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591
3부 709화(1591화)
19.
광남국주 응우옌 푹 코앗(院福?)은 이제 만 25세가 되었다. 13년 동안 재위했던 부왕 응우옌 푹 쭈(院福澍)가 사망하여 그 자리를 물려받은 지 이제 1년이 좀 넘었다. 왕세자 시절에는 효정후(曉正侯)에 봉해졌고,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하는가 하면 찬랍군의 침공까지 막아낸 바 있다. 그랬던 덕분에 장차 보위에 오르면 대단한 무재를 발휘하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응우옌 푹 코앗이 광남국주 자리에 오르면 북하나 찬랍을 공격하는 대대적인 군사원정을 시작하리라는 예상도 많았다. 본인도 뜻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직 실행하진 않았다. 즉위한 지 이제 겨우 1년, 그런 큰 계획을 준비해서 실행에 옮기기에는 좀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더라도 이러저런 계획을 세우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기간이다. 계획을 세우자면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므로, 응우옌 푹 코앗은 많은 첩자를 내보내 열심히 정보를 모았다.
“북하국에서는 요즘 군주의 폭정으로 혼란이 심하다던데…..어떤가? 공격할 만하겠는가?”
“아직은 어렵습니다, 전하.”
그동안 북하국에서도 왕이 바뀌었다. 서나라 내란 당시에 국경을 넘어 침입한 운남군을 격파함으로써 수십 년간 쌓인 그동안의 원한을 풀고, 서나라건 송나라건 외부인들이 자신을 함부로 보지 못하게 했던 안왕 찐끄엉이 싸움 직후에 사망한 거다. 만약에 찐끄엉이 조금만 일찍 죽었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국상 때문에 혼란에 빠진 북하국 내에서 후계 문제로 운남군과 연계하려는 세력이 나오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서나라 내전의 향방에는 아무 차이가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 북하국 놈들은 본래 은혜 따위 모르는 놈들이거든.”
주가 운남군의 힘을 빌려 정권을 잡았든, 서나라 관군과 원군으로 온 외병(外兵)들에게 운남왕이 무너질 때 북하국이 모른 척할 건 분명했다. 운남왕을 도와 원군을 보내준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다. 그놈들은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말이다. 물론 응우옌 푹 코앗 자신도 같은 상황이면 그렇게 했을 거였다. 이미 져서 망한 놈들을 돕겠다고 자기도 같이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바보짓을 왜 한단 말인가. 하지만 여기서 굳이 ‘나도 그랬으리라’라고 말하는 바보는 없는 법이다.
“북하국주가 지난 10년 동안 저지른 짓만 나열해보아도 그놈은 배은망덕한 난신적자가 분명하다. 우리 광남국이 아직 그 역적을 토벌할 만큼 강하지 못해 유감이다.”
북하국왕 찐장(鄭?)은 죽은 찐끄엉의 장남으로, 응우옌 푹 코앗보다 세 살 위다. 지난 10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온갖 포학을 저지른 것으로 악명이 높다. 대표적인 것만 꼽아도 황제 레 주이 프엉(黎維?)을 즉위한 지 겨우 3년 만에 폐위하고 다시 3년 만에 암살해버린 일이 있다. 그 동기도 정말 기가 막힌 것이, 자기가 황제의 첩과 사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해물을 처치하고자 한 것이었다.
황제를 시역한 건 찐장이 저지른 악행 중 가장 큰 것일 뿐이다. 찐장은 황제의 첩 외에도 숱한 여자들을 침소로 끌어들여 황음의 죄를 지었고, 자신의 사치에만 관심을 두었다. 여러 차례 일어난 홍수에도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곤란에 처했을 때 구휼하지 않은 대가는 컸다. 호구지책이 없는 백성들은 자기 토지를 권세가에 넘기고 그 노복이 되었고, 권세가들은 갖은 수단을 다 써서 자기들 앞으로 나오는 세금을 피했다. 당연히 조정에 들어가는 세수가 줄어들었다.
세금 수입이 대폭 감소하자 곤란해진 찐장은 당장 급한 지출을 메우기 위해서 자기 밑에 있는 환관들을 시켜 매관매직까지 시작했다. 응우옌 푹 코앗은 그에 관한 보고를 받으면서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띠었다.
“거봐라. 그따위로 나라를 다스리니 그런 꼴이 나지 않느냐. 작위와 벼슬을 팔아서 모은 돈으로 사치나 벌이고 후궁이나 확충하니 그 지경을 벗어나지도 못하지.”
광남국에서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 팜파와 찬랍을 무찌르면서 계속해서 강역을 넓혀왔고, 토지 없는 백성들에게 그 땅을 내주어서 경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비옥한 메콩강 일대는 개간만 한다면 벼농사에는 정말 좋은 땅이다. 여기에 요즘은 일본인이나 광동인 이주자들도 부쩍 늘었다. 일본인들이야 용병으로 처음 발을 들인 뒤 포상으로 땅을 받아서 눌러앉은 사례가 많고, 광동인들은 광동에서 몇 번이나 일어난 전란을 피해 탈출한 자들이 많다. 이들은 획득하거나 사들인 노예로 종사를 짓는다.
