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585
3부 703화(1585화)
7.
꼬불꼬불한 가발을 쓴 사내들이 둘러앉아 조용히 보고를 들었다. 현재 신성로마제국 내의 각 세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핵심에 있는 황제 카를 6세의 정확한 의중은 어디 있는지에 관한 보고였다. 황제가 자기 딸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 하고 있으며 무척 서두르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런 국사조칙 같은 것도 만든 게 아니겠는가.
일단 수상인 월폴 이하 영국 정부 각료들은 국사조칙 내용에 이의가 없었다. 영국에서는 잉글랜드건 스코틀랜드건 남자 계승자가 없으면 여자가 왕관을 물려받는 게 당연했으니까 말이다. 윌리엄 정복왕 이후로 군주로 재임한 여성의 수만 해도 7명이나 된다. 그러므로 국사조칙을 승인하도록 국왕 조지 2세에게 건의한다는 결정은 곧바로 내려졌다. 문제가 된 부분은 다른 나라들이 보일 반응과 그에 따른 대응이었다.
“황제가 선포한 국사조칙에 대한 바이에른과 작센의 반응은 어떻소?”
수상인 월폴의 질문을 받은 북부 국무장관 –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폴란드, 러시아, 신성로마제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각료 – 해링턴 남작은 당연하다는 듯 보고했다.
“당연히 격렬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바이에른에서는 케케묵은 옛날 문서 한 장을 어디서 들고 와서는 ‘이게 자기들의 계승권을 강화하는 증거’라고 내세웠다고 합니다.”
바이에른인들의 문서고에서 꺼내온 문서에 따르면, 과거 바이에른의 알브레히트 5세는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안나와 결혼하면서 ‘만약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이 단절되면 비탤스바흐 가문이 대를 잇는다’라는 계약을 맺었다. 1546년, 190년 전 일이다.
이 계약에는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두 대국을 장악한 왕실이었고 양쪽 본가는 혼인으로 단단하게 얽혀 있었으므로 계승권자가 하나도 없는 사태 따위는 일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스페인 쪽 합스부르크는 이미 망했고 오스트리아 본가에도 마지막 한 사람만 남았다. 그러니까 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케케묵은 고문서가 튀어나온 거다.
게다가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자이므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할 수 없지만 바이에른 선제후는 직접 출마하여 황제가 될 수 있다. 이것도 나름대로 중요한 요소였다.
“어차피 황제가 주장하는 계승권도 12세기에 작성한 낡은 문서를 바탕으로 하잖소. 서로 똑같은 수준이지.”
6백여 년 전인 1156년,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프라드리히 1세 – 일명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붉은 수염) – 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보상으로 오스트리아 공작령을 다스리던 바벤베르크 가문에 특권을 하나 내렸다. 남자 후손이 없어 대가 끊어져도 영지를 반납하지 않고 임의로 계승자를 정해도 괜찮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바벤베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가 1243년에 헝가리와 싸우다 전사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 공작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 말았다. 1278년에 가서야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첫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루돌프 1세가 오스트리아를 합스부르크 령으로 만들었다. 하여간 황제 측에서는 이 1156년의 특권 부여를 근거로 해서 오스트리아에서는 계승자가 없으면 여자가 가문을 이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이에른이 가지고 온 1546년에 작성한 문서는 그에 비하면 훨씬 양반인 셈이다.
“지금 분위기를 보면 황제가 죽자마자 바이에른과 작센이 군대를 일으켜서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고, 합스부르크 영토를 분할하자고 합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 자리는 바이에른이 앉고, 작센은 영토 일부로 만족하려는 모양입니다.”
작센 선제후의 성향이야 잘 알고 있다. 싸워 얻을 전리품이 그토록 크지만 않았어도 절대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다. 그러니 연맹의 주도권을 바이에른이 쥐는 것도 당연하다.
“신성로마제국 내부 상황에 대한 분석은 그만하면 됐소. 중요한 건 주변국들의 동향이오. 해링턴 남작, 뉴캐슬 공작. 두 분 모두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을 부탁드리겠소.”
