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519
3부 637화(1519화)
1.
내 명을 받아 태손궁에 다녀온 입직 승선이 내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열심히 주워섬겼다. 지금 이 궁궐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이 소식을 전하는 것임을 자기도 아는 거다.
“태증손께서는 매일 식욕이 왕성하시며 배변하는 양도 많고 그 색과 맛을 태의가 살피니 실로 훌륭하기 짝이 없으며 그 울음소리가 또한 높고 우렁차시니 그 기상이……”
“됐다. 태증손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말인 줄 알겠으니 그만 입을 다물 라.”
오늘은 대보름이다. 오늘도 명절이라 이래저래 챙길 게 많지만, 그래도 내 귀한 증손자를 챙기지 않을 수 없다. 대한에서, 아니 원래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서 증손자를 본 임금은 없었다. 세손을 본 사람은 몇 있어도 세증손을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일단 고려는 제쳐 놓고, 조선에서 27명 임금의 평균수명부터가 50을 넘기지 못했다. 다들 손자 보기도 빠듯할 나이에 죽었는데 무슨 증손자를 본다는 말이가.
그나마 80을 넘겨 가장 장수하고, 손자인 정조에게 자리를 몰려준 영조도 증손자는 보지 못했다. 사도세자보다 먼저 태어난 손위였던 효장세자가 요절했고, 사도세자가 남긴 정도를 비롯한 여러 아들 중 영조가 죽기 전에 대를 이을 아들을 얻은 이도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겨우 일흔둘-겨울이 지났으니 한 살 더 먹어야지-에 불과한데 이미 증손을 얻었다. 원래 역사에서보다 더 발달한 의술의 힘과 천운이 따른 덕분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선(?)이는 사실 내 첫 증손자가 아니다. 프란치스코와 알레한드로, 원이가 모두 아들을 두었고 심왕부 세자 이성균도 아들이 있다. 외손자들까지 가면 열 명을 족히 넘는다. 하상운만 해도 의순공주와의 사이에 아들이 넷이나 된다. 게다가 증손녀도…… 하지만 선이는 그 아이들보다 훨씬 귀한 아이다. 조선 역사에서 그 유례가 없었던 임금의 적장자의 적장자의 적장자다. 이 아이가 무사히 자라서 제위에 오른다면 쥐게 될 정통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만약 선이가 대한 역사상 없었던 폭군이 된다고 해도, 반정 따위는 아무도 시도하지 못할 정도의 정통성이다. 장조 이후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은 적자 승계인데 누가 감히 나서서 깨트리겠느냐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켜야 할 정도라는 게 있다. 아무리 그 자질을 떠받들고 싶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태증손은 아직 세상의 빛을 본 지 백일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두고 젖을 많이 먹고 변을 많이 보며 그 맛과 향이 모두 극상이라고 칭송하다니, 그게 자연스러우냐?”
“소, 송구하옵니다.”
이게 딱 그거 아닌가. 일흔을 넘긴 노장이던 염파가 한 끼 식사에 쌀 한 말로 밥을 지어 먹고 고기 열 근을 반찬으로 먹었다고 칭송하는. 하지만 장성한 사내도 아니고 백일잔치를 겨우 이틀 앞둔 갓난애를 두고 이런 소리를 해 봐야 가소로울 뿐이다. 과장된 보고로 내 비위를 맞추려고 시도한 좌승선을 걷어차다시피-실제로 찬 건 아니고 마음속으로만-해서 내쫓고, 혜련이에게 좀 더 절제되고 차분한 말로 아기의 상태에 관해 들었다.
“태증손 애기씨께서는 실로 건강하기 이를 데 없으시옵니다. 비록 아까 좌승선이 다소간 부풀려서 폐하께 전하긴 하였으나, 아기로서 해야 할 일을 모두 훌륭히 해내고 계신 것은 분명하옵니다.”
덧붙여서 내 명에 따라 아직 영이가 태손빈 침소에 못 드나들게 하고 있다고 확언했다.
“잘하였다. 태손빈도 쉬어야지.”
겨우 13개월 만에 다음 애를 낳은 건 부부간에 의가 좋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그게 몸에 무리가 안 가는 행동이라고는 말하기 힘들 거다. 아들도 낳았으니까. 이제 마음의 부담을 좀 덜고 쉬어가게 해야지. 그게 태손빈에게도 좋다고 본다. 적어도 반년은 띄워야지. 내일모레 백일잔치를 일단 무사히 치르고, 돌까지 무사히 치르고 나면 아이의 장래에 관해서는 한시름 놓는 셈이다. 부디 대한의 명운을 양어깨에 지게 될 이 아이가 그 역할에 걸맞은 능력과 의지를 품고 태어났기를.
2.
