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640
4부 024화(1640화)
옛날….장조 때나 중종 때 같았으면 한국인들이 서양 음악을 접하는 중심지는 마포성당이 되기 쉬웠다. 하지만 요즘은 좀 달라졌다. 일단, 교회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가 가본 적은 없고 듣기만 한 이야기지만 마포성당에는 오케스트라 같은 게 없다. 미사 도중에 성가를 부를 때 풍금(오르간)으로 반주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예전에 있었던 바이올린이나 하프 같은 것도 쑥 들어갔다.
이유는 벌겨 없으리라. 안정적으로 연주자를 수급하기도 어렵고, 재정적인 여유도 별로 없다. 조선 교구장은 모차르트를 고용한 잘츠부르크 주교공같은 봉건 영주가 아니니까. 조선 교구 – 나라 이름이 바뀐 지 2백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한국 교구’가 아니라 ‘조선 교구’인 걸 보면 가톨릭도 참 보수적이다 – 가 등장했으니 지난 80여 년 동안 교회가 어떻게 굴러갔는지도 언급하는 게 도리겠지만, 지금 다루면 삼천포로 빠지게 될 테니 그건 나중에 기회 될 때 따로 이야기하는 게 낫겠지.
하여간 태자가 서양 음악을 접할 장소로 성당은 탈락이다. 어차피 황실에선, 특히 태황과 태자는 공식적으로 어떤 종교도 믿을 수 없다. 그러니만큼 태자가 공공연하게 성당에 가서 음악을 즐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역시 기방(妓房)에서 접했나.’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마찬가지다. 유흥업계는 다양한 새 상품으로 손님들에게 눈길을 끌면서 수요를 만족시키려 한다. 당연히 기생들은 여러 가지 기예를 두루 갖출수록 몸값이 오르고 악기 연주 역시 그들이 갖춘 기예 중 하나다. 중종 시절 항양에도 양악을 연주하는 백인 악공을 내는 기방이 드물게나마 있긴 있었다. 백인이나 백인 혼혈인 기녀가 양장을 입고 그 곡에 맞춰서 춤을 추기도 했고, 그러니 요즘 세상에는 자기가 바이올린을 직접 연주하는 기생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태자가 기방에 자주 – 매일 가지는 않는다 – 다니는 거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문제는 저 연주를 장악원 악사들한테 시키는 게 아니라 내 누나, 그러니까 하나뿐인 자기 적녀 화원군주에게 시킨다는 거다. 태자는 화원군주가 여섯 살 때쯤부터 바이올린을 들려 연주하게 했다. 그러니 어찌 주변에서 좋은 소리를 듣겠는가.
중종 때 상희와 올렝카가 애들까지 데리고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한 까닭에, 적어도 황실 내에서는 여자가 악기를 연주하는 데 대한 거부감이 좀 약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은 여전히 별로 좋지 않다. 그런데도 태자는 딸에게 바이올린을 시키는 거다.
옛날보다는 좀 느슨해졌다지만 신분제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백정이나 악공, 기생 같은 직업은 여전히 천역(賤役)이다. 특정 직업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라는 게 어디 쉽게 바뀌느냔 말이다. 그나마 이들에 대한 물질적인 대우는 옛날보다 많이 좋아졌다. 왜 좋아졌냐고? 그야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해주면 그치들이 죄다 대남이나 누손, 미주로 가버린 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쉽게 말해 사람값이 올랐다.
해외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꼭 흉년 때문에만 떠나는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든 바깥에서 사는 삶이 여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떠난다. 더구나 출신이 천민이라면 사대부들처럼 자기 조상의 무덤 따위에도 얽매이지 않으니 한층 더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물질적인 대우가 좋아지는 것과 사회적인 인식이 좋아지는 건 별개 문제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그랬는데 여기라고 안 그럴까.
“음, 왔느냐.”
“예, 아버님.”
오늘은 태자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인다. 술도 안 마셨고, 내가 문안인사를 올리니 아주 즐겁게 받는다. 새장가를 든다니까 그런가. 누이와는 눈인사만 교환했다. 같은 부모 몸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나하고 참 닮은 외모라,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하다.
