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491
3부 609화(1491화)
19.
하와국에는 왕이 머무는 궁궐이 세 군데 있다. 하나는 그저 ‘왕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본궁(本宮)이고, 다른 하나는 하와도 동부에 있는 별궁, 마지막은 오아도에 있는 행궁이다. 오아도에 대한 해군 수영이 있다 보니 가끔 왕이 오아도를 방문할 때 사용한다.
다른 다섯 섬에는 행궁이 없다. 이는 근본적적으로 각 섬 전체가 여섯 공의 영지이지 왕의 땅이 아닌 데서 비롯한다. 각 섬을 다스리는 여섯 영주는 국왕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충성을 서약하기는 했으나, 자기 밑에 거느린 땅과 백성을 왕에게 바치지는 않았다. 이 점은 유일하게 행궁이 있는 오아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아도에 위치한 국왕의 행궁은 오아공의 영지가 아니라 진주만에 있는 해군 수영 부지 내에 있다. 수영이 설치된 구역은 대한 태황의 직할령으로 되어있으므로, 행궁은 태황의 땅에 있는 셈이다.
행궁이 없다고 해서 국왕이 다른 섬들을 전혀 찾지 않는 건 아니다. 3년에 한 번 정도는 각 섬을 방문하여 영주들에게 받는 충성 서약을 갱신하는 행사를 치른다. 이때 왕이 머무는 숙소는 각 영주의 저택으로, 영주들은 손님을 대접하는 예로 왕을 대접하게 되어있다.
“그 부담이 적지는 않지만 말이오.”
“어련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한둘이어야 말이지요.”
대한 복국에서도 그렇듯이, 하와국이라고 해서 군주가 혼자 여행할 리는 없다. 늘 측근에 두어야 하는 조신(朝臣)들에다 친위병, 시종과 시녀에다 후궁들까지 합치면 5백에서 6백 명 정도는 거느리는 게 보통이다. 국왕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도 이 정도는 되어야 했다. 이만한 규모의 사람들이 최소 사흘에서 길게는 열흘 이상 머무른다. 게다가 국왕 일행을 얼마나 성대하게 환영하느냐가 영주를 간에 일종의 경쟁이 되는 만큼 절대 소홀하게 대접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주들은 왕에게 신하로서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게다가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아 풍요로움과 관대함을 과시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 어디서 힘들다고 토로할 수도 없는 부담이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그만큼 베푸시지 않습니까. 신년 잔치, 중추절 잔치를 겸해 가면서 석 달마다 열리는 대회의 때면 영주들이 모두 하와도를 찾아와 전하의 손님이 되니까요.”
최지원과 대화를 나누던 이종이 미소를 지었다. 대회의를 비롯한 행사에 참석하러 왕궁을 찾는 영주들 역시 왕도에 별도의 저택을 두지 않고 왕궁에서 유숙한다. 수행원을 백여 명씩 거느리고 오는 이 영주들을 성대하게 대접하는 것도 왕의 몫이다. 하와국의 왕과 영주들이 치열하게 벌이는 접대 경쟁을 보고 있으면 미주인들의 포투래취(布投來取)가 떠올랐다. 북미주 쪽 토인들에게 성대한 잔치를 열어 서로의 재력을 과시하며 다투는 포투래취라는 습속이 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옳은 말이오이다. 비록 하와국이 번왕으로 봉함은 받았으나, 아직 그 습속은 옛날 왕화를 받기 전과 같다는 증거가 아니겠소이까. 사대부라면 부를 과시하며 물자를 낭비하기보다는 마땅히 학문을 익혀 예와 도리로서 서로를 앞서려 하는 편이 옳지 않겠소.”
최지원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이곳 하와국에 국왕의 국사(國師)로 부임한 지도 어느덧 17년째다. 그 동안 하와국 왕족들과 각 섬에서 온 공자(公子)들에게 학문과 예법, 군자로서 행해야 할 도리를 가르쳤다. 가끔은 국왕과 공작들 사이에서 재판관 노릇도 했다. 귀국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두어 차례 본국에서 후임을 보내겠다는 연락이 오기는 했다. 하지만 국왕 하가위를 비롯한 하와국 조정이 똘똘 뭉쳐서 최지원을 붙들었다. 본국에 계시는 주상께 표문을 올려 제발 최지원을 계속 두어달라고 청했음은 물론이다.
“그 표문을 직접 손보시는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허허, 그 부끄러운 기분을 어찌 내 입으로 말하겠소.”
하와국 조정에서 본국에 보내는 문서는 모두 국사인 최지원을 거치는 게 법도였다. 아직 한문이 익숙하지 않은 하와국 문관들이 작성한 문서는 오류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적절하지 않은 문장 구조는 물론이고 아예 틀린 글자를 떡하니 써놓기도 했다.