뉴캐슬 공작은 남부 국무장관이다. 그는 아일랜드, 채널 제도, 아메리카 식민지 관리업무 외에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터키, 아시아와의 외교를 맡고 있다. 두 국무장관은 프랑스, 프로이센, 폴란드, 러시아 등의 향방에 대해 예상한 상황을 번갈아 알렸다. 다음 차례로 뉴캐슬 공작이 스페인에 관한 문서를 펼쳤다.
“스페인 역시 우리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바이에른을 편 들어서 참전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탈리아 방면에서는 어느 정도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페인 왕가가 바이에른에 대한 상속권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본가가 세력을 확장하려 기회를 잡았는데 방관할 것 같지는 않다. 돈이든 군대든 보내서 지원할 게 분명하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지 정하는 것만 남았구려.”
이미 스페인과는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이다. ‘젠킨스의 귀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갈등을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월폴은 이제껏 그랬듯이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다. 여론은 전쟁을 요구했고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도 끼어드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오스트리아의 처지가 너무 안 좋습니다.”
뉴캐슬 공작이 지적했듯이, 현재까지 조사한 바를 보면 바이에른ㆍ작센 연맹에는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세 나라가 확실하게 붙는다. 이에 반해 오스트리아에는 확실한 동맹이 없다. 작센과 바이에른 둘 만이라면 오스트리아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지만, 프랑스가 문제다.
오스트리아 편에 설 만한 주요 국가로 폴란드와 프로이센이 있긴 한데, 가담 여부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전통의 우방인 러시아도 귀추가 불확실하다. 요즘 들어 러시아가 프랑스와 가까워졌다는 게 문제다. 사실상 혼인동맹까지 맺은 셈 아닌가.
“그 결과가 프랑스 출신 폴란드 국왕 아닙니까. 루드비크 2세가 아무리 방탕하고 국사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설마 본국에 맞서 싸우려고 들지는 않을 겁니다. 애초에 프랑스 왕이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려고 동생을 폴란드에 보냈으니…..”
고로 러시아도 사위인 폴란드 국왕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러 가려면 폴란드를 통과해야 하는데, 혹시 폴란드 측에서 길을 막는다면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에 들어갈 수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폴란드와 싸울 수도 없는 일이다. 국왕인 루드비크 2세야 프랑스와의 동맹을 깬 셈 치고 무시한다고 해도 왕비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공주가 아닌가.
“다만 작센군이 승리하면 폴란드 왕위를 되찾으려고 들 수도 있습니다. 그 점은 폴란드와 러시아 양국도 고려하고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시점에서 굳이 폴란드 왕위에 욕심을 내서 적을 늘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작센 선제후가 상식적으로 움직이리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어니, 어쩌면 아무 일도 안 해서 그런 결정도 안 내릴 수도 있겠다.
“그럼 우리는….. 역시 황제를 지지해야겠군요. 말뿐인 지지가 아니라 자금과 물자, 필요하면 병력까지 동원해서 말입니다.”
수상인 월폴이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면서 확인했다.
“다른 분들은 어떤 생각이십니까?”
“수상께서 말씀하신 바에 동의합니다.”
“같은 의견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프랑스가 바이에른을 지원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에 저들이 성공한다면 프랑스의 위세가 하늘로 치솟을 게 뻔하다. 그런 꼴을 볼 수는 없다. 그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좋습니다. 그러면 네덜란드를 통해서 오스트리아에 자금과 물자를 보낼 준비를 하지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독일 내가 아닌 다른 방면에서 전투할 준비도.”
프랑스와 싸운다면 북아메리카나 아시아에서도 싸우게 될 수도 있다. 다만 그 경우 월폴 자신이 그동안 해군에 한 일이 발목을 잡으리라고 해군대신 찰스 웨이거 경이 경고했다.
“그동안 해군 군비를 대폭 줄였는데, 이는 해군이 곧바로 싸움에 나설 수 있는 준비태세 약화를 불러왔습니다. 당장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서 재촉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그동안 프랑스는 해군 군비를 몇 배나 늘렸는데 우리는 줄이기만 했다며 격하게 성토하는 웨이거를 보면서 월폴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분개해봐야 뭐를 한단 말인가. 내가 일부러 해군을 약화시키려고 그런 것도 아닌데.
