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45
1부 145화
– 15 –
“아이구, 어서 오세요. 자주 좀 오시지 왜 이리 뜸하세요.”
황주댁이 호들갑을 떨며 나를 맞았다.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으니 영 대하기 껄끄럽지만, 별 방법이 없다. 외면할 수도 없고.
“그간 일이 좀 많았네. 그런데 어찌 바깥사람이 있는가?”
내가 상희를 찾아오는 시간은 보통 통행금지 종이 친 후다. 당연히 거리고 집이고 사람이 없어야 정상인데 오늘은 웬 아낙네가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행색이 초라한 게 분명 가난한 백성이다.
“나리께서 두 달 전부터 의원을 여셨거든요. 사실 전에 혜민서에 계실 때부터 워낙 명성이 자자하셔서 주변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듭니다요. 원체 용하다고 소문이 나서 순라군들도 좀 눈감아주고 있습지요. 오늘은 이제 다 끝나가요. 어이, 처자, 말씀 안 드렸어?”
다지는 이제까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잘 지내고 있더라고, 그렇게만 보고했다. 지금도 내 옆에 태연한 얼굴로 서서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이놈의 계집애가 왜 이걸 말하지 않았을까 하며 속으로 이를 가는데 늙수그레한 영감님이 한 명 안방에서 나왔다. 방문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여 굽실대던 노인이 마당으로 내려서자 애를 안은 아낙네가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 저화 내고 가슈!”
내 옆에 있던 황주댁이 급히 달려가며 손을 내밀었다. 노인이 허리춤에서 꾸깃꾸깃한 저화 한 장을 꺼내 내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황주댁이 싱글거리면서 처마 밑으로 돌아왔다.
“나리께서는 먹고 살 만큼만 벌면 된다면서, 무조건 한 되짜리 저화 한 장만 받으세요.”
저화가 액면가보다 대체로 싸게 통용되는 걸 감안하면 쌀 한 되보다 덜 받는 셈이다. 그걸 가지고 둘이서 먹고 살 수 있나?
내 의문을 알아챈 듯 황주댁이 넉살 좋게 웃었다.
“나리께서 씀씀이가 많지 않으신 데다, 가끔 치료를 받은 병자들이 감사하다고 푸성귀다발, 계란꾸러미 같은 걸 몰래 두고 가곤 합니다요. 저번엔 누가 닭도 한 마리 놓고 갔지 뭡니까? 덕분에 두 입 건사하기는 어렵지 않아요.”
황주댁은 내가 대갓집 아들이라고 알고 있다. 또한 뭔가 다른 생각을 품고 상희를 찾아오고 있음도 알고 있다. 보통이라면 생활비를 보태달라는 명목을 내세워서라도 뭔가 금품을 요구할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황주댁은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아, 벌써 끝났네요. 들어가 보세요. 나리! 이 도령님 오셨어요!”
소리치는 것 같지만 사립문 밖으로 새나가지는 않을 정도였다. 안방을 향해 외친 황주댁은 아이를 안고 나서는 아낙을 향해 뛰어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가 섬돌에 올라서자 방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어? 들어와.”
“그동안 바빴나 봐? 직접 오지는 않고 다지만 보내고.”
상희는 입 주위에 물을 발라 천천히 수염을 떼고 있었다. 떼어낸 수염 가닥은 종이 위에다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상희는 내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감사부터 표했다.
“다지 통해서 보내준 돈은 잘 받았어. 아직 쓰진 않았지만, 혹시 필요해지면 고맙게 쓸게.”
“얼마 되지도 않는데 뭘.”
지난번 찾아왔을 때 상희는 내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은 쓰였다. 연말이라 직접 찾아올 시간을 내기는 힘들어서 다지 편에 저화를 두 섬 보냈는데, 아까 황주댁이 말한 걸 보니 내가 돈을 보냈을 때는 이미 개원한 뒤였던 모양이다.
“근데, 나라님 허가도 없이 병원을 막 열어도 돼? 의료법 위반인데?”
“의료법이나 만들고 나서 이야기하셔. 조선팔도에서 돌팔이 의사가 얼마나 많은지나 알아?”
내가 자리에 앉으며 농담을 건네자 상희도 농담으로 응수했다. 헌데 수염을 떼며 피식 웃던 상희가 갑자기 다지를 언급했다.
“그런데 그 다지라는 애, 심부름 왔을 때 보니까 꽤나 무뚝뚝하더라. 너한테 애교는 가끔 부려? 늘 그럴 것 같으면 데리고 다니기 영 재미없겠던데?”
“경호원이 왕한테 애교부리면 큰일 난다. 내 옆에 못 둬.”
아무리 신분이 백정이라지만 여자 근위병이란 건 조선왕조에 존재한 적이 없다. 현대 퓨전 사극에서도 그렇다. 왕자라면 모를까 임금 옆에 여자 무사 따위가 등장한 적은 없었을 거다. 다지도 약간 화장을 하고 향낭을 찬 외에는 굳이 평소에 근무할 때 여자 티를 내지 않았다.
