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607
3부 725화(1607화)
1.
대한의, 그리고 조선의 350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 이전 고려까지 가더라도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임금이 예고도 없이 풍을 맞고 쓰러졌다. 그것도 칠순이 넘은 나이에 비하면 엄청나게 정정하던 사람이 말이다.
“세상에, 세상에, 이 이럴 수가…..”
벌떼같이 달라붙은 태의들이 침을 놓고 뜸을 뜨면서 갖은 애를 쓰는데도 태황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급보를 듣고 미친 듯이 강녕전으로 달려온 신하들, 그리고 태손을 비롯한 종친들은 눈앞이 막막해서 할 말을 잃었다.
“홍이 이 오라질 놈의 자식! 이 경을 칠 놈이 어떻게 아바마마께 이런 불효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냐! 이 부모의 은혜도 모르는 새까!”
뒤늦게 달려온 심왕 이준이 길길이 날뛰었다. 의관을 제대로 차릴 짬도 없었는지, 심왕의 신분으로 갖춰 입어야 할 익선관과 곤룡포 대신 평복에 갓을 쓰고 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 비례(非禮)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명색이 태의라는 놈들이 무엇을 하느냐! 아바마마께서 눈을 뜨지 못하신다면 네놈들의 사지를 각을 떠 남대문 앞에 내걸고 삼족을 북변으로 전가사변에 처할 것이다!”
격노한 이준이 분노를 토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심왕에게는 태의들을 벌할 권한 따위는 없다. 게다가 아무리 천왕이라고 해도 종친이 중신들 앞에서 날뛰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조 이래 종친은 조정 중신들 위에 설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데다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누구도 이준의 앞을 막지 못했다. 심왕은 대한의 종친이면서 종친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나마 그의 동복아우인 정친왕 이권이 나서서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심왕 전하, 아니 형님! 진정하십시오. 이 상황에 태의들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으려고 그러십니까!”
“야 이 자식아! 평소에는 녹봉만 신나게 받아 처먹다가 정작 필요할 때가 되니 아무 일도 못하는 저 돌팔이 새끼들을 편 들어주는 거냐, 지금!”
분노로 두 눈이 시뻘게진 이준은 태의들을 향해서 삿대질과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래도 처지가 난감해서 말리지 못하는 중신들을 대신해 이권이 강경하게 막아섰다.
“태손께서도 참으시는데 형님께서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그만하십시오!”
황태손 이영은 조부 앞에 꿇어앉아 연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강녕전에 들어서자마자 사촌 아우인 종성후의 뺨을 후려갈기던 분기(憤氣)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저 흐느끼면서 이렇게 외칠 뿐이었다.
“할바마마, 눈을 뜨시옵소서, 예, 할바마마? 아직 소선은 할바마마께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사옵니다, 할바마마. 이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눈을 뜨시옵소서. 다 소손의 잘못이옵니다…..”
태손은 자기가 울릉도에 있는 이홍을 변호했기 때문에, 태황이 이홍을 용서하려는 마음을 먹었다가 실망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자책했다. 차라리 계속 분노한 채로 있었다면 이 사고를 접했어도 훨씬 충격이 덜했으리라면서 말이다.
“할바마마, 소손이 죄인이옵니다. 어서 일어나셔서 소손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예? 그만한 기력은 있으시지 않사옵니까, 할바마마. 어서 눈을 뜨시옵소서…..”
애절한 통곡에 주변에 있는 이들이 모두 눈물을 훔쳤다. 부황에게서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의명공주도 옆에 앉아서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중신들도 흐느꼈다. 저변 기색을 살핀 이준이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안도한 이권이 옆에 앉아 형을 달랬다. 그나마 가장 친한 형제였다.
“예, 형님. 기다리시는 겁니다. 여기서 그치시지 않고 계속 소란을 피우시면 아바마마께서 더 힘드실 겁니다.”
“정말 보고만 있어도 아바마마께서 일어나시겠느냐?”
“아바마마께서 얼마나 건강한 분이신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워낙에 평소 강녕하셨으니까 태의들도 갑작스럽게 이런 변고를 겪으실 줄을 몰랐던 게 아니겠습니까? 모두 그 홍이 놈 탓이니, 어찌 의원들을 탓 하겠습니까.”
태황이 졸도한 원인은 따로 일아 볼 것도 없었다. 울릉도에 유배된 죄인 이홍이 제멋대로 고래를 쫓아 바다에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알려온 주본 탓이다. 도승선이 보았고 종성후와 대전내관들이 보았다. 그 주본을 읽다가 임금이 쓰러지는 것을.
“태후마마께서도 와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께도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셔야지요.”
창덕궁에서 지내는 태후 양 씨도 경복궁에 와 있다. 같은 강녕전, 태황이 누워 있는 침실 반대편 방에서 초조하게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하늘은 왜 저승에 갈 때가 다 된 이 늙은이를 안 데려가고 우리 주상을 데려가려고 하느냐고 흐느끼면서 말이다.
