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478
3부 596화(1478화)
3.
지난번 혜주부 전투야 우리 군사들이 직접 치른 전투다 보니 상세한 보고가 들어왔었다. 그래서 내가 그 현장에 없었음에도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을 마치 손에 잡듯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 방면에는 주재무관이 따로 나간 것도 아니다. 청나라 조정에서 관습적으로 보내온 보고서도 매우 동양적으로 적혀 있어서 상세한 전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전투를 ‘동양적으로’ 기록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당연히 이렇게 되지.
“남양을 거점으로 하여 번성을 노린 우 리 군사들은 용맹하게 싸웠으나 그만 하늘의 뜻이 따르지 않았기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싸움을 서두르다가 적의 계교에 빠져 막대한 군사들을 잃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라고? 이게 전부냐?”
어느 군사를 어떻게 움직였다는 세 부적인 이야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지난번에 신양 공격 때는 그렇게 상세하게 써서 보내더니.
“폐하, 그 싸움은 이미 30여 년 전의 일이 아닙니까. 청인들이 선제 시절의 법도를 잊어 글을 보내는 일을 소홀히 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관군단을 보내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지.”
관군단(觀軍團)은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관전무관단’이다. 지난 임오년(1703)에 청나라가 후송을 대대적으로 공격했을 때 전 삼군부 도총사 김용상이 관군장(觀軍長)을 맡아 전선에 파견, 상황을 살펴 보고한 바가 있다. 그때는 청나라 측에서 개전 여러 달 전에 미리 작전계획서를 보냈다. 그러니 우리도 그에 따라 관군단을 편성하는데 별 부담이 없었다. 이번에도 미리 연락만 있었으면 관군단 파견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삼군부와 훈련도감에서 군관 몇 명만 차출하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탁이 공격 계획을 전했을 때는 출병까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남아있었고, 뱃길이 거칠어지는 겨울이었다. 그래서 관군단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랬더니 지금처럼 아주 간략한, 전쟁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의 보고서가 왔다.
“폐하. 이는 관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지난 임오년에 저들이 보낸 문서는 실로 세밀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소략한 내용으로 보내다니요. 엄히 꾸짖음이 옳습니다.”
신하들이 웅성거렸다. 잠시 두고 보다가 그만 그치게 했다.
“그동안 건주 양국이 우리에게 전록(戰錄)을 보내온 것은 그저 관례였지 조약으로 규정한 의무는 아니었다. 그러니 너무 야속하게 여기지 말고, 문서에서 부족한 부분은 우리가 따로 수집한 첩보를 통해 보완하기로 하자.”
청나라 애들도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가 전력으로 자기들을 돕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이제는 자기들도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뭔가 내주는 게 내키지 않을 거다. 교역은 서로 주고받는 물품이라도 있지, 기록 제공은 정말 일방적인 상납이었으니까.
청나라가 10만 병력을 동원해서 번성과 양양을 동시에 공격한 게 1월-양력으로는 2월-이었고, 패했다는 보 고서가 우리한테 온 건 3월-양력으로 4월-이었다. 그 뒤로 5개월 동안 이런저런 정보를 모아 조합해 보니 이번 양양.번성 원정은 대략 이렇게 전개됐다. 이번 전쟁에서 청나라는 만주팔기 중 하오기 병력 3만, 왜군팔기와 한군팔기 3만, 녹영군 4만을 동원했다. 30년 전 신양을 공격할 때 투입한 병력이 13만이었으니 딱히 적은 병력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급하게 준비된 원정이다 보니 협의할 시간이 부족해서 후금군이 참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오기를 보유한 친왕들이 주도한 원정이라 중장갑을 갖춰 개갑군(鎧甲軍)으로도 불리는 황제 직할 상삼기도 참전하지 않았다. 원정을 주도한 친왕들은 양양을 함락함으로써 신양 남쪽에 펼쳐진 대별산맥(大別山脈)을 우회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열려고 했다. 양양은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이 도시를 뚫어야만 중원 서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열린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도시가 허술하게 방어될 리가 없다. 양양성은 과거 쿠빌라이 칸의 몽골군에게 포위도니 채 5년이나 견딘 과거가 있는 철옹성이었다. 공격군이 그저 둘러싸고만 있으면 10년이라도 보틸 수 있었다.
