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520
3부 638화(1520화)
4.
문자 그대로 손발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내 몸을 혜련이가 급히 부축했다.
“폐하! 정신을 차리시옵소서!”
다급한 소리를 듣고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밖에 있던 내관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거들었다. 내관들이 나를 침상에 눕히려 하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놓….놓아라. 지금 당장 도…..동궁에 가야겠다.”
내가 알기로 피를 토 하는 환자는 크게 두 가지다. 위궤양이나 위암에 걸려 위벽에 구멍이 뚫렸건, 폐결핵으로 폐나 기관지가 헐어서-이쪽은 엄밀히 말하면 토혈(吐血)이 아니라 각혈(?血)이다-피가 나오는 경우다. 하지만 은이는 어느 쪽도 아니지 않은가. 은이는 술 때문에 간이 상한 거라고 알고 있다. 간이 나빠졌다면 내장 쪽에 문제가 생겨 내장 기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옳지, 피를 토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희가 있었다면 정확하게 진단해 줄 수 있었을까?
머리가 어지럽다. 바로 동궁에, 은이 곁에 가야겠다. 어서 그 아이의 손이라도 잡고 품에 한 번이라도 안아야겠다.
“내 신발을 가져오너라! 지금 이대로 동궁에 가겠다.”
경희궁이 주로 입식으로 생활하는 공간이라지만, 겨울 침실은 온돌을 깔아놓은 1층이다. 당연히 방문 밖에다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온다. 하지만 대전내관들은 바로 움직이는 대신에 나를 말려서 주저앉히려는 시도부터 했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날이 춥사옵니다. 일단 몸을 추스르시고…..”
“이놈들이! 내가 동궁에 가야겠다지 않느냐!”
내가 아직 아주 늙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작심하고 힘을 주어 뿌리치자 오른팔을 붙들고 있던 내관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내가 못 가게 앞을 막는 놈들은 그게 누구건 모조리 차 버리고 뛰어나갈 참이었는데 상선 조원신이 앞을 막았다.
“폐하, 폐하께서는 대한 천하를 다스리시는 지존이시니 어떤 상화에서도 체통을 지키셔야 하옵니다. 당장 동궁으로 달려가고 싶으신 마음은 천만번 이해하오나, 부디 잠시 틈을 내어 의관이라도 차리시고 가소서.”
조원신이 간곡하게 말리는 말을 들으니 그제야 내가 지금 잠옷 차림이라는 게 떠올랐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느라고 시간을 허비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내 아들이 지금 입으로 피를 쏟고 있다는데 옷 따위가 뭐가 중요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왕은 무치라 하였다! 벌거벗은 것도 아니거늘, 지금 의관이나 따지고 있게 생겼느냐! 어서 신을 가져오너라!”
군왕무치(君王無恥)는 본래 이럴 때 사용할 말은 아니다. 군주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사소한 시시비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런 해석이 딱히 의미가 없다. 당장 은이에게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이 있을 뿐이다.
“어서 비켜라! 네놈들이 신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내 버선발로 나갈 것이니라!”
어물어물하던 내관들이 뒤로 물러났고, 내관 하나가 얼른 신을 가져왔다. 가죽신에 급히 발을 꿴 다음 곧바로 은이가 있는 동궁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분명 걷고 있었지만 어느새 반쯤 뛰듯이 발걸음이 빨라졌다.
5.
전에도 언급했지만, 동궁은 말로는 ‘궁’이지만 실상은 경희궁 내에 있는 2층짜리 별채다. 동궁 주변은 정원과 분수로 둘러싸여 있으나, 겨울이라 분수는 가동하지 않고 있다.
“폐하!”
내가 급히 걸어 도착하자 동궁 주변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동궁 소속 궁인들이 나를 보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안으로 들어가 태의를 찾았다.
“태의는 어디 있느냐! 지금 일이 어찌 되었느냐!”
이용원이라고 했던가, 태의 한 사람이 급히 뛰어나와서 나를 맞았다. 이용원의 긴 앞치마 자락 한쪽이 피에 젖어 검붉게 변한 모습을 보자 머리가 또 띵하고 울렸다.
“폐하, 고정하소서. 태자께서는 고비를 넘기셨나이다!”
“고비를…..넘겼다고?’
‘고비를 넘겼다’라는 말에 날아갈뻔하던 이성이 간신히 붙들렸다. 고함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자초지종을 묻자 이용원이 숨 가쁘게 대답했다.
