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637
4부 021화(1637화)
21.
이처럼 서나라는 중원에서 쫓겨나면서 사실상 남만의 여러 소국 중 하나에 불과한 처지로 전락했다. 청과 후송이 서로를 가장 큰 적으로 여기고 있기에 숨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이 사태는 동남아시아 방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안남 외에 서나라를 형식상 상국으로 모시던 면전(미얀마), 섬라(타이), 남장(라오서), 진랍(캄보디아) 등도 일제히 태도를 바꿔 손바닥을 뒤집었다. 몰락한 서나라 따위, 이제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안남에서 새로이 일어난 서산당의 완씨는 서군을 격파하면서 그 기세를 올렸고, 잽싸게 송도(宋都) 남경에 사신을 보내 칭신하였습니다. 정씨를 무찌르고 안남을 일통하는 과업을 완수했으니 송을 배경으로 하여 기반을 더 다지려는 의도였지요.”
다음번 역사 이야기에서 김유근은 지난 50여 년 동안 안남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정리해 들려주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안남이 확실한 우리 번국으로 들어온 사연’ 쯤 되겠다. 사산당(西山黨)이라는 건 안남의 떠이선 왕조를 가리킨다. 이들은 본래 광남국 서산 지방 출신의 하급 관리로, 부패하고 타락한 완씨 정권이 농민들을 마구 착취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북하의 정씨와 손을 잡고 완씨를 멸망시켰다.
이때 서산당은 북쪽에 있는 정씨 세력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바로 북정을 감행하여 정씨 세력을 공격했다. 이들이 정씨 정권을 거세게 밀어붙이자 정씨 편에 있던 여씨 황실이 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동학군을 진압하러 청군을 불러들인 누구처럼.
“반란을 일으킨 자기 나라 농민들 앞에 무릎을 꿇기보다는 서나라 황제를 받드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청을 받아들여 출병했던 서나라 원군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20만 서나라 대군은 떠이선 군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무너졌고 총대장 손사정(孫士正)은 손발이 묶여 강물에 내던져졌다. 포로들은 노예가 되었다. 대승을 거둔 떠이선 군은 반격전까지 벌였다. 후송에게 칭신하여 연계를 확보하고, 바로 다음 해에 홍사옥이 감행한 광동 공격에 보조를 맞추어 남쪽에서 운남과 광서를 공격했다. 임호관이 원군을 제때 받지 못한 데도 떠이선 군의 공격이 크게 한몫했다.
떠이선 군은 장시원이 양광 탈환을 시도할 때도 운남을 공격하며 충실하게 조공의 역할을 맡았다. 크게 기꺼워한 후송 황제 조승번은 떠이선의 수령에게 책봉 교서를 내려주었다.
“허나 서산당은 그 본질이 도적입니다. 일단 지위와 세력을 얻자 곧바로 형제가 반목하여 군사를 이끌고 내전을 벌였고 과거도 시행하지 않았으니, 어찌 일국의 군주 자격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김유근이 여지껏 ‘서산당’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 대한에서는 떠이선 조를 한 번도 정당한 안남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서산당’이라고 부르는 거다.
우리 대한에서 인정한 유일한 안남 왕조는 당연히 내가 책봉한 광남국의 완씨다. 하지만 완씨가 무너지는 동안에 우리 조정은 개입을 삼갔다. 조부가 말했듯이, 우리 대한의 외교는 ‘남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태황이었던 선이는 미국 독립전쟁, 서나라 붕괴, 본국을 덮친 심각한 기근 – 선이가 재위한 7년 중 4년이 흉년이었다 – 과 같은 수많은 과제를 쌓아두고 있었다. 그러니 광남국 내전 따위에 선뜻 개입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허나 번국의 국체를 지키게 하고 그 핏줄을 돕는 건 중요한 문제지요. 당시 목종께서는 이런저런 문제로 광남국 완씨를 크게 돕지는 못하셨으나, 그 마지막 후예인 완복영이 몸을 의탁해 오자 받아들여 보호해주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광남에는 우리 군사가 천 명 정도 주둔하고 있었다. 우리 자본으로 움직이는 농장과 이를 관리하는 우리 거류민을 보호할 목적에서 주둔시킨 병사였다. 광남국 산악지대에 있는 커피농장은 중종 시절부터 대부분 우리 소유였다. 여기에 우리가 자본을 투자한 코친차이나 일대의 쌀농장도 있다. 주로 영이 시절에 얻은 이 농장들은 우리 입맛에 맞는 단립종 쌀을 주로 재배하는 수출용 – 광남국 시각에서 – 농장들이었다.
