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31
4부 115(1731화)
‘여기에 더해서 후계자인 내 위신까지 덤으로 크게 올라갈 일이기는 하지.’
조부를 설득해서 스페인령 동인도를 매입하도록 한 장본인이 나다. 그리고 그렇게 진언한 근거에 광해서도 중신들 앞에서 당당하게 설명했다. 불과 열다섯 살, 만으로 열넷밖에 안 된 나이로 이런 일을 해냈으니 당연히 평가가 올라가지 않겠는가. 더불어서 국제적 신인도의 문제도 있다. 이미 조부가 스페인에 특사를 보낸 상태 아닌가. 이제 그 사자가 답신을 받아 돌아올 때가 다 됐다. 태황이 조정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 것도 사자가 돌아올 때가 됐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거래를 거부한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받아들이겠다고 회답했는데 우리 쪽에서 제안을 거둬들이고 없던 말로 하자고 나서면 그것도 우스워진다. 조부의 이름으로 금액까지 제안한 이상, 이 거래를 계속 추진하는 게 옳다. 이런 배경이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자기한테 찬성할 사람들을 콕콕 끄집어내 부른 것도 태황이 가진 재주라면 재주다. 외무대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죄다. 평소에 이 자리에 나올 일이 없는 사람들을 태황이 일부러 골라 데려온 게 아닌가.
정말이지 태황은 발 뻗을 자리 하나는 기차게 찾아내는 인간이다. 조정에서 우세를 얻는 데 필요한 사람들을 이렇게 뽑아내다니 말이다. 다만 내 외조부 김조순이나 진짜 외숙인 김유근은 이 자리에 끼지 않았다. 부르기만 하면 태황과 나에 대한 지지는 확실하겠지만, 이 자리에 동석시키기에는 벼슬이 적당하지 않았던 탓이 아닐까 싶다.
김조순은 일반적으로 국구에게 내리는 명예직이었던 정1품 영돈녕부사다. 김유근도 이제 내 스승 노릇을 그만두고 한성판윤을 제수 받았다. 한성판윤은 그 품계가 정2품으로 대신과 동급이나 예전 보직인 종1품인 강서원 사보다는 품계가 낮다. 하지만 애초에 강서원 사로 보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모친의 죽음 – 지금은 순원황후(純元皇后)로 추증되었다 – 에 대한 위로 차원이었다. 또 명예직인 강서원 사보다 실직인 한성판윤 쪽이 가치가 더 높다. 덤으로 품계는 종1품상 개부의동삼사 그대로다.
물론 한성판윤은 요직이다. 하지만 내정에 집중하는 직책이라 외교 문제를 논하는 자리에 동석하기는 좀 애매하다. 영돈녕부사도 마찬가지, 돈녕부라는 관청이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들을 관리하는 곳이므로 외교와는 관련이 없다.
전 장인인 김조순에게 영돈녕부사를 내린 태황은 현 장인인 박종선에게는 판의금부사를 주었다. 물론 판의금부사라고 해서 정말로 의금부 일을 제대로 하는 건 아니다. 형식상으로 자리에 앉아 지위가 주는 권위를 누릴 뿐이다. 과거에도 종종 있었던 사례다. 이렇듯 태황이 결집한 인사들은 입을 모아 조부의 뜻대로 스페인령 동인도를 사들이자는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국상 정약용을 비롯한 조정 중신 다수는 아직 이 거래를 실행하는 데 의구심을 품었다.
“하오나 폐하. 이 일은 나라의 강역을 그린 지도가 달라지는 큰일입니다. 섣부르게 결정할 수는 없으니 심사숙고하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정약용은 조부 생전에도 이 계획에 반대했었다. 50만 달러가 우리 전체 예산에 비하면 야 적은 돈이겠지만 절대적으로도 적은 금액은 아닌데, 이 돈을 들인다고 해서 당장 눈에 띄는 효과가 두드러지지도 않을뿐더러 멀리 있는 섬들을 관리하기만 번거롭기 때문이다. 내가 발언한 일본의 변화에 대한 예측에 대해서도 이들은 의문을 드러냈다. 내가 제출한 예상이 꽤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일본이 정말 그렇게 움직이리라는 근거는 전혀 없니 않느냐, 어디까지나 억측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예, 폐하. 국상의 지적이 옳습니다. 소자가 말씀드린 바는 소자가 임으로 한 예측일 뿐,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추궁이 들어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나라고 해도 고작 열너덧 살짜리 애새끼가 자기 멋대로 상상한 이야기를 떠벌리면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다면 정약용처럼 반응했을 거다. 백이면 아흔아홉은 무시했겠지. 그게 상식적인 반응이고.
중2병 걸린 애새끼가 내놓은 과대망상을 판단의 자료로 국정을 운영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나도 이 노신들에게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물론 나는 ‘진짜’ 열다섯 살이 아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가.
