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651
4부 035화(1651화)
12.
누벨 프랑스와 멕시코 제국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 이웃인 미주에도 큰 변화가 하나 있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펄쩍 뛰었을 이야기다.
“아쉬운 일입니다. 이 대한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올바른 가르침이 바다 저편까지 확고하게 퍼졌어야 하는 것을요. 소승들이 의무를 태만하게 한 탓입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정약용의 조카, 정하상 바오로가 마포성당을 구경하러 온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정하상이 책임질 사안이 아니다.
“괜찮소. 그것이 어찌 그대들의 탓이겠소. 바다 건너 외로운 땅에서, 마음을 기댈 곳 하나 없었던 가엾은 백성들이 많았던 탓이지.”
장조 시절, 처음 백성들을 바다 건너로 이주시키면서 종교 같은 데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 자신이 종교가 없으니까 그런 걸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런 건 개인의 사생활에 해당하는 문제니, 각자 알아서 챙기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종교를 따로 권하지 않아도 백성들 대부분은 유고 윤리에 따라 생활했고, 미주에 가서도 각자가 알아서 제사를 지내고 향교를 찾으며 임금과 조상을 섬기는 법을 배웠다. 그 정도면 내게는 충분했다. 물론 내가 내버려 둬도 종교인들이 스스로 전도하러 다녔다. 많지는 않아도 절이 곳곳에 들어섰고 성당도 세워졌다. 특히 스페인령 누에바 에스파냐와 가까운 남미주에는 우리 본국 쪽과 누에바 에스파냐 양쪽에서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가톨릭이 제법 많이 퍼졌다.
“저희가 더 열심히 전도해서 북미주에도 교회의 뿌리를 확실하게 내렸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장조께서 금지하신 이래 3백 년 동안 우리 대한의 강역에 발을 들이지 못한 삿된 종자들을 계속 막을 수 있었을 텐데요…..”
내가 분명히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고 타일렀건만, 정하상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탄식했다. 아니, 북미주에 개신교가 퍼진 게 왜 댁의 탓인가. 다 멋대로 돌아다닌 미국놈들 탓이지.
장조 시절에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으로 인한 후폭풍을 보고, 성친왕 시절에 러시아에 가서 만난 위그노 출신 고문관 달레 대령이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사람인데 종교적으로는 골통도 그런 꼴통이 또 없는 것을 보고 학을 뗀 나는 개신교를 금지했다. 아직 너무 독선적이었다. 다른 내 후계자들도 개신교 금제를 풀지 않았다. 딱히 풀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우리와 긴밀하게 교역하는 나라 중 개신교 국가가 있었다면 달랐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프랑스나 스페인은 철저한 가톨릭 국가였고, 러시아는 졍교회를 믿었으며 네덜란드는 선교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영국도 선교보다는 장사를 택했다. 덴마크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이 평온하던 종교 지형에 지진을 일으킨 존재들이 바로 미국인들이다. 금세기 초,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가 북미주로 들어와서 우리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문에는 종교 전파와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양측 모두 굳이 언급할 필요를 못 느껴서 였다. 그런데 북미주에 장사하러 오는 미국 교역상 사이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꽤 섞여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통과하는 교역 거점을 중심으로 개신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과 장사할 때 유용한 영어를 가르친다거나, 무의촌에서 병을 치료해준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조정에서 이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개신교 신자들이 생긴 뒤였다. 심지어 미주 원씨 가문, 원사웅의 후예인 그 원씨 집안이 통째로 개종해버렸다. 지가 막힌 상황이었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유주 열국(列國)과의 조약에서는 개신교 션교를 금지한다는 조항을 조약문에 넣었지만, 미주합중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할 때는 넣지 않았습니다. 외무부에서 저지른 실수였습니다.”
백여 년이 넘도록 새신교 문제는 조정에서 논란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조약문을 작성한 담당 관헌들도 그 문제를 떠올리지 못했다. 미국 측에서도 그 문제를 굳이 끌어내서 논란거리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조정에서는 북미주에서 종교 문제가 터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핀에 느닷없이 날아든 소식이 종교 때문에 빚어진 충졸이었다.
“본국에서 건너간 일부 관헌들이 ‘반주교 선교 금지’에 관한 옛 조약을 더올리고는 임의로 금교령을 내리고 배교를 명령했습니다. 따르지 않는 백성들을 잡아다가 몽둥이질도 했지요. 이에 반발하는 신자들이 연대하여 사발통문을 돌리고, 주상께 상소를 올렸습니다.”