그럴 시간이 없는 청나라 친왕들은 후송군이 상호 지원하지 못하도록 보조요새인 번성과 양양을 동시에 포위하고 곧바로 맹공을 퍼부었다. 겨울이라 도시 주변의 강과 해자가 모두 얼어붙은 부분이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과거의 전훈도 잊지 않았다. 신양을 쳤을 대 그랬듯이, 남쪽에서 황급히 달려올 후송 측 구원군을 요격하기 위해서 양양 남쪽에 하오기 소속 3만 기병을 배치했다. 이들은 예상대로 남쪽에서 형주도통사가 보낸 원군 5만 명을 격파하여 대승을 올렸다.
문제는 이 5만 병력이 대부분 단련병으로 구성된 미끼였다는 사실이다. 팔기군이 이들을 짓밟고 통쾌해하는 동안에 동쪽에서 온 한양도통사 임사맹(林思盟)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 청나라 원정군과 본국 사이를 차단해서 이들의 양도와 퇴로를 끊어버렸다. 청군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후송의 대군이 배후를 차단한 채로 내려오고 있었다. 한편 남쪽에서는 형주도통사 유승원이 20만 명으로 진짜 주력부대인 2진을 편성해서 북진했다. 그리고 포위된 번성과 양양성에도 아직 후송군이 10만 명이나 있었다.
아무리 청군의 평균 전투력이 후송군보다 높다지만, 여섯 배나 되는 적에게 포위당한다면 결말은 뻔하다. 게다가 후송군이 양도를 끊어버려 식량 보급도 끊겼다. 계속 버티면 황제가 구원군을 보내주긴 하겠지만, 30만이나 되는 한양군을 격파할 만한 구원군을 모으려면……:
결국 헝군은 너무 늦기 전에 포위를 뚫고 후퇴하기로 했다. 하지만 후퇴도 쉽지 않았다. 청군이 후퇴할 기색을 보이자 양양성 안에 있던 후송군이 결사대를 내보내서 둑을 폭파했기 대문이다. 삽시간에 청군 진영으로 얼음장 같은 강물이 쏟아졌다. 이 꼴이 되었으니 무거운 화포 따위는 몸땅 버려야 했다. 성에서 뛰쳐나온 적이 추격하는 가운데 앞길을 막아선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면서 철수하느라 청군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대략 4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고 했다.
선두에서 포위를 뚫은 만주팔기와 왜군팔기의 손실도 꽤 컸다. 하지만 보병이라서 이들을 바로 뒤따르지 못하고 난오한 한군팔기와 녹영병은 정말 막대한 피해를 냈다. 원정 실패로 체면을 구긴 친왕들은 꼼짝없이 군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청제가 패장이 된 친왕들을 벌하지는 않았다고.”
“예, 폐하. 승패는 병가지상사인데, 패전할 때마다 장수를 벌한다면 남아나는 장수가 어디 있겠냐면서 가벼운 문책만 했다고 합니다.”
옛 건주에서의 관습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여전히 황족 대부분이 무관으로 전장에 나간다. 전장에 나가지 않는 황족이라면 황제 본인, 그리고 황태자 정도다. 아직 태자로 책봉되지 않은 친왕도 전장에 나갈 수 있다. 물론 정말로 일선에서 칼을 휘두르지는 않겠지만. 고로 이번에 패한 친왕들도 하오기의 소유궈는 내놓을지언정 장차 장수로서 다시 전장에 나가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니 박화탁으로서도 굳이 그들을 모욕할 필요는 없는 거다.
“당분간 청군은 송군은 반격을 경계하며 입번 싸움에서 입은 손실을 회복하는 데 몰두할 듯합니다.”
“당장 설욕전을 시도하기보다는 그편이 훨씬 낫겠지. 청군은 별력을 보충하는 데 시간이 적잖게 걸리니.”
