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624
4부 008화(1624화)
15.
김유근은 계속 이어지는 내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이제는 그만 좀 끝내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하기는 했지만, 누이동생 생각이 났는지 차마 내 질문을 묵살하지는 못했다.
“루이 17세는 미주합중국이 독립하도록 도와서 잉글국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나라의 위신을 세우는 데도 무척 큰 효용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비용은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와서 국고를 바닥냈습니다.”
루이 17세가 경자년(1780)에 사망하면서 그 자리를 이은 샤를 10세는 이 전쟁을 기회로 여긴다는 점에서는 부왕과 같았다. 되려 아버지보다 한술 더 떴다. 자금과 무기를 원조하고 일부 장교들이 의용병으로 싸우도록 묵인하는 정도였던 부왕과 달리 대놓고 파병까지 했다. 샤를 10세가 조직한 지원군 총사령관은 무려 몽캄 후작이었다. 몽캄 후작은 7년 전쟁 때 당한 굴욕을 잊지 않았고,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 – 미국 독립군 – 을 도와서 영국군을 마구 박살내고 다녔다. 전쟁 후반의 주역이 대륙군인지 프랑스군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김유근이 설명했듯이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 프랑스의 재정은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루이 16세 시절에 쌓인 빚도 못 갚았는데 루이 17세와 샤를 10세가 그 빚을 또 늘려놓았다. 플뢰리 추기경이 고생하면서 모아놓은 돈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리품이라도 있었다면 사정이 좀 나았겠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땅을 뺐으려고 싸운 게 아니라 미국을 독립시켜주려고 뛰어든 싸움이었으니, 받아내려야 받아낼 게 없었다.
“전비만 써댄 것도 아니었습니다. 샤를 10세는 중종께서 세우신 위업을 흠모하여 불랑국 땅에 철로를 부설하고자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과욕을 부렸습니다.”
내가 철도 부설 사업을 할 때도 몇 십 년에 걸쳐 노선 하나씩 깔았다. 지금이야 한양에서 기차를 타고 심양, 북경까지 가고 부산까지도 갈 수 있다. 하지만 이게 한두 해 만데 된 게 아니다. 지난한 세월과 자금이 들었다. 그런데 새를 10세는 프랑스 주요 도시를 모두 연결하는 철도망을 일시에 착공해서 모두 한꺼번에 완성하려고 했다, 그런 허황한 계획이 성공할 리가 있는가.
“잉글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철도를 부설했으나, 잉글국은 철도 부설을 민간에 맡겼기에 나라에서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랑국에서는 이런 귀하고 중요한 사업을 민간에 내줄 수 없다고 하면서 왕실이 독점한다고 과역을 부렸으니, 어찌 일이 되겠습니까.”
“스승님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루이 16세는 정부 퐁파두르 여후작이 계몽주의자들을 후원해서인지 나름대로 계몽주의를 이해했고, 그 아들인 우리 17세도 다소 자유주의적인 시각을 가졌다. 영국에서 독립하려는 미국인들을 도운 것도 영국이 싫어서만이 아니라 그 대의를 어느 정도 이해해서였다. 허나 샤를 10세는 달랐다. 새를 10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반동주의자로 절대 권력과 특권의 독점을 당연시하는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부왕 시기에 성장한 계몽주의자들의 세력을 견제하려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유지, 자기편으로 키웠다.
“게다가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오스트리아에서 시집온 불랑국 왕비 역시 왕의 권한은 신민들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드센 성품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부창부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나라가 평화롭겠습니까.”
루이 17세가 자기 아들을 오스트리아 공주와 결혼시킨 이유는 원래 역사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이제 프랑스의 진자 적은 영국이라는 인식이 확고해졌고, 합스부르크는 이제 적이 아니라 동맹을 맺어야 할 상대였다. 결혼 이상 가는 동맹 수단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왜 얘가 프랑스로 시집을 왔지?!’
내가 당황했던 부분은 다른 데 있었다. 프랑스로 시집온 – 신랑도 원 역사의 루이 16게가 아니기는 하지만 – 오스트리아 공주가 내가 아는 대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었다! 마리 카롤린, 독일식 본명은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바로 손위 언니였다. 대체 바뀐 이유가 뭔지 머리를 굴려 봐도 통 모르겠다. 그냥 다른 세계니까 일이 다르게 진행됐나보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기는 하다.
