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641
4부 025화(1641화)
27.
태자는 스트라디바리우스에 대한 집착이 은근히 강한 모양이다. 의현군주와 의진군주 – 이 아이들은 영이가 즉위한 뒤에 장공주(임금의 친자매)로 승격되긴 했지만, 내게는 군주로 창하는 게 익숙하다 – 가 쓰던 상희와 올렝카의 바이올린은 그 아이들이 손을 놓은 후에는 계속 장악원에 있었는데, 그걸 모두 동궁에다 갖다 놓았다.
바이올린만이 아니다. 중종 때는 딱히 켤 사람이 없어서 장악원 악공들이 사용하게 했던 비올라와 첼로까지 동궁에 갖다 놓게 했다. 태자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몽땅 가져가 버린 탓에 장악원의 양악 악공들은 유럽에 악기를 새로 주문해야 했다. 그건 어디 제품이라더라. 조부는 태자가 저지르는 다른 배행에 비하면 악기 모으기 정도는 양반이라고 생각했는지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태자는 황실에서 소장한 다섯 개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몽땅 동궁에 모아놓고는 그 앞에 서서 이렇게 중얼거릴 수 있었다.
“나머지 스트라디바리우스 두 개도 가져다가 보태서 합주단을 만들야 하는데…..”
‘나머지 두 개’란 연주와 이사벨라가 쓰던 악기들을 말한다. 양쪽 집안 후손들이 중종께서 내리신 귀한 하사품이라고 애지중지하면서 모시고 있다. 남들 앞에서 직접 연주하지는 않고 보관만 하는 중인데, 태자는 그 점을 트집 잡았다.
“어차피 그놈들은 가지고만 있지 연주도 안 한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내가 여기 가져와서 합주단에서 쓰는 편이 좋지 않으냐? 엄연히 악기인데 연주하지 않고 처박아만 놓을 거라면 아궁이에 처넣을 불쏘기개보다 나을 게 뭐란 말이냐?”
흩어진 세트를 다시 모으고 싶어 하는 거야 애호가로서 보일 수도 있는 태도이긴 하다. 문제는 과연 그 악기를 누가 다루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이다. 지금 태자에게는 공식적인 자식이 나를 포함해서 딱 8명 있다. 올해 태어난 막내딸 하나 빼면 딱 일곱인데, 하나씩 떠안기면 딱 숫자가 들어맞는다. 자기 적장녀에게 악기를 쥐어 준 인간이라면 그 밑에 애들한테는 안 시킬까…..”
딸인 길현이와 아지는 내년부터 시킬 게 거의 확실하고, 머릿수가 모자라다 싶으면 나나 운이, 이정까지 끌어내서 합주단을 조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대부는 음률을 꼭 알아야 한다며 끌어내려고 하겠지. 조부가 살아있는 동안에야 나한테까지 억지로 악기를 잡으라고 하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조부도 올해로 환갑이 다 됐다. 언제 조부가 눈을 감고 그 새끼가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지 알 수 없는 나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게 어명이 되어 버린다.
태자가 등극하면 생길 수 있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혹시 연주네 집안과 이사벨라네 집안에서 중종의 하사품인 바이올린을 끝까지 내놓지 않겠다고 하면 강제로 뺏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무종 이후 황실에서 백성들의 물건을 강탈하는 임금은 여태껏 없었다. 태자가 정말 내가 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전부 모으고 싶다면, 부디 합당한 값을 치르고 사들여 주기 바란다. 그게 도리니까.
28.
이사벨라와 옭힌 추억이 바이올린만 있는 건 아니다. 재위 말년, 크리스마스쯤이면 함께 마포성당 인근에 크리스마스 축제를 구경하러 가곤 했다. 물론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변복하고 말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요즘 마포는 어떤지 가보고 싶어졌다.
“아니 되옵니다, 저하. 저하께서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신데, 벌써 무슨 미행을 나가신단 말입니까. 더 자라실 때까지 참으시옵소서.”
