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65
1부 165화
– 1 –
갑자기 명나라 사신이 왜 오겠다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평안도 관찰사가 올린 상세한 장계를 보니 그 대략적인 연유는 짐작이 갔다.
“니마차가 잡아두고 있던 대국인들을 송환한 데 대한 사의(謝儀)를 표하며, 그 외 몇 가지 사안을 의논하고 싶다고?”
“그러하다 합니다.”
중국인들을 구출해서 송환해준데 대해서 명나라 조정이 감사를 표하는 정도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그 목적 때문에 칙사를 보낼 필요는 없다. 북경으로 찾아오는 조선 사신 편에 고맙다는 칙서를 보내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다.
결국 방점이 찍히는 용건은 뒤쪽에 막연하게 작은 ‘그 외 몇 가지 사안’이 분명하다. 놈들이 도대체 무슨 안건을 가지고 직접 찾아올 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걸까.
“혹시 세자 책봉 문제가 아니겠사옵니까?”
“세자를 책봉해 달라는 주청(奏請)도 올리지 않았는데 무슨 책봉이란 말인가.”
세자가 될 내 맏아들, 중전 신씨 소생인 원자 이황(李??)은 아직 세 돌도 안 지났다. 아무리 타고난 후계자라지만 세자로 책봉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유아사망율도 높은 시대인데, 적어도 10살은 되어야 세자 책봉 운운할 때가 되지 않겠는가.
의정부에서 그 문제로 토론을 나눠 보니 뜻밖에 간단히 결론이 나왔다.
“지난번 칙서에서 정계(定界)를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필시 정계 전 단계로 감계를 하자고 찾아오는 칙사일 것입니다.”
병조판서 임사홍이 굳은 표정으로 아뢰었다.
“그동안 백여 년에 걸쳐 야인을 상대로 군사를 내었으나 이번만큼 크게 성과를 거둔 사례가 없습니다. 대국이 군대를 내었을 때도 이만큼 큰 전과는 거두지 못했습니다.”
여러 지휘관들이 솔직히 작성한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이번에 거둔 대승리는 우리가 잘나서 거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저놈들이 알아서 대규모로 삽질을 한 탓에 이긴 거다. 하지만 그걸 지금 따지는 건 의미가 없겠지. 이럴 때는 결과가 말하는 법이니까.
“신이 판단하기에도 병판의 말이 맞나이다. 대국 조정에서는 우리가 저들이 생각한 바보다 쉽게 큰 승리를 거둠을 보고 경계심을 품었음이 분명합니다. 저들이 과연 어느 선으로 정계를 하자 제안할지는 알 수 없으나, 준비는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예조판서 김감도 임사홍에게 동조하는 뉘앙스로 발언했다. 김감은 글 잘 쓰고 내 비위도 잘 맞추지만 무능하지는 않은 사람이다. 이들 둘 이외에 다른 신하들 중에는 또 다른 걱정거리를 내놓는 자들도 있었다.
“지난번 조총 때처럼 우리가 화포를 쓰는 제도가 새어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구출한 한인들이 가능한 화포에 범접하지 못하게 했다고는 하나, 그중에 누군가는 야포가 움직이는 형태를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대국에서 야포와 포가를 보내라 하면 그 난리를 어찌하겠습니까. 조총보다 훨씬 만드는 수고도 많이 듭니다.”
자라 때문에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이건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고 있네. 그런 걱정은 닥쳤을 때 하면 된다.
“모두 억측일 뿐이다. 설사 대국에서 우리 야포를 요구한다 한들, 걱정할 일이 없다. 적당히 만들어 보내주면 되지 않느냐?”
“의외네. 너 예전에는 명나라 군대에 대한 화력 우위를 유지하야 한다면서, 총은 넘겨줘도 포는 절대 안 줄 거라고 하지 않았어? 지나가는 말이긴 했지만.”
“그랬었지.”