태황도 마찬가지로 생각한 듯했다. 내가 주장하는 바가 얼마나 대단하냐고 추켜세우기는 해도 내 주장을 근거로 해서 중신들을 찍어 누르려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용기를 얻었는지 정약용을 비롯한 반대하는 편에 선 중신들이 입을 모아 간청했다.
“폐하, 신들이 감히 청하옵니다. 부디 심사숙고하시어 판단하소서.”
노신들의 청을 들은 태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그리 생각한다니 아직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결정을 내리기로 하지. 하지만 잠은 선황께서 남기신 유지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노라.”
태황은 끝내 계획을 최소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 의견을 들어주는 시늉은 했다. 이만하면 자기 뜻을 꺾지 않으면서 여론을 반영하는 흉내는 낸 셈이다. 이를 깨달은 양편 신하들이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사실 태황이 부드럽게 구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여기 있는 중신 중에 절반은 조부와 함께 물러가겠다던 노신들이다. 가겠다는 사람을 계속 일하라고 억지로 붙든 장본인이 태황 자신이니, 일을 강요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날의 회의는 일단 그렇게 마무리됐다. 태황은 스페인령 동인도를 매입할 의향을 확실히 밝혔고,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주기는 했으나 동의하지는 않았다. 선황의 유지라는 강력한 방패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이만하면 방향은 명확하게 정해진 셈이다. 하지만 아직 실행 여부를 확실하게 선언하지는 않았다. 내 예전 삶에서도 종종 그랬듯이.
“하와국은 새 정책을 결정할 때 그렇게 하지 않은가?”
인사치레로 물어보았더니 하진교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하와국에서부터 함께 배를 타고 오는 동안 친해져서 그런지, 대답하는 태도가 아주 유들유들하다.
“그날 바로 끝나지 않을 안건은 애초에 회의에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래, 하와국은 그런 나라지. 나도 다 알면서 왜 물었을까. 괜히 쓴웃음을 지으면서 발을 움직여 부케팔로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자, 나는 가네! 달리자며?”
“저, 전하! 기, 기다려 주십시오!”
순한 말을 탄 하진교는 삽시간에 저만치 뒤에 떨어졌다. 안장 위에서 허둥거리는 모습을 얼핏 보니 괜히 피식 웃음이 났다. 익위사 무관들이 나를 놓칠세라 빠르게 따라붙었다.
6.
조부의 상이 끝나고 반년이 지났다. 하진교는 조문을 마치고도 당분간 한양에서 머무르고 있다. 살 빼러 밖으로만 다니는 게 아니라 나하고 시강원 수업도 종종 같이 듣는다. 그리고 스승들에게 뜻밖의 호평을 들었다.
“하와국 세자께서는 학문을 상당히 깊게 닦으셨군요.”
“어험, 험.”
저 큰 덩치로 하는 헛기침 소리가 은근히 귀엽다. 하지만 실제로 시강원 스승들이 탄복할 만하기는 했다. 본래 하와국 왕실에서는 찬자문도 뗀 사람이 드물다는 악평이 자자하건만, 하진교는 소화에 논어까지는 공부하고 왔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모후께서 제 학업에 크게 신경을 쓰신 결과로…..”
점잔을 빼며 자랑하는 소리를 들으니 더 웃음이 난다. 과연 하진교는 자기만 유별난 이가 되지 않고 하와국 왕실에 제대로 왕화를 전할 수 있을까. 하와국 사회 전반에 퍼진 풍조야 간단히 바뀌지 않겠지만, 적어도 왕실의 사고는 같은 궤를 타는 편이 좋으니.
“어떻습니까. 이번 달 회강에 태자 전하와 함께 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대궐 안팎에 저하의 문재(文才)를 널리 알리실 기회입니다.”
스승들이 하진교를 꼬드겼다. 나도 옆에서 은근히 부추겼다.
“당당하게 솜씨를 뽐낼 기회일세. 하와국 세자로서 위상을 떨쳐 보게나.”
“그럴까요……? 좋습니다, 해보겠습니다.”
회강이 뭐 특별한 시험도 아니다. 태자나 태손의 성취 정도를 파악하느라 보름마다 치는 간단한 시험이다. 내게는 그저 요식행사에 불과하고 말이다. 하지만 하진교에게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으리라. 이 이야기가 하와국에 전달될 때는 ‘세자께서 태자 전하와 함께 황궁에서 시험을 치러서 극찬 받으셨다!’ 정도로 ‘와전’될 테니까 말이다.
하진교는 그동안 하와인들의 선호하는 지도자감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대한 본국에서 인정받는 모습이라도 보여주어서 그 권위를 등에 업게 해줄 필요가 있다. 회강 참여는 이를 위한 아주 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호랑이도 한 마리쯤 잡아야지.”
“물론이지요!”
지난겨울에는 아무래도 국상이 끝난 직후라 사냥을 나가기는 좀 그랬다. 그래서 법으로 정해진 강무에만 나갔다. 주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내가 했다. 태황이 ‘고뿔’에 걸렸다며 드러누워서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나, 선황 폐하를 보낸 충격 때문인지 가벼운 병이면서도 내가 도저히 일어날 수 없구나. 미안하지만 네가 이번 강부를 좀 주관했으면 좋겠다. 너는 이미 강무에 참석해본 적도 있고, 장수들이 잘 보좌할 터이니 괜찮을 거다.”