따지고 보면 청나라도 후송처럼 세병제를 채택한 셈이다. 팔기와 녹영은 모두 그 신분이 세습되니까 말이다. 녹영은 일단 형식상으로는 지원을 받지만, 그 지원자의 대다수가 이미 녹영병인 부친을 두고 있는 자들이다. 군인으로서 받는 특권을 사실상 세습하는 거다. 고로 이런 큰 손실이 나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청나라는 후송이나 서나라 같은 민병도 없고 군대라곤 상비군 70만뿐인데, 일거에 4만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으니 박화탁의 속이 얼마나 쓰릴까.
“청제는 아마 공성에 실패하고 물러서는 정도를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짐도 그리 생각한다.”
이제 당분간은 청나라가 공세에 나설 일은 없으리라. 도리어 간만에 대승을 거두어 신이 난 후송에서 보복전을 벌이는 상황을 우려해야 할 공산이 크다. 과연 조형서가 광동에서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청을 공격하는 무 리수를 시도할지는 모르겠다만…..”
4.
청군이 양번 지역에서 입은 대손실이 우리에게는 다소 유리하게 작용했다. 군대 재건 및 장비 보충을 위해서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진 청나라 조정에서 기근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진 우리에게 곡물을 대량으로 팔았기 때문이다. 밀과 보리, 잡곡이 대부분이었다.
“재무, 청나라 쪽은 날씨가 좋은 모양이지?”
잔쯤 부러움을 담아 물었다. 하지만 재무대신 성시진의 답변은 그저 평범했다.
“별로 좋지는 않으나, 우리처럼 심한 융년은 아니라 하옵니다. 그래서 여유가 되는 만큼을 판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나, 혹시 내년에 청나라에 흉년이 들면 저들도 후회가 크겠구나.”
내가 산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아무래도 동북아에서 한 나라에 흉년이 들면 이웃 나라도 흉년을 맞는 경우를 자주 봤다. 예전에야 중국 전역이 같은 나라였으니 혹시 화북에 흉년이 들어도 강남에서 곡식이 얼라와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어떨까. 화북을 장악한 다이샨이 한족 인구 상당수를 남쪽으로 쫓아버린 것도 그 당시 화북에서는 그만한 인구를 제대로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화북 인구 증가세가 강남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것도 경지가 부족하다는 점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숲을 줄일 수도 없고.
물론 우리 농업이 발전한 만큼 청나라에서도 많은 농법 개선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화북 인구는 거의 청나라 입관 전 수치를 회복했다. 하지만 강남의 인구는 더 많이 늘었다. 과거 명나라 시절 인구보다 세 배는 족히 되리라는 평을 받고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후송이 사방에서 가해지는 포 위를 견뎌내고 반격까지 시도하는 배경도 이 막대한 인구와 이들을 통해 얻는 방대한 생산력 덕분이다. 동아시아에서 최고로 생산력 ㄴ ㅗㅍ은 토지에, 가장 많은 인구가 더해지니 못 할 일이 없다.
이 후송의 상상을 초월하는 생산력 때문에 내 계산도 빗나갔다. 임오년에 후송과 화의를 맺고 바닷길을 열어주면서 예상하기를, 이미 국제시장에서 우리 비단과 차가 단단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으니 후송이 시장에 나와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른 상품은 괜찮았다. 도자기도 괜찮았다. 문제는 차와 비단이다. 차야 그전부터 우리가 밀수해다가 딱지만 붙여 팔아댔으니 그럴만하다고 하더라도, 비단조차 그리될 줄은 몰랐다. 세상에, 수력 직기로 짜는 우리 비단보다 후송제 비단이 싸다니! 질도 동등 이상이고! 이래서야 국제시장에서 우리 비단이 차지한 점유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밧줄과 돛 같은 선박용품을 제작하는 데 사용하는 마닐라삼 산업이 성장헤서 비단 수출 감소분을 메워줬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타격이 클 뻔했다.
“내년에 날씨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청나라 조정은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하니, 곡식을 내다 파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그리고 저들도 만약을 대비한 예비분은 남겨 놓지 않았겠습니까.”
“그도 그렇구나. 청나라 조정은 송나라보다 더 민심에 민감하니.”