“태자께서는 석식을 드신 후 주무실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셨습니다. 신이 왔을 때도 아직 토혈이 멈추지 않았사온데, 토하신 피가 엉기는 모양을 보니 폐가 아니라 위에서 흐른 피가 분명하였사옵니다.”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설명을 제댜로 이해할 수가 없는데, 폐에서 나온 피와 위에서 나온 피는 색깔이나 엉키는 모양에서 차이가 꽤 큰 모양이다. 출혈하는 곳이 동맥과 정맥-장조시기에 의서를 편찬하고 번역 할 때 나와 상희가 개입한 덕분에, 이런 용어들은 현대 의학과 같다-중 어느 쪽인지, 위액이 섞였는지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복잡한 설명보다는 응급환자 옆에서 상황을 살펴야 하는 태의가 지금 밖에 나와 있다는 사실이 약간이나마 안도감을 주었다. 물론 다른 태의가 안에 있기는 하겠지만, 일단 이용원 하나쯤은 자리를 비워도 될 상황이라 나를 맞이하러 나온 거겠지.
“어쨌든, 지금은 토혈이 그쳤다고?”
설명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아 마지막으로 들린 맨 끝 문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러자 이용원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고비는 일단 넘겼사옵니다.”
고비를 넘겼다. 지금 당장 죽지는 않는다. 그 말을 듣자 긴장이 풀리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온 혜련이와 조원신이 옆에서 달라붙어 부축한 덕분에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 상태로 더듬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태자가 피를 한 되나 토했다던데…..”
“아마 흥분한 궁인들이 착각하여 말을 잘못 옮겼을 것입니다. 신이 동궁에 도착하여 흘린 피의 양을 가늠하니, 세 홉 정도였습니다.”
하긴 그렇지. 한 되(1.8리터)나 피를 쏟으면 사람이 그 자리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하지, 고비를 넘겼느니 어쩌니 운운할 수가 없다. 세 홉이면 540ml인데, 그것도 꽤 많은 양이지만 그 자리에서 죽을 정도는 아니다. 정말 한숨 돌렸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덜덜 떨리는 고함이 들려왔다.
“무엇이라 하였느냐, 태의? 아버님께서 고비를 넘기셨다고 했느냐?”
나보다 조금 늦게 영이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태손빈도 종잇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태손궁에서 동궁까지 걸어서 5분인데, 이 종도는 뛸 수 있을 만큼 몸이 회복된 모양이다.
“예, 고비는 넘으셨습니다. 지금은 토혈도 멈추었고, 의식도 찾으셨습니다.”
태의 이용원이 정중하게 은이의 용태를 설명했다. 영이가 안도하면서 내 눈치를 살피기에 고개를 끄덕여 어서 들어가 보라고 허락했다.
“먼저 들어가거라. 네 아미와 함께 아비를 잘 보살피도록 하여라.”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했다. 은이 녀석도 지금 눈앞에 떠오르는 건 나보다 영이를 비롯한 자식들이리라.
“예, 할바마마.”
내 허락을 받은 영이는 얼른 태손빈과 함께 은이의 침실로 갔다. 동궁전 궁인들이 앞서서 둘을 인도했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태의는 들으라. 내,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 태자의 방에서 나올 때까지 자리를 뜨지 말고 기다리도록 하라.”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은이가 당장 죽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자 안도감이 밀어닥치며 마음이 차분해졌다. 하지만 곧 불안감이 뒤이어 밀려들었다. 이 토혈, 이번 한 번으로 끝일까?
그럴 리가 없다. 폐건 위건, 피를 토할 정도로 장기가 상했다면 이미 끝난 거다. 지금이야 운 좋게 상처가 잠시 붙었을지 몰라도, 어쩌면 당장 내일 아침 피가 또 터질지도 모른다. 이 시대 의술 수준으로는 아직 그런 환자를 살릴 방법이 없다. 수술을 통해 치료할 수도 없고 약고 없다. 위아래로 피를 쏟으며-위에서 그 정도로 대출혈이 일어나면 환자는 혈변(血便)을 보게 된다-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태의에게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도 영이를 따라서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고비를 넘기고 숨을 돌린 은이, 상희와 나의 장남과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6.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이젠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약을 먹고 정양하면 다 나을 것이니라. 번잡한 대궐 대신에 한적하고 조용한 별궁에 머무르면 어떻겠느냐? 옳지, 멀지 않으면서도 호젓한 홍제궁이 어떠냐.”
홍제궁은 본래 탕춘대 별궁이었다가 20년 전에 홍제궁으로 개칭했다. 도성 인근에서 가장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인 홍제원이 가까운 곳에 있기는 하나, 중간에 산등성이 하나가 궁과 홍제원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별로 방해가 될 일은 없다.
“그리고 몸이 나으면, 이 아비와 함께 미주에 가자꾸나. 성모곡에 있는 별궁에서 바라보던 그 넓은 포도밭이, 대구곡에서 보던 그 엄청난 눈밭이 생각나지 않느냐? 너만 건강해진다면 옛날 우리가 함께 말을 달리고 물장구를 치던 그곳에 다시 가는 거다.”
불가능한 소망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차마 내 아들에게 ‘네 병은 낫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 뒤에 닥칠 게 똑같은 고통이라도, 희망에 있는 상태에서 견디게 해주고 싶었다.
