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426
3부 544화(1426화)
16.
기갑선은 장감판의 무게에다 기관, 수차, 화포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보니 정원보다 사람을 더 태우기 힘들다. 그래서 이형직을 비롯한 진위사 인원들을 데려오려면 적어도 배 한 척은 더 필요했다. 게다가 박문수를 따르는 백위영 군사들도 태워야 했다. 생각 같아서야 광동왕을 위압할겸 2등 대선인 좌선 치국을 들이밀고 싶었지만, 불산으로 올라가는 수로는 그 배가 움직일 만큼 넓지 못했다. 기갑선과 크기가 비슷한 2등 중산 정도 되는 배나 좌초할 걱정없이 갈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이 광현(廣顯)을 따로 끌고 갔다.
불산으로 올라가면서는 갑동에 승선했던 이봉중과 박문수도 적두도로 귀환하는 길에는 다 광현에 탔다. 그리고 겨우 구출된 이형직과 일차 회견을 마치고 돌아온 조현명과 함게 이번 방문에 관한 사후 논의를 했다. 물론 이형직에게 건네는 위로가 먼저긴 했다.
“정녕 고생이 많으셨소. 별다른 탈없이 귀환하셔서 다행이오.”
이봉중의 격려를 받은 이형직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사람을 셋이나 잃었으니 소인의 죄가 큽니다. 더구나 계집에 혹해 도망간 놈만 둘이나 되었으니…..”
50일 동안 병으로 한 명이 죽었다. 두 명은 그 엄중한 감시를 뚫고 담을 넘어 도망갔다. 혼자 도망간 것도 아니고 여자까지 끼고 말이다. 아무리 여자에 눈이 얼었다지만 참 대단한 놈들이었다. 심지어 그냥 몸만 빠져나간 것도 아니다. 도주와 새살림을 위한 밑천으로, 광동왕부에서 진위사 일행에 선사한 재보를 한 뭉치씩 챙겨서 튀었다. 정말 어처구리없는 일이었다. 깊게 한숨을 쉰 박문수도 이형직을 위로했다.
“광동왕이 붙여준 미녀들과 살을 맞대고 지낸 기간이 거의 석 달이니, 정이 들어 더나기 싫다는 놈들이 나올 만은 했습니다. 부사게서도 보셨지만, 남은 놈들도 계집에 혹해 떠나지 않으려던 놈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순수하게 정 때문인지, 아니면 윗전이 시켜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접대를 맡았던 계집 여럿이 자기와 함께 지내던 사내를 붙들고 늘어졌다. 헤어지기 실다느니, 애를 배었다느니 하며 매달려 울어대자 생각이 머리가 아니라 거웃에 붙은 사내놈들은 발을 때지 못했다. 심지어 춘식이 같은 놈은 자기 계집도 함께 대려가면 안 되겠냐고 조르기까지 했다. 하도 기가 막혀 화가 치림 박문수가 ‘황명을 따르지 않는 놈들은 다 대역죄인이 될 것이다!’라고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뭐가 더 중요한지 모르던 놈들도 정신을 차리고 배에 올랐다.
“언제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 판인데 겨우 계집에 정신이 나가 있다니. 아무리 멋모르는 하인배들이라해도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박문수가 혀를 찼다. 아무 말 없이 그 말을 듣던 이형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까. 소인과 주서사 이 공 때문에……”
바깥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이형직은 이인좌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배에 오른 뒤에야 박문수에게 이인좌가 객사를 빠져나간 날 밤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저들이 잘못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폐하께서 무척 분노하고 계시니 어쩌겠습니까. 광동 조정이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참극을 피하기 힘들 겁니다.”
광동왕과의 회견을 무사히 마친 조현명은 편안한 태도로 상황을 정리했다. 겨우 5품관에 불과한 낮은 품계로 광동왕부를 뒤엎어놓았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좀 으쓱댈 만도 하건만, 그저 옆집에 마실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부사 영감과 다른 진위사 관원들을 데려왔고 억류한 데 대한 사과도 받았으니, 첫 번재 과제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이제 두 번째 과제가 남았는데……”
두 번재 과제란 이인좌의 시체를 찾아내고 이인좌를 살해한 광동왕부 측으로부터 제대로 사죄를 받는 일이다. 광동왕부에서는 자기들이 광주 건너편 기슭을 찾아봤으나 시신을 찾지 못했다며, 이인좌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건 박문수의 착오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었다. 조현명은 그런 소리를 듣고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고 침착하게 도리를 따지며 대한이 주서사의 죽음을 조작할 이유가 없음을 지적하고, 박문수와 세묜의 진술을 정리하여 그날 밤 불산에서 소동을 일으킨 ‘간자’가 이들 두 사람이었음을 증명했을 뿐이다.
“광동인들은 고령위께서 그날 자기네 순라군과 싸웠음은 마지못해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주서사를 소아죽였다는 증거는 없지 않으냐고 버텼지요. 굳이 그 문제로 더 싸울 것 없기에 태도 차이만 확인하고 회견을 끝냈습니다만.”
“이미 시신을 찾아 없앤 뒤에 오리발을 내미는 건 아니오?”