“뭐 어때. 사람들이 보더라도 ‘아, 임금이 기생에게 무사 옷을 입혀 데리고 다니나 보다’, 하는 소리밖에 더 하겠어. 다지 걔도 스무 살이라며? 한참 애교도 부리고 싶을 때 아냐?”
어째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다지를 계속 이름으로 부르네? 백정 계집애라고 안 부르고?
“아니면, 평생 산을 누비면서 짐승 잡느라고 애교는 애초에 배우질 못했대? 그래서 그렇게 무뚝뚝한가? 벌써 스무 살인데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다지 밖에 있어, 듣겠다!”
급히 손을 내저어서 중단하게 했다. 다지는 귀도 밝은데, 설마 벌써 듣지는 않았겠지. 다지 역성을 들 상황은 아니라 일단 내 변명부터 했다.
“너, 날 진짜 연산군으로 만들려고 그래? 난 일부러 후궁도 처음부터 있던 두 명 말고는 더 안 들이고, 궁녀들한테도 손 안 대고 있다고.”
“웃겨. 나한테 한 말은 뭐야? 정 도사 아저씨 조카로 신분 세탁하고 궁에 들어오라며?”
어느새 수염을 다 뗀 상희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혹시 남은 수염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유리거울, 내가 선물한 거였던가.
“그야 너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당혹감에 얼굴이 붉어졌다. 상희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됐어. 이제 와서 네 말대로 할 거였으면 개원도 안 했어. 내 생활 걱정은 말아. 아직 길이 미끄러워 그런지 요즘 넘어졌다고 침 맞으러 오는 환자도 잦고, 감기 환자도 많아서 수입은 꽤 많아. 너 좋으라고 진료비는 저화로만 받는다.”
마지막 말은 농담일까, 진담일까. 하지만 고민과 상관없이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감기? 약 지어 주는 거야?”
솔직히 화제가 바뀐 게 반가웠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방안에는 약장도 없고, 한약재 냄새도 나지 않았다. 보통 의원 하면 떠오르는, 서까래에 매달린 약재 자루 같은 것도 없었다.
“처방전만 써 주는 거야. 그럼 환자가 약방에 가서 그대로 짓지. 직접 약까지 지어주기에는 밑천이 너무 많이 들어. 약재상이랑 거래 터서 재고 관리도 해야 하니까.”
“그러냐.”
상희는 작년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거의 히스테리 상태였던 작년 봄과도, 내의원을 그만둔 직후 가라앉아 있던 가을과도 달랐다. 지금 상희가 보이는 태도는 예전에 나와 승마를 하면서 즐거워하던 때랑 비슷했다. 내가 원자를 얻기 전 말이다.
“내의원 떠나서 일반 백성들 다시 만나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네. 어때, 예전처럼 밑바닥 백성들 민심 한번 들어보겠어? 궁에서 파악하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며.”
“그건 그렇지. 들려줘봐.”
상희는 즐거운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성 백성들이 지나간 역모 소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제 시작된 올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밤은 쉽게 새지 않았다. 밤은 길었다.
– 16 –
“콜록콜록.”
상희네 집에서 너무 늦게 들어오다가 감기에 걸렸다. 3월이 다 되어간다지만 아직 밤공기는 차가웠다. 나름 따뜻하게 잘 챙겨 입고 나갔는데도 이 꼴이 났다.
“추운데, 차라리 자고 아침에 가지 그래? 이불은 있어.”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을 때는 이미 사경(三更, 01시~03시)이 반 이상 지나간 한밤중이었다.
“아…아니, 다들 걱정해. 내가 안 들어가면 난리가 날 거야.”
내가 아침까지 안 돌아오면 경복궁이 발칵 뒤집힐 게 분명하다. 게다가 지금 대비전에서는 할머니 인수대비가 오늘내일 하는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단외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그럼 할 수 없지.”
약간 맥이 풀린 듯한 목소리였다. 어, 이거 받아들였어야 하는 건가? 순간 갈등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다음이었다.
“지존께서 가셔야 한다는데 할 수 없지. 조심해서 가. 아직 길에 언 데 많으니까.”
꼼짝없이 일어서야 했다. 대청마루로 나오니 놀랍게도 다지가 미동도 하지 않고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서 물었다.
“날씨가 춥다. 찬모의 방에라도 들어가서 쉬고 있지 그랬느냐.”
“제 임무는 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리 추운데….”
나는 미안한 기분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다지는 간단히 답했을 뿐이었다.
“쇤네는 천것이라 이 정도 추위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저희 마을에서는 이 정도 날씨에도 창을 들고 산에서 짐승을 쫓습니다.”
“알겠다. 이만 돌아가자.”
그리고 그대로 밤길을 걸어 환궁했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둘 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하, 부디 유념하여 들어주소서.”
“아, 미안하오.”
거의 잠을 못 잔 탓인지 기침을 하면서도 머리가 멍했다. 중신들과 회의 중인데도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동래부사가 보고하기를, 또 왜국에서 사자가 토산품을 진상하러 왔다 하옵니다.”
“또 왔다고?”
