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29
4부 113(1729화)
3.
태황도 꽤 오래 참았다. 작년 봄에 조부가 병석에 누워 자리보전한 뒤부터는 술과 여자를 정말로 거의 끊다시피 했으니까 말이다. 모두가 대단하게 여기며 칭송했고, 귀국해서 그걸 본 나도 참 대단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게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전에도 언급하지 않았던가, 태황은 지난 백여 년 동안 내가 본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발 뻗을 자리를 잘 찾는 인간이라고. 그런 인간이 병에 걸려서 쓰러진 부친을 두고 주색에 빠질 리가 있겠는가.
왜 그러면 안 되냐고? 그야 천하의 불효자로 지탄받을 게 분명하니까 그렇지. 황태자니까 그런 게 아니라, 일반 무지렁이 농사꾼이라고 해도 아비가 병에 걸려 누워있는데 병구완은커녕 술과 계집에 미쳐 있다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 게 당연하다. 내가 귀국했을 때, 태황은 행동을 조심하면서 비교적 상식적인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예법에서 실수를 많이 범했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처음 치러보는 국상이니까 당연한 거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나.
그리고 그동안 태황이 주변 사람들에게 주던 인상이 있지 않은가. 학업에 임하는 태도나 생활 태도나 등등. 그러니 아무도 태황이 완벽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예상외로 모습을 보인다면야 물론 칭찬받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나도 그렇고 조정 중신들도 그렇고 태황이 딱 남들 하는 만큼만 해도 만족이었다. 그리고 태황은 정확히 남들이 바라는 만큼만 했다. 조부의 무덤 앞에 혼유석을 놓고 대궐로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여봐라, 상선. 상이 끝났다고 하나 선황께서 가신 빈자리가 아직도 크기만 하구나. 선황 폐하의 영전에 술이라도 한 잔 올려야 이 울적함이 가실 듯하다. 그러니 술상을 간단히 차려 들이도록 하라. 안주는 간소해도 좋으나 술은 독한 것이 좋겠다. 그리고…..”
태황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망설였다. 필시 열한 명이나 되는 후궁 중 누구를 불러들여 술을 따르게 할지를 고민했으리라. 하지만 그 고민은 끝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중궁전에서 달려온 상궁이 급보를 알렸기 때문이다.
“폐, 폐하! 중전마마께서 산기가 있으시옵니다! 상태가 좋지 않으시옵니다!”
“뭐라고? 아직 산달까지는 한참 남아있지 않았느냐? 어서 안내하여라!”
그렇게 해서 조부의 관이 발인하는 날을 기해서 다시 살아날 예정이던 태황의 옛 버릇은 잠시 늦춰졌다. 태황도 사람은 사람인지, 자기 말대로 ‘몸이 아프지만 잘 치료하고 돌보면 살 수 있는 사람’을 신경은 썼다. 조모의 눈치도 조금은 살핀 듯하다.
헌데 여기서 내게 엉뚱한 불똥이 튀었다. 중궁전에서 달려온 상궁에게서 중전의 용태가 위태롭다는 말을 들은 태황이 심각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더니, 같이 있던 내게 내일부터 대리청정을 맡으라는 게 아닌가.
“부부는 일심동체라, 중전이 저토록 아픈데 내가 방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정의 대사를 팽개칠 수도 없는 일이니, 임시로 네가 한동안만 맡아라.”
“하오나 아바마마. 과거 선황들께서 남기신 전례를 보면 이런 사유로 대리청정을 명하신 사례가 없사온데…..”
내가 어물거리며 거부하자 태황은 뭐 이런 한심한 자식이 다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태자야. 너는 효가 무엇인지 모르나냐? 중전은 네 어미니라. 네 어미가 지금 명이 경각에 달려 신음하고 있는데 네가 어찌 방관할 수 있단 말이냐?”
자기는 죽어가는 아내의 병구완을 해야겠으니 조정은 내가 맡으라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덧붙이기를, 중전 소생인 어린애들은 너무 어려 이런 일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되니, 자기가 곁에 있으면서 중전의 힘이 되어주어야겠다나.
“더구나, 네가 중전을 간호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예…..알겠습니다, 아바마마.”
그럼 자기가 조정에 있을 테니 네가 간호하겠느냐는 식으로 나오니 어쩔 수가 없었다. 말이 좋아서 새어머니지, 나이는 겨우 만으로 스물이다. 나보다 단지 일곱 살 연상이니까 사실상 큰 누나뻘 되는 외간 여자다. 제대로 간호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야 바른말이지, 친자식이 돌볼 수 없다고 해서 태황이 중궁전에 죽치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 대궐에는 중전의 병구완을 맡을 궁인들이 수레로 실어내도 남아돌 만큼 있는데, 왜 하필 태황이 그 일을 맡는단 말인가. 여차하면 며느리들을 동원해도 되는 일이다. 네 사람 모두 그동안 중전 앞에서 공손하게 굴면서 한껏 점수를 따 두었다. 그것도 은근히 경쟁이 되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환자의 옆자리를 지킨다 한들, 임금이 하는 일은 지친 환자의 손이나 잡아주는 게 고작일 게 분명하다. 내가 어디 아픈 중전 한두 번 본 사람인가. 결국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답은 하나였다. 그거 외엔 답이 없었다.