이봉중이 질문했다. 조현명 대신 박문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일입니다. 시신부터 찾아놓고 나서 추궁했어야 하는데, 소인이 서툴렀습니다.”
남에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직접 찾아간다면 그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변장이라도 하고 숨어들어 시신을 파내왔어야 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고령위 나리. 저들은 지금 관군과의 싸움 때문에 주변이 혼란스럽다며 우리가 직접 시신을 발굴하는 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시신을 이미 숨겼거나, 찾아서 숨길 작정이라는 말이지요.”
저들이 보이는 태도는 복국 조정에서 상정한 그대로였다. 본국에서는 이번 사건을 적당히 넘기지 않고 철저히 책임을 묻기로 정해놓았다. 광동왕이 절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리라고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발대가 출발 준비를 하는 사이에 조정에서는 광동에 보낼 국서가 급히 작성되었다. 그 자리에서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낸 사람은 임금의처남이자 현재 조정의 실세, 좌참정 대신 민지원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서나라를 너무 가볍게 대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우리를 잘 모르고, 마치 천축이나 유주를 대하듯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미적지근한 관계는 그만 끝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청나라나 후송, 일본이 대한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건 과거에 크게 혼이 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 대한을 건드렸다가는 무슨 꼴이 되는지 잘 알기 때문에 대한과 친교를 다지려고는 할지언정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불만이 있어도 말로 한다.
“번신으로 들어온다느니, 충성을 바치겠다느니 하는 것도 다 헛소리입니다. 절대 진심으로 그런 제안을 했을 리 없고, 설사 진심이라고 해도 타국의 반란자 따위를 받아들이다니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금나라 여진인들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금나라는 현재 있는 후금이 아니라 과거 5백 년 전에 있었던 그 금나라를 말한다. 당시 금나라는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려인 조위총이 영토를 바치면서 금나라에 귀순하겠다고 하자,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자를 붙잡아 고려 조정에 보내버렸다.
“우리가 금나라보다 못한 욕심꾸러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서나라 관군을 도와서 광동왕의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 진압을 도와준 대가와 우리 주서사가 죽은 데 대한 배상을 받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민지원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중신들도 마찬가기 태도였다.
“당연히 서제(西帝)에게 이 일에 관한 책임을 엄히 물어야 합니다.”
“직접 잘못을 저지른 이는 광동왕입니다. 하지만 번국이 범한 잘못은 결국 본국이 책임을 져야 하는바, 서제에게 책임을 붇는 게 당연하고도 당연합니다.”
조정 중론은 확실하게 강경론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물이 광동왕과 서나라 황제에게 각각 보낼 강경한 항의문이었다.
“광동왕은 자기 군사들이 주서사를 살해했다는 증거는 없지 않으냐고 계속 항변하면서도, 광동을 우리 번국으로 받아들여 주기만 하면 주서사를 애도하는 뜻에서 보상도 하겠고 더 원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습니다.”
흥시제가 보낸 대군의 공격을 받아 광동왕은 지금 난처한 상황이다. 자기 편일 줄 알았던 운남왕까지 관군에 합류했다고 하니, 난리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군사가 더 올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더 긴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우리 조정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하지는 않았기에, 아직도 폐하게서 자기를 번신으로 받아들여 주실지도 모른다는 얕은 기대를 품고 있지요.”
조정에서는 조현명을 통해서 광동왕부에 대놓고 최후통첩을 날리지는 않았다. 자칫하다가 충분한 병력이 도착하기도 전에 눈에 뵈는 게없어진 광동왕이 죽을 각오로 발악하지라도 하면, 엉뚱한 피해를 볼 수도 있어서였다.
“그래서 지금 광동왕은 자기를 번신으로 받아들여만 주면 영토든 모든 내놓겠다며 협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번국의 영토는 곧 본국의 것이니 줄이든 늘이든 본국의 듯이나, 우리가 광동을 서의 번국으로 인정한다면 자신은 땅 한 조각도 내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광동이 서의 번국이라면 그 영토를 처분할 권한은 서나라 황제가 쥐고 있다. 고로 대한이 어떤 명목으로든 광동 영토를 점유한다면 이는 서나라 측과 충돌한다는 의미가 된다.
“맞는 말이오. 그래서 토벌을 돕고 서제로부터 배상을 얻어내자는 것이지.”
흥시제에게 정확히 어떤 배상을 요구할지는 권훤이 본진을 이끌고 오면 알 수 있으리라. 조현명의 역할은 일단 대한 조정의 입장을 광동측에 알리는 것이고, 본격적인 교섭은 본대 도착 후에 권훤이 하기로 되어있으니까.
“그럼 도원수 대감이 오실 대까지 우리 군사들은 배에 탄 채 기다려야 하오?”
홍진오 휘하 군사들은 1달이 넘게 배 위에서 보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흔들린 탓으로 상당한 병자도 나왔다. 하루빨리 육지에 내려 기운을 차릴 필요가 있는데, 이대로 부드러운 협상 분위기를 유지한다면 땅에 내릴 수가 없다.