선이가 태어나면서 황실은, 그리고 도성은 온통 기쁨과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당연하지 않은가, 보위를 물려받을 적장손이 태어났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당장 바로 그날 저녁, 한양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신문팔이들이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별호요, 별호! 황태증손이 태어나셨소!”
“아주 건강하신 황손이시오!”
별호(別號)는 원래 나올 때가 아닌데 나온 신문을 말한다. 내게 익숙한 현대식으로 하면 호외(號外)라고 하는 게 맞을 텐데, 이쪽 세상에서는 어째 ‘별호’라는 표기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뜻도 큰 차이는 없고, 별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조보는 이런 보도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조보는 확실한 소식을 전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발행하지, 빠른 정보 전달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사건이 있어도 호외를 내지 않았다. 괜히 호외 따위를 찍으면 다음 날 정규 발행에 지장을 주잖는가.
이런 식으로 호외를 내서 속보경쟁을 벌이는 건 죄다 시보들이다. 한 장이라도 더 팔아야 하는 처지다 보니, 어떻게든 남보다 먼저 특종을 건지려는 경쟁이 나름대로 치열하다. 황실 소식은 잘 터지면 대박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철퇴를 맞으므로 수위도 잘 조절해야 한다. 참, 이렇게 길에서 신문을 팔고 다니는 아이들을 가리켜 보동(報童)이라고 한다. 가축을 몰고 다니는 아이는 목동(牧童), 땔감을 마련하러 다니는 아이는 초동(樵童)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붙은 이름이다.
“그 신문쟁이들, 참 빨리도 소식을 얻더구먼.”
탁자 위에 팔꿈치를 짚어서 턱을 괴고 한마디 했더니 법무대신 신윤성이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신윤성은 옛날에 민지원이 한림원 학사로 지내던 시절의 절친한 친구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날, 종로 거리를 호외 뭉치를 든 신문팔이들이 휩쓸고 다닌 건 예무부에서 황태증손의 탄생을 공표한 직후였다. 신문을 조판하고 인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각 시보는 적어도 정식 발표가 나오기 두어 시간 전에는 소식을 입수했다는 이야기다.
“신경 쓸 것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흉사도 아니고 경사다. 나라의 경사를 접한 궁인들이 어쩌다 입을 놀려 주변에 그에 대해 알리는 게 어디 이상한 일이겠느냐. 눈감아줄 만하다.”
대궐 안은 온갖 소문이 횡행하는 곳이다. 각 처소에 속한 궁인들끼리 패가 갈라져 갈등을 벌이기도 하고, 여러 권세가에 줄을 댄 궁인들이 은밀하게 바깥에 말을 흘리기도 한다.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장조 때부터, 무종 때부터 늘 그랬다. 대궐도 바깥과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인데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다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진짜 기밀로 취급해야 할 일을 빼돌린다거나 하면 감찰 상궁 등 궁인들의 기강을 담당하는 인력이 나선다. 그 정도가 심하면 의금부에 넘겨서 대역죄로 처벌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 지경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다만 금위사는 궁중에 끄나풀을 두지 못하게 되어있다. 왜냐고? 그야 금위사는 내가 이 나라를 편하게 다스릴 생각으로 만든 조직이지, 나랑 내 처자식이 그놈들한테 감시받으려고 만든 조직이 아니니까 그렇다. 당연한 거 아닌가.
애초에 금위사는 무소불위의 비밀경찰이 아니라 역모 방지를 목적으로 창설한 조직이다. 그리고 ‘역모’라는 건 기본적으로 대궐 밖에 있는 놈들이 일으키는 거다. 대궐 안에는 나랑 비빈들, 내 자식들밖에 없는데 누가 역모를 일으킨단 말인가. 그래서 금위사 수사망은 언제나 궁궐 성벽 앞에서 멈춘다. 추적하던 죄인이 궁궐 안으로 연결되는 혐의를 잡으면 내게 보고하고 궁궐 내 업무를 담당하는 내직사로 사건을 넘긴다. 그러면 내 직사 내 감찰부가 일을 넘겨받아 수사와 처벌을 맡는다.
이는 내명부의 수장으로 궁궐내에서 기강 유지를 맡는 중전의 역할과 약간 상충하는 부분도 있다. 상희가 중전이던 시절에는 상희 밑에 있는 상궁과 나인들이 질서를 확실하게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중전 자리가 빈 상태인지라 그 체계가 제대로 안 돌아간다. 태후는 관념적으로나 실제로나 웃어른 노릇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홀로 창덕궁에 머물다 보니 경복궁이나 경희궁까지 관리하면서 안주인 노릇을 하지는 못한다. 아흔이 다 되어가는 노인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게 도리도 아니고.