평지에서 짓는 벼농사만 성한 게 아니다. 산지에서는 커피 농사가 제대로 궤도에 올라서 막대한 세수를 쏟아내기 시작한 지 오래다. 응우옌 푹 코앗으로서는 재정난에 빠진 찐장을 비웃을 자격이 충분한 셈이었다.
“이것도 한인들 덕을 크게 본 덕분이긴 하다만.”
광남국에 커피농장을 처음 세운건 프랑스인들이다. 하지만 농장이 번성할 수 있었던 건 대남도에서 온 한인 농부들 덕분이다. 이들이 건너와서 손을 대고서야 커피농장이 안정되고 막대한 양의 생두를 산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인들은 광남산 커피를 사들이는 큰 고객이기도 하다. 자기들도 대남도에서 많은 커피를 수확하건만, 광남산과 대남산은 맛이 다르다면서 매년 상당한 양의 커피를 수입하고 있다. 유럽 다음으로 많은 커피가 수출되는 시장이 대한이다.
“이처럼 국력을 계속 모으면 얼마 안 가서 북하국을 정벌할 만한 힘을 모을 수 있으리라. 난신적자를 처단할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전하.”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북하국을 무너뜨리고 안남국 전체를 재통일하는 것, 그 위대한 과업은 광남국이 수립되던 시기부터 내려오는 오랜 염원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도 종종 있지만, 완전히 포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을 위해 대한과 일본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왜병을 고용해서 군대를 보강하고 있다. 준비가 완료되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며 응우옌 푹 코앗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세자 시절부터 총애하던 후궁인 귀인 쩐(陳)씨의 처소에 드는 날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20.
유구 전선 ‘아마미쿄’가 고요한 바다를 지나 나하 항구에 접근했다. 아마미쿄는 하늘에서 내려와 유구를 세운 여신의 이름으로, 유구에서는 가장 강력한 전선 두 척의 이름을 하나는 아마미쿄, 다른 하나는 그 배필이었던 ‘시네리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곧 항구에 들어갑니다, 선장! 이번에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가네요!”
항구가 다가오자 수졸들이 환호했다. 귀항을 기뻐하는 거야 선원들이라면 누구든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유구군 수졸들은 다른 나라 군사들보다 유독 풀어진 분위기를 보였다. 마치 상선 선원들 같은 태도였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 다들 긴장 좀 하게. 마지막까지 주의를 잊지 말도록.”
선장 임귀남(任貴男)은 수졸들의 해이해진 태도를 보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이 군사들이, 유구가 처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이런 태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유구는 적이 없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는 섬나라인 하와국만큼이야 아니겠지만, 유구도 위협하는 적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일단, 위협에 처했던 적이 없지는 않다. 대한에서 말하는 계미남변 – 유구에서는 ‘여송의 변’이라고 부른다 – 당시 스페인군이 동원한 마다구들이 유구 주변까지 휩쓸었다. 그때 아주 지독한 꼴을 당한 경험이 있다. 그때도 대한군이 나하에 주둔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마다구가 워낙 지독하게 설치는 바람에 유구가 자체적으로 군선을 갖추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그 뒤로 전선 십여 척이 차례로 취역하며 유구 수군도 전력을 갖춰나갔다.
하지만 여송의 변 때 마다구들이 유구 근해를 누비고 다닌 것도 벌써 30여 년 전 일이다.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수군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차츰 줄어들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다. 2대 황제인 천안제 상경은 어떻게든 군대를 강화하려고 기를 썼다. 슈리에 위치한 황궁만 지키는 게 아니고 국내의 여러 요지를 지키는 역할까지 자국 육군에 맡기고, 유구 주변에서 출몰하는 해적에 대한 단속도 수군에게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유구 주변을 돌며 치안을 유지한 존재인 대한 해군이 있다. 이들이 나가서 순시를 돌면 해적선이 유구에 들어오는 건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 된다. 지난 30년 동안 유구 수군이 잡은 해적선은 총 여섯 척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유구의 바다는 그렇게 평화로웠다. 유구 수군 덕분이 아니라 대한 해군 덕분에 말이다.
유구의 바다가 안전한 건 자기들 때문이 아니라 대한 해군 덕분이라는 건 유구 수졸들이 더 잘 안다. 그러니 황제의 바람과는 별개로 전선 타는 일을 상선 타는 일과 그다지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선장도 사정을 빤히 안다. 그러니 군사들을 크게 나무라지도 못하고 이렇게 소리칠 뿐이다.
“네놈들도 일단은 이 나라 수군이 아닌가! 하선례(下船禮)를 갖춰야지! 어서 입항 준비를 하고 복장을 손질해라!”
