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669
4부 053화(1669화)
24.
“장조께서 처음 미주에 사람을 보내 이곳 토인들에게 왕화를 전하시고 본국에서 백성들을 사민하여 개척하신 지 어언 2백여 년이나 지나갔도다. 그 긴 세월 동안 황실을 향한 충심을 지켜온 그대들에게 진한 감사의 염을 표하노라.”
“주상 폐하 만세!”
“주상 폐하 만세!”
“위대한 아버지께 하늘의 은총이 끝없이 이어지시기를!”
나를 환영하는 의미로 지선성 주민들이 바친 연회는 엄청난 환호 속에 마무리를 맺었다. 당연히 나도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서 미주 백성들이 나한테 바친 성의에 답해야겠지만 그건 또 적당히 시일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일단은 휴식이, 그리고 현재 멕시코 상황을 파악하는 일이 급하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좀 일찍 들어와서 쉬었다. 침실에 누우니 또 옛 생각이 났지만 억지로 참고서 잠을 청했다. 기분이 워낙 싱숭생숭해서 푹 잤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아침에 눈을 뜨니 한결 기운이 났다. 그래서 미리 계획한 대로 미주총관부를 방문하기로 했다.
“말을 준비하도록 해라.”
“예, 저하.”
미주총관부에서는 우리가 지내는 데 필요한 일용품과 하인들만이 아니라 교통수단도 아주 넉넉하게 준비해 놨다. 마구간에는 준마가 들어차 있고 차고에는 마차들과 증기차가 나란히 늘어서서 밖으로 나갈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증기차나 마차도 나쁠 건 없지만….오랜만에 보는 지선성 시가지를 자유롭게 관찰하려면 안장 위에서 주변을 편히 둘러볼 수 있는 말 쪽이 낫다. 마차나 증기차에서 좌석에 멍하니 앉아있으면 공연히 잡념에 빠지기 쉽다는 것도 걸린다.
그래서 마차는 함께 데려갈 문관들에게 내주고 – 수행원들의 숙소 역시 행궁이다 – 나는 호위병들과 함께 말을 타기로 했다. 그래서 바로 눈에 들어오는 종마 한 마리를 지목하면서 그놈에게 안장을 얹으라고 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옵소서.”
“고맙소. 속히 다녀오겠소.”
권씨에게는 내가 다녀올 동안 세 후궁과 함께 쉬면서 피로를 좀 더 풀라고 권해두었다. 하지만 내 당부에도 불구하고 권씨는 세 후궁을 데리고 행궁 앞까지 나와서 나를 배웅했다. 무척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숙여 절한 권씨가 몸을 일으키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두 눈이 나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갔다. 나이가 두 살 많은데다가 여자치고는 은근히 큰 키라서, 권씨 앞에 마주 서려니 언제나 괜히 꿀리는 느낌이 든다. 나도 어서 키가 더 자라야 할 텐데.
인사를 마치고 내가 고른 말에 오르니 다시금 주변 풍경이 눈에 담긴다. 그래도 이틀째라 그런지, 어제 이미 눈물을 한 번 뽑아서 그런지 감정이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좀 더 지나고 나면 여기서도 담담하게 지낼 수 있겠지. 한양에서는 이제 평범하게 지낼 수 있다. 은이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던 경희궁의 동궁에 가서도, 상희와 수많은 나날을 보냈던 경북궁 향원정에서도 이제는 담담히 지나갈 수 있다.
시선성에서도 어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만약 매일 어제처럼 감정이 격해진다면 내가 계속 버티지를 못할 것 같으니까.
25.
나와 마찬가지로 말에 오른 호위병 한 무리와 수승들, 문관들이 탄 마차 두 대를 거느린 내가 정문 앞에 도착하자 미주총관부 안에서 대소동이 벌어졌다 내가 분명히 내일 오전에 들르겠다고 미리 통보했는데 무슨 난리인가 싶었다.
“아이고, 저하! 어찌 이리 귀한 걸음을 하셨나이까! 그저 명령만 내리셨으면 신이 당장에 행궁으로 달려갔을 것을…..”
그중에서도 미주대총관 이종우는 버선발로 달려 나오다시피 하면서 나를 맞았다. 이놈은 내 입으로 내일 들르겠다고 하는 말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 내 말을 X으로 들었나 하는 생각에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내가 말을 타고 온 걸 알고서는 또 이종우의 눈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아니, 내가 이 정도 승마 솜씨도 없을 줄 알았나? 타보니 성질도 생각보다 순하더구먼. 보통 종실 자식들이나 양반집 아들들이라고 하면 열두 살에 말 타는 애들이 별로 흔하지 않기는 하다. 하지만 예외는 어디나 있는 법이고, 나 같으면 그런 면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날 소지가 훨씬 크지 않은가. 뭐니 해도 태자의 친아들이니까.
태자 그놈도 어릴 때는 말이고 활이고 제대로 못 다뤘다고 들었다. 그런데 열한 살쯤부터 갑자기 말을 타겠다고 날뛰기 시작하더니 떨어지고 구르기를 십여 년에 걸쳐서 반복한 끝에 지금 같은 솜씨를 닦았다고 한다. 대기만성의 표본 같은 놈이다. 기마술에서는.