“거창하게 미행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잠시 바깥 구경이 하고 싶은 것뿐이다. 수업이 끝나면 잠깐만 나갔다 금방 들어오겠다.”
“그래도 아니 됩니다, 저하. 정 나가시려거든 주상 폐하께 윤허를 받으소서!”
그런데 그대를 생각하며 한번 외출할까 싶었더니 송현승이 절대 안 된다고 막아섰다. 이 추운 겨울에 남몰래 밤 나들이를 가다니 말이 되느냐며, 혹시 나한테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태손궁에 있는 궁인들은 모조리 치도곤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잠깐만 나갔다 오면 그만인데 무슨 불상사가 생긴다는 말이냐?”
“저하께서 고뿔에 걸리시기만 해도 소인들에게는 엄청난 불상사이옵니다!”
틀린 말이 아니니까 나도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덟 살, 만으로 일곱 살밖에 안 된 내 몸으로는 몰래 대궐 담장을 넘어서 혼자 마포까지 가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아직 어리니까. 같이 가줄 사람이 필요하다.
친왕들에게 익위사가 있어 경호를 맡듯이, 태손의 경호는 태손위종사(太孫衛從司)가 맡게 되어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정식으로 태속 책봉을 안 받았기 때문에 위종사가 없다. 젠장, 그럼 강서원도 없어야지 왜 위종사만 없는데? 하여간 위종사가 없으므로, 현재 내 경호는 태자를 경호하는 익위사 관원 몇 명이 파견을 나와서 맡고 있다. 나는 이들에게 지시를 내릴 권한이 없고, 이들이 내 무단외출을 도와줄 리도 없다.
그래서 송현승을 데리고 살짝 나갔다 오려고 했다. 그런데 본인이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거부하니 방법이 없다. 아, 이 깐깐한 아재 같으니. 투덜거리면서 동궁으로 문안을 올리러 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불평을 토로했다가 전혀 생각지 못한,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나올 게 뻔했던 말을 들었다.
“멍청한 녀석, 박에 나가고 싶으면 이 아비한테 말하면 될 것을 왜 송 내관한테 말한다는 말이냐? 내보내 주지도 않으면서 감시만 엄중해질 게 뻔하지 않으냐? 너는 바보냐?”
….확실히 태자한테 바보 취급당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와 가장 친한 송현승이라면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줄 알았단 말이다.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할 줄 누가 알았는가.
이틀 뒤, 태자는 늘 그렇듯이 태연하게 대궐 문을 나섰다. 태자의 밤 나들이는 하도 자주 있는 일이다 보니 대궐 수문장들도 아무 말 없이 통과시킨다. 막아 봐야 담 넘어 나가니까.
“태자께서 미행을 나가신다! 문을 열어라!”
“에, 나리!”
태자가 민심을 살피러 미행을 나가는 게 아니라 술 먹고 놀러 나가는 길이라는 건 태자도 알고 궐문을 경비하는 금군들도 안다. 하지만 말만이라도 미행이라고 해서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금군들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됐다, 고개를 들어라.”
“예, 아버님.”
궐문을 통과할 때는 적당히 차려입고 시동인 척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태자는 평소에 외출할 때도 사람을 서너 명씩 데리고 다녔으므로 금군들은 내 얼굴은 자세히 보지 않았다. 궐문에서 멀찍이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태자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묵직한 손으로 내 어개를 두드렸다.
“어떠냐, 별거 아니지? 어디든 가도 좋겠으나 오늘을 네가 마포에 가보고 싶다고 했으니 용산에서 기차를 타도록 하자. 용산역까지 걸어가면 시간이 걸리고 힘도 드니, 길을 지나는 합승차를 타고 역까지 가자꾸나.”
