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492
3부 610화(1492화)
21.
본래 북미주 토인들이 여는 ‘포투래취’라고 하는 행사는 그저 성대한 잔치를 열어 물품을 나누어 주기만 하는 행사가 아니었다. 커다란 화톳불을 피워서 향유와 포목, 쪽배 따위를 마구 불태우면서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 심지어 현장에서 노비를 죽이기까지 했다. 처음 이주해온 한인들은 아까운 물품을 낭비하는 행사를 보 고 기겁을 했다. 그래서 이런 낭비는 나쁜 짓이라고 타일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도리어 교역으로 얻은 본국산 철물과 도자기 같은 물품이 파괴할 자산으로 추가되었을 뿐이다.
결국 미주총관부에서 나섰다. ‘포투래취 행사에서 재물을 불태우는 자’에게는 없앤 재물의 열 배에 달하는 특별세를 징수하겠다고 건복제 시절에 황명으로 선포한 뒤에야 이 낭비적인 행사가 끝을 맺었다. 토인 추장들은 투덜거렸지만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포투래취 행사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므로 잔치는 계속 이어졌다. 다만 재물을 불태우는 대신 참석자들에게 전부 나눠주는, 문자드대로 ‘포목을 던지면(布投) 와서 주워가는 (來取)’ 잔치가 되었다. 어찌 보면 좀 더 근원적인 옛 형태로 회귀한 셈이다.
역설적인 사실 하나는, 이 풍습으로 가장 큰 덕을 봤던 이들은 토인들 자신이 아니었다는 부분이다. 본국에서 미주로 갓 이주한 한인 신착민(新着民)들이야말로 이 행사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다. 신착민들은 가지 몫으로 토지를 할당받을 때까지는 먼저 건너온 선착민(先着民)들 밑에서 머슴 노릇을 해야 한다. 선착민들은 당연히 이들을 최대한 쥐어짠다. 물론 미주에서는 머슴 일을 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낯선 땅에서 부족한게 많게 마련이다.
이처럼 포투래취가 변형되자 선착민들도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다. 옛 방식으로 행사를 벌일 때는 비웃으면 그만이었지만, 본국에서 온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리가 되니 ‘그대들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비난이 자신들을 향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는 어떻게 알고 있을지 몰라도, 이제 북미주 일대에서 포투래취라고 하면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자리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다. 한인과 토인을 불문하고, 유력 호족이나 부호들이 다른 이들에게 시혜를 베푸느라 재물을 모으는 행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일단 행사의 의미가 한번 바뀌면 더 넓어지는 것도 여반장이다. 축제에서 음식과 물자를 나누는 상대가 이웃한 마을, 북미주 내에서 알고 지내는 상대로 끝나지 않게 되었다. 바다 건너에 있는 대한 본국에도 원조를 보내게 된 거다.
“바다 건너 큰아버지께서는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그분의 또 다른 자녀들이 지금 기근에 시달린다는데, 어찌 저희가 가만히 두고만 보겠습니까?”
“그대들의 정성이 참으로 갸륵하구려. 내, 모아서 지사께 보내드리리다.”
원신은 자기 눈앞에 산더미같이 쌓인 말리거나 절인 생선, 생선기름과 돼지기름이 가득한 나무통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적어도 6천 석들이 상선 세 척은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한 막대한 분량이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작년에도 두 번이나 이렇게 재물을 모아서 보냈잖소. 그대들의 듯이 참 기특하기는 한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오?”
“아닙니다, ‘쓴 뿌리를 씹는 자’ 나리. 그동안 바다 건너 큰아버지께서 저희에게 베푸셨던 은혜가 있는데 이 정도가 무슨 부 담이겠습니까. 이까짓 재물이야 기꺼이 드릴 수 있습니다.”
북미주의 여러 토인 추장들은 작년, 임자년에 이미 두 번이나 막대한 식량을 모아 본국에 보냈다. 대가를 한 푼도 받지 않고 보인 이 정성에 본국 조정에서도 크게 감격했고, 재물을 바친 추장들에게 홍익장 6등을 내려 포상했다. 대금도 다로 지급했고 말이다. 원신을 비롯한 한인 유력자들도 토인 추장들의 행동을 보고 울며 겨자 먹기로 한몫 크게 모아 바쳤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이들에게도 역시 훈장을 주었고, 바친 물품에 대한 대 금도 챙겨주었다.
처음 재물을 바칠 대는 솔직히 좀 아까웠다. 하지만 대가가 주어졌을 뿐 아니라 훈장까지 받고 보니 무척 뿌듯했다. 훈 6등이면 정6품 품계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집안일 챙기는데 바빠서 향시조차 한 번 보지 못한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큰 영예였다. 그렇게 기분이 좋다 보니 요즘은 자기 조상인 원균을 거론하며 투덜거리는 일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 토인식 이름이 그 탓으로 유래 되었는데 말이다.