이렇게 동생 대신(?) 프랑스 왕비가 된 마리 카롤린은 자기 어머니가 낳은 여러 딸 중에 가장 어머니를 많이 닮은 딸이었다. 그 말인즉슨 통치자로서 갖춰야 할 자세를 가장 철저히 갖춘 여장부였다는 말이다. 여장부 유형의 아내와 봉건적이면서 반동적인 남편이 결합했으니 힘든 고통으로 신음하는 백성들의 반발 따위가 귀에 들어올 이가 없다. 이 부부는 자기들이 원하는 정책이라면 뭐든 망설이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 첫 번째가 미국 독립전쟁 지원이었다. 그 전쟁이 끝난 뒤에 국왕이 열을 쏟은 두 번째 사업이 수도 파리와 주요 국경, 항구를 연결하는 간선철도 건설이었다. 이 웅대한 계획안은 선왕 루이 17세가 기반을 잡아두었지만, 본격적인 공사는 샤를 10세가 시작했다. 루이 17세가 세워둔 기본 계획에 따라 순차적으로 공사할 진행했으면 그나마 부담이 좀 적었으리라. 하지만 왕세가 시절에 직접 증기자동차를 제작한 적이 있을 정도로 증기기관에 관심이 많았던 샤를 10세가 과욕을 부였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허나 아무리 독선적인 국왕이라 해도, 그간의 낭비로 인해 국고가 마른 상황을 목도하자 어디선가 돈을 마련해야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랑국왕이 선택할만한 대책은 증세밖에 없었지요.”
프랑스왕실은 몇 차례나 사신을 보내서 우리 조정이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지 배워갔다. 그러면서도 그 난잡한 조세 제도나 관직 체계를 뜯어고치는 건 결국 못 했다. 당연히 원래 역사 그대로 빚더미에 눌려 헤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조부나 부친과 자신이 쌓아 올린 빚더미에 눌려 죽을 지경이 된 새를 10세는 응급수단을 사용할 생각을 했다. 건설 중인 철도가 완공되어 돈을 쏟아낼 때까지 버티기 위한 임시세를 징수하겠다는 생각으로 납세 여력이 있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을 물리려고 한 거다.
“하지만 그동안 면세 혜택을 받던 이들이 순순히 이 조치에 응할 리가 없었습니다. 고로 국왕의 뜻을 꺾으려고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였지요.”
샤를 10세가 그동안 성직자와 귀족들의 특권을 유지해준 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그동안 국왕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임시세라도 낼 의사가 전혀 없었고, 국왕의 과세 시도를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꺾을 생각으로 삼부회 개최를 요구했다.
삼부회는 신분별로 투표하므로 자기들이 힘을 합치면 국왕의 과세안을 부결시킬 수 있다. 그리고 나라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일은 평민인 제3신분으로 떠넘길 작정이었다. 당연히 3신분이라고 그 부담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7년 전쟁 이후, 프랑스 사회에 증기기관이 본격 도입되면서 서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일부 공장이 기계를 도입하자 도시에서는 막대한 수의 수공업자, 기술자, 도제들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농민들은 가뭄과 홍수, 우박, 기록적인 한파 등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이런 판국인데 증세 부담 따위를 떠안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삼부회를 소집한 세 세력은 모두 다른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세금 부담을 꾀하려고 정책 방향을 돌리려고 했고, 국왕은 뒤늦게나마 평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특권 계층을 억제하려 했으며, 평민 대표들은 합당한 권리를 얻기를 원했습니다.“
샤를 10세가 원한 건 징세 문제에서 평민들이 자기편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민 대표의 숫자도 두 배로 늘려서 귀족, 성직자들을 합친 수와 같게 만들어주었다. 이 양보는 샤를 10세로서는 거의 최대치였다.
“그런데 국왕이 자신들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평민들이 그동안 쌓인 한을 푸느라 한층 더 과격한 요구를 내밀었습니다. 그 요구를 받은 국왕은 분개하여 역으로 삼부회를 해산하라고 나오게 되었지요.”
개인별 표결 요구는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샤를 10세는 그동안 자기가 베푼 은혜에도 불구하고 특권층에게 ‘배반당한’ 데 대해 격분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이들 특권층을 다시 억누를 생각으로 평민 대표들의 숫자를 두 배로 늘려준 게 아니었던가.
하지만 영국식 의회제도 도입, 헌법 제정, 징세 청부 제도 폐지는 샤를 10세가 들어줄 수 있는 조건들이 아니었다. 국왕의 권력을 제약한다는 건 말도 안 될뿐더러, 이미 백여 년 분량에 달하는 징세권을 낙찰 받아 가지고 있는 청부업자들과의 계약은 어떡하란 말인가.
징세권을 회수한다고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징세 기구도 없는 게 현실인데 준비도 없이 징세 청부 제도를 폐지하면 세금은 어떻게 걷는단 말인가. 여기가 대한인 줄 아는가. 평민 대표들의 요구사항을 받고 길길이 날뛴 샤를 10세는 당장 특권층 편으로 돌아서서 삼부회를 폐쇄했다. 그러자 평민 대표들은 주 드 폼 경기장으로 옮겨가서 국민의회를 열고 ‘주 드 폼의 선언’을 했다. 어떻게 원인은 좀 달라도 결과는 이렇게 비슷하게 갔는지 원.
“이는 우리 대한으로 따지면 전국에서 모인 선비들이 지부 상소를 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군주라면 마땅히 그 뜻을 살펴 받아들이고 국정에 반영했어야 할 것을, 무도한 불랑국왕은 걸주(桀紂)나 할 짓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그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었지요.”
