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509
3부 627화(1509화)
6.
벵골에 대군을 보내는 건 애초에 논외다. 지난번 광동 출병 때도 경험했지만, 해외파병은 막대한 비용이 든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필요한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벵골까지의 거리는 광동까지 가는 거리의 세 배다.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짓을 수시로 한 유럽놈들은 참……”
유럽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인 경제 및 군사력 우위를 쥐고 있으니 그런 짓이 가능했지. 전장에서의 수적 열세도 질적 유세로 만회할 수 있었고. 영국의 인도 제패 계기가 1757년의 플사시 전투였다고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것 같다. 영국 세력을 축출하겠다고 결심한 벵골 태수가 영국인 포로와 민간인들을 좁은 방에 감금해 질식하게 한 ‘캘커타 불랙홀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프랑스가 벵골 편에 붙었다.
숫자로만 따지면 벵골군은 영국군의 스무 배는 되었다. 프랑스인들의 지원까지 받았다. 영국군도 잔짜 유럽인은 소수고 대부분 병력이 인도인 용병(세포이)이었으니, 언뜻 보기에 벵골군이 이길 게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붙어보니 벵골군은 어이없이 참패했다. 수십 배나 되는 병사와 딱히 뒤떨어지지 않는 숫자와 성능의 대포를 가지고도 졌다. 패군지장인 벵골 태수는 혼자 도망가다가 잡혀 죽었다. 이런 게 유럽 군대가 질로 양을 극복한 대표적인 사례다.
시작된 계기야 어떻건 이 전투는 7년 전쟁의 일환이었고, 영국이 인도를 확실히 지배하는 시발점도 되었다. 인도사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그것만 대충 듣고 치웠는지라, 여기까지가 이 시기 인도에 관해 내가 알던 전부다. 중등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인도사가 빤하니 뭐.
“그다음에 내가 아는 사건은 세포이 항쟁이군.”
세포이 항쟁은 영국이 세포이들에게 돼지기름과 소기름으로 방수 처리한 지협(紙莢), 즉 페이퍼 카트리지를 보급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소를 신성하게 여기는 힌두교도들과 돼지를 혐오하는 이슬람고도들에게 이걸 이로 물어뜯게 했으니 반발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반란은 인도 동부를 휩쓸었지만,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전국적인 항쟁은 아니었다. 반란에 가담한 세포이보다 영국 편에서 진압군에 동참한 세포이가 더 많을 지경이었으니까. 반란 자체도 몇 달 가지 못했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무굴 제국은 그 여파로 멸망했다.
한 가지 공통점은 영국이 인도를 장악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이 두 사건이 모두 벵골에서 일어났다는 거다. 과연 이쪽 세계에서는 이 두 사건이 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일어나기는 할까?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겠네. 앙주 공작이 원래 역사에서의 루이 15세와 똑같은 짓을 차는 걸 보면, 20년 뒤에 즉위할 벵골 태수도 똑같은 또라이일 수 있다. 그놈이 먼저 영국 상관을 공격해서 여자까지 포함된 포로들을 좁은 감방에 처넣어 질식시킨다면 우리가 그쪽 편을 들 수는 없지 않은가.
세포의 항쟁도 일어날 수 있겠다. 다만 원래 역사에서처럼 영국군에 맞서는 반란은 아닐 수도 있다. 영국군에 복무하는 세포이들이 아니라 우리 대한군에 복무하는 인도 토민병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도 인도 병사를 다수 고용하고 있으니까.
그런 사태가 터지지 않게 하려면…..나중에 우리 군대에서 지협을 제작할 때 인도에 보내는 물량은 방수처리를 할 때 꼭 수지(獸脂) 말고 어유(魚油)를 사용하라는 지침이라도 군부에 남겨둬야겠다. 그래야 이런 종교 문제가 안 터지지. 참, 지협, 즉 종이 탄포는 옛날 무종 때 잠시 쓰다가 한동안 사용이 중단됐다. 실화(失火)로 폭발사고를 간혹 일으킨 탓에 내가 장조가 되었을 때는 이미 전군이 다시 죽관(竹管)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협을 다시 사용하게 된 건 수석총이 보급되어 실화로 인한 사고 위험성이 줄어든 뒤다. 다만 급히 바꿀 필요를 못 느낀데다 비용도 부담스러웠던 지방군 군영 중에는 아직 죽관을 쓰는 곳들도 꽤 있다. 뭐, 그렇게 급한 과제는 아니니까 상관없는 일이다.