“형님께서 중간에 주선을 잘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러니 지사부나 총관부에서 빼돌리지도 못하고, 바다건너 본국에 가서도 큰아버지께 잘 전해진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 뭘 그런 걸 가지고.”
원씨 집안이 주상의 눈에 들었던 건 사실이다. 딱히 특혜를 내리거나 하시지는 않았지만, 40여 년 전 옛날 미주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친왕비와 함께 찾아와 유숙하시는 등 호감을 보이셨다. 그것만으로도 미주총관부 관리들이 원씨 가문을 의식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에다 원씨 가문은 북미주 최대의 호족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영향력이 작을 수가 없다. 외사촌인 신욱족 추장들이 추켜세우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그렇게들 여겨주니 고맙네. 이제 주지사 나리께 연락을 넣어야겠구먼.”
이 많은 짐을 실을 배를 구하는 일도 큰일이다. 원씨 집안이 소유한 배들이 지금 어디쯤 있는지 확인하고, 북미주지사 홍성윤을 찾아가서 처리를 요청해야 하리라. 처음 겪는 일이 아닌지라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 협조를 구하는 적업도 능숙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멀리 동변에서 고생하는 아우 원호 생각이 났다. 조상의 죄라도 씻을 겸, 자신의 재주도 살릴 겸 무관이 된 건 좋지만…..어쩌다 그런 골 아픈 일을 맡았는지 원.
22.
동변의 황야는 없고도 넓다. 본국에서 막 건너와서 이 황야를 처음 눈에 담은 자들은 그 계급이 군관이건 군졸이건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지금 원호의 눈에는 황야고 골짜기고 먼 하늘을 나는 독수리고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땅바닥 먼지 위에 남은 발자취를 찾고 있을 뿐이다.
“그 망할 놈의 자식이 어디로 튀었나!”
“계속 동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부령 나리.”
원호가 으득거리며 이를 갈았다. 이번에야말로 그 망할 놈의 도적을 꼭 붙잡아서 말뚝에 매달고야 말 터였다.
“장길산, 그 개놈의 새끼……!”
장길산(張吉山)은 미주 역사상 최악의 도적이다. 그런데 그놈의 정체는 묘연하다. 일단 나이는 물론이고 출신부터가 확실하지 않다.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신착민이 토인 처녀를 취해 낳은 자식이라 하는데, 산적이라고도 하고 숯쟁이나 잠상이라고도 한다. 과연 어느 설이 맞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아비가 한인이고 어미가 토인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아비는 장길산이 태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장길산은 외가라고 할 수 있는 토인 부락에서 자라다가 아버지를 찾으러 지선성에 왔지만,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로 사람대우를 받지도 못했다. 선착민이고 신착민이고 할 것 없이 가장 무시당하는 존재가 제대로 된 아내를 얻지 못해 토인 여자를 처로 맞은 사내다. 그 자식들도 자연히 우대는 못 받는다. 게다가 아비가 아비 구실도 안 하고 도망갔다면 당연히 더 천대받는다.
차라리 장길산이 일찍 포기하고 외가 마을로 돌아갔으면 편히 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놈은 무뢰배가 되어 지선성 항구 일대를 배회했다. 그러다가 자기 같은 불평분자들을 모아 패거리를 만들 더니 대놓고 도적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주 사상 최악의 도적이 되었다. 장길산 패거리가 날뛰기 시작한지 이미 7년, 처음에는 그 세가 미약하여 여타의 소소한 도적들과 딱히 다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장길산의 용력과 배짱에 반한 불한당들이 점점 그 주변에 모이더니 2년 전부터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도적이 되었다.
지금 장길산의 패거리에는 제 놈과 같은 혼혈인뿐 아니라 한인과 토인, 백인까지 섞여서 활동하고 있다. 그 숫자는 1천여 명에 달한다고 하며, 중미주.남미주.동변 각지를 들쑤시고 다녔다. 2년 동안 관군이 필사적으로 뒤를 쫓았으나 아직도 잡지 못했다. 미주총관부에서는 올해부터 장길산의 목에 은 3천 냥과 정4품 토관직을 내걸었다. 그래도 장길산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그 용력과 배짱에 대한 소문만 널리 퍼질 뿐이었다.
지금 원호는 장길산이 소수의 부하만 거느리고 애첩을 만나러 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 뒤를 쫓는 중이었다. 놈의 성격상 애첩을 잡아놓고 기다려 봐야 코빼기도 안비치고 애첩을 버릴 게 분명했기에, 애첩과 밀회하는 동안에 덮쳐야 했다.
“그 개자식을 좇아라! 무조건 잡아서 각을 떠야 한다!”