공식적인 행차라면 경희궁 내에 설비된 특별역에서 바로 승차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을 몰래 나가는 밤 나들이니 용산역에서 일반열차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합승차(合乘車)는 지난번 생에 등장했던 증기 버스를 말한다. 이젠 도성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예, 아버님.”
눈치를 보니 함께 나온 익위사 관원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이거, 내일 아침에 당장 조부한테 불려갈 게 뻔하겠구나.
29.
용산에서 마포까지는 멀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려 직접 본 마포 거리는 옛날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마포 일대는 경희궁 앞에 펼쳐진 강촌 못지않은 번화가가 되어있었다. 마포가 유흥가로 번성하는 이유는 그저 세월이 흘러간 탓만은 아니다. 사대문 안 도성은 지금도 통행금지가 엄격하게 적용되는데, 성벽 밖인 마포는 그 적용을 안 받는 탓이 크다. 그러니 밤새워 놀고 싶은 이들이 마포 인근으로 몰리면서 이 지역에 불야성이 펼쳐진 거다.
사람과 돈이 몰리니 자연스럽게 건물도 커졌다. 대궐 안쪽이 들여다보이는 문제도 있어서 사대문 안에서는 여전히 3층 이상 올라가는 건물을 지을 수 없지만, 이곳 마포에는 층고에 대한 제한이 없다. 그래서 4층, 5층 건물도 여기저기 서있다.
“너는 태손궁 안에서 글만 읽고 있으니 세상이 이런 줄은 몰랐겠지?”
배알이 꼴리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예….그렇습니다.”
지나간 80여 년 동안 세상이 얼마나 변했다고 글로 읽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신기해하는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태자는 연신 주변을 손가락질하며 저건 뭐다, 저건 뭐다 하며 가르쳐주었다.
“저기는 역사가 2백 년이나 되었다는 시계점이다. 주인장이 아주 솜씨가 좋지. 내년에 네 생일에는 저기서 시계를 사마 맞춰 주마.”
“감사합니다.”
2벽 년은 개뿔, 85년 전에 이 일대는 모조리 텅 빈 벌판이었는데. 상점 주인과 태자, 둘 중 하나가 가게 내력을 부풀린 게 분명하다. 과연 둘 중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시계점의 역사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오랜만에 크리스마스를 맞아 떠들썩한 마포 거리에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즐겁다. 나중에 상희랑 재회하면 함께 와야 하니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열심히 익혀 두었다. 내가 주위를 기울여 듣는 것 같으니 태자도 신이 난 모양이었다. 주변의 시선을 조심해야 하다 보니 목소리는 작은데, 그 어조에는 확연하게 흥이 올랐다.
“저기가 마포성당이다. 장조께서 도성을 지킬 거점으로 삼고자 짓도록 하신 곳이지, 혹시 오새가 필요하셨으면 그냥 요새를 지으셨으면 됐을 것을.”
태자는 아무리 유사시에만 이라고 해도 종교시설을 군사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매우 거부감을 품은 모양이었다. 나 말고도 따라오며 듣는 사람이 있으니 대놓고 장조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는 그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명확했다.
“내가 이렇게 얘기한들 네가 알아듣겠느냐만.”
한마디 던지고는 나지막하게 폭소를 터트렸다. 그래, 계속 나를 그렇게 어린애로 봐주라. 괜히 과대평가해서 견제하거나 괴롭히지 말고.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자. 여기 음식이 맛이 좋다.”
‘베르사유의 백합’이라는 프랑스어 간판은 술집인지 음식점인지 바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태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멋들어지게 지은 3층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떠냐, 내 말이 맞지 않느냐. 맛이 좋지?”
“예…..좋습니다.”
좋지, 좋을 수밖에 크리스마스가 다 되어가는 한겨울에 뜨거운 서현차와 아이스크림을 먹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곱게 간 얼음이나 눈에다 꿀을 뿌린 빙과(氷菓)가 아닌, 우유를 얼려서 만든 진짜 아이스크림이다. 대한에서는 감설병(甘雪餠)이라고 한다.