숙빈 홍씨나 정빈 김씨는 의례에서 자리를 채우는 역할이지 중전의 역할을 전부 수행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주도권을 쥐지도 못하고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둘이다 보니 아무래도 내명부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진다. 그렇다 보니까 실질적으로 지금 경희궁의 안주인은 태자비 한씨가 맡고 있는데…..아무래도 이쪽은 또 아직 정식 중전이 아니다 보니 조금 밀리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내 명을 따르는 내직사 감찰부의 위세가 옛날보다 올라갔다.
하지만 이는 중전의 부재라는 변칙적인 상황에서 잠시 나타난 비일상적인 양상일 뿐이다. 내가 죽고 나서 은이가 즉위하든 영이가 즉위하든, 태자비 한씨가 중전으로든 대비로든 그 자리를 확실히 하고 나면 만사가 원래대로 돌아가리라.
“각지에 내린 사면령은 실행이 되었느냐.”
선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며 사면령을 반포한 지 석 달이 지났다. 이제 방방곡곡에 거의 퍼졌을 시점이다. 신윤성이 이 질문에는 자신 있게 답했다.
“예, 폐하. 북변에서 동변을 거쳐 남양에 이르기까지, 폐하의 권위가 미치는 모든 고을에 태증손께서 탄생하신 기념으로 가벼운 죄인은 모두 석방하라는 어명을 전하였습니다. 다들 그 은덕에 감복하며 경사를 축하할 것입니다.”
국가에 이런저런 경조사가 있을 때나 가뭄과 같은 큰 재해가 닥쳤을 때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죄인을 석방하는 건 이 나라의 오랜 관습이다. 조선만 그런 게 아니고 고려도 그랬다. 순수한 축하의 의미도 있고, 하늘에 성의를 보여 자비를 구하는 의미도 있다. 무종 때나 장조 초기에는 내가 전가사변에 미쳐 있었던지라 그런 사면도 거의 없긴 했다. 몇 번이나 후회하는 중이지만, 가벼운 경범죄자들까지 죄다 북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판에 경조사 기념 특사 같은 게 제대로 시행될 리 있는가.
그에 비하면 내 후손들, 특히 황이하고 연이는 이런 특사를 정말 많이 시행했다. 황이가 괜히 묘호를 인종으로 받은 게 아니다. 연이도 수시로 이런 대사령을 내려 민심을 다졌다. 뭐 일일이 묘사할 만한 일도 아니라서 그동안 대충 넘겼지만, 이번 생에는 나도 심심찮게 대사령을 반포해 사면을 시행했다. 이제는 옛날처럼 미개척지에 보낼 노동력을 확보하느라 죄인을 양산할 필요도 없고, 그보다는 민심 안정 쪽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석방할 인원은 얼마나 되는가?”
“정확한 숫자가 집계되지는 않았사오나, 7천여 명 정도 되옵니다.”
대사령을 받고 ‘전국의 옥문을 열어’ 풀려나는 이들은 대부분은 형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들이다. 그중에서도 경범죄자들이 그 대상이 된다. 본래 조선에서는 감옥에다 죄수를 자구어서 벌하는 제도가 없었다. 감옥은 재판이 끝나지 않은 죄수를 가두어두는 유치장 역할이고, 재판이 끝난 죄수는 바로 태ㆍ장ㆍ도ㆍ유ㆍ사의 오형 중 하나를 받는다. 현대처럼 언제 올지 모르는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은 거 없다.
감옥이 그저 죄수를 임시로 가둬두는 곳이지 그 자체가 법적인 처벌 수단이 아니다 보니, 그 안에 있는 죄수들에게는 밥도 안 줬다. 가족들이 옥바라지해주지 않으면 죄수가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 부분은 좀 바뀌었다. 뇌옥에 갇힌 죄인에게 하루에 두 끼씩 꼬박꼬박 소뼈다귀로 끓인 곰국을 주는 걸로 유명한 금위사만큼 좋은 밥을 주지는 않지만, 전옥서에 있는 미결수들도 조밥에 나물국 정도는 준다. 벌도 받기 전에 굶어 죽게 둘 수는 없잖은가.
북방의 사금장이나 탄광에서 노역에 종사하는 도형수들도 마찬가지다. 새 일손을 구하기 힘든 이런 광산에서 계속 일을 시키려면 목숨이 붙어 있을 만큼은 밥을 줘야 한다. 그래서 기운 내라고 근처 강에서 잡은 생선국 정도는 먹여준다. 다만 이것도 도형(徒刑)을 받아 노역장에 간 죄인들에게만 제공된다. 유형(流刑)을 받아 유배지에 간 죄인들은 옛날부터 그랬듯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 이들은 각자 가진 재산과 재주에 따라 알아서 먹고 살게 된다.