“허나 광남국에 망조가 들면서 치안이 어지러워지고 도적이 설치기 시작했습니다. 법도에 따르자면 광남 군사들이 우리 농장을 지켜줌이 당연하겠으나, 저들이 그 마땅한 일을 제때 하지 못하니 현종께서 광남에 우리 군사를 약간 두게 하였습니다.”
서나라가 제대로 돌아갔으면 분명히 그 일을 알고 난리를 쳤으리라. 하지만 당시 서나라 황제는 말종(末種)인 말종(末宗) -정말이지 민종보다는 이쪽이 훨씬 입에 딱 붙는 시호가 아닌가 – 이었다. 그러니 광남에 대한군이 진주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혹시 후송과 가까운 북하국이었으면 또 모르지만, 코친차이나는 머나먼 남쪽 끝에 있는 땅 아닌가.
서산당으로부터 도망친 완씨의 마지막 생존자 완복영(阮福暎), ‘응우옌 푹 아인’은 복승 – 계미남변에서 우리 함대가 영란 연합함대와 결전을 벌인 그곳 – 에서 우리 상관에 보호를 청했다. 서산당도 우리와 정면으로 충돌할 생각은 없었기에, 완복영은 겨우 숨을 돌렸다.
“허나 그 도적놈들이 자중지란에 빠져 나라를 도탄에 몰아넣으니, 안남 백성들의 민심도 다시 돌아와 정당한 군주를 찾았습니다. 이에 완씨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서산당을 치고 보위를 되찾으니, 이 어찌 하늘의 도리가 살아있는 증거라 아니하겠습니까.”
당연히 그 대업을 서산당에게 밑바닥까지 털린 완복영 혼자 이뤘을 리 없다. 그때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던 조부가 다 도와주었다. 복승에 주둔하던 우리 군사들에게 완복영을 돕게 하고, 완복영이 직접 군대를 모을 수 있도록 무기와 군자금도 별도로 지원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주장도 일부 나왔다. 하지만 조부는 ‘광남국은 타국이 아니라 중종 시절 책봉을 받고 신속한 번국’이니까 도와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고 완복영을 ‘광남국주’가 아닌 ‘안남국왕’으로 정식 책봉했다.
“그때 주상께서는 과거 말로만 우리 번국이라고 하던 안남을 확실하게 우리 산하에 넣을 결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완씨를 안남국왕에 정식으로 책봉하시고, 복승에 주재한 군사 외에 술루군을 파병하고 대남도 의군 수천까지 모아 보내신 것입니다.”
조부한테 병력과 무기, 자금을 지원받은 완복영이 재기에 성공하자 가정부(嘉定府, 쟈딘)에 거점을 두고 있던 프랑스인들도 몰래 접촉해왔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원이 필요했던 완복영은 기꺼이 프랑스인들의 손도 잡았고, 무기와 용병에 군함까지 추가로 얻었다.
“그렇게 해서 완조(阮朝)는 힘을 키웠고, 10여 년에 걸쳐서 치열하게 싸운 끝에 서산당을 물리치고 안남 땅에 올바른 도리를 새로 세웠습니다.”
완조는 처음에는 대월(大越)이라는 예전 국호를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 명목상의 군주였던 여씨 황제도 없어졌으니 8백 년 넘게 쓴 그 국호를 계속 써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서산당을 멸하고 안남을 석권한 뒤에 대남(大南)으로 새 국호를 정?다.