“아바마마, 이 대한의 임금께서 어지 허언부터 하십니까. 평생을 일에 묻혀 바쁘게 사시던 분이 갑자기 나랏일을 놓고 미주에 가신다니요. 그 말을 소자가 믿으리라 생각하시옵니까?”
은이가 말하다 말고 누운 채로 기침을 했다. 아직 입안에 피가 남아 있었는지, 입을 가린 소매에 곧바로 붉은 점이 숱하게 찍혔다. 피를 보는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 기색을 눈치 챘는지 은이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나마 조금 마음이 풀렸는가 싶어 얼른 나도 입을 열어 위로 했다.
“나랏일은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아들이 이토록 든든하게 자라지 않았느냐? 게다가 대를 이을 아들도 얻었으니, 훌륭한 임금의 재목이다. 앉혀두고 가면 잘 해낼 거다.”
난데없이 ‘양위예고’를 받은 영이가 두 눈을 함지박만 하게 떴다. 그러더니 지금 대화가 나온 상황을 파악하고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아니옵니다! 할바마마께서 이토록 정정하시고 아버님께서도 곧 쾌차하실 것인데 소손이 어찌 보위를 받겠습니까. 그런 과분한 말씀은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태손빈도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보탰다. 목소리에는 긴장이 서려 있기는 했지만 떨지는 않았다.
“태손의 말이 옳습니다. 폐하, 부디 과분하신 말씀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 대한의 땅을 돌보시는 임금은 폐하이시며 그 자리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입니다.”
태손빈 유씨는 역시 현명하고 침착하다. 지금도 영이보다 차분하지 않은가. 손자며느리는 확실히 잘 고른 듯하다. 여기에 은이까지 가세했다.
“아바마마, 태손이 놀랐잖사옵니까. 양위를 그리 함부로 입에 담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 양위라는 말 한마디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을 수 있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네가 조정 일로 내게 훈계를 하는 게냐?”
일부러 화가 난 척 짐짓 눈을 부라려 보았다. 하지만 은이는 까딱도 하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옛날 어릴 때, ‘아빠’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매달리던 그때처럼.
“예, 아바마마. 소자가 과거 아바마마께, 그리고 어마마마께 들은 훈계를 따르지 않은 게 아쉬워서라도 아바마마께 양위를 함부로 언급하지 마시라고 훈계를 드려야겠습니다.”
“네가 훈계를 안 듣기는 뭘 안 들었다고 그러느냐. 너는 늘 훌륭한 아들이었느니라.”
진심이 담긴 대답이었지만 은이는 쓸쓸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회한이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아바마마께서도, 그리고 생전에 어마마마께서도 몇 번이나 제게 술을 줄이라 권하셨건만 제때 그 분부를 따르지 않은 벌을 지금 받고 있사옵니다. 전부 제 탓이옵니다. 피를 토하는 지경까지 왔으니 어찌 낫기를 바라겠습니까.”
“태자야…..”
“순전히 술 때문에 생긴 제 속병이 도진 것이니, 한적한 궁으로 옮긴들 몸이 낫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미주에는 어떻게 가겠사옵니까. 배 위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고 횡사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요.”
차마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지 못했다. 소매 위에 선명하게 찍힌 핏방울 자국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내 손을 내밀어서 은이의 오른손을 꽉 부여잡았을 뿐이었다. 왼손은 태자비 한씨가 꼭 잡고 놓지 않고 있다. 태자비가 은이와 혼인한 지도 어느새 30년, 정말 긴 세월을 함께했다. 은이가 병으로 아파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도 태자비니 저토록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도 당연하다.
숙녀 이씨, 안나도 이 자리에 빠지면 안 될 사람이지만 안나는 하필이면 오늘 자기 아들 원이네 집에 다니러 갔다. 급히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고는 하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바마마, 아까 피를 좀 흘려서인지 졸음이 와서 참기 힘이 듭니다. 송구하옵니다만 이만 불을 끄고 자고 싶으니, 모두 물러가라 해주시지 않겠사옵니까.”
“그래라. 어서 좀 자고 원기를 회복하도록 하여라.”
일단 당장은 고비를 넘긴 듯하다는 태의의 말도 있고 해서 오늘은 나도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태의에게 은이의 상태에 관해 자세히 듣기로 하기도 했으니까. 태자비 한 사람만 남겨두고 일단은 모두 자리를 뜨기로 했다. 일어나면서 은이에게 굳게 다짐을 받았다.
“넌 꼭 일어날 것이니라. 내가 때가 되어서 네 어미를 만나러 가기도 전에 네가 먼저 네 어미를 만나는, 그런 불효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식을 잃는 고통을 참척지통(慘慽之痛)이라고 한다. 내가 자식을 잃는 게 처음도 아니긴 하지만, 부디 은이가 내게 그 고통을 안겨주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