“네 누이의 연주 솜씨가 갈수록 좋아지는 구나. 조금만 더 연습하면 모차르트 악곡을 아주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을 듯하다.”
그야 하루에 여덟 시간씩 강제로 연습하니 실력이 안 들어날 수가 있나. 화원군주가 어린 동생을 돌봐줄 틈이 없는 데는 이 바이올린 연습도 크게 한몫하고 있다. 태자가 북한산성에 처박혀 있을 때는 그래도 연습을 쉬었는데, 돌아오자마자 또 시키고 있다. 내 귀가 깡통이라 그런지 적당히 듣기 좋은 수준인 줄을 알겠다만 얼마나 잘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상희 같으면 들으면 바로 수준을 알려나.
“인현황후께서 쓰시던 양제금으로 연주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 그 귀한 물건을 미숙한 손으로 함부로 다루게 할 수는 없으니.”
태자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아느냐?’며 싱글벙글한다. 내가 그걸 아니까 모았지, 모르고 모았겠냐? 이런 말을 하는 태자가 좀 특이하긴 하다. 황실에서 그 악기들을 여전히 귀품(貴品)으로 여기는 건 그게 유명한 명기(名器)라서가 아니다. 중종께서 모은 수집물 중 하나라 귀하게 여길 뿐이다. 이곳 경희궁 여기저기에 걸린 렘브란트나 루벤스 그림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태자는 중종은 언급하지 않고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악기 자체에 관해서만 계속 말을 꺼냈다. 상희가 언급되긴 했지만 그건 ‘황실 여자들이 악기를 연주해도 된다는 선례를 만들어준 사람’이라는 의미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기생과 악공이 음률을 다룰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건 크게 잘못된 태도다. 일패 기생들은 창과 가무는 물론이고 시, 서, 화를 다루는 솜씨가 웬만한 사대부를 능가한다. 그러면 기생이 하니 시, 서 화도 그만둘까?”
“아버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내가 자기 말에 찬성해주자 태자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왕족이나 귀족 여자들이 악기를 다루거나 그림을 그리는 걸 아주 좋은 교양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며, 대한 사회가 뒤떨어진 증거라고 투덜거렸다.
“그림은 그나마 좋게 보지만, 악기는 안 좋게 본다. 이는 매우 후진적인 태도인지라. 이를 바로잡고자 내가 네 누이에게 양제금을 가르치는 것이다. 새 태자비가 들어오면 그도 배워 함께 연주하게 하리라.”
상희와 올렝카 덕분에 황실에서는 악기 연주를 조금 했다지만 어디까지나 황실 안에서만 했다. 밖에서 시집온 이들도 하지 않았다. 내 모친인 태자비 김씨도 악기 따위는 안 했다. 상희와 올렝카가 쓰던 바이올린을 물려받은 은이의 딸, 의현군주와 의진군주는 오직 대궐 안에서만 연주했으며 집으로 악기를 가져가지 않았다. 당연히 외간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댁 식구들 앞에서도 절대 연주하지 않았다. 이들이 죽은 뒤 악기는 대궐에 남았다.
연주와 이사벨라는 집에서도 즐겨 연주했다. 받은 악기도 대를 물려가며 집안의 가보로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 두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닌 탓에 가능한 일이었고, 보통의 한국 가정에서는 여자가 악기를 다룰 엄두를 못 내는 게 여전한 현실이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황실에서 모범을 보이면 감히 누가 따르지 않는단 말이냐. 음악 연주가 나쁘다고 주장할 생각이 있다면, 그자는 일단 선비가 꼭 익혀야 하는 육예에 왜 ‘악(樂)’이 들어가 있는 지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이다.”
듣고 있으려니 이 개념 없는 태자 놈이 서양 문물에 맛이 가서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아주 작정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세계에서 대한은 원래 세계보다 훨씬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타성도 강해졌다. 기존 체제가 잘했으니까.