일종의 기결수라 할 수 있는 이들 유형수(流刑囚)나 도형수(徒刑囚) 중에 일부 잡범들도 대사령이 반포되면 사면 받아서 풀려날 수 있다. 다만 풀려난다고 해서 모두 본국에 귀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지 인구를 늘리기 위해 정착이 강제되는 경우도 많다.
“빙주로 가는 뱃길은 아직 풀리지 않았을 테니, 그쪽에는 아직 사면령이 닿지 않았겠지.”
이제는 거문도 따위는 유배지 목록에 얼굴도 못 내민다. 유배지로 유귀국(사할린) 정도만 걸려도 본국에서 가깝다고 부러움을 살 정도니까. 이제는 알루토(알류샨)나 귀궤탁(코디악) 같은 섬도 유비지로 쓰고 있다. 여기 비하면 거문도 정도야 뭐…… 유배지로 사용한 덕분에 이런 북방 섬들에 우리말과 글, 풍습이 조금씩이라도 더 빠르게 전해지고 있다. 일부러 교사를 보내 가르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전파되니, 그 어찌 좋지 않은가.
“태증손이 태어나서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기쁜 일이 있었으니, 마땅히 더 많은 죄인을 용서함이 옳다. 그러니 이번에도 책을 잘 쓴 자가 있으면 선별하여 사면하도록 하라.”
이 이야기는 학식 있는 사대부가 유배당했을 때는 원주민의 풍속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한 풍물지(風物誌)를 집필하기도 해서다. 내가 즉위 초기에 이런 책을 잘 쓴 놈 하나를 골라서 사면해줬더니, 그 뒤로 이런 책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지더라.
나머지 사안을 다 논의할 뒤 대전으로 돌아오니 온몸이 노곤하다. 이틀 뒤에 치를 선이의 백일잔치를 생각하니 지친 몸인데도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내 자리를 물려줄 아이라고 생각하니 한층 더 관심이 쏠리는 듯하다.
3.
경희궁이 좋은 점은 모든 잔치가 기본적으로 실내에서 열린다는 거다. 잔치를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열면 대궐 마당에서 장막 치고 바닥 깔고 상을 차려야 할 때가 많은데, 여기는 기본적으로 탁자와 의자를 쓴다. 여름에는 이게 좀 답답해서 일부러 경복궁에서 가서 연회를 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직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라면 경희궁이 확실히 유리하다.
“많이들 들라. 그게 다 태증손을 위한 마음이라.”
장악원 악공들이 연주하는 악곡을 배경으로 시종들이 열심히 음식을 날랐다. 수라간에서 정성껏 준비한 갖가지 요리들이 식탁을 채웠다. 참석한 하객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본래 왕실의 백일잔치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몇몇 정승과 승지, 산실청에서 일한 관원 정도만 불러 수고했다는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는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들도,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라는 점에서 상례를 좀 벗어난 큰 규모로 잔치를 열었다. 관례에 따라 부르는 신하들 외에 가까운 종친들과 내 직계 자손들도 부르고 음식도 거하게 준비했다.
“정말 감격스럽사옵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께서 태증손을 보시다니요……”
은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악어와 공작새를 넣은 용봉탕도 큰 효과가 없어서 겨우내 빠진 살이 회복되지도 않고, 이제는 거의 누워지내는 형편이지만 이런 자리에 안 나올 수는 없다면서 나와 앉아있었다. 내게 선이가 첫 증손자가 아니듯, 은이에게도 첫 손자가 아니다. 원이가 기유년(1729)에 낳은 맏아들 전이가 이미 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짚었듯, 사실 원이와 전이는 제위를 물려받을 수는 없는 처지다 보니 영이가 낳은 적손 쪽으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정말 다 이루었습니다. 소자는 정말 다 이루었습니다. 이제 남은 할일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서 몸을 회복하고 내 뒤를 이어 성군이 되어야 할 게 아니냐.”
내가 달래는 말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은이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쓸쓸하고 허탈한 웃음이었다.
“아바마마, 소자는 지금 보위에 앉더라도 국사를 돌볼 수 없사옵니다. 그저 태손의 장래가 걱정되어 이 자리를 지켰을 뿐인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지니 실로 마음이 편해집니다.”
은이가 하는 말이 불안했지만, 그래도 좋은 날인데 이런 걸로 말다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뭐라고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잔치에 참석한 다른 신하들, 조카들, 자식들에게 술잔을 받다 보니 은이의 푸념도 잠시 잊었다. 잔치를 즐겁게 마치고 이제는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전으로 돌아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려는 참인데 혜련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슨 일ㄹ이기에 그리 당황한 태도를 보이느냐고 하자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폐, 폐하! 태, 태자께서, 피, 피를 한 되나 토하셨다고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