미주에 가기 전에 조부를 따라 나갔던 강무 말인가. 열 살도 안 된 어린애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군대 구경하러 나갔던 그 ‘나들이’를 과연 참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볼 거리도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임금한테 꾀병 아니냐고 추궁할 수도 없고, 태의에게 폐하의 병이 진짜냐고 캐 물을 수도 없으니까. 시키는 대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바마마. 소자가 강무에 나가서 군사들을 점고하고 그 연습하는 양태를 잘 살펴서 아바마마께 전하겠습니다.”
“고맙구나, 쿨럭.”
심지어 참관단도 있었다. 디에고야 익위사로 소속을 옮겨 여전히 내 경호를 맡고 있으니 그렇다 치고, 혼자 도성에 있기 심심하다며 하진교가 따라왔다. 여기에 한국군의 군사훈련 장면이 보고 싶다며 데이비 크로켓과 영국 공사 리처드 웰즐리 후작까지 따라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아시아에서는 한국 육군의 위상이 참으로 높더군요. 늘 궁금했는데 직접 살펴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하고 수풍처럼 따라온 크로켓과 달리 웰즐리 후작은 조금 더 무게를 잡았다. 하지만 그동안 영국군과는 교류가 별로 없었던 우리 군대가 과연 어떻게 움직이는지 구경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품고 따라붙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보나파르트 황제를 격파한 명성 높은 웰링턴 공작의 친형께서 우리 육군을 높이 평가해 주시니 감사할 뿐이오. 근래 실전을 치른 적은 없으나, 옛 조상들이 남기신 명성이 있으니 그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소.”
그렇게 해서 이번 강무는 손님까지 잔뜩 끌고 나갔다. 부담 백배였다.
“으으, 그때 일을 떠올리니 갑자기 온몸이 춥다.”
괜히 몸을 한번 떨었다. 엿새 동안 눈밭에서 말을 달리고, 눈밭에 군막을 치고 숙영하고, 8천 명에 달하는 금군과 오군영 군사들을 사열하고, 프랑스군 출신 고문관들의 지도를 받는 강무관 생도들의 실습 과정을 참관했다. 군사들이 진법을 펼치는 장면도 살폈다. 그래도 진행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골백번은 해본 강무 주관 아닌가. 게다가 구경꾼들을 잔뜩 모셔다 놓고 진행하는 행사다. 괜히 서툴게 진행해서 흠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웰즐리 후작이 뭐라고 했더라. 나보고 칼 12세 이래의 천재인 것 같다고 했던가.”
내가 아주 능숙하게 군사들을 지휘하는 모습을 본 웰즐리 후작의 표정을 잊지 못하겠다. 삼군부의 보좌는 있다지만 제대로 된 군대 경험도 없고, 군사교육도 안 받은 어린 황태자가 마치 백전노장이라도 된 듯이 수천 명에 달하는 군대를 움직이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데이비 크로켓이 보인 놀라움과는 달랐다. 데이비 크로켓은 우리 병사들을 보고서 대놓고 이렇게 말했으니까.
‘바닷가재 놈들과 정면으로 대결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절대 지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바닷가재, 랍스터는 영국 육군을 가리키는 속어 중에 하나다. 영국군이 착용하는 붉은색 외투를 익으면 빨갛게 되는 랍스터 껍데기에 빗대어 부르는 속칭인데, 그 소리를 다른 이도 아니고 웰즐리 후작 바로 옆에서 했으니 그 배짱도 참 만만찮은 사람이다. 크로켓도.
웰즐리 후작은 우리 군대가 정예가 된 건 나폴레옹 휘하에 있던 고문관들의 공이 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도 완전히 엇나간 생각은 아니지만, 오해를 방치할 생각은 없어 우리 군대의 발전사에 관해 간략하게만 읊어주었다. 내게 이야기를 들은 웰즐리 후작은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기강이 잘 선 정예군 같다면서 연신 감탄사를 발했다. 칭찬받으니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어쨌든 우리도 당장은 영국과 충돌할 일은 없다. 유일하게 양 세력이 접하는 지역인 인도 방면에서도 딱히 긴장 관계는 없고, 영국은 이제 거의 껍데기만 남아서 말라 죽어가는 무굴 제국 잔여 세력을 확실히 휘어잡는 데 집중하는 중이니까.
그보다는 태황이 터트린 두 번째 폭탄을 어서 처리하는 데 집중해야 할 상황이다. 이건 나하고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면서 내 의견은 아무도 안 묻고 있다. 뭐냐고? 아직 국상이 끝나기도 전에 태황이 내게 미리 알려준 거 있잖은가. 건주 양국 방문. 조문에 대한 답방.
태황이 마침내 그 건을 조정에서 터트렸다. 그리고 편전에서는 그 문제를 두고서 치열한 논쟁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