어쨌든 그 이야기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내게 굽실거리느라 일을 시작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이종우가 정신을 차리는 게 급하지.
“미주대총관은 무엇을 하시오. 어서 들어가서 논할 일이 있지 않소.”
“예, 예, 저하!”
아무래도 이 양반은 나에 대해 아주 막연하게 밖에 몰랐던 모양이다. 열두 살 난 어린애, 태자의 맏아들, 딱 그것밖에 몰랐나 보지.
회의실에 들어가서 상석에 앉았다. 내 오른쪽에는 한양에서 온 내 스승과 다른 문관들이 앉았고 왼쪽에는 미주총관부 관리들이 앉았다.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당연히 이종우가 앉았다.
하지만 이종우는 곧바로 회의를 시작하지 않았다. 이마에서 진땀을 흘리면서 나를 향해서 아까 했던 말을 거의 똑같이 반복했을 뿐이다.
“저하, 이리 일부러 왕림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시종을 보내서 한 말씀만 하시면 신이 바로 행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리 번거롭게 나오시지 마시고 부사인 김 대감을 이리로 보내시면 저희가…..”
한층 더 확신이 생겼다. 이 늙은이, 내가 얼굴마담이라고 확신하는구나. 아주 굳게.
이종우가 부사 – 내가 임명장을 받은 정사(정사)는 아니지만 사실상 정사이므로 김유근이 부사(부사)라는 시각은 틀린건 아니다 – 인 김유근이 진짜 임무를 띤 사절이라고 생각하는 건 뭐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내가 어려도 너무 어리니까, 별로 기분 나쁘지 않다.
하기야 내가 알기로 이종우는 올해로 미주에 부임한 지 9년째라고 했다. 그 정도면 본국 소식에 어두울 수 있다. 내가 강서원 수업에서 어떤 성과를 보였는지, 조부가 내게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지 같은 기사는 조보에 실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됐소. 그대가 여기서 맡은 국사가 한둘이 아닐진대, 어찌 내 마음대로 오라느니 가라느니 하겠소. 내 한 몸 잠시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소. 오가는 길에 성내의 풍경을 볼 수 있으니 그것 또한 좋은 일이오.”
미주대총관이 얼마나 하는 일이 많은지 내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동변관리사도 사실상 미주대총관 밑에 있다. 그러니 미주총관부가 맡은 관할구역은 한반도에 만주까지 합친 본국 전체만큼 넓다. 이 넓은 땅을 제대로 다스리려면 일분일초가 아쉽다. 아무리 행궁이 여기서 코앞이라지만, 그런 바쁜 양반을 꼭 필요하지도 않은 용무 때문에 불러들이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기껏 불렀는데 내 질문을 받고 ‘아파, 그만 그 부분에 대한 자료를 안 가지고 왔습니다’하고 당황하기라도 하면 그것도 난감하고.
‘뭐, 내가 못 올 상황이면 그때 부르면 그만이지.’
살다 보면 나도 아프거나 나오기 귀찮을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날 미주대총관과 함께 논의할 사안이 있다면 당연히 행궁으로 불러야겠지. 그러니 오늘 같은 날은 내가 먼저 와서 미리 대가를 치러두는 셈이다.
“자, 그러면 회의를 시작해 봅시다. 지금 급한 건 지난 반년 동안 신서반아 방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으며, 보나파르트가 어떤 제안을 새로 보내왔나 하는 거요. 덕진성에서 미리 배를 보내 알렸듯이, 폐하께서는 내게 이 문제를 처리할 권한을 주셨소.”
이종우 이하 미주 관리들은 분명히 그 편지를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내가 아니라 김유근이 진짜 특사고 나는 거기에 그저 숟가락이나 얹으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역량을 보임으로써 그러한 인식을 완전히 박살내고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어서 말해 보시오. 설마 반년 동안 저쪽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닐 거 아니오.”
“예, 예!”
책상 위에 쌓인 문서 더미에서 허겁지겁 종이 몇 장을 뽑아낸 이종우가 헛기침 몇 번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태손 앞에서 보고하려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신서반아 내에서는 여전히 분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교역도 거의 끊기고 사방에 도적이 날뛰어서 사정을 파악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멕시코는 여전히 내란 상태라고 했다. 프랑스군은 여전히 대서양 연안 주요 항구와 수도 멕시코시티만 확보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은 크리오요 출신 군벌들이 분점하고 있다. 일부 군벌은 왕당파, 일부 군벌은 독립파고 양쪽을 오가는 중립파, 도는 박쥐파도 상당수다. 왕당파 군벌 중에는 원주민 계열도 있다. 스페인 왕실로부터 피정복민이 아니라 동맹자로 대우받은 틀락스칼텍 같은 경우 끝까지 왕당파로 남아 저항하다가 나폴레옹에게 붙었다.
“보나파르트는 기존 왕정을 부정하는 자인데, 어찌 그자와 협력할 수 있소? 역적이 되는 길 아니오?”