하여간 좀 더 가까운 문제는 플라시 전투 쪽인데…..내가 22년이나 더 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그때 제위에 있을 영이가 잘 판단하기를 바라야겠다.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는 자가 벵골 태수로 즉위하게 돕든지, 아니면 적절한 명분에 따라 사태에 개입해서 이익을 얻든지.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쪽이든 ‘적절한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다. 광동 진남도 그랬지만, 이제껏 우리 대한은 조야를 설득할 적절한 명분 없이 출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주 정벌? 그거야 국초부터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 여진족 놈들을 토벌하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다.
일본 정벌? 설명이 필요 없는 반격, 보복이었다.
미주 개척? 나라도 없고 군주도 없는 야인들에게 왕화의 도를 퍼뜨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계미남변? 스페인인들이 우리 이주민을 학살하고 임금의 위패를 불태워 황실을 모욕했다.
광동 진남? 이미 말했잖은가. 부당하게 살해당한 이인좌의 원한을 갚고 반적을 토벌하는 서나라 관군을 원조하기 위해서였다.
고로 인도 정복 같은 건 시도할 일이 없다. 인도인들은 야인이 아니라서 자기들 나름대로 잘살고 있으니까 우리가 굳이 왕화를 전할 필요도 없고, 우리를 침략하지 않았으니 응징할 필요도 없다. 조정 대신부터 일개 군졸까지,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한다. 갖다 붙인 핑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껏 우리가 제대로 움직였을 때는 언제나 무력 사용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명분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벵골에 군대를 파견하는 건 그렇게 쉽지 않다.
예전에 파천군을 대규모로 유지하던 시절엔 인도 전역이 내란 상태라 상관을 지킬 병력이 필요하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벵골은 유능한 태수들이 3대에 걸쳐 다스리며 안정화되었다. 병력을 많이 둘 필요가 없다. 더구나 8년 전에 즉위한 새 태수 벵골 태수 지위를 승인한 감사의 표시로 무굴 황제에게 막대한 재물을 바쳤고-슈자 칸이 세공을 끊었다는 보고는 오보였다-그 답례로 여러 칭호와 가마, 보검, 코끼리 같은 선물을 하사받았다.
게다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인들과 죄다 분쟁을 벌인 슈자 칸이지만, 유독 우리한테는 좀 더 호의적이다. 아무래도 서양인들보다는 좀 더 말이 통하기 때문이리라. 5년 전까지도 3천 명이던 수비대를 괜히 1천 명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만약 영국인들이 우리 상관을 공격해왔을 때 슈자 칸에게 구원을 청하는 게 합리적인 대책이다. 우리가 직접 배를 타고 그 먼 길을 건너가는 대신에 말이다. 신세는 나중에 갚으면 된다.
“아무리 육군대신이 불안해해도, 역시 벵골에 파병할 필요는 없겠군.”
다시 말해두지만, 보내려고만 하면 보낼 병력이 없는 건 아니다. 광동에서 돌아와 결원을 보충하고 재편성을 마친 대붕영이 있지 않은가. 성공적인 광동 진남 덕분에 사기도 높다.
하지만 역시 너무 멀다. 그리고 영국이 지금 우리 상관을 공격하는 정신 나간 짓을 벌일 기낭승도 거의 없다. 그러니 육군대신의 걱정은 그냥 기우로 남겨두고, 일단은 내정 관리에 집중하는 편이 좋겠다.
7.
올해부터 적용한 세금 인상안은 벌써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 연초세는 가을에 걷으니 올해분 연초세는 아직 안 걷었지만, 주세 징수액은 벌써 작년 같은 기간보다 6할 가까이 더 늘었다.
‘봄 수확이 생각보다 괜찮게 나와서 백성들의 씀씀이가 커진 덕도 보았습니다.”
“잘된 일이로다.”