“하와국왕이 아무리 붙들어도 돌아가려면 갈 수 있었소. 하지만 지내다 보니 이 섬나라에 정도 들었고, 기왕 시작한 일이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놓고 싶었지요. 생각 같아서야 문현공께서 미주에 계실 때 하신 만큼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이다.”
문현공(文賢公)은 죽은 이형준에게 주상께서 내리신 시호다. 이형준이 7년 동안 미주에서 돌아다닌 거리는 1만 리는 족히 넘는다. 그 먼 길을 움직이며 쉰 개가 넘는 향교를 챙기고 책을 나눠주며 수많은 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하지만 나는 고작 10만 명도 안되는 하와도 백성들조차 돌보지 못하고 있으니.”
“대감,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문현공께서는 말이 통하고 이미 예의와 도리를 웬만큼은 아는 우리 백성들을 가르치셨지만, 대감께서는 일단 말부터 안 통하는 하와인들을 상대하고 계시니 어찌 그 수고가 같겠습니까.”
하와인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종도 잘 안다. 진주만에서 서당을 열고 하와인 아이들에게 글을 자르쳐 보았더니 한국어만 써서는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다. 결국 이종이 하와어를 익혔다. 그리고 나서야 아이들에게 제대로 학문을 전할 수 있었다.
“대감께서는 왕족과 공자들을 가르쳐 위로부터 왕화를 퍼뜨리는 데 힘쓰셨습니다. 그것도 큰 공입니다.”
최지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도리어 이종을 칭찬했다.
“내가 보기에는 귀공이 했듯이 아래로부터 왕화를 퍼뜨리는 일이 더 대단하오. 하와어를 글로 쓰는 법까지 고안하지 않았소.”
미주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이형준도 겪은 문제지만…..눈앞에 있는 몇 명을 붙들고 열심히 가르쳐 보았자 당장은 큰 효과가 없었다. 시간을 들여 18만에 달하는 하와국 백성들 모두를 가르쳐야 예의도, 학문도 제대로 퍼진다. 그걸 시작한 사람이 여기 이종이다.
“별말씀을요. 저는 그저 옛날 장조께서 계시던 시절에 만주문을 만드신 선학들의 기록을 보고 그대로 본떴을 뿐입니다.”
이종이 사실상 혼자 힘으로 이룬 위업이 이 하와어 표기법 정리였다. 본국에서는 하와국 백성들에게 한어(韓語)와 한문(漢文)을 가르치는 일에는 신경을 좀 썼지만 하와어를 문자로 적고 정리하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하와인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종은 하와인들에게 제대로 학문을 전하려면 하와어를 제대로 글로 적는 법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주어가 그렇듯, 국문을 사용해서 하와어를 적는 법을 20년 동안 연구했다. 난관 끝에 3년 전에 완성한 책이 《하와어해(夏?語解)》 다.
다만 이종은 왕도가 있는 하와도가 아니라 자기가 살던 오아도 방언을 표준으로 이 책을 만들었다. 그래도 말이 방언이지 각 섬에서 쓰는 말은 거의 같아서, 지극히 사소한 부분을 제외하면 어차피 별 차이가 없다. 환성된 책을 받아든 하와국왕 하가위와 세자 하상운도 그 부분을 문제로 삼지는 않았다. 되려 크게 탄복하여 산더니같은 공물과 함께 금상께 표문을 올렸다. 이종을 하와국 관리로 등용하고 싶으니 허락해주십사 청하며 그 공을 알리는 글이었다.
“그 표문을 점검할 때야말로 정말 뿌듯하였소. 이 공이 세운 공이 인정을 받았으니까.”
“저야말로 부끄럽습니다.”
이종이 오아도에 유배를 온 지도 이미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어떤 사고도 일으키지 않고 성실히 군졸로 복무하였으며 주변 토인들에게 널리 덕을 베풀었으니, 귀국이라면 좀 곤란할 수 있어도 유배지에서 좀 더 자유롭게 지내는 정도라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역시나 올해 초에 청을 허락하는 답이 왔다. ‘부친의 죄가 너무나 큰 탓에 그 벌을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으나’, 그동안 덕을 많이 쌓았으니 군졸로서의 역(役)을 해제하며, 이제는 오아도에만 머물지 않고 하와국 내 다른 섬은 자유롭게 왕래해도 좋다는 윤허였다.
대놓고 하와국 관리가 되어도 좋다고 허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적에서 빼주었다는 건 이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묵시적인 양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실망한 표정이던 하가위는 최지원에게 설명을 듣고는 뛸 듯이 좋아하며 이종에게 관직을 내렸다.
