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
1부 017화
“대마도는 인구가 1만을 조금 넘는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입니다. 게다가 대마도인들은 이제 거의 변을 일으키지 않으니, 단순히 대마도 정벌만으로는 우리의 무위(武威)를 충분히 떨칠 수 없습니다.”
변수가 잠시 망설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내뱉을 말이 스스로도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눈길이 자신을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저들을 정벌하고 다시는 저들이 우리 해안을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무위를 떨치고자 한다면 구주까지 원정하여 왜구들의 소굴을 짓부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기해동정 때보다 더 많은 군사가 필요합니다. 적어도 3,4만은 있어야 합니다.”
“대마도는 쳐야 하오, 치지 말아야 하오?”
“대마도는 치기보다는 향도(嚮導, 길잡이)로 삼아 길을 안내하게 함이 가하리라 보옵니다. 물론 대마도에는 충분한 군사를 주둔시켜 저들이 뒤에서 흉계를 꾸미지 못하게 하고, 군량을 운반할 경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북정에 5만, 남정에 4만. 거기에 일본을 치기 위해서는 수많은 배와 뱃사람이 필요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임진왜란 때 바다를 건너온 일본군도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비율이 2:3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에 따라 4만을 일본 원정에 투입하려면 10만 대군이 필요해진다.
전투원에게 노를 젓게 하면 소요인원은 줄겠지만 별로 효율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친 군사들은 제대로 싸울 수 없고, 전투손실이 발생하면 자칫 배도 인원부족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기 십상이니까 말이다. 으음, 어느 정도 숫자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전하, 왜국 정벌도 생각하고 있으신 것이옵니까?”
변종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그러고 보니 어째 오늘 가장 중요한 발언자 두 사람이 다 변씨구나.
“그러하오. 그래서 그대를 경상우수사로 제수한 거요. 저기 변 목사의 뒤를 이어 왜국 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한 준비를 진행토록 하시오.”
지금 일본 상황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전국시대라는 것,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도 히데요시도 아직 태어나지 않아 통일을 이룰 전망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도 없다는 정도다. 쓰시마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다이묘가 누군지, 그런 것도 모른다. 다 조사해서 알아내야 한다.
“전하, 외람되오나 한 말씀 드리자면 북정과 남정을 동시에 실시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 살림이 당해내지를 못할 것이옵니다.”
변종인이 거침없이 진언했다. 유자광, 변수, 박원종 등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북방에서 군사를 움직여 야인들을 징치할 필요는 분명 있사옵니다. 남방에서 군사를 움직여 왜적들을 근절할 필요 또한 있사옵니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으며 군사를 일으키려면 비용이 필요합니다. 무엇부터 할지 분명히 명해 주시옵소서.”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자광이 뭔가 입을 열려고 했으나 내가 손을 뻗자 입을 다물었다. 박원종과 변수는 방바닥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경상우수사께서 우려하는 바는 인정하오. 허나 아직은 성급한 걱정이오. 지금 과인은 군사를 일으킨다면 어찌 하는 편이 유리할지 확인하고 있을 뿐이오. 실제로 군사를 일으킬지, 한다면 언제 얼마나 일으킬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소. 단지 따져보고 있을 뿐이오.”
생각 같아서야 당장 원정을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싶지. 하지만 삼국지 게임이 아니잖아.
“예, 전하.”
변종인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물러앉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오늘 이 자리는 그만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은 이만 파하도록 합시다. 추후에 또 과인이 밀지를 보낼 터이니 경들은 외직(外職)에 있다면 답서를 보내고 경직(京職)에 있다면 오늘처럼 궁으로 입시하기 바라오.”
“예, 전하.”
참석자들을 모두 편전 밖으로 내보내고 나자, 이제 첫발을 내디뎠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래, 이제 이 세계에 적응은 했어. 앞으로는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거야. 그동안 많이 고민했잖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돌렸다. 벽모서리 쪽에 앉아 있다가 막 일어서려던 사관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라.”
“예, 예, 전하.”