혹시 태자는 다소 과한 서구화론자가 아닐까. 너무 급진적인 서구화를 추구하다가 역으로 반동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그 반동이 더 클 거다. 앞서 말했듯이 기존 체제가 크게 변하지 않고 세계적인 강대국을 만들어냈으니까, 이걸 왜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가 전혀 형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억지로 서구화를 추진한다고 하면 반발이 나올 수밖에.
태자가 단순한 망나니라면 사고 친 것만 수습하면 된다. 하지만 과격한 서구화론자라면 – 입헌주의파 민주주의 신봉자인 것 같은 부분까지 포함해서 – 그로 인한 부작용은 방치하면 엄청난 폭탄이 될지 모른다. 아무래도 주의해서 살펴야겠다.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당당하게 대한 사회를 뜯어고치겠다는 포부를 밝힌 태자는 여기서 한 발 더 앞으로 나간 계획까지 늘어놓았다. 이 한양에다 서양식 교향악단을 만들고 오페라까지 공연할 수 있게 하겠단다.
‘도성에서는 우리 국극(國劇) 이외에 당극(唐劇)도 얼마든지 감상할 수가 있고, 판소리나 마당놀이도 흔하게 즐길 수 있다. 그렇다면 유럽식 가극(歌劇)이라고 해서 극장에서 즐기지 못할 이유가 뭐냐.”
그럼 그걸 억지로 권장해서까지 즐겨야 할 이유는 뭔데. 네 취향을 백성들에게 강요하지 말란 말이다. 나도 상희가 좋아한다고 해서 유럽 음악을 전국에 일부러 퍼뜨리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될 리가 없었다.
“장차 여의도에다 커다란 가극장을 짓고 그 안에서 비발디의 가극을 대대적으로 상연하여 이 대한의 위명을 천하에 떨치겠노라. 어떠냐, 네가 들어도 실로 웅대하고 멋지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아버님.”
여의도는 그 여의도 맞다. 그동안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는지 여의도라는 이름이 정착되어 쓰이고 있다. 그런데 여의도에 오페라 극장? 풀밭 약간밖에 없는, 그 쓸모없는 모래섬에 다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고? 이건 무슨 정신 나간 개발사업인가?
“기껏 비발디가 직접 쓴 친필 극본까지 받아놓고 악공이 부족하다. 배우가 없다. 상연할 극장이 없다는 핑계로 백 년 가까이 처박아만 놓는 것도 문제다. 이를 상연할 크고 장려한 극장을 지으면 천 년을 내려갈 서울의 상징이 될 터, 꼭 해야 하리라.”
….제정신이 아닌 게 맞는 것 같다. 이게 다 쓸데없이 나를 소재로 한 오페라를 쓴 비발디 때문이다. 아니, 비발디를 후원한 예카테리나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예카테리나가 돈에 몰리지 않도록 지원해준 내 탓인가? 결국 내 탓인 거야?
26.
비발디….는 현재 대한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서양 작곡가다. 아직 살아 있을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는 물론이고, 죽은 모차르트나 바흐, 하이든도 비발디만 한 인지도가 없다. 왜냐고? 이미 앞에서 말했잖은가. 나를 소재로 오페라를 썼다고. 예카테리나한테 후원도 받았다고.
이 사연도 따지고 보면 기가 막힌다. 자그마치 80여 년 전에 오간 두 대륙에 걸친 교류의 역사가 비발디에게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책에서 비발디에 관해 처음 읽었을 때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었다. 아니, 비발디가 나를 소재로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제목이 「동방에서 온 빈의 기사왕」? 이거 뭐야?
“중종께서 외손녀를 아끼신 데서 나온 일종의 부수적인 결과지요.”
내가 이런 질문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유근밖에 없다. 내가 평범한 어린애가 아니라고 드러내는 상대를 최대한 줄이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김유근은 내 외숙이기도 한 사람이라 그만 특별하게 대하는 게 이상해 보일 리도 없다.
다만 김유근 한 사람만을 통해서 역사를 접한다면 걱정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김유근의 시각으로 해석한 역사를 받아들이는 셈이라 그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 이거 다양한 책을 참고하면서 보완하는 수밖에 없겠다.