“내 관직인 ‘왕과 공들을 가르치는 자’보다는 이 공이 받은 ‘아이와 선비를 가르치는 자’ 쪽이 훨씬 듯이 깊소. 이 나라에 바닥부터 왕화를 전한다는 의미잖소? 진심으로 부럽구려.”
“국사께서 칭찬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아도에서 유유자적하며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이 좀 그립습니다.”
이종이 오아도에서 가르친 제자들도 자랐다. 오아공 밑에서 관리로 일하는 이들이 많다. 해군 수영이나 본국에서 온 상인, 농장주 밑에서 고원(雇員)으로 일하는 이들도 다수 있다. 이들 덕분에 오아도에 본국의 투자가 더 집중되기도 했다. 이렇게 이종 덕에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던 오아공 오안가-토인 이름은 아나칼레(왕관)-는 하가위가 이종을 데려가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이종이 정식으로 자기 밑에서 직책을 맡은 것도 아니므로, 그냥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여기서 더 큰 일을 하시게 될 거요. 곧 새 왕이 즉위하실 테니, 이 공에게도 더 큰 일을 내리시지 않겠소.”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이 문제는 언젠가 닥칠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닥치게 되니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했다.
“대감님들,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시녀 한 사람이 어느새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을 전했다. 고개를 끄덕인 최지원이 곧바로 답했다. 왕의 침전으로 바로 가겠다고.
20.
하와국에 있는 세 궁궐 중에서 국왕 하가위가 가장 좋아하는 궁전이 바로 여기다. 하와도 서해안에 있는 왕궁과 반대편에 있는 하와도 동쪽 해안, 옛 와가촌(와이아케아)에 4년 전에 새로 지은 별궁이다. 궁궐 이름은 한어로 ‘무우궁’이다.
“한양에서 처음 온 한인들은 늘 묻더군. 내가 그 푸성귀를 좋아하느냐고.”
병석에 누운 하가위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대한에는 ‘무’라는, 이 별궁하고 이름이 비슷한 채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궁궐 이름은 그 푸성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걱정이 없다(無憂)’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일 뿐이다.
이곳 와가촌은 하가위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젊을 때도 가끔 찾기는 했지만, 쉰이 넘어 머리에 백발이 늘어나면서부터 부쩍 고향을 찾는 날이 늘었다. 그래서 고민한 끝에 이 마을에 바다를 바라보는 별궁을 지었다.
“그게 벌써 40년 전 일이다.”
늘 반복하는 카우이의 과거 회상이 또 시작되었다. 하지만 침상 주변에 둘러선 아내들과 자식들, 신하들과 시종들은 아무도 지루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이미 잘 아는 탓이다.
“그때 폐하께서 커다란 배를 타고 해 뜨는 쪽에서, 바로 저기로 나타나셨다. 내가 손으로 가리키는 저기, 저 해안으로 말이다. 그리고 내가 부왕의 명을 받아서 카누를 타고 폐하의 어승선에 올라갔다.”
태황이 아직 친왕이던 시절이다. 그리고 힘세고 용맹한 전사였다. 광채를 발하는 갑옷이 전신을 덮은 그 모습을 본 카우이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상대를 빛의 신 카네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상대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존경심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위대한 전사이자 영도자의 뒤를 따라가서 그가 하는 바를 배우고, 그로써 이 하와국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솟았다.
“아우가테 그놈! 그때부터 내게 질투심을 품었지! 어떻게든 나를 따라잡으려고 기를 쓰는 꼴은 너희도 모두 보았지! 하지만 보아라! 40년 동안 싸워서 결국 내가 이겼지! 으핫핫하!”
가와도, 아니 카우아이섬 놈들은 하와국왕 책봉 경쟁에서만 진 게 아니다. 위신을 걸고서 벌이는 씨름에서도, 낚시에서도, 물소싸움과 경마에서도 언제나 하와이섬이 근소한 우세를 쥐었다. 가와공 아우가테가 기를 쓰고 덤볐지만 소용없었다. 승률은 대략 5대 4였다.
“마지막 승부도 내가 이겼다. 놈은 나보다 먼저, 3년 전에 죽었지. 저세상에 나중에 가는 승부도 내가 이겼어. 내가 더 오래 살았으니 내 승리다!”
“전하. 가와공은 전하보다 나이가 두 살 더 많았으니 먼저 죽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왕비 ‘아누헤아’가 쓸쓸히 웃으면서 남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카우이는 그 말을 듣고도 콧방귀를 뀌었다.