오늘도 상희한테 왔다. 상희의 태도가 바뀌고는 종종 찾았었지만 원정 중에는 발을 끊었다. 수천 군사가 내 명에 따라 북방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데 나는 궐 밖에까지 나가서 여자친구나 만나러 다니다니,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언제 무슨 연락이 올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원정이 성공하고 장병들이 돌아온 뒤에야 다시 상희를 찾을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개선식 전에 와서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찜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대포에다가 바퀴를 달아서 끌고 다닌다는 정도 아이디어는 하나도 특별한 게 아니더라고. 쟤들도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알면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단 말이지.”
중요한 건 이동 가능한 포가를 만들어 야포를 운용한다는 사실 정도가 아니다. 가능한 많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구조, 그리고 운용 방법에 대한 노하우다. 바퀴 달린 포가라는 개념 자체는 모방하기도 쉽고, 부족한 점은 쓰면서 개선해나가면 그만이다.
“혹시 명나라에서 자기네한테 포가도 보내달라는 요구가 오면, 적당히 수레 짜 맞춰서 구형 총통 얹어준 다음 바가지로 돈 받아먹으면 돼. 이게 그거 맞는지 어떻게 알겠어.”
우리 야포에 얹은 포는 수력천공기로 깎은 신형 총통이다. 성종 시기까지 만든 구형 총통들은 아직까지는 일단 배치해두고 있지만 순차적으로 회수해서 녹여 재활용할 생각이다. 쓰지도 않고 놓아만 두는 것도 낭비니까 말이다.
이 총통들이 수백 년 뒤에는 전부 역사적 유물이 될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좀 아깝긴 한데 멀쩡한 금속자원들을 쌓아두고서 새로 생돈을 들일 수도 없으니 아쉬운 노릇이다. 조선에서 구리 값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보존용으로 몇 개만 따로 빼다가 전시관이라도 만들까.
“듣자하니 명나라 호부에서는 우리한테 주는 조총 값이 아까워서 죽을 지경이라고 하더라. 포가 같은 건 자기들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데 왜 조선에다가 그 돈을 퍼붓자고 하겠어?”
“하긴 수레 같은 건 명나라가 더 잘 만들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그쪽에서 더 많이 쓰니까.”
상희도 기본적인 역사교육은 받았다. 중국에서는 배와 수레를 사용한 국내 교통이 조선보다 훨씬 발달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고개를 끄덕여서 내게 동의한 상희가 탁자 위에 있는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김이 오르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화제를 바꿨다.
“요즘은 너랑 나누는 화제가 확실히 달라진 것 같아. 예전에는 도성 백성들 동향 듣는 거 말고는 한국 이야기만 죽어라 했는데, 요즘은 나라 어떻게 다스리고 외교를 어떻게 하고 그런 이야기도 하네.”
“그랬던가? 나라 다스리는 이야기는 꽤 전부터 했었잖아?”
“백성들 민심만 들었다고 방금 말했잖아. 그것도 혜민서 있을 때뿐이었어. 그 뒤에 이렇게 집에 찾아왔을 때는 한국 이야기만 주로 했었지.”
아, 그러고 보니 그랬구나 싶다. 상희 보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던 그때. 낮에 만나지 못한 날이면 종종 밤에 찾아왔다. 그리고 온갖 한국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다가 궁으로 돌아가곤 했다. 업무시간 외에 만나면서 국정 따위를 논하고 싶지 않았다.
곰곰이 기억을 되새겨 보니 상희가 내의원으로 옮기고, 함께 승마를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그 뒤로는 정치 이야기를 아예 관두게 되었지 싶다. 상희도 밑바닥 민심 이야기를 들려주기 힘들게 되었고, 스트레스가 심해 보이는 모습에 나도 왠지 짐을 더해주기 껄끄러웠다.
그 뒤로 우리 둘 사이에 주고받은 화제는 무난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한국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번 원정을 마치고 나서는 딱히 특별한 결심 없이도 국정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서로를 더 부담 없이 대할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닐까?