“저하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중종께서는 폴수국 국모가 되신 외손녀를 퍽 귀애하시어 종종 편지를 보내시고 내탕금도 내리곤 하셨습니다. 풀수국은 나라 살림이 넉넉하지 않으니 보태 쓰라는 의미셨지요.”
김유근은 그 돈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홍이가 자기는 얼굴 한 번 못 본 외손녀보다 못한 존재라고, 없는 게 낫다고 난리를 친 그때 동짓날 잔치 사건 말이다. 결국 내 죽음으로 이어진. 뭐 이해는 한다.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고 지금 이야기하는 주제하고 직접 연관된 사건도 아니니까.
“폴수국왕비께서는 그 돈을 주로 군비에다 쓰셨지만, 이름 있는 화공과 악공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후원하고 이로써 폴수국 궁정의 명성을 떨치는데도 일부를 쓰셨습니다. 비발디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한에서도 문인 이외에도 화공이나 가희 등을 집에 두고 후원하면서 즐기는 문화 자체는 있다. 그러니 유럽 궁정의 저런 문화도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차이점이 한 가지 있다면 후원자 본인은 절대 붓이나 악기를 직접 잡지 않는다는 거지만.
본래 비발디는 이탈리아에 있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의 후원 약속을 받고 빈에 갔었다. 하지만 가진 재산을 다 털어서 빈에 갔는데 카를 6세가 급사하고 말았다. 후계자가 된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계승전쟁 때문에 비발디 따위를 거들떠볼 여유가 없었고. 그때 비발디를 구원해준 사람이 예카테리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동명 논의 때문에 빈에 사자를 보낸 예카테리나가 비발디의 딱한 사정을 듣고 바르샤바로 초빙했고, 비발디는 다행히도 그 애 덕분에 인생의 마지막 5년을 비교적 편안히 보낼 수 있었다.
“당시 폴수국왕비께서는 중종께서 보내주신 내탕금에 모후인 수빈공주께서 보내주신 돈도 있어서 문객을 몇 명 두는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니셨습니다. 비발디는 그 은혜에 감사한다면 여러 악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가장 큰 가극이 그 작품입니다.”
「동방에서 온 빈의 기사왕」은 제목 그대로 빈 포위전에 종군한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오페라다. 모험을 찾아 이국에 온 동방의 이교도 왕자가 미녀를 얻기 위해서 기꺼이 명마에 올라 창을 잡고 전장에 뛰어든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로맨스 구성에 충실한 작품이었다.
초연은 1743년 바르샤바였고, 그 뒤로도 몇 차례쯤 상연된 모양인데 정확한 기록은 구할 수 없었다. 지금 시대에 그런 자료가 한양까지 흘러올 리가 없지 않은가. 유럽에 직접 가서 뒤져도 파악하기 힘들걸. 태자는 이걸 한양에서 상연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싶어 한다. 하지만 김유근은 이 작품에 관한 내 질문을 받고 전혀 좋게 말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설정이 문제라고 했다.
“중종께서 하신 여러 일들을 과정하거나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건 괜찮습니다. 소설이나 연극이라는 것들을 원래 실제 사실을 그대로 적지 않고 바꿔서 기술함으로써 보는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돈을 내게 하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안 됩니다.”
그건 바로 ‘기사왕’이 얻고자 하는 ‘미녀’가 올렝카라는데 있었다. 이 오페라는 근본적으로 나와 올렝카 사이의 사랑 이야기였고, 두 사람이 맺어져 함께 동방으로 돌아가는 데서 끝을 맺었다. 김유근으로서는 그 결말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폴수국왕비께 후원받은 비발디가 그런 결말을 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내면 우리 대한의 황통이 귀비 소씨의 후예라는 엄청난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가극을 상연하게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우리 황실이 올렝카의 핏줄인 줄 아는 사람이 상당하다고 한다. 이런 오해가 퍼지는 데 비발디도 한몫했을 것은 분명하다. 김유근의 태도가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여의도 오페라하우스에서 이 작품이 공연될 날은 요원하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