연명상소에다 이름을 적은 개신교 신자 숫자만 적어도 수천에 달했다. 그러지 종교 담당 부서인 예무부 관리들이 발칵 뒤집혔다. 기존의 조약에 명시된 바는 ‘외국인의 반주교 국내 선교를 허용하지 않는다’였지, ‘반주교를 믿는 내국인을 처벌한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미주에 거주하는 개신교도들이 올린 상소에서 말하기를, ‘우리 대한에서는 충효의 도를 어기지만 않는다면 누구든 그가 믿고 싶은 바를 믿을 수 있사온데, 어찌 저희에게만 그것을 금지하려 하시옵니까. 부디 허용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지요.”
아예 벽이 뚫리지 않았을 때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이미 벽에 난 구멍으로 물이 흘러와 땅을 적신 상황이다. 이를 되돌리려면 젖은 흙을 모두 파내 불구덩이에 넣고 말리거나 담장 밖으로 내던지는 수밖에 없는데, 북미주의 민심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개신교는 옛날 무종 시절의 미륵교처럼 충효의 도를 어긴 적도 없다 보니 금지할 명분도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신교를 용인하셨습니다.”
덤으로 그전까지 반주교(叛主敎)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 불리던 공식적인 명칭을 개신교(改新敎)라고 바꿔준 사람도 조부였다. 이 허교령(許敎令)을 받아 든 북미주 개신교 사회는 기뻐하며 환호했다.
물론 조부가 개신교 신자들에게 당근만 건네준 건 아니었다. 채찍, 아니 육모방망이도 그 옆에 함께 있었다. 천주교를 허용할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국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법률에 따라 처벌하리라는 경고가 있으셨습니다. 그 경고를 무시하고 죄를 범한 자들이 백여 명쯤 처벌을 받았지요.”
가벼운 배형과 노역형 정도로 처벌받은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빙주로 보내는 유배형을 받은 자들도 있다. 소란을 피웠다는 명목으로 미국인 선교사가 추방되기도 했다. 이런 난리를 겪으면서도 북미주에서는 개신교 신자가 착실히 늘고 있다. 하지만 내 눈에 그 양반들이 보일 날은 아직 멀었으리라. 그것도 자기들이 둔 제약 때문이지만 말이다.
개신교 신자들은 임금의 신위에 절을 올리는 정도 예법은 따른다. 군주의 상징, 깃발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로 간주해서다 하지만 국가 제사에서 모시는 여러 신에게는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러니 본국에 와서 고관이 될 일은 죽어도 없다. 그러니 볼 일이 없다.
아마 국가 제사 문제 때문에라도 출세를 원하는 사회지도층에 개신교가 확산할 일은 없을 거다. 원래 역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20세기 중반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이처럼 북미주 촌구석에서 개신교가 퍼지는 상황을 알고 난 뒤에도 조정에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도의 수도 고작 수천에 불과한데다 미륵도처럼 역란을 꾸미는 것도 아니고, 덕성도처럼 절대적인 존중을 받는 교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걱정할 까닭이 없었다.
천주교가 일본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일부 신도들이 그랬듯이,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등 소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괜찮다고 보았다. 유럽에서도 종교전쟁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사실이 그런 안도감을 주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원래 세계에서도 개신교 때문에 부정적인 경험을 많이 해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지금 사회적 대세를 보니 내가 나서서 개신교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되어가는 상황을 보면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밖에
“다 저희 잘못입니다. 저희가 잘했으면 그자들이 뚫고 들어올 큼도 없었을 텐데요.”
정하상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건 정하상 탓이 아니라고 그저 어쩌다 보니 그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계속 위로해주어야 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예수회 애체 논란에 휘말려 조선 교구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게 정하상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13.
예수회는 장조 시절에 처음 조선에 들어온 이래, 거의 150년에 걸쳐 이 나라에서 천주교 선교의 주도권을 쥐었다. 주교직도 예수회 소속 성직자들이 이어받았다. 원래 역사에서라면 제사 문제로 논쟁이 벌어져 밀려났겠지만, 이쪽 세상에서는 그 운명도 피했다. 원래 역사에서 예수회가 패했던 건 가톨릭교회 내에서 일종의 근본주의적인 교리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수도회들이 천주교의 근본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오랜 동방 선교 경험을 쌓은 예수회는 현실적인 적응에 비중을 두었다. 교황청은 전자를 택했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달랐다. 원래 역사에서는 이 논쟁에 끼지 않았던 동방의 군주들, 대한 태황과 후금 대칸이 적극적으로 예수회 편에 섰다. 예수회의 방식이 옳았다는 증거로 이 이상 가는 것은 없었고, 예수회는 계속 동아시아 선교에서 지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유럽 내의 정치적 갈등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예수회를 탄압하고 그 입장을 교황아ㅔ게도 강요하자 클레멘스 13세는 예수회를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 정치적인 배경까지 세세하게 늘어놓을 건 없겠고, 하여간 결과는 그랬다.