“하지만 우리야 여전히 전처럼 안남으로 칭하고 있지요. 폐하께서도 꼭 필요하지 않다면 예로부터 내려온 것을 바꾸는 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안남국왕은 옛날 송나라 고종 시절 이후로 7백 년 동안 사용한 칭호니 계속 쓰는 게 옳다고 하셨습니다.”
완복영이 자기 땅에서 대월국 황제를 칭하든 대남국 황제를 칭하든 우리로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베트남은 외왕내제가 관습 아닌가. 완씨는 중종 시절부터 우리 책봉을 받은 번국이었고, 그 법도에 따라 우리가 새로 책봉한 직위가 ‘안남국왕’이었다. 그러면 된 거다. 그렇게 해서 안남은 우리 대 한의 확실한 번국이 되었다. 농장 경비라는 명목으로 주둔한 군사는 1천에서 4천으로 늘었고, 복승에는 전선도 늘 두세 척씩은 기항하게 되었다. 조홀, 술루, 누손, 뇌주를 연결하는 선 한가운데에 굳건한 거점을 확보한 셈이다.
“그런데 스승님, 우리가 완씨를 돕듯이 송국이 서산당을 돕지는 않았습니까?”
서산당은 후송의 번국이었다. 더구나 안남이라고 하면 서와 후송이 수백 년 전부터 서로 자기 번국으로 삼으려 경쟁하던 대상 아닌가. 기껏 손에 넣었는데 무너지게 놔둔다면 말이 안 된다. 갑신정변 때 청나라처럼 군대를 보내서라도 서산당을 돕는게 당연하다.
“그것이, 그 시점에 덕성도가 난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하필 그때 덕성도의 난이 일어났다는 데 있었다. 안남과 바로 인접한 양광 지방은 우리 땅인 뇌주를 통해 유입된 덕성도가 많이 퍼져 있었고, 당연히 반란도 격렬했다.
“송재가 제 코가 석자니 어찌 안남에 출병하여 서산당을 돕겠습니까.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지요.”
후송에서 5년에 걸친 덕성도의 난을 겨우 진압했을 때는 이미 완복영이 서산당을 완전히 격파하고 안남을 통일한 뒤였다. 지원군을 보내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서산당 세력을 복위시키려 원정하자니 후송도 내란 때문에 후유증이 심각했다. 게다가 안남을 얕보고 출병했다가 20만 대군이 궤l당한 서나라의 전례까지 있었다.
다만 완복영이라고 해서 상황이 좋지도 않았다. 안남은 서산당의 난 발발로부터 시작해서 30년 가까이 격렬한 내란을 치렀다. 게다가 옛 북하국 땅은 아직 완전히 완씨의 지배 아래 들어왔다고 할 수 없었다. 만약 후송이 침공한다면 동조해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송이 내란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쳐들어온다면 안남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인데, 이걸 대비하겠다고 안남국왕이 한 일이 참으로 맹랑했습니다. 글쎄, 후송에 칭신하고 ‘난월국왕(南越國王)’으로 책봉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뭐라고요?”
당연히 조부는 물론이고 당시 우리 조정 중신들도 분노했다. 그런데 이 사태를 해명하러 한양에 건너온 안남국 사신이 실로 인물이었다고 했다. ‘안남의 종주권 같은 하찮은 문제로 후송과 싸우는 건 정말로 손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조정 전체를 설득해버렸다!
‘후송에 신종하는 건 놈들이 안남 땅에 쳐들어오지 않게 하려는 의도적인 기만일 뿐이니, 우리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요. 그 논리가 얼마나 정연한지 마치 소진과 장의가 살아서 돌아온 듯했습니다.”
후송은 체면만 살릴 뿐 안남 땅에 군대를 두거나 매년 조공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대한은 수천에 달하는 군대를 두고 매년 한 차례씩 정기적으로 조공을 받는다. 이것만 봐도 안남이 어느 나라를 진짜 종주국으로 여기는지는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후송과 싸우려면 막대한 군비가 들뿐더러 교역도 끊긴다. 대한이 후송과의 교역을 통해 얻는 이익을 생각하면 싸우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이익이다. 아 두 가지가 사신이 꺼낸 논리의 요지였다. 그런데 그 뻔한 소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풀어놓는지, 절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조부와 조정 중신들이 제대로 반박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 회견은 필담도 아니고 한국어로 이루어 졌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현장을 제 눈으로 직접 보았지요.”