아무래도 아직은 농업이 가장 큰 산업이다. 그러니 농사가 잘돼야 이런저런 소비가 는다. 주머니에 돈이 짜랑거려야 주막에도 가고 저자에도 가지 않겠는가. 면포도 사고, 형편이 더 좋은 이들은 비단옷도 살 것이고. 예전에 보리스의 집에 갔을 때, 장옥정이 예왕이 했던 말을 하나 들려주었었다. 술기운에 짓궂은 호기심이 일어, 혹시 예왕과 살 적에 있었던 일 중에 내게 들려줄 만한 게 없느냐고 물어봤을 때 들은 이야기다. 물론 보리스가 변소에 간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글쎄요……호호호, 흉년이라고 모두가 삼베옷만 입으면 비단 짜는 직인은 다 굶어 죽으라는 거냐고 비웃었던 일이 불현듯이 떠오릅니다.’
사실 그때 내가 기대했던 답은 남자답고 힘 좋은 보리스를 칭찬하면서 비실거리는 예왕을 까내리는 그런 내용이었다. 예왕과 지낸 밤은 보리스와 비할 수 없을 만큼 부실했다거나 뭐 그런 거. 나도 취하고 장옥정도 취했었잖은가. 하지만 장옥정의 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장옥정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나, 하고 내가 놀랄 만큼, 그리고 예왕의 식견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만큼.
사실이 그렇잖은가. 지금 경기가 안 좋다고 모두가 소비를 아예 안 해버리면 경제는 그냥 망한다. 내가 공납을 폐지하고 황실에서 모든 물건을 사들이게 한 데는 백성들이 고생하지 않게 하려고 한 뜻도 있었지만,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우리끼리 무릉도원에서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니고, 농사만 지어서는 못 한다. 상공업이 제대로 발전해야 다가온 제국주의 시대를 버텨내고 현대로 나갈 수 입다. 물론 그대까지는 농업국으로서 살아야 하고, 날씨에 크게 신경을 써야 하지만 말이다.
“올해는 비와 바람이 적당하고 햇빛도 강하니, 곡식이 무척 잘 여물 것으로 보이옵니다.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가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기근 때문에 텅 비었던 관고의 곡식도 다시 채울 수 있으리라 보옵니다.”
기근 대처 때문에 4년 동안 재무대신 자리에서 고생하던 성시진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돈다. 성시진만이 아니라 편전에 든 다른 대신들도 다들 표정에 생기가 돈다.
“내무, 북도 지방 5개 주를 도로 개편하는 작업은 올해 안에 끝나겠는가?”
“예, 폐하. 끝내도록 하겠사옵니다.”
거의 준비를 마쳐 가던 도 개편작업은 뜻밖의 흉년으로 연기됐다. 그래도 서류상으로는 계속 준비가 진행됐고,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개편한다. 내년, 병진년(1736) 1월 1일부터는 북방의 요동주ㆍ연해주ㆍ영락주ㆍ속말주ㆍ부여주는 폐지되고, 그 자리에 10개 도가 들어선다.
이는 그동안 은연중에 외지(外地)로 취급되던 만주를 온전히 우리 본국, 즉 내지(內地)로 편입한다는 뜻이다. 양강(兩江) 이북 영토를 처음 손에 넣은 지도 어느덧 230여 년 그동안 본국 취급한다 어쩐다 말로만 언급하던 계획을 드디어 실천하는 거다. 현재 압록강 이남에 13개 도가 있으므로 내년부터는 전국에 23개 도가 존재하게 된다. 이 숫자에서 왠지 원래 역사에서 구한말에 행정체계를 23부제로 개편했던 게 생각나서, 이 우연의 일치는 또 뭔가 하고 혼자 속으로 웃었다.
주에서 도로 바뀌는 만큼 행정 책임자도 정2품 도독에서 종2품 관찰사로 바뀐다. 군권을 쥔 종2품 병마절도사도 병사로 바뀌지만, 병사가 원래 병마절도사의 약칭이었으니까 이쪽은 뭐 달라지는 게 없는 셈이다. 다만 요서주는 도로 바꾸지 않고 계속 주로 남는다. 건주 양국과 접경하는 변방이다 보니 특별한 지위를 유지할 필요가 있어서다. 고려 때 변경에 두었던 동계와 북계처럼 국경에서 방위를 맡는 군사지역이 된다.