이름 모를 사관은 낯빛이 파래져 있었다. 오늘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 스스로도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여진족이나 왜구는 그렇다 치고, 명나라와도 전쟁을 하게 될지 모르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 만약 이 사실이 조야에 흘러나간다면 엄청난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이 비밀을 알게 된 사관이 태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관! 오늘 그대가 들은 것은 입을 봉해야 함을 알고 있겠지?”
“무, 물론이옵니다. 전하.”
“만약 오늘 일이 시중에 퍼진다면, 그 근원은 네놈의 입이 될 수밖에 없다. 대간들이 오늘 일을 들어 과인을 공박하는 일이 생긴다면, 네놈의 목은 붙어있지 못할 줄 알아라.”
사관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입이 얼어붙었는지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과인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아, 아니옵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바닥에 엎드려서 부들거리는 사관을 보며 천천히 다음 말을 내뱉었다. 사실 내 진짜 목적은 이거였다. 사관에게 겁을 주는 게 아니라.
“과인이 그대에게 명할 것이 있도다.”
“무, 무엇이시옵니까?”
이놈이 평소에 이렇게 말을 더듬었나? 뭐 긴장한 모양이다. 그런 건 신경 끄고 내가 원하는 요구사항이나 내밀어야지.
“지금 여기서 오간 대화에 대해 사초를 적지 않았느냐?”
“사초는 보여드릴 수 없사옵니다!”
아 사초 이야기 나오니까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들었냐? 고개만 드는 것도 아니고 허리까지 발딱 일어서네, 아주. 근데 난 거기 관심 없거든?
“과인의 말을 끝까지 들으라! 사초를 보겠다는 게 아니다. 사초는 직접 적은 사관 외에 누구도 볼 수 없음을 내 잘 알고 있다. 과인이 명하고자 하는 바는, 사초와는 별개로 그대가 지금 이 자리에서 적은 것을 정서하여 과인에게 제출하라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적은 것…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러하다. 과인이 건넨 질문과 여기 있던 신료들이 각기 한 답변 등을 모두 순서대로 정서하여 제출하라. 중요한 밀담이니, 내 잊지 않도록 적어두고 보려 한다.”
그래, 이거 밀담이다. 새나가면 조정이 뒤집힐 정도로 위험한 이야기다. 아예 새어나가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스템 상 사관 없이 신하들을 만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500년 조선 역사에서 사관을 속기사(…)로 쓸 생각을 한 사람이 나 말고 혹시 또 있을까 싶다. 조정에서 받아쓰기를 사관들보다 빨리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임금이고 신하고, 대부분은 가능하면 자기가 꾸민 일, 특히 당대에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기록을 안 남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세 사람들이 역사의 배경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좋지 않겠는가.
“하오나 전하, 사초를 베껴 드릴 수는….”
그런데 이 앞뒤가 꽉 막힌 사관은 여전히 맹꽁이 같은 소리를 했다. 아, 이 자식아! 사초를 그대로 보여 달라는 게 아니라니까!
“멍청하기는! 과인이 내린 지시가 이해가 가지 않는가? 과인에게 보여주면 곤란한 부분은 빼고, 과인이 오늘 이 자리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만 ‘따로 베껴서’ 보여 달라는 것이다. 과인이 뭐라고 말했는지 그대로 적어서 보이는 것도 안 된단 말인가?”
“저, 그래도 그것이….”
“사초 그대로가 아니라, 새로 적은 것을 보여 달라 하였다!”
“아, 알겠사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사관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이 자식은 이 요구까지 사초에 적겠지? 임금 앞에서 한숨을 쉰 건 불경한 행동 같지만 참아 주기로 하자.
“베껴 적은 문답은 내일 아침에 편전으로 가져오라. 빠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며 보겠다.”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려 인사를 마친 사관이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불러 세웠다.
“아, 그리고 앞으로도 이 평락사에 들어와 사초를 적는 일은 그대가 전담으로 맡아서 하라. 다른 사관이 오면 들이지 않겠다.”