“실로 장관이었겠습니다.”
완복영의 수완 덕분에 안남은 우리와 후송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쳐도 좋다고 허락받았다. 하지만 이 외교적 성과가 곧 안남의 평화와 안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완씨가 한번 망한 이유는 부패와 탐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나라를 찾은 뒤에는 그런 잘못을 돌이켜 후회하고 고쳐야 할 터인데, 옛 제도와 악습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니 어찌 백성이 그 임금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겠습니까.”
정씨 정권의 세력권이던 북부에서는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대한과 후송에는 무릎을 꿇었지만 자기보다 약한 나라인 진랍과 남장을 상대로는 침략을 계속했다. 섬라와는 이 두 나라를 놓고 전리품을 다투었다. 안팎에서 싸움이 그칠 날이 없는 거다. 지금 안남은 완복영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완복교(阮福?)가 다스리고 있다. 하지만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는 건 여전하다. 그 덕분에 안남으로 흘러 들어가는 용병과 무기의 물결은 끝이 없다.
“일단은 같은 번국이라지만, 조홀국이나 술루국과 비교됨이 이와 같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두 번국 중 조홀국은 요즘 들어 비교적 평화를 누리고 있다. 정주신 시절에 벌인 대규모 내란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말레이인 인구를 거의 절멸 직전까지 몰아내 버린 덕분이다. 그 뒤로 조홀국 내에서는 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사라졌다.
현제 호적에 오른 조홀국 인구는 대략 80만이라고 한다. 건흥 말년에 벌어진 내전이 대충 끝났을 시점의 조홀국 인구가 대력 30만이었으니, 세 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
“마래인의 수가 당시에 12만이었는데 90년이 지났어도 아직 15만에 지나지 않으니, 조홀 조정이 얼마나 마래인들을 경계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화인(華人)의 수는 8만이던 것이 되려 6만으로 줄었으니, 이 또한 조홀국이 화인을 경계함을 알 수 있습니다.”
대략 7만여 명이던 한인과 4만여 명이던 일본인은 양쪽 모두 14~15만으로 늘었다. 다만 한인들은 대개 본국이 아니라 대남도에서 이주한 이들이라 대남도 토인 혈통이 섞인 자들이 많다. 일본인들은 용병으로 고용된 뒤 눌러앉거나 인신매매로 팔려온 여자들의 후예다.
예전에 없었는데 확 늘어난 게 인도계다. 정주신 재위시기에 농장과 광산의 노동력으로 처음 들어온 인도계는 지금 30만에 달해서 가장 수가 많은 집단이다. 물론 이들 모두가 파르시는 아니다. 대부분은 영국이 일찌감치 상관을 설치한 마드라스를 비롯한 인도 동남부 출신이다. 조홀 국에 인도인 노동자를 주로 공급한 영국인들이 운송비를 절약할 수 있는 가까운 지역에서 인력을 조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인 노동자 대신 주석 광산이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다. 나중에 고무나무와 팜유를 생산하는 농장을 만들면 그쪽에서도 인도인 노동자가 많이 필요해지리라.
“자, 오늘은 여기에서 끝입니다. 더 듣고 싶으시면 어서 어제 배운 치체로의 편지 문장을 외어 보십시오.”
“…..예.”
아이고, 이놈의 등가교환은 끝이 나질 않는구나. 공부를 해야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니. ‘치체로’는 카이사르 시대 문필가인 키케로(Cicero)의교회 라틴어식 발음이다. 대한에서 배우는 라틴어는 주로 교회라틴어라 치체로라고 읽는다.
그런데 내가 이걸 배우는 게 맞는 거야? 겨우 문장 몇 개뿐이라고는 해도 여덟 살밖에 안 된 초보자한테 키케로를 가르쳐? 아무리 황실이라지만, 조기교육이 너무 정도가 지나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