8.
델리 방면에서는 아직도 피난민이 내려왔다. 델리를 점령했던 나디르 샤는 이미 5월 초에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싣고 델리를 떠나 아프간으로 돌아갔지만, 델리를 떠나려는 피난민의 행렬은 아직도 끊이지 않았다.
“나디르 샤가 돌아올까 봐 저러는 걸까요?”
“모르지. 이미 털어먹을 건 다 털어먹었는데 또 올까 싶지만.”
아그라에 주둔한 영국군, 그리고 용병으로 고용한 시크교도 병사들의 눈은 하나같이 멀리 북쪽을 향했다. 나디르 샤가 철저하게 짓밟은 델리의 폐허가 그쪽에 있었다. 델리 거리에는 아직도 수만 구나되는 시체가 흩어져 있다. 2년 전에 동인도회사에 속한 영국군과 시크교도 동맹군을 이끌고 결전을 벌여 무굴제국 정부군을 대파한 코밤 자작은 막대한 전리품을 거뒀다. 델리 학살 건에 대한 배상금으로만 1천만 루피 – 대한통보로 3백만 냥 – 를 받아냈고, 영국군이 마라타 동맹으로부터 탈환한 모든 영토의 징세권을 주기로 했다.
물론 노련한 코밤 자작은 이 약속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갈수록 그 혼란이 심해지는 무굴제국 측에서 고의건 아니건 약속을 부도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무함마드 샤가 그 약속을 ‘잊지’ 않도록 코밤 자작이 내린 조치가 아그라 점령이었다.
델리에서 150마일(240km)가량 남쪽에 있는 아그라는 과거 몇 차례나 델리 대신 수도가 되었던 신도시다. 무굴의 3대 황제였던 악바르 대제의 영묘(靈廟)와 5대 황제인 샤 자한의 왕비 뭄타즈 마할의 영묘, 즉 타지마할이 있는 곳이 아그라다.
코밤 자작은 무굴제국의 동맹군으로서 – 형식상으로는 분명히 동맹군이었다 – 남쪽에서 올라오는 적으로부터 델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아그라 성채를 점거했다. 저항은 없었다.
“무굴 황제와 정부를 위압하려면 우리 관리와 군대를 가까이에 주재 시켜야 한다. 하지만 지난번 학살 사건을 생각하면 델리 내에 주둔하는 건 위험하다. 그런 면에서 아그라는 아주 좋은 거점이다.”
무굴 측에서 혹시 모슨 음모를 꾸미더라도 델리에서 여기까지 움직이는 데 필요한 시간이 있으므로 대비할 여유는 충분하다. 적군이 델리를 떠나서 여기까지 150마일을 이동하려면 적어도 엿새는 걸릴 테니 말이다. 도착해도 문제는 남아있다. 아그라는 악바르 대제가 건설한 성채로 방어되고 있을뿐더러, 도시 곳곳에 들어선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화려한 건축물들은 그 자체가 인질이다. 설마 무굴인들이 악바르 대제의 영묘가 파괴될 위험을 각오하고 공성전을 벌이겠는가.
이런 중요한 도시니만큼 당연히 무굴제국 측에서도 영국 측의 무단 행동을 항의했다. 허나 코밤 자작은 철저히 이를 무시했다. 황제가 보낸 항의 사적도 만나지 않고 돌려보낸 자작은 부하들 앞에서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우리가 여기 못 들어오게 하고 싶었으면 싸워서 이겼어야지. 아니면 최선을 다해서 수성(守城)에 나설 군사들을 배치하거나.”