후송이야 강남을 지키면서 옛날 명나라의 강역을 회복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있다 보니 북벌 준비를 위해 세금도 높고, 백성들에게도 좀 무자비한 편이다. 하지만 청나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는 무력으로 백성들을 억누르면서도 민심의 향방에 무척 신경을 쓴다. 옛날 요토 시절까지만 해도 안 그랬다. 그대는 정말 칼과 말발굽으로 나라를 통치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탄압과 민란의 악순환을 개달은 그 뒤의 황제들이 온건책으로 돌아서면서 지금은 초창기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한인들의 충성심도 높아졌고 말이다.
“그렇다면, 청나라가 기근을 맞이할 걱정을 해줄 필요는 없겠구나. 우리 백성들에게 먹일 곡식이나 챙기도록 하자.”
가을이 되면서 청나라 말고도 해외에 주문해둔 곡식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우리 속령인 대남과 누손에서도 막대한 양이 들어오고, 일본에서도 정기 계약으로 들어오는 50만 석이 차질 없이 들어왔다.
“일상(日商)들이 제안하기를, 우리가 원한다면 곡식을 더 보내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땅에 기근이 든 것을 알고 있다며, 기꺼이 쌀을 보 내 돕겠다고 합니다.”
“공짜로 줄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어쨌든 보내주면 고마은 일이다. 주는 대로 받아오라.”
일본은 올해 농사에 별로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일본이 우리보다 농사에 유리한 환경인지라 우리는 흉년이어도 일본은 풍년이 드는 해가 많았고, 그만큼 식량 사정에 훨씬 여유가 있었다. 단지 일본 농민들이 우리 농민들보다 세금을 많이 낼 뿐이지. 물론 일본이라고 아예 흉년이 안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길쭉하게 생긴 일본 국토 모양 덕분에 일본 전역에 흉년이 드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전국적인 대기근 같은 건 잘 안 생기더라. 어쩌면 우리가 내년에 2년째 흉년을 겪어도 쟤들은 괜찮을지도 모른겠다.
“만약 일본에도 흉년이 들면 큰일이겠습니다.”
“별수 있느냐. 강남에서 들여오는 쌀을 늘려야지.”
그렇지 않아도 후송에서는 쌀을 팔고 싶다는 제안이 이미 들어와 있다. 후송도 남북 양쪽 전선에서 손실한 전력을 보충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한 까닭이다. 팜패한 복건군 재건에는 당연히 돈이 들고, 승리한 형주군과 한양군도 막대한 전비를 쓴 건 마찬가지다. 어디 후송뿐이랴. 내란으로 타격을 입은 양광 지방을 재건해야 하는 서나라에서도 우리가 기근을 겪는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당장 쌀을 팔겠다고 제안한 참이다. 말 그대로 전 세계가 우리한테 쌀을 내민다. 치를 돈과 나를 배만 있으면 된다.
이에 반해 미주에서 오는 식량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진다. 미주까지 한 번 왕복할 시간이면 누손은 세 번 오갈 수 있으니 말이다. 다급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가까운 누손에서 쌀을 더 싣고 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대신 미주에서는 예전에 그랬듯이 기름류를 주로 들여온다. 기름이 곡식보다 가격이 훨씬 비쌀뿐더러, 굶주린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음식물이기도 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양곡은 얼마를 모아도 넉넉하다고 할 수 없다. 재무부와 외수사는 최대한 많은 양곡을 구하도록 노력하고, 내무부는 구휼이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철저히 감독하라. 법무부는 이 혼란을 기화로 하여 죄짓는 재들을 철저히 찾아내 벌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곡식을 사재기하는 놈, 금주령을 위반하는 놈, 대놓고 도적질을 하는 놈….지금 같을 때는 꼭 이런 죄인들이 나온다. 잘 단속해야지.
이렇게 기근 대책에 바쁜 사이 겨울이 왔다. 그런데 1731년도 다 저물어가는 양력 12월 27일, 우리 달력으로 11월 29일에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동글게 뜨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뭣? 돌궐국 사신들이 지금 제물포에 들어왔다고? 그게 정말이냐?!”
기근 대책으로 꽉 차 있던 머리가 싹 비어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