“알겠다. 조용히 있으마…..”
사실 이들 형제 역시 태손과 마찬가지로 막냇동생을 그만 용서하라고 부황에게 청한 바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더 후회하는 감정이 들었고, 심왕 이준이 공연히 태의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이었다. 이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2.
멀쩡하던 태황이 갑자기 쓰러졌다. 그런데도 황실과 조정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돌아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모든 업무가 멈추고 모두의 이목이 강녕전으로 쏠렸다. 태황이 과연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흘렀다. 임금의 나이도 있으니, 정상적으로 앓다가 쓰러진 거였다면 충분히 호상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었다. 물론 다들 슬퍼하기야 하겠지만, 자연스럽게 휴식도 취하면서 차분하게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갈 때가 되지 않았는데 울릉도에 있던 아들이 실종 때문에 갑작스럽게 쓰러진 게 너무도 분명했다. 당연히 대궐 전체가 경악과 슬픔으로 뒤덮일 수밖에 없다.
“일어서실 수 있겠지요?’
“풍으로 쓰러진 사람이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난 전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폐하께서도 원체 강건하셌으니 아마…..”
중풍으로 쓰러진다고 해서 사람이 다 죽지는 않는다. 짧게는 몇 분, 도는 몇 시간 안에는 의식을 찾기도 한다. 다들 그 사실에 기대를 걸었다. 금상이, 이 대한 땅에서 지난 4천 년간 유례가 없는 업적을 이룬 그 임금이 이토록 허무하게 눈을 감는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세상을 한 바퀴 돌았다. 스스로 활을 들어 반적을 진압했다. 서방의 대국과 싸워 이겼다. 아주 전역에서 권위와 명성을 높였다. 미주를 확고하게 제압하여 대한의 강역이 두 대륙에 단단하게 뿌리내리게 했다. 국내에서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이중 한둘을 이룬 군주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룬 이가 있었던가? 없다. 단연코 없었다. 금상, 건흥제와 같은 군주는 이제까지 단 한 사람도 이 대한 땅에서 존재한 적이 없었다. 장조도 이렇게는 하지 못했다. 세계를 직접 돌고, 손수 창을 잡고 적을 무찌른 임금이 대체 태조이후 누가 있었단 말인가.
그런 임금이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죽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품위를 지키며, 당당하게 가족들과 신하들 앞에서 고명을 남기고 나서 떠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결말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민 언니, 어떤가요. 아바마마께서 정신을 차리실 것 같은가요?’
혜련을 강녕전 밖 모퉁이로 데리고 나간 연주가 조용히 속삭였다. 초조함과 피로 때문에 핏발이 선 눈으로 애절하게 혜련을 쳐다보았다. 혜현 역시 공주와 마찬가지로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지만 차분하게 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자가, 용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깨어나지 못하시리라는 말씀이신가요?”
연주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높아지더니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혜련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비록 직접 낳아 주지는 않았어도 자신에게도 임금은, 그리고 돌아가신 중전마마는 마치 친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화재 때는 갓난아이인 자신을 불구덩이 속에서 건져주었다. 죽은 부모 대신 정성을 다해 키워주었다. 허드렛일이나 익혔을 평범하나 여염집 계집애를 당당한 의원으로 만들어 주었다. 누가 봐도 모자라지 않는 훌륭한 배필과 만나 혼례까지 올리게 해주었다.
그런 고마운 분이 지금 의식을 잃었는데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솜씨가 뛰어난 태의들이 임금의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으니 말이다. 상감께서 혜련을 딸처럼 아끼셨음을 다들 알지만, 지금은 그런 사정이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태의들의 조수 노릇밖에 못하고 있지만, 임금 곁에 있으면 돌볼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드나들면서 보니 임금의 용태는 전혀 회복할 전망이 없었다. 태의들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기에 뭐라도 하면서 발버둥들을 치고 있다.
“풍을 맞은 환자는…..머릿속에 울혈이 생깁니다. 피가 뭉치니 주변을 압박하는데, 두개골이 주변을 막아 그 압력이 나갈 곳이 없으니 뇌가 눌려 제대로 기혈이 돌지 않고 양기가 흐를 수 없게 됩니다.”
뇌에 상처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숱한 전쟁에서 머리를 다친 전사자와 부상자들을 통해 이미 많은 연구가 축적됐다. 의학계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뇌에 상처를 입으면 기와 혈기와 진액이 제대로 흐르지 못해서 사람이 죽거나 바보가 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풍을 맞은 이들도 마찬가지다. 풍을 맞은 이들이 머리에 통증을 느낀 다는 점에 착안하여 머리를 열어보았던바 – 당연히 이미 죽은 이의 머리만이다 – 크기에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울혈이 분명히 관찰되었다. 뇌내에서 발생한 출혈로 인한 것이 분명했다.