‘병간호 핑계로 땡땡이를 칠 심산이군.’
그동안 태황이 편전을 전담하긴 했지만, 업무강도는 평소에 비해서 낮았을 게 분명하다. 국상 기간에는 새 로 큰일을 벌이지 않고, 하던 일도 급하지 않으면 중단하고, 상례와 직접2 관련된 업무에만 집중하는 게 관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다 끝났다. 게다가 장례가 끝난 때가 동짓달이었으니, 그동안 밀렸던 온갖 잡무를 처리하면서 본격적인 새해 준비를 시작해야 할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막힌 시점에 중전의 병환이 터진 거다.
“너니까 믿고 맡기는 거다. 부디 잘해다오.”
그리고는 중궁전으로 획 가버렸다. 덕분에 나는 졸지에 국상이 끝나자마자 편전에 나가서 앉아 있어야 했고, 나와 마찬가지로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국상 정약용 이하 관원들과 난감한 눈길을 교환해야 했다. 태황의 행동은 당연히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중전이 아프다고 해서 아예 국정을 팽개치고 그 옆에 틀어박힌 임금의 선례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상희가 암에 걸렸을 때조차 은이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까지는 할 엄두도 못 냈다.
보통 임금이었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일이었다. 모후의 병을 간호한다면 혹시 모를까, 중전의 병을 간호한다고 국정을 팽개치다니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도 남았다. 임금이 여색에 빠져서 정신이 나갔다고 난리가 났으리라. 그런데 이게 태황이다 보니 반응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갔다. 주색잡기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던 태황이 부황의 상을 치르면서 마음을 바로잡았고, 자기 반려도 소중하게 생각해서 챙기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지금 이 상황은 당황스럽기는 하오나…..”
김유근이 내게 따로 말한 바와 마찬가지였다. 조정 중신들은 예전의 그 막돼먹은 태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꼬락서니를 보느니 중전의 병구완에 매달린 애처가를 보는 게 낫다고들 생각했다. 장지에서 돌아오자마자 술상을 차리라고 한 건 몰랐나 보다.
“그래, 우리 주상은 역시 본성이 착하다니까. 중전이 크게 앓는다고 하니 외면하지 못하고 옆에서 기운을 북돋워 주고 있지 않으냐.”
심지어 조모까지 태황이 지금 하는 행동을 좋게만 보았다. 어쩌면 태황이 진짜로 노린 건 이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라의 최고 어른인 황태후가 자기를 믿고 지지해주는 거. 그러면 아무도 자기한테 뭐라고 할 수 없게 되니까. 나로서는 속이 터지는 상황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들 좋게 보는데 나만 뭐라고 할 수 없으니 그냥 조용히 있었다. 분명히 얼마 못 가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예상대로 되었다.
“전하. 폐하께서 강녕전에 술상을 들이시고 선비 이 씨를 불러들이셨다고 합니다.”
“겨우 나흘 만에 말인가.”
열심히 중전의 병구완을 하겠다던 태황의 결심은 딱 4일을 갔다. 그래도 임금이라 그런지 작심삼일에서 하루는 더 보탰다.
태황은 며칠 동안 중궁전에서 기식하면서 중전의 용태를 살폈다. 그리고 태의들이 이제는 괜찮다고, 고비를 넘겼으니 푹 쉬면서 기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되면 아기씨도 무사하실 것 같다고 말하자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냐, 알겠다. 여봐라, 강녕전으로 간다.”
그리고 대전으로 돌아가자마자 술상과 함께 열한 명이나 되는 후궁 중에 막내면서 나이도 가장 어린 선비 이씨를 불러들였다. 선비 이씨는 나보다 겨우 두 살 위로, 작년 초 조부가 아직 앓아눕기 전에 들인 후궁이다. 본래는 소주방 나인 출신이다.
해가 아직 중천에 있는데 술상과 후궁을 불러들인 태황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저녁상과 야참상, 아침상을 빙자한 새 술상이 들어가고 그에 맞바꿔 먹던 상이 밖으로 나왔을 뿐이다. 그동안 동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있던 내가 아침 문안을 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방문 앞까지 갔다가 안에서 들리는 숨 가쁜 신음과 호탕한 웃음소리에 질려서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새빨개진 대전내관이 내가 왔다고 알리려고 하기에 말렸다.
“아침에 왔었다면서?”
“예, 폐하.”
태황의 얼굴을 본 건 오후에 다시 한 번 찾아가고서였다. 효심 때문이 아니라 어떤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할지가 궁금해서 한 번 더 가본 건데, 역시나 가관이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내일부터는 내가 다시 편전에 나갈 테니 너는 동궁에서 쉬도록 하여라. 석 달 동안 빈전에서 지낸 것만도 힘들었을 텐데 조정 일까지 맡겨서 미안하구나.”