1월, 2월 두 달 사이에만 일본에서 스무 번 가까운 사자가 왔다. 아마 규슈 일대에 세력을 두고 있는 여러 영주들이, 그리고 막부나 조정에서 보내는 사자들이겠지. 하지만 국서에 적힌 이름만 봐서는 어디서 온 누군지 헷갈리기만 했다.
해동제국기를 펼쳐놓고 대조하니 지역명은 대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관직명이나 인명은 도저히 다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너무 낯설고 복잡하다.
“아니, 저들이 왜 이리 난리를 치는지 그 이유를 그대들 중에 누가 알겠느냐?”
그냥 무역 상대에 대한 신년 인사라기에는 너무 과하다. 누군지는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 한 영주는 세 번이나 사자를 보내기도 했다. 도리어 쇼니나 오우치는 그 뒤로 사자를 보내지 않는데, 다른 잡다한 자들은 줄줄이 사절을 보냈다.
“소이전과 대내전이 양쪽 다 우리에게 지원을 청하지 않았사옵니까. 저들이 조만간 군사를 몰아 대대적으로 쟁투를 벌이리라는 예상은 다들 하고 있을 터, 우리가 저들 중 일방을 도와 싸움에 참가한다면 자기들에게도 영향이 미치겠기에 저러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우의정 박숭질이 침착하게 진언했다.
“왜국 땅의 영주들은 정세에 따라 이합집산이 심하옵니다. 우리가 대내전과 소이전 중 어느 한 쪽에 원병을 보낸다면 균형추가 크게 기울 터, 그때 어느 편에 붙어야 할지 판단하고자 그 근거를 구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사자를 보냄도 우리 조정 여론을 파악하고자 함이겠지요.”
옳은 이야기다. 지금 일본은 전국시대, 강한 자가 살아남는 시대다. 만 단위 병력을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이 규슈에 나타난다면, 이제까지 유지되던 세력균형이 흔들린다. 저들로서는 그 추이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콜록. 알겠다. 그럼 지난달에 왜국에서 온 사자들에게도 그랬듯이, 이번 사자는 물론 차후 오는 사자들도 당분간은 모두 상경을 허용하지 않고 동래에서 접대를 받고 돌아가도록 하라. 저들이 우리 사정을 모르면 모를수록 좋다.”
올해 한 해는 여진족 정벌에만 전념하고 싶다. 일본인들이 뭘 들고 오든, 그쪽에서 뭐라도 일을 벌이는 건 내년이다. 올해 흉년이 안 든다면 말이지만.
“전하, 나라 법도가 부마에게는 관직을 내리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풍원위 임숭재를 장악원 제조로 임하신 조치를 거두어 주소서.”
이조판서 김수동이 간언했다. 예전 같았으면 간관들이 나섰을 일이지만, 그들이 작은 일에 입을 다물게 되자 대신들이 직접 이런 문제도 논하게 되었다.
“병조판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신이 어찌 할 말이 있겠나이까. 그저 전하의 명을 받들 뿐이옵니다.”
임숭재는 병조판서 임사홍의 아들이다. 임사홍을 면전에 두고 그 말을 할 수 있는 김수동도 대단하고,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공을 내게 떠넘긴 임사홍도 대단하다.
“내 보기에 임숭재는 가무에 대해 아는 바가 많고 그 자신도 뛰어나니, 장악원 제조의 일을 잘 수행하리라 본다. 부마를 관직에 앉히지 않음이 그간 행해진 법도라 하나, 장악원이 딱히 국정에 크게 관여하는 자리도 아니지 않으냐? 그대들이 넘어가기 바란다.”
이 문제는 술친구에 대한 배려가 크게 작용하긴 했다. 작년에 형이 죽고 난 뒤로 아무래도 임숭재가 그전보다 조금 기운이 없어서, 기운 나게 해주고 싶다. 뭐, 그 집에 갈 때마다 옆에 달라붙어 애교를 떨면서 남편한테 한 자리 달라고 조르는 휘숙옹주한테 좀 넘어가기도 했고.
솔직히 정치적으로는 정말 하잘것없는 자리다. 그러니 부마인 임숭재가 앉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칙을 벗어나는 일임은 분명하건만, 신하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작년 일로 학습효과가 단단히 생긴 탓이겠지. 별 거 아닌 일로 날 건드리지 말라는.
이후로도 몇 가지 안건이 계속 이어졌다. 회의가 계속되는 중에 좌부승지 이충순이 장계를 가지고 급히 들어왔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받았는지 얼굴 가득 화색이 넘쳤다.
“전하, 평안도 관찰사 유순정이 매우 기쁜 소식을 알려왔사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 금산적하라도 잡았다더냐?”
지금 평안도에서 올라올만한 기쁜 소식이라면 그거 하나밖에 없다. 아직 금광이 터질 것도 아니고 말이다. 운산 금광 같은 건 나도 존재는 알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말이지. 그걸 제대로 캐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정말 돈방석에 앉을 수 있을 텐데.
“예, 전하! 바로 그대로입니다, 금산적하를 잡았다 하옵니다!”
“무엇이라!”
조정 중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어 이충순을 돌아보았다. 나 역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은 크게 뜬 채, 급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아니, 그 미꾸라지 같은 놈을 도대체 어찌 잡았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