이 울혈이 생기는 원인에 관해서는 의서에 따라, 학파에 따라 설명이 갈린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건 울혈로 인해 뇌가 상처를 입는 건 상황에 따라서는 외부에서 머리에 충격을 가했을 때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도 풍을 맞고 움직이기 못하게 되었다가 죽은 환자를 부검하는 자리에 참여해본 적이 십여 번쯤 있습니다. 개중에는 폐하와 같은 증상을 보이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은 이도 서넛은 되었지요. 폐하의 증상은…..그들과 비슷하십니다…..”
책무를 다하기 위해, 목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일하는 태의들과는 다르다. 황실 일가와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혜련이기에 내릴 수 있는 진단이었다.
“그렇다면 아바마마는….아바마마는….이대로 가시는 건가요. 정녕 다시는 저를 보면서 밝게 웃어주실 수 없는 것인가요…..”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리던 연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지만, 파도처럼 들썩이는 어깨는 감출 수 없었다. 자기도 눈시울이 붉어진 혜련이 조용히 소매로 공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공주께서 이토록 슬퍼하시는 줄 아시면 폐하께서도……”
막 위로를 건네는 순간 강녕전 안에서 비명이 울렸다. 애통한 부르짖음이 문과 창을 뚫고 밖으로 터져 나왔다. 온종일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던 임금이 끝내 눈을 뜨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폐하, 폐하! 아니 되시옵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할바마마!”
통곡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던 연주와 혜련은 허겁지겁 달려 강녕전에 들어갔다. 두 사람만이 아니라 잠시 숨을 돌리러, 다른 일을 살피러 바깥에 나왔던 종친과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태황의 옷가지를 든 내관이 천천히 강녕전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구슬프게 흐느끼면서 옷자기를 흔들었다.
“상위복(上位復), 상위복, 상위복……”
내관의 애절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하늘 저편으로 흘러갔다. 건흥 41년이 되는 경신년 2월 10일, 양력으로는 1740년 3월 8일이었다.
3.
임금이 분사(분사)했다. 그것도 고명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붕어했다! 정말로 생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일은 과거에 무종이 심장에 급병이 와서 사망한 이외에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임금이 급사했다지만 나랏일에는 별다른 혼란이 없었다는 부분이다. 말이 좋아 대리청정이지, 사실상 이미 양위한 거나 마찬가지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동안 나랏일은 실질적으로 태손 이영이 맡았다.
선황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태손에게 나랏일을 상당히 넘겼다. 그러다가 지난 1년 동안은 전면적인 대리청정을 명하여 대부분 업무를 넘겨주었다. 군권과 외교권은 계속 자신이 쥐고 있었으나, 결정만 자신이 내렸을 뿐 그 과정에는 태손도 모두 참여하게 했다. 선황이 이런 업무에 태손이 아예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면 급히 제위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혼란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미 실무에 충분히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서도 문제는 없었다. 장례 그 자체만이 문제일 뿐이었다.
“대행태황(大行太皇)께서 붕어하셨으니, 어서 국장도감과 산릉도감을 두어 큰일을 치르게 해야 합니다. 상께서는 즉시 명을 내리시어 조정과 중추원에서 덕망 있는 인사를 뽑아 일을 맡게 하소서. 실로 급한 일이옵니다.”
국장도감(國葬都監)은 국상 기간에 필요한 갖가지 도구와 기물을 마련하고 전체적인 행사 진행을 맡는다. 산릉도감(山陵都監)은 장지를 정해 무덤을 만드는 공사와 석물 설피, 제각(祭閣) 건축, 주변 정리 등을 담당한다. 선황이 아주 눈을 감을 때까지 몇 달 정도만 걸렸어도 그동안 어느 정도 준비가 진행됐을 것이다. 하지만 건흥제는 말 그대로 급사했다. 장례 준비가 되어있을 리 없다.
“중추원과 예부에서 선례에 따라 진행하고, 일을 맡기기 적당한 이를 추천하라. 지금 본…. 아니, 짐은 차마 그 일에 쏟을 정신이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태손 저하’라고 부르던 신하들이 이제 상(上)이라고 부른다. 이영은 그 호칭에 자신이 보위에 올라 이 대한의 19대 임금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이제 앉는 자리도 바뀌었다. 용상 앞 작은 책상이 아니라 용상 위에 정식으로 앉는다. 하지만 기쁨이나 긴장감 같은 기분은 없었다. 오직 슬프고 황망할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짐’이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영은 자신의 마음을 의연하게 다잡으면서 신하들을 이끌었다. 이제 자신이 진짜 임금이었다.
임금이 바뀔 때는 처리할 일이 많다. 직접적으로 장지를 정하고 장례를 치르는 일 외에도 전국의 죄인을 사면하고, 주변국에 사신을 보내 부고를 전하며, 죽은 임금의 행정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작성해야 한다. 임금이 바뀔 때마다 늘 있는 일들이다. 이영은 이 모든 사안에 필요한 전례를 다르면 되는 일들이기에 큰 곤란은 없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만은 바로 처리할 수 없었다.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했다.
“폐하, 돌아가신 대행태황께는 어떤 묘호를 올림이 가하겠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