죄의식 가득한 표정으로 이 말을 했으면 진심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태황의 얼굴에는 그동안 쌓이고 쌓인 묵은 욕구를 완전히 쏟아낸 듯, 아주 후련하고 상쾌한 기분이 가득했다. 내가 아침에 와서 들은 소리와 저 표정을 종합하면 태황이 하루 동안 뭘 했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네가 조정을 이끈 솜씨에 관해서는 아주 달 들었다. 역시 너는 장차 보위에 앉을 자격이 있다. 선황께서 너를 아끼신 게 허사가 아니구나.”
내게는 이런 말이 단순한 칭찬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아무 때나 자기가 쉬고 싶으면 나를 편전으로 불러 앉히겠다는 의미인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것도 내게 사전에 알려서 동의를 구하거나 준비할 시간을 줄 생각 따위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저 속으로 한숨만 쉬었다.
그 뒤로 태황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술과 여자에 푹 빠져 환장하던 그 모습 말이다. 내게도 무척 너그러웠다. 앞서 말했듯이 수업도 적당히 쉬게 해주고, 여유를 실컷 누리게 해줬다. 명분은 2년에 걸친 미주 순행과 3개월에 걸친 빈소 지키기로 충분했다. 중궁전에 누워있는 중전? 그야 가끔 찾아가서 문병했다. 그리고 문병을 마치고 나와서는 곧바로 술상을 준비시켜서 후궁 침소를 찾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새해에 접어들자 꽤 오래 그만뒀던 대궐 바깥으로 가는 나들이도 다시 시작했다. 송현승을 통해 이 소식을 듣고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했지.’
그 기가 막힌 꼬락서니를 보며 남몰래 혀를 찼다. 조부가 죽어서 자기를 확실하게 제어할 사람이 없어졌으니 멋대로 놀아나리라는 건 확실했지만, 한 해도 못 가서 이럴 줄이야. 내가 이렇게 기가 막힌 판이니, 중궁전에 있는 중전이야 미칠 노릇이었으리라. 그 성격에 태황을 붙잡고는 포달을 부릴 수도 없을 테고, 아픈 몸으로는 태황을 유혹해서 교태전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을 터.
당연히 중전의 심기는 극도로 불편했다. 내가 권씨와 함께 문안을 가도 별로 좋은 소리를 들어 본 기억이 없다. 피곤하니 얼른 동궁으로 돌아가라는 축객령이나 매번 들었을 뿐이다. 그런 상태였으니 내가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지 처지인 용이나 전이를 데려가 놀아주었지. 이제는 중전도 몸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기분도 훨씬 좋아졌고, 자기 자식들도 다시 직접 챙기고 있다. 하지만 자기가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 태황이 벌인 처사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살아있으리라. 그걸 계속 속에 품고 있을지, 삭여서 없앨지는 나도 모르지만.
하지만 태황은 중전의 그런 속마음에 관해서는 하나도 모를뿐더러, 신경도 전혀 안 쓰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도 여전히 저따위로 살 리가 없지 않은가. 벌써 4월인데, 양력으로. 국상이 끝난 지도 벌써 4개월이 다 됐다. 그리고 중전의 심리 따위에 관심이 없는 태황은 내게 예고했던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조정에다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황이 예언했듯이 그 사안들은 하나같이 폭탄을 터트렸다.
4.
가장 먼저 터진 폭탄은 역시나 그 영토 매입 문제였다. 태황도 자기 입으로 여러 폭탄 중 이게 가장 약한 폭탄이라고 했으니, 쉬운 일부터 처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편전에 나갔더니 신하들이 맹렬하게 반대를 표했다. 태황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폐하. 그 섬들은 고작해야 미주에서 오는 배들이 기점으로 삼으며 물을 보급하는 정도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그런 섬에 50만 냥이나 되는 값을 치르면서까지 사들이시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국상인 정약용이 반대론의 중심에 있었다. 아무리 정약용이 외부 사정에 밝은 남인이라고 해도, 조부와 같은 세대다보니 생각하는 관점도 비슷했다. 그가 보기에 이 거래는 너무도 비합리적이었다. 마리아나 제도도, 북서 캐나다도 마찬가지였다.
“동변 북동부에 있는 그 땅도 2백만 냥에 달하는 돈을 들여 사들일 가치가 없습니다. 그 땅은 척박하여 산물이라야 목재와 모피뿐이고, 도중에 미주대령이 가로놓여 있어 백성들을 사민하고 돌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땅을 얻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이에 반해 내가 처리하고 온 멕시코 영토 매입 안에는 별 반대가 없었다. 그 사안은 아직 조부가 살아있을 때 보고서가 도착했고, 조부가 ‘태손의 협상 솜씨가 참으로 뛰어나구나! 참 잘했다. 돌아오면 크게 칭찬해야겠다’라면서 승인한 문제라 아무도 뭐라지 않았다.
“경들은 모르는 모양인데, 그건 다 여기 태자가 선황께 말씀드려 승인을 얻은 계획들이오. 다들 모르셨소?”
한참을 떠들던 중신들이 조용해지자 태황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나를 팔았다. 저 자식, 이러려고 나를 오늘 편전에 부른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