“왕당파에 속한 유력자들은 대개 진정한 충심 때문에 국왕을 섬겼던 게 아닙니다. 국왕이 자기들에게 많은 권익을 주었으니 따랐고, 독립당이 정권을 잡으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권익을 빼앗기리라고 생각해서 왕당이 되었던 겁니다.”
군주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성리학적인 충성이 아니라 서구적인 계약 관계에 따른 충성이 맞이한 결과다. 군주가 자기들의 이익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 바로 돌아서는 이런 모습 말이다. 역시 우리 대한에서는 성리학을 놓을 수가 없겠구나. 나폴레옹은 새로 정복한 멕시코 영토 중에서 리오그란데 강 이북, 즉 텍사스를 멕시코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누벨 프랑스 제국에 속하는 텍사스 준주(準州)로 편입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이남의 나머지 영토는 ‘멕시코 공화국’의 영토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신불랑군은 나머지 신서반아 지역에서는 힘을 빼고, 새로 획득한 테하스 지방을 완전히 제압하고 자기 땅으로 만드는 데 진력하고 있습니다.”
텍사스에는 스페인계 크리오요들과 메스티소 농민들, 원주민인 인디언들 다수가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폴레옹이 자기들, 상전이 되었다고 하는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건 이들로서는 쉽지 않았다.
“저항이 강한 편이오?”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꽤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텍사스는 넓다. 한반도 면적의 세 배는 족히 되는 넓이다. 그런 넓은 땅, 그것도 대평원을 고작 군사 몇 만으로 완벽하게 제압한다는 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거기 몰두하느라 신서반아 전역을 직접 제압하는 일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건가….”
내가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텍사스 정도로 만족할 것 같기는 하다. 멕시코 민중이 자유를 얻도록 돕겠다는 출병 명분 때문에라도 너무 넓은 땅을 빼앗을 수는 없다. 게다가 나폴레옹 측이 지금 보유하는 행정 능력을 감안하면 너무 많은 땅은 되려 짐이 된다.
“더구나 그 땅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흡수하기도 어려울 거요.”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저하.”
이종우는 계속 굽실거렸다. 김유근을 비롯해 나를 따라온 신하들은 내 능력을 돋보이려는 생각 때문인지 나와 김종우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각자 자기들 앞에 앉은 미주 관리들 쪽으로만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문답을 주고받고 있을 뿐이다.
“하온데, 그 부분에서는 다소 큰 변화가 있었사옵니다.”
“무엇이오?”
“합중국에서 신불랑으로 넘어가 신불랑의 관료나 군인이 된 자들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 덕분에 신불랑에서 부족하던 행정관의 수가 다소 보충되었습니다.”
본래 나폴레옹에게는 군인은 많아도 관료는 적었다. 유럽을 떠난 나폴레옹을 따라올 만큼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군인이었고, 아니면 이상을 찾아온 학자나 혁명가였다. 관료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 부족한 부분을 미국인들이 메운 모양이다. 순수하게 모험을 찾아서든, 합중국 내에서 정쟁에 패해서든 배를 타고 서쪽으로 떠난 미국인의 수는 꽤 많다고 했다. 정확한 명단까지 입수할 정도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경향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와 회견할 상대 중에 합중국 출신자들이 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겠구려. 본국에서 잉글어 통변을 데려오지 않았으니, 미주총관부에서 준비해주시오.”
“예, 저하.”
아쉽다. 본국에서 통변을 데려왔으면 멋들어진 영국식 영어로 미국 촌놈들 기를 죽여 놓을 수 있었는데, 미주에서 구하면 분명히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운 북미주 출신자를 데려오게 될 거다. 물론 나도 영국식 영어 구사할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공식적으로는’ 영어를 안 배운 것으로 되어있다. 라틴어랑 프랑스어 수업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영어는 무슨, 공연히 의미 없는 일을 늘리는 건 사절이다.
하여간 총관부에서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역관을 구해달라고 강조하는 중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주 필요하고 효과적인 아이디어였다.
“원씨 집안에 명해서 역관 노릇을 할 젊은이를 뽑아 보내라 하시오. 그러면 내가 데려가 일을 시켜본 뒤, 그 재주를 살펴 중히 쓰도록 하겠소.”
“예, 저하.”
원씨 집안이라면 실력이 모자라는 자식을 보낼 리가 없다. 며칠 전에 방문했을 때 태도로 보건대 환호하면서 가문 내에서 가장 영어가 능숙한 이를 뽑아서 보내리라. 확실하다. 이는 그저 유능한 통역관을 확보하는 수단이 아니다. 원씨 집안에 태자가 저지른 패악을 보상하는 안배이기도 하다. 황실이 그들을 잊은 게 아님을 확실히 하는 조치가 아니겠는가. 그 외에도 중요한 정보 몇 가지가 더 있었다. 나폴레옹의 소재를 확인하는 문제도 그중 하나였다.
“보나파르트가 신불랑에 있는지, 신서반아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소?”
“그렇습니다, 저하. 계획 없이 수시로 오간다고 하옵니다.”
이건 좀 골치가 아프군. 그래도 해결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회담을 열기 몇 달 전에 미리 사자를 보내서 회담 장소와 날짜를 확실히 정해두면 간단한 문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