“그러게나 말이옵니다. 불랑국왕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국민의회가 ‘반기를 들어’ 자신에게 도전하자, 샤를 10세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왕비의 조언을 받아들여 국경에 배치되어 있던 군대를 파리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모두 프랑스인이 아니라 독일인과 스위스인으로 구성된 용병들이었다. 파리 시민들과 말도 통하지 않았다. 3만 명에 달하는 군대가 연병장인 샹 드 마르스 일대에 주둔하자 파리 시민들은 공포에 질렸다. 국왕의 군대가 시민들을 학살하러 왔다는 소책자가 시 전역에 퍼졌고, 이에 맞서는 시민들이 무장을 갖추고 군대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김유군은 이것도 비판했다.
“불랑국왕이 무도하게 굴었다고 하나, 아직 이때까지는 자기 백성을 해치려는 의도까지는 없었고 소요를 진압하려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은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서 군주의 역린을 건드렸으니, 어찌 이 또한 옳다고 하겠습니까?”
김유근이 언급한, 결정적으로 ‘역린을 건드린’ 사건이 바로 1789년 7월 14일에 시민들이 무기와 탄약을 구하고자 벌인 앵발리드 습격, 바스티유 습격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앵발리드 바로 옆에 있는 샹 드 마르스에 주둔한 군대는 그동안 손도 까딱하지 않았다. 원래 역사에서, 같은 사태에 직면한 루이 16세는 다음 날 아침에 소식을 듣고 망설이다가 시민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쪽 세계의 새를 10세는 루이 16세와 달랐다. 다음 날 아침에 소식을 들은 것까지는 같았지만, 그가 한 건 근위대 사령관을 교체한 일이었다.
“제대로 일하지 않은 장수를 해임한 건 당연합니다. 허나 그 이후 대응은 나빴습니다.”
근위대 사령관 브장발 남작은 소심한 사람이라서 시위 진압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하루 내내 갈팡질팡하다가 바스티유가 함락되게 놓아두었다. 샤를 10세는 당장에 브장발 남작을 해임하고, 왕실 마필관리관 랑베스크 공에게 진압군 지휘권을 주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왕실 마필관리관(Grand Ecuyer de France)이란 단산하게 말 관리만 맡는 자리가 아니다. 젊은 귀족들을 가르치는 군사교육기관까지 관할한다. 국왕이 행차할 때는 왕의 칼을 드는 운검 노릇까지 하는 대단한 자리다. 11대 마필관리관인 랑베스크 공은 이미 시위 군중에 대한 잔혹한 진압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동안 시민들과 군대 사이에 벌어진 충돌 대부분이 랑베스크 공 휘하에 있는 로얄 알레망 기병연대의 독일인 기병들에 의해 벌어진 사태였기 때문이다.
파리 전역에 있는 정부군의 지휘권을 쥔 랑베스크 공은 즉시 시위대가 본부로 삼고 있는 파리 시청에 대한 정면 공격에 나섰다. 당연히 대참극이 벌어졌다. 시체가 포석을 덮고 그 사이로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국민의회 요인들은 급히 시외로 탈출했다.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면 군사를 내어 진압하는 한편으로 따로 글을 내려 효유함이 군주 된 자의 도리입니다. 하지만 불랑국왕은 군사를 내어 백성들을 죽이기부터 하였습니다. 그 장소도 도성 한복판에서 였습니다. 이 어찌 임금 된 자가 마땅히 행할 일이겠습니까?”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아 물론 자기한테 담비는 놈들이 있으면 싹 쓸어버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양 백성들이 물밀듯 몰려와 지부 상소를 한다고 대뜸 금군을 시켜 그걸 다 패죽이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당연하게도 랑베스크 공이 벌인 학살에 관한 소식은 프랑스 전국에 퍼져나갔다. 파리에서 눈을 의심할 정도의 학살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프랑스 전역이 분노로 들끓었고, 정규군조차 다수가 반기를 들었다. 결국 프랑스 전체가 왕당파와 혁명파로 나뉜 내란이 시작되었다.
왕당파의 우두머리야 당연히 국왕이다. 혁명파는 파리에서 대학살을 피해 간신히 탈출한 국민의회 의원들이 지도부를 형성했다. 이 내란은 무려 4년이나 지속되면서 프랑스 전역을 피로 물들였다. 국왕의 하나뿐인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 전사할 정도였다. 국왕은 처가인 오스트리아에서까지 지원군을 불러들였으나 전세는 불리했다. 혁명파가 더 유리한 국면이 지속되었고, 마침내 국왕군 최후의 주력부대가 투항하는 날이 왔다. 마지막 승리를 얻어낸 지휘관은 내전 와중에 두각을 드러낸 신예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저하, 이 이야기는 정말이지 여기서 끝내야겠습니다. 경서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이렇게 옛이야기만 하실 수는 없는 겁니다.”
“알겠습니다…..스승님.”
젠장,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려는 참인데 여기서 끊다니, 김유군이 원망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지루한 경서 공부 좀 하면서 눈치를 보고 다시 어떻게든 역사 이야기로 몰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