“목종께서는 로마 법왕이 예수회를 해산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못마땅해 하시며 그 문제를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로마에서 그 서한에 답을 보내는 데는 4년이 걸렸고, 답서가 도착했을 때는 목종께서 이미 붕어하신 뒤였습니다.”
선이가 보낸 국서에 대한 답은 조부가 받았다. 그리고 그 답서 내용은 엄청나게 길고도 장황했지만, 요점만 뽑으면 ‘이것은 우리 교회 내의 일이나, 조선 임금께서는 간섭하지 말아 달라’라고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우리도 로마에서 뭐라고만 하면 늘 ‘우리 내정이니 간섭하지 마시오’라고 했으니, 저쪽에서도 똑같이 돌려준 게 아니겠는가. 전 세계 어디에서 활동하건, 모든 가톨릭 성직자는 교황의 신하라고 할 수 있기는 하니까.
“주상께서 북미주에서 개신교 신교(信敎)를 허용하신 배경중 하나가 그대 로마에서 보낸 서한에 모욕을 느끼셨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장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엄연히 우리 땅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우리하고는 어떤 협의도 없이 진행하지 않았습니까.”
시대가 시대니만큼 로마 교황청은 우리의 개신교 허용을 두고 공식적으로 항의한다거나 하지는 못했다. 고거 참 쌤통이다. 그놈들이 배 아파하기는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예수회 해체로 인한 짜증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예수회가 해체됐을 때, 만약 나였으면 예수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나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부는 그렇게까지 나설 의사는 없었다. 그래서 예수회의 보호자로 나선 이는 원래 역사에서처럼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3세와 알렉산드르 2세였다.
조부는 국내에 있는 예수회원들이 교황의 해산 조치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에 계속 최선을 다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예수회가 해체됐다고 해서 회원들이 환속하고 학교 운영을 비롯하여 예수회가 진행하던 사업도 모두 중단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주교직을 비롯해 교회 내에서 정치적인 주도권은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18대까지 예수회에서 독점적으로 배출하던 조선 교구 주교는 20대부터 파리 외방전교회에 넘어갔다.
예수회는 해산된 지 41년만인 원평 32년(1814)에 겨우 재건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잃은 세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26대인 현직 주교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Barthelemy Bruguiere) 신부도 파리 외방전교회 사람이다. 다행히 주교가 바뀌었다고 해서 교회 정책에 급격한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제사와 국가 의례 참석에 대한 묵인 같은 특전도 계속 유지되었다.
만약 교황청에서 이런 조치를 철회하고 원래 역사에서처럼 빡빡하게 굴었다면 그 여파는 엄청났을 터였다. 우리는 이제 로마와 관계를 끊어도 아쉬울 게 없으니까 말이다.
“법왕국에서도 행여 그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질까봐 그러는지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안남국에서처럼 할까 봐 두려운 모양입니다.”
안남에 천주교가 전해진 건 괘 오래전부터다. 루이 14세 시절에 파견된 사절단과 함께 온 선교사들이 일찍부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완씨 조정에서는 프랑스인들과 협력하기 위해 선교를 묵인했다. 애매한 것은 완씨 조정이 천주교 탄압과 방관을 수시로 반복했다는 점이었다. 풀어주려면 완전히 풀고 탄압하려면 꾸준하게 때려잡아야지, 어느 쪽도 아니고 갈팡질팡하니 안남에서 천주교 교세도 성했다 쇠했다 하며 오르락내리락했다.
물론 안남에서 천주교를 탄압할 때마다 우리는 득을 보았다. 배를 타고 탈출한 찬주교도 ‘보트리플’들이 술루국으로 들어가 인구를 보충해주었으니까.
“현상을 유지하면 서로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종교라도 폐하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신교(信敎)는 인정해야 하니까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하.”
김유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사람 보는 눈을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얼굴이다. 그래, 틀리지 않기는 하지, 날 이토록 조이는 데 성공했으니. 그런데 왜 조부는 김유근을 승진시키지 않는지 모르겠다. 벌써 강서원에 들어온 지 5년째 아닌가. 이제 김유근한테 들을 역사 이야기도 들을 만큼 다 들었는데, 이젠 좀 다른 자리로 보내주면 안 될까? 아무래도 일단은 외삼촌이니 대하기 좀 불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