“외교 같은 건 솔직히 듣다 보면 좀 부담스럽지. 내가 비선실세도 아닌데, 그냥 떠오르는 대로 괜히 한 마디 했다가 네가 그대로 따라하면 어떡해. 이 세상은 우리 세상이랑 돌아가는 논리도 다르잖아.”
“예전엔 내가 정치하는 거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말 많았잖아? 사람 죽이더라도 잔인하게 죽이지 말라고 잔소리도 하고.”
상희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땐 왕이면 뭐든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알았지. 거기다가 넌 연산군이잖아.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뭐가 아니었어?”
“혜민서에 있으면서 네가 나라 다스리는 이야기 듣기만 할 때까지도 임금은 원하는 일이면 뭐든 이룰 수 있는 줄 알았어. 그저 네가 권력 강화랑 영토 확장에만 관심이 있어서 안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희가 한숨을 쉬었다.
“내의원에 있으면서 조금 더 가까운 데서 보니까 조선의 왕이라는 게 절대로 편한 자리가 아니더라. 임금이 한 마디 한다고 신하들이 바로 따르는 것도 아니고. 정책 하나 내고 시행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논의가 따르는지도 그때에야 알았어. 그게 얼마나 힘든지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상희가 이런 모습, 임금으로서의 나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날이 오다니. 이게 꿈은 아니겠지.
중전이나 두 숙의도 내 고충을 모르지는 않는다. 다만 세 사람은 그게 임금이 갖는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위로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희는 다르다. 상희는 내가 현대인이고, 평범한 대학생이었음을 알고 있다. 평범한 대학생, 학과 공부에 공시 준비나 하던 내가 갑자기 짊어지게 된 조선의 임금이라는 부담, 그 자리가 안기는 중압감을 곧바르게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위로주 한 잔 쏠게. 마실래? 이야기만 하면 황주댁이 바로 술상 차려올 거야. 생각해보면 우리 인연도 벌써 근 십년인데, 아직 마주앉아 술 한 잔 한 적이 없잖아.”
술을 마시자고? 정말?
그동안 정 도사네 집에서 셋이 마신 적은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상희네 집에서, 그것도 둘이서만 술을 마신 적은 없었다. 가끔 생각이 안 난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술김에 실수라도 해서 다시는 얼굴 마주보기 힘든 일 생기면 어쩌나 싶어 꾹 참았다. 상희도 권하지 않았었다.
놀라움이 이어지는 날이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상희가 피식 웃었다.
“왜, 미성년 음주로 걸릴까봐 그래? 나 이제 조선 나이로도 스물하나야. 그리고 조선에서는 열여섯 살이면 호패 나온다? 내 호패 보여줄까?”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농담인 거 안다. 조선에서는 법으로 규정된 음주연령 따위가 아예 없으니까 말이다. 상희도 마주 웃었다.
“음, 다지가 밖에서 기다리는데 나 혼자 안에서 술 마시기는 좀 그러네. 불러들여서 같이 마시자니 네가 불편할 테고….”
다지 핑계는 댔지만, 사실은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갑자기 술을 마시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른다는 게 무서웠다. 주변 사람들 말로는 내가 취하면 일단 말이 많아지고 그 다음에는 그냥 엎어져서 자 버린다고 했다. 잠든 뒤는…나도 모르겠다.
행여 상희와 아무 일 없다고 해도 문제다. 말 많아지는 거야 그렇다 치고, 여기서 자버리면 아침에 궁에서 난리가 날 거다. 혼자 속으로 고심하는데 상희가 괜찮다는 듯 웃었다.
“난 괜찮은데. 혹시 네가 불편한 거 아냐? 그럼 다음에는 편하게 혼자 한번 와. 휴, 저번에 다지한테 휴가 줬을 때 그때 혼자 오지 그랬어.”
원정에서 복귀한 다지에게 한 달 정도 휴가를 줬었다. 당연히 다지 뿐만이 아니라 겸사복과 내금위에서 차출된 군사들 모두에게 준 휴가였다. 그 시기에 상희한테 두 번 왔는데, 혼자서 외출하기는 조금 그래서 입이 무거운 선전관 두 명을 골라서 각각 한 번씩 데리고 왔었다.