그렇게 아그라를 장악한 영국군은 대략 1년 이상을 평화를 누리며 지루하게 보냈다. 남쪽 방면, 마라타 동맹과의 싸움도 지지부진했다. 동인도회사 상층부가 적당히 싸우고 진군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무굴제국이야 마라타 동맹을 하루빨리 멸망시키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동인도회사로서는 돈만 벌 수 있다면 마라타 측이 그냥 존속해도 상관없었다. 진격을 서둘러 봐야 전비만 더 많이 쓰게 되고 힘들여 통제해야 할 땅이 넓어질 뿐이잖은가. 그래서 천천히 세력을 넓히며 기반을 다지는데 나디르 샤가 쳐들어왔다. 자기에게 반항한 아프간인들이 무굴제국에 망명하도록 받아줬고, 이를 항의하려고 보낸 페르시아 측 사절을 인도인들이 죽인 일을 문제 삼았다.
그동안 잔뜩 쌓인 원한 대신에 총알받이로 내세우려는 앙갚음이었는지, 지푸라기 하나도 아쉬웠는지 모르지만 무함마드 샤는 아그라에 있는 영국군에게도 출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수비대 지휘관 브래독 대령은 간단한 한 마디로 그 요청을 거절했다.
“우리는 마라타 동맹으로부터 귀국을 지키러 찾아온 거지, 페르시아군으로부터 당신들을 구하려고 온 게 아니오. 런던에 있는 본사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출동할 수 없소.”
거절하는 답을 받은 무함마드 샤는 실컷 투덜거리며 자기 병사들만 소집해서 나디르 샤를 저지하러 북쪽으로 올라갔다. 페르시아군은 5만 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자기가 거느린 20만 대군이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말이다. 그리고 아주 박살이 났다.
영국군과 싸우느라고 정예부대를 상실하지만 않았으면 상황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급하게 모은 오합지졸들은 역전의 맹장인 나디르 샤와 그 휘하 정예병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굴군은 아주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짓밟혔다. 나디르 샤는 포로로 잡은 무함마드 샤를 끌고 델리에 입성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온화한 태도를 보이면서 배상금도 그다지 많이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델리 시민들은 북쪽에서 온 ‘야만인’들을 혐오했고, 사방에서 무기를 들고 아프간 병사들을 공격했다.
이런 습격이 한두 건 발생한 것도 아니고, 사상자가 천 단위까지 발생하자 마침내 나디르 샤의 분노가 폭발했다. 3월 22일, 페르시아군은 델리 시내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기세로 대학살을 벌였다. 공터에 쌓인 시체가 산을 이루고 거리를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뤘다. 사람의 목숨이 먼지처럼 날리는데 재물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나디르 샤는 아직 수천만 루피가 있는 무굴 조정의 재무부 금고를 통째로 빼앗았다. 샤 자한이 만들고 무굴 황제들이 그 위에서 제국을 통치하던 ‘공작 옥좌’도 빼앗겼다. 황금과 보석을 얼마나 아낌없이 써서 꾸몄는지, 타지마할 건설에 들어간 비용의 두 배가 들어갔다고 하는 보물이다.
무함마드 샤는 백성 한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 나디르 샤 앞에 엎드려서 울면서 빌었고, 덕분에 겨우 학살이 멈췄다. 하지만 이미 거리에는 겹겹이 시체가 쌓여 있었고, 5월이 되어 나디르 샤가 마침내 떠날 대는 짐을 잔뜩 실은 낙타와 코끼리들이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뒤에는 폐허, 철저히 약탈당하고 파괴당하고 학살당한 폐허가 남아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피난민이 계속 내려오다니, 신기한 노릇이군. 지금쯤이면 수도를 재건하러 나선 사람들로 바쁜 게 정상일 텐데.”
“나디르 샤는 돌아갔다고 해도 아직 돌아다니는 잔당들이 많지 않습니까, 각하.”
소문에 따르면 나디르 샤는 내친김에 인도 전역을 정복하는 것도 고려했다고 했다. 다만 델리에서 더 남진하면 아그라에 있는 영국군과 싸우게 될 테고, 그러면 영국을 적으로 삼게 된다는 생각에 취소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철수한 건 나디르 샤의 본대뿐이다. 본대의 퇴로를 엄호하거나 무굴제국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맡은 몇몇 부대는 아직도 북인도 일대를 들쑤시고 있다.
아그라 성채 위에 선 영국군 장교들은 북쪽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이어질 상황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적이 아그라로 밀려오지만 않는다면 이들로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