그 외에 흑룡강 이북의 변방인 북변은 여전히 종2품 북변관리사가 맡는 구역으로 남는다. 땅은 넓지만, 파악된 인구는 여전히 10만도 안 된다. 그런 황량한 땅에다가 무슨 주를 두고 도를 두겠는가. 이로써 내지 13도하고 구분되던 외지 8주는 내년부터는 3주로 줄어 든다. 요서주, 대남주, 누손주다. 미주와 구주는 또 별도로 갈라지는지라 약간 성격이 다르다.
“이제 북도 지방도 정녕 우리 강역이 되었다. 그러니 그저 북도 출신이라 하여 야인이라 부르며 멸시하는 태도는 앞으로 한층 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일부러 엄한 목소리로 강조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이 넓은 나라에서, 누군가의 출신을 두고서 은연중에 가해지는 차별은 없을 수가 없다. 우리보다 훨씬 작았던 원래 조선에서도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들이 얼마나 박대 받았던가. 그 결과가 홍경래의 난이었고 말이다. 이쪽 세계에서도 경화사족(京華士族)이 정국의 주도권을 쥔 부분은 다르지 않다. 과거에 합격하거나 전공을 세워서 벼슬을 얻는 등 다양한 지방 세력이 새로이 진입하고는 있지만, 최고위 고관들은 한양 출신들이 많다. 삼남 출신은 일부 있어도 북도 출신은 거의 없다.
이는 대한이 매우 안정된 사회 구조를 수백 년 동안 유지한 데서 기인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나라가 망하지도, 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으니까 한번 자리를 잡은 지배층은 계속 자리를 지키면서 기반을 다진다. 고로 계층 구조가 공고해 진다.
아무리 대한이 신분제 사회라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양극화가 굳어지는 양상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 건 내가 근본적으로는 현대인이라서 일거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겠답시고 인위적으로 숙청을 벌여서 모가지를 줄줄이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면 이건 답이 없다. 그나마 북도 출신은 낫다. 구주 출신 왜인들은 왜놈이라고 부르고, 미주 출신은 한인이건 토인이건 가리지 않고 동해야인(東海野人)이라고 대놓고 부르며 비웃고 깔보는 자들이 널려 있으니 말이다. 대남도나 루손 출신? 도배(島輩)라는 새 비칭이 생겼더라.
제대로 배운 사대부들은 그러지는 않는다. 속으로는 어떤 차별의식을 품고 있더라도 그걸 드러내지는 않으니까. 적어도 겉으로는 ‘우리 모두 폐하의 자녀’라고 말하며 상대를 점잖게 대한다. 물론 내 장인 민성윤처럼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안 그런 이들도 많다는 게 문제다. 제대로 못 배워먹은 작자들은 외지 출신들을 대놓고 깔본다. 이것도 대한이 그동안 너무 잘나가서 생기는 부작용 중 하나이리라.
지금이야 본국이 인구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확실한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 이런 문제 역시 적당히 묻고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장차 외지에 있는 속령들이 성장해서 실력을 키우면 이것도 큰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 그전에 이걸 어느 정도는 잡아야 한다. 신분을 바꾸는 최고위층으로의 출세까지야 어렵다고 하자. 하지만 적어도 출신지에 따라 받는 차별이라도 도가 지나치지 않은 정도로 내려야 한다. 북부 5개 주를 도로 개편하는 건 이를 완화하고자 하는 내 첫 시도다.
“장조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우리 땅에 살며 우리 법과 풍속을 지키고 임금에게 충성하면 모두 우리 백성이다. 다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출신지가 다르다고 하여 핍박하고 깔본다면 이는 소인배나 할 짓이다.”
“예, 페하.”
몇 번을 강조해도 불안하다. 지역 차별 때문에 지역감정이 심해져서 장차 제국이 토막 나 갈라지기라도 하면 내 눈에 피눈물이 흐를 것 같으니까. 그런 사태를 피하려면, 다음 과제는 보통교육이 되어야 할 거다. 학교에서 지식과 충효를 가르쳐 장차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도록 교육함과 동시에, 어느 지방에 살든 모두가 똑같은 임금의 백성이라고 인식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보통교육 실시도 쉽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