“그러고 보니 다지한테 썸남 생겼다며? 어떻게 됐어?”
“아, 이장곤.”
지난번에 왔을 때 해준 이야기다. 북정 동안 있었던 사건들 중에 상희가 관심 가질 만한 것들로 골라서 들려줬는데, 그중 다지와 이장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희가 무척 흥미를 보였었다.
“그래. 몇 달 동안 황야를 헤매면서 부부 행세에, 전투를 벌일 때는 둘 다 맹활약에, 다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 이씨 군관이 구해주기까지 했다며. 완전 플래그 섰네 섰어. 나이차가 좀 많이 나는데, 둘이서 서로 좋다면야 뭐 괜찮겠지. 기왕 나섰으니 중매 잘 해봐.”
“주, 중매?!”
“너도 그 커플 이어주려고 이씨 군관을 선전관으로 옮긴 거 아냐? 겸사복이랑 선전관이면 서로 얼굴 볼 일도 많잖아. 난 네가 일부러 그렇게 한 줄 알았지.”
“그런 건 아닌데….”
딱히 남의 연애사에 개입할 생각은 없다. 다지건 이장곤이건, 만약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스스로 찾아야지, 내가 중간에서 뭐 어떻게 할 게 아니잖은가.
혹시 둘 중 하나라도 나한테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한다면야 이어줄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나서서 오지랖을 부릴 생각은 없다.
“알았어. 그럼 다음에 다지 떼놓고 혼자 와. 둘이서 편하게 한 잔 하자.”
“그…래.”
– 2 –
상희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한번 정말로 둘이 마주앉아 술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봐야 알 수 있으려나.
상희 이야기를 듣고 보니 확실히 이장곤이 취하는 태도가 좀 수상하긴 하다. 왠지 궁 안을 돌아다니면서 주변을 자꾸 살피고, 내게 왔을 때 다지가 있을 때와 없을 때 분위기가 차이가 난다. 다지는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건만.
일단은 좀 더 모른 척 해야겠다.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자기가 다지한테 관심이 있으면 프러포즈를 하든지 나한테 청을 하든지 하겠지. 상희 말대로라면, 여전사 캐릭터인 다지한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어서 더 열심히 전공을 세우러 전장에 나가지 않을까?
그보다는 더 중요한 문제가 많다. 명나라에서 칙사가 오기 전에, 다른 정리할 일들 다 마쳐놔야지.
연말이면 늘 정산하는 내수사 결산은 올해도 짭짤했다. 고래잡이에서 거둔 수익은 작년만큼 나와서 6만 석, 각지에 있는 은광에서 2천 냥을 얻었다. 소금과 석탄에서 얻은 수입을 합치면 총 15만 석에 달했다. 백성들에게 구휼 등등으로 인심을 쓰고 남은 것만 따져도 이 정도였다.
나만 주머니가 두둑해진 게 아니고, 국고도 풍족해졌다. 날씨가 좋아서 올해 농사도 잘 된 덕이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농사가 잘 되면 시험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할 경기도 지역에서도 조세 인상에 대한 거부감이 약해질 것이다.
“앞으로도 쭉 농사가 잘 되었으면 좋겠구나.”
더구나 내년에는 일본 원정을 나갈 예정이다. 그러려면 더더욱 농사가 잘 되어야지.
지금 규슈에서는 쇼니 씨와 오우치 씨가 대립상황을 이어가고 있는데, 전반적으로는 오우치 씨가 우세하지만 아직 쇼니 씨를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에 조선군이 가세하면 결정적 타격을 줘서 쇼니 씨를 자빠트릴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명나라에서 걸어온 교섭을 끝낸 뒤에야 일본 원정도 나갈 수 있다. 올해는 북방 원정 뒷수습을 하면서 명나라랑 정계를 마무리하고, 내년에 규슈를 치도록 하자. 어느 쪽 일이건 북방 탐사는 병행할 수 있으니까 별 부담은 갖지 않아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