비밀을 아는 자는 가능한 적은 편이 좋다. 이 사관 저 사관이 줄줄이 들어와 회의 내용을 기록하다 보면 사관들이 속한 예문관 전체가 알게 될 테고 조정 전체로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막아야 할 입이 단 한 개라면 회유하기도 상대적으로 쉽고 최악의 경우 죽여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예문관을 통째로 불태워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 먹통은 또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전하, 사관이 입시함은 그 순번이 다 정해져 있습니다. 임의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바꾸면 될 게 아닌가! 과인이 도승지에게 일러 그대를 보내라 하겠노라.”
도승지는 종3품 직제학으로 예문관 관직을 겸직한다. 그 위에 정1품 영사, 정2품 대제학, 종2품 제학, 정3품 부제학이 있지만 이중에 예문관을 전담하는 사람은 부제학 하나뿐이다. 영사는 영의정이 겸직하고, 대제학과 제학은 홍문관 업무를 겸임하기 때문이다.
“허나 전하, 사관이 입시함에 있어 순번을 지키도록 함은, 공정한 기술을 보장하기 위함입니다. 특정 사관이 유별나게 자주 입시하다 보면 해당 내용을 누가 적었는지 뻔히 알 수 있게 되고, 과거 이행의 사례에서 보듯이 사관이 몸을 사려 기록을 조심하게 됩니다.”
이행은 고려 때부터 사관이었던 인물이다. 각 사관이 집에 보관해 놓았던 가장사초(家藏史草)를 제출하라는 명을 받고 제출했는데, 원문을 ‘마사지’한 다른 동료들과 달리 혼자만 자기가 처음 쓴 원문을 그대로 내놓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치도곤을 당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단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고, 장 1백 대라는 형벌을 받은 뒤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울진으로 귀양까지 갔다. 1년 반이 지난 뒤에 특사로 풀려나 복권되기는 했지만, 정말 죽다 살아났다.
다만 태조 이성계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행은 자기가 맡은 파트에서 기술하기를, ‘이성계가 죄 없는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조선 왕실의 일관된 입장은 이성계가 두 임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그들 두 사람의 존재가 자꾸 화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기에 대소 신료들이 처형을 원했고, 공양왕이 재가하여 집행되었을 뿐이라는 게 공식 입장이다.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자기가 적은 그대로 내민 이행이 욕을 본 건 빤한 결과였다. 당연히 사관들은 그 모습을 보며 위축되었고, 그 뒤로도 사관들이 위협을 느낄 만한 사건들은 가끔 한 번씩 벌어졌다. 지금 이 자가 보이는 반응도 그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과인은 사초 내용을 트집 잡아 사관을 핍박할 의향이 없다. 사초를 빌미로 왕실을 능멸하는 허황된 망언을 쏟아 붓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사초를 적은 사관에게 왜 벌을 준단 말이냐?”
물론 나는 ‘사초를 빌미로’ 누군가를 때려잡을 계획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이미 말했듯, ‘왕실을 능멸하는’ 언사를 고의적으로 사초에 삽입한 경우다. 지금 이 사관처럼 우직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을 핍박할 의사는 없다. 악연으로 얽혀 있지만 않다면 말이지.
“허나 전하, 그리 된다 하면 과연 소신이 공정하게 계속 기록을 남길 수가 있을지….”
“어허, 잔말이 많다! 네놈은 사관으로써 공정하게 기록을 남길 배짱이 없단 말이냐? 군주와 자주 보면서 그 사이가 가까워짐은 사적인 것이고, 그대가 사관으로서 직무를 다하는 것은 직무를 다하는 게다! 공사(公私)를 혼동하지 말라!”
내 말을 들은 사관이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 사관, 이해력은 좀 떨어지는 것 같고 눈치도 없고 간은 작지만 줏대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런 성격이 입은 무거워서 비밀 유지에는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약삭빠르고 입 싼 놈들보다는 훨씬 낫지 뭐.
“알겠사옵니다! 소신, 사관으로서 붓을 쥐고 있는 한 신명을 다해 역사를 기록하겠나이다!”
“그래, 좋다. 그만 가보도록 하라.”
손을 저어 사관을 내보낸 뒤, 그대로 보료 위에 누워서 생각했다.
자, 이제 원대한 계획의 첫발을 내디딜 참이다. 과연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