그 망할 개놈이, 감히 태황의 사유재산인 내수사 태호은광을 털었다. 도둑맞은 은의 양만 10만 냥에 달한다. 그놈이 이런 일까지 저질렀는데 붙잡지 못한다면, 원호는 당장 대동양에 뛰어들어 죽어야 하리라. 문제는 놈의 패거리가 흔적을 숨기는 데도 귀신이라 추적하기 너무나 힘들다는 점이었다. 80리를 추적하면서 여섯 번이나 흔적을 놓치고 뒤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원호가 거느린 추적꾼들도 추적이라면 도가 튼 이들인데도 그랬다.
“나리! 흔적이 또 끊겼습니다!”
“망할!”
원호가 이를 갈면서 선두로 나섰다. 흔적을 보고 판단하려는 순간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급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휙휙 둘러보니 사방에서 숲과 바위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격에 집중하다가 그만 놓쳤는데, 어느새 좁은 골짜기 안에 들어와 있었다.
“매복이다! 당장 뒤로 돌아 골짜기 밖으로 나가라!”
원호가 군사를 물리려고 소리를 지르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함성이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탄환과 화살이 마구 쏟아졌다. 원호가 데려온 속오군 기병들은 큰 혼란과 함께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설사 이들이 관군 기병이었더라도 뾰족한 수는 없었으리라.
23.
장길산 일당이 또 나타났다는 소문에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청이 발칵 뒤집혔다.
“그놈들, 조선령에 있는 본거지로 돌아갔다가 조선군한테 다 토벌당한 거 아니었나?”
“아니랍니다, 부왕 전하.”
조선과 전쟁을 치러 참패한 알부케르케 공작-전쟁을 일으킨 건 그가 아니었다-이후, 누 에바 에스파냐 부왕청이 외교적으로 가장 신경쓰는 문제는 조선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그래야 누에바 에스파냐가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알부케르케의 바로 다음 후임자인 리나레스 공작도, 그다음 부왕인 아리옹 공작도 그런 태도를 견지했다. 1722년부터 12년째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직에 있는 카사 푸에르테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전쟁에서 조선은 바하 칼리포르니아를 강탈했다. 그 탓으로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및 서해안에서는 전례 없는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평화조약이야 맺었다지만, 언제 조선이 다시 군대를 움직여 전쟁을 벌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국에서는 누에바 에스파냐 방위를 위해 병력을 증강하고 요새를 다수 신축했다. 일단 조선과 화평을 맺었다고는 해도 그게 장래를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조약 하나가 영구한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데 조선이라고 그렇겠는가.
그래도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청에서는 되도록 이쪽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행여나 지난 1708년처럼 또 전쟁에 패한다면 그때는 또 어떤 피해를 보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 도적놈의 너무나 담대한 도적질은 도저히 참고 넘길 수가 없군. 당장 편지를 준비해라. 조선총독에게 항의해야겠다.”
장길산이라는 조선인 도적은 조선령 아메리카에서만 날뛰는 게 아니다. 누에바 에스파냐 방면은 물론이고 프랑스령인 루이지애나, 누벨 프랑스 일대까지 돌아다닌다. 그 패거리에는 아파치를 비롯하여 국경에서 날뛰는 온갖 못된 놈들이 다 들어가 있다.
“여차하면 우리 쪽에서도 지원군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일러라. 그놈들이 하도 국경을 들쑤시니 우리로서도 결질 수가 없다.”
“예, 부왕 전하.”
전술했듯이 지금 조선과의 관계는 스페인이 세 수쯤 접어주고 들어가는 관계다. 조선과 전쟁을 벌여 패했을 때 고려해야 할 손해도 문제지만, 유럽에서의 국제관계 문제도 크다. 지금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모두 대치 상태다. 영국과도 사이가 나쁜 판이다. 서인도제도에서의 교역 문제로 무척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런 판에 조선까지 건드릴 여유가 있을 리 있겠는가.
호세 페르난도 1세는 영국을 동맹국으로 만드느라 지브롤터까지 넘겨줬다. 하지만 뭐 할 때 랑 뭐 할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영국은 대놓고 스페인을 뜯어먹으려 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가 스페인을 공격할 대 도와주는 조건이었지, 우리가 스페인 측의 모든 요구에 따른다는 조건은 아니었잖소?’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 지금 와서 영국 놈들에게 속았다고, 공연히 요충지 지브롤터만 빼앗겼다고 통탄해 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언제 영국과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감안하면,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으로서 이곳 영토를 지키고 다스릴 책임이 있는 카사 푸에르테 후작은 꼭 조선과 평화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장길산이라는 놈의 약탈이 끝나지를 않으니 조선 당국에 항의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놈을 죽이거나 우리 국경 연변에서 쫓아버려야 한다. 조선총독이 연합작전을 받아들이도록 설득에 최선을 다하라.”
“예, 전하.”
한숨을 쉬던 카사 푸에르네 후작이 북아메리카 전역을 그린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같은 북아메리카에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그 도적놈들에게 습격당할 일이 없는 영국 놈들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