“두 살 많으면 2년만 먼저 죽어야지! 3년 먼저 죽었으니 그놈이 진 거요! 내가 이겼어!”
카우이는 아득바득 자기가 아우가테한테 이겼다고 우겼다. 처음 보이는 모습도 아닌지라, 다들 아무 표정 없이 고개만 조아렸다. 하지만 아누헤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물을 삼켰다. 아우가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3년 전부터 카우이가 조금씩 기운을 잃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겉으로는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고 해도, 그게 40년이나 되었으니…..
카우이 본인에게 그 이야기를 해봐야 바로 부정할 게 뻔하니 아누헤아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아우가테가 좀 더 살아주었으면 남편을 위해서도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삶의 자극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을 테니까.
“전하. 두 ‘가르치는 자’가 당도했습니다.”
“들라 하라!”
최지원과 이종이 침실로 들어왔다. 카우이가 손짓으로 침상 옆자리를 비우게 했다.
“어서들 오시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그대들에게 할 말이 생각나서 말이오.”
“눈을 감기는 뭘 감으신다고 그러십니까. 전하보다 한참 연상이신 태황 폐하께서도 아직 강녕하신걸요. 전하께서도 곧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최지원이 애써 카우이를 격려했다. 하기야 본국에 계시는 주상은 카우이보다 딱 열 살이 많으시다. 그런 주상께서도 건강하신데 카우이도 좀 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어의가 바치는 탕약을 제때 드시고, 섭생에 좀 더 주의하시면 아직 한참은 사실 수 있을 겁니다. 부디 소인의 청을 들으소서.”
“됐소. 조상들께서 부르시니 갈 때가 된 거요. 억지로 세상에 좀 더 남은들 무엇 하겠소.”
카우이가 웃었다. 지난 40년 동안 이루고 싶었던 과업은 모두 이루었다. 아버지를 도와 하와이를 통일했고 앞을 막은 형들을 초치해서 왕위에도 앉았다. 그 뒤에는 평화와 풍요를 한껏 누리며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았다. 권세가, 부가, 미녀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게 전부 태황 폐하께서 만들어 주신 축복이오. 그러니 내 이름으로 폐하께 올리는 감사 편지 하나 써주시오. 아, 최 공보다는 이 공이 쓰고, 최 공이 검수를 해주면 더 좋겠소.”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종이 점잖게 고개를 숙였다. 카우이는 자신을 귀양에서 풀어준 은인인 셈이니, 이 정도 작은 일은 보답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걸 쓰자면 내가 폐하를 만나고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대가 정확하게 알아야겠지. 당장 오늘부터 여기 침실에서 내가 부르는 대로 다 받아적으시오. 그리고 그 내용을 상세히 정리해서 폐하께 올리는 서한을 쓰는 거요.”
이건 감사의 편지를 한 장 쓰는 정도가 아니라 카우이 자신의 일대기를 몽땅 정리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난감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고맙소. 학당을 세워 애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건 급한 일이 아니니까, 지금은 이 일부터 해주시오. 여봐라, 방해되니 다들 나가거라.”
삽시간에 침실이 다 비었다. 시족들이 지필묵을 가져오고, 시녀 두 사람은 옆에 달라붙어 카우이가 침상 위에 일어나 앉도록 돕고 부채를 부쳐주었다.
“자, 시작하겠소. 어디 보자. 40년 전 그날……”
그렇게 카우이의 회고를 받아쓰는 작업은 꼬박 석 달 동안 이어졌다. 카우이는 생각이 안 나는 부분이 있으면 수시로 구술을 멈췄고, 그 일을 기억하는 측근을 데려다 확인할 때까지 다시 진행하지 않았다. 그동안 이종은 그저 기다려야 했다. 그 길고 벅찬 작업이 마침내 끝나자 카우이가 웃으며 이종을 치하했다.
“고생했소. 그만하면 글감은 충분할 테니, 한 5천 자 정도로 잘 정리해 보시오. 너무 길면 폐하께서 읽기 지루하시잖소? 완성되면 내가 먼저 한번 읽어보고 국사 대감에게 보내리다.”
“예, 전하.”
집무실로 돌아온 이종은 자기 앞에 산 같이 쌓인 종이 더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50만 자는 될 것 같은 이 방대한 문서를 어떻게 5천 가로 줄인단 말인가. 너무 많은 자료는 없는 것만 못했다. 하지만 이종은 이 문서 더미를 축약해서 선보일 여유도 없었다. 회고를 구술하느라 진을 너무 뺐는지, 겨우 사흘 뒤에 카우이가 향년 57세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임자년 11월 14일, 양력으로는 1732년 12월 30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