“잉글인들이 경계해서 적두도에 내릴 수도 없소. 적당한 상륙지가 필요한데.”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통제사 영감. 그 문제는 소관이 말끔하게 해결했습니다.”
조현명이 씩 웃었다. 궁금증 어린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17.
선두에서 육지에 내린 부장에 이어 두 번재로 단정에서 내린 홍진오 참장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한숨을 쉬었다. 무너져내린 축대와 내팽개쳐진 대포와 포가, 땅바닥에 박힌 철환, 미처 다 수습되지 않은 시신 따위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이 난장판을 우리 연대 보고 정리하란 말인가.”
허탈한 마음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한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대뜸 막일부터 하라니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조현명은 광동왕과의 회견에서 어처구니없는 합의를 했다. 몰론 조현명으로서야 괜찮은 합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홍진오가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뭣이라고? 기갑선이 대려 부순 광동군 포대를 우리가 가서 보수하라는 말인가?”
“일단 형식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갑선 두 척은 포대 세 개를 박살냈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 문제에 관해서 광동왕과 이런 합의를 했다고 했다.
‘두 번째 포대와 함대는 명확히 의도적으로 우리 함대에게 일제사격을 퍼부었으므로 우리 기갑선이 응사하여 제압한 건 당연한 권리다. 두 번이나 먼저 공격당했으니 세 번째 포대를 이족에서 먼저 제압한 것도 당연한 대응이다. 하지만 첫 포대는 경우가 다르다.’
첫 번째 포대는 과실로 딱 한 발을 쐈을 뿐이다. 그런데 집중사격으로 포대를 부숴놨으니 그건 이쪽이 과잉 대응한 거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충동한 한군이 포대를 다시 쌓아주겠다고 제안했다. 첫 번째 포대 하나만 말이다.
“아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가 다시 쌓아줄 것까지는 없지 않소?”
“참장 나리, 생각해보십시오. 그 포대는 주강 본류와 불산으로 올라가는 수로가 갈라지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광동군이 그 자리에 포대를 복구하고 수로를 막아버린다면 나중에 불산을 치게 됐을 때 심각하게 곤란한 점이 생길 겁니다.”
“……그렇겠군. 그건 내가 생각하지 못했소.”
배를 움직여야 하니까 해군에서 병력을 차출할 수는 없다. 고로 홍진오 휘하에 있는 육군 선발대가 포대 보수를 맡아 기갑선들이 신나게 즐긴 자리의 뒤치다거리를 맡게 되었다.
“부장. 대대장들을 불러 각 대대에 작업구역을 할당하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하라.”
“예, 연대장 나리.”
홍진오는 딱 하나 남은 무너지지 않은 축대 위에서 포대 전체를 훑어 보았다. 손볼 구석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래도 확실한 주둔지를 확보한 셈이니 나쁘기만 하지는 않았다. 본래 2백 명 정도 머물던 작은 포대라서 면적이 좁지만, 그건 넓히면 되는 일이다.
“우리가 여기에 진을 치는 건 저들에게 포대를 복구해주려는 게 아니다.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대들은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예, 나리.”
바다를 향하고 있던 방벽은 모조리 육지 방면으로 새로 쌓는다. 벽을 쌓을 석재와 벽돌이 부족하면 호를 파서 그 흙으로 토벽을 쌓는다. 과거 경인왜란 때 논산 전투에서도 도감군이 호와 토벽을 조합해서 쇄도하는 왜군을 막아낸 전례가 있었다.
“그런데 나리, 위치가 강변이다 보니 군사들 사이에 질병이 돌기 쉽겠고 땔감을 구하기도 어렵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땔감은 수로로 공급받으면 되니까 걱정할 거 없네. 그리고 질병이 돌 만큼 여기에 오래 머물지도 않을 걸세.”
한 달, 한 달 뒤면 권훤이 6천 명을 데리고 온다. 그때쯤이면 서나라 관군이 내려오면서 광동왕의 처지도 더 나빠질 테고, 아군은 육군만 따져도 1만 명이 된다. 1만 명이면 광동왕을 제대로 밀어붙일 수 있다. 경무장한 대붕영이니까 불산이나 광주를 정면으로 공격할 수야 없겠지만, 광동군을 쳐부수면서 불산성 성문까지 진격하는 일 정도는 수월하게 해치울 수 있다.
“고작 한 달 동안 머무를 거라고 축성을 대충 해서는 안 되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예, 나리.”
휘하 군관들에게 작업구역을 할당하고, 홍진오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광동왕이 과연 그렇게 허술하게 행동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조현명은 젊다. 그만큼 경험이 부족하고, 광동왕부 쪽에서 뭔가 수를 스고 있어도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을 공산이 있다. 게다가 광동왕은 어려서부터 군재 하나는 확실히 뛰어나다는 평을 받지 않았던가.
자신이 광동왕이라고 해도 일단 대한의 사절을 잘 달래서 그 군대가 움직이지 않게 되면 바로 방어 준비에 들어갈 터였다. 그게 장수의 도리다. 과연 지금 불산에서는 어느 쪽에 중점을 두고 있을까? 반란을 진압하러 오는 관군에 맞설 준비일까, 느닷없이 바다에서 나타난 대한군에 맞설 준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