몇 척 안 되는 귀한 군선이다 보니, 항구에 들어갈 때마다 군관과 군졸 모두 휘황찬란한 옷으로 잘 챙겨 입고 상륙하는 게 관습이다. 이는 황제가 내린 특별 지시 때문이기도 하다. 황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수군을 확대하기를 바랐다. 그러자면 초모가 잘되어야 하고, 초모를 잘하려면 수군이 얼마나 귀한 집단인지 천하에 알려 유구 백성들의 호감을 사도록 해야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선택한 방안이 좋은 옷이다.
“하선복에 얼룩 하나라도 있는 놈은 얼룩 개수만큼 몽둥이로 후려 팰 테다! 다들 제대로 챙겨 입고 하선하라!’
선장이 복장이 불량한 선원들을 보고 지금까지 뭐 했냐고 호통혔다. 헌데 돛대 위에 있던 파수꾼이 느닷없이 고함을 질렀다.
“선장, 선장! 급보! 함선 출현!”
뱃전으로 달려간 임귀남은 기겁을 하고 천리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쪽보다 좀 더 큰 전선 한 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분명히 보였다.
“혹시 해적인가?”
“아닙니다! 일본 전선입니다!”
그제야 돛대 꼭대기에서 나부끼는 깃발이 선명하게 보였다. 선장은 겨우 긴장을 풀었다.
“일본 전선이라.”
일단은 일본도 유구와 우호 관계다. 그러므로 일본 전선의 접근을 두고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겨우 1척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저 배 하나 때문에 수하 수졸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귀항을 늦출 필요는 없어 보였다. 종종 있는 일이잖은가.
21.
대한 해군 남부통제영은 대남도 대남성에 본영을 둔다. 남부통제영이 관할하는 구역 중에 가장 북쪽이 여기 유구첨사진이다. 때문에 통제사들은 1년에 1번 정도는 유구에 방문하고 했다. 여기만이 아니라 담당구역 전체를 적어도 1년에 1회는 찾아가는 게 원칙이기도 하고,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인 유구국의 황제에게 수영 설치를 허락한 데 대해 감시하는 형식을 갖추자는 의도이기도 하다.
“폐하의 깊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본국 연변의 중요한 항로에서 안전을 얻은 수 있었습니다.”
“아니요. 내, 대국에서 베푸신 은혜에 우리 유구가 얼마나 큰 신세를 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소. 그 은혜의 일부나마 갚을 수 있다면 고작 수영 지을 땅 하나 내주는 게 대수겠소?”
남부통제사의 인사는 실은 ‘대한 해군이 없으면 유구는 본국 인근의 안전조차 확보할 수 없다’라고 은근히 위압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 본의를 뻔히 알면서도 불만이 아닌 감사하는 뜻을 전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두 나라 사이의 관계였다. 그 뒤에는 내빈을 환영하는 잔치가 이어졌다. 진수성찬이 산같이 쌓이고 악공들이 공들여 연주하는 악곡을 즐기며 미녀들의 시중을 받는, 정말 화려한 행사였다.
이틀 전 황제 천안제를 알현했을 때를 생각하며 숙소에서 쉬고 있던 남부통제사 이봉신은 항구에 들어오는 일본 전선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일본 배라고 해도 유구를 그저 방문하는 건 조약 위반이 아니었으므로 딱히 불만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볼일이 있으니 왔겠지. 왜놈들 따위는 신경 쓰지 마라.”
일본과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여기는 양국 모두 중요하게 보는 우호국의 수도이니, 별일이 있을 리 없다. 편안히 여기는 게 당연했다. 이봉신은 계미남변 때 해군을 이끌었던 명장, 이홍원의 맏아들이다. 하지만 그의 출세는 집안 배경이 아니라 순전한 자기 능력으로 이루었다. 충무대왕의 후예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춘 장수다.
충무대왕의 후예로서 통제사 자리까지 올랐다면 정세를 보는 눈 정도는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 지금 대한과 일본은 우호적으로 지내고 있으며, 여기는 친대한 성향이 강한 유구국의 수도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경계는 최소한이면 족했다.
“첨사. 저놈들이 왜 왔는지 알아보는 데 얼마나 걸리겠는가?”
“내일 아침까지는 다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통제사 영감.”
유구첨사진은 그저 단순한 수영 노릇만 하는 게 아니다. 유구 내부 사정을 살피는 익문사 관원들도 유구첨사진을 거점으로 활동한다. 다만 첨사의 수하는 아니다. 계통이 다르니까.
“보통은 알아낸 사항을 일일이 제게 알려주지는 않고 그냥 복국으로 서한을 보냅니다만, 영감께서 직접 물으신다면 숨기지는 않을 겁니다. 바로 답하겠지요.”
“음, 그런가.”
하지만 익문사 관원들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봉신과 마찬가지로 궁궐에 들어가서 천안제를 알현하고 나온 일본 수군 장수가 자기 배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 이봉신을 찾아와 만남을 청했기 때문이다. 그자의 이름은 협판안정(脇坂安貞)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