아이스크림 자체는 대궐에서도 가끔 먹었다. 미식가인 조부가 아이스크림도 즐기는 탓에 종종 한 접시씩 맛을 볼 수 있었다. 조부와 겸상하면서, 이쪽 세상에서 처음 아이스크림을 보고 눈을 의심했던 날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다만 조부는 여름에만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고로 나도 여름에만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겨울에 아이스크림이라니, 심지어 대궐에서 먹은 것보다 이 가게에서 낸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었다!
태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주인은 프랑스인으로, 내란 때 도망쳐 나온 귀족이라고 했다.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돌다가 여기까지 흘러왔다나. 내게는 서현차와 아이스크림을 시켜 주고 자기는 따뜻하게 데운 뱅쇼 – 포도주에 과일, 향료, 설탕등을 넣어 끓인 음료 – 를 마시는 태자의 입에서 설명이 계속 흘러나왔다.
“감설병도 감설병이지만, 주인이 직접 만드는 채소무침이 또 무척 뛰어나지. 나중에 너도 한번 맛을 보도록 하여라.”
채소무침….이라는 건 샐러드겠지, 아마도. 그런데 귀족이라면서 직접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샐러드를 무쳐? 그것도 왠지 신분을 부풀린 사기꾼 같은데. 아까 2백 년 된 시계점 운운도 그렇고….태자, 의외로 허언증인가. 아이고, 됐다. 음식만 맛있으면 됐지. 프랑스 식당 요리사 본래 신분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그보다는 다른 게 신경 쓰인다. 태자는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처음에는 순전히 개새끼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하는 걸 보면 그냥 평범한 아버지랑 다를 게 없잖아? 나가 놀고 싶어 하는 아들 데리고 나와서 구경시켜주고, 맛있는 거 사주고, 대체 뭐야?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면서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을 정리했다. 태자 이 자식, 생각하는 건 어딘가 황당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지만, 혹시 본래 인간성은 그렇게까지 나쁜 놈이 아닌 게 아닐까? 그래서 요즘 나한테 잘 대하는 거고?
나보고 공부하지 말라고 했던 건 정말 살인적인 공부량에 내가 치여 죽을까 봐 진심으로 걱정해서 그런 겨였을지 모른다. 대한의 태손에게 주어지는 공부의 양이 얼마나 엄청난지는 내가 요즘 실감하고 있지 않은가. 태자는 이 지독한 학습과정을 나보다 먼저 겪었을 테고, 당연히 지쳐 나가떨어졌을 거다. 나만 한 지식과 경험이 있을 턱이 없으니까. 그러니 나한테도 살살 하라고 경고한 거고.
이 커다란 나라를 혼자 다스릴 수 없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문제는 갑자기 큰 변화를, 제대로 된 사전 준비도 없이 시도한다면 엄청난 충격이 몰아칠 거라는 부분이지, 그런 면에서 태자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한 가지만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나를 죽일 뻔했던 그놈의 미친 음주운전에, 사고 이후에 자기 처자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 태도 말이다.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건가?
그동안 몇 번이나 따져 묻고 싶었지만, 대궐 안에서 그런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조심해서 말을 꺼낸다 해도 싸움 나기 딱 좋은 주제고, 부자간에 말다툼을 벌였다는 소문이 대궐 안에 퍼져서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다. 말다툼이라야 내가 일방적으로 까였겠지만. 내 머릿속은 이렇게 복잡한데 태자는 그저 즐겁기만 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마포성당의 역사와 그에 얽힌 여러 잡다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성당에서 후금 대칸이 묵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어봤느냐?”
“아…스승님께, 아니 큰 외숙께 들었습니다.”
태자가 말한 후금 대칸은 부수다. 사상 최초로 한양까지 찾아온 후금 대칸이던 부수가 내 장례식 때 머무른 숙소가 마포성당이었다. 태자가 꺼낸 건 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