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37
4부 121화(1737화)
1.
“폐하께서도 불랑국과의 관계에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실 겁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앉은 김정희가 애써 태황을 변호했다. 본래 김정희가 맡은 보직은 학무대신이지만, 외교에도 일가견이 없지 않았다. 학무부 쪽에서도 외무부와 별도로 학문적인 교류를 진행하는 부분이 있어서다. 게다가 부서 업무와 별개로 김정희 본인도 다양한 분야에 재능이 있고, 과거 외무부에도 근무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 대한의 외교 현황에 관해서도 꽤 잘 알고 있다.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 대한이 예로부터 바로 곁에 인접한 동양 국가들과 멀리 떨어진 서양 국가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음을요.”
“알고 있습니다.”
달랐지. 중국이나 일본은 죽으나 사나 계속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하는, 같은 천하에 속한 상대였지만 유럽은 멀리 동떨어진 별세계(別世界) 취급이었으니까. 견서사 파견 때도 그래서 힘들었다. 우리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다른 천하’에 대한 사람들의 생리적인 거부감을 다스려 가라앉히고 왕래의 틀이 잡히기까지 얼마나 노력해야 했던지.
그 이후로도 유럽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매년 교역선이 수십 척씩 오가고 소식을 보내는 익문사 주재관이 주요국 소도에 상주하며 학술지와 논문이 들어온다 해도 유럽은 다른 천하였다. 동아시아와는 달랐다. 동아시아 각국은 긴밀하게 지내야 하는 상대였다. 화친을 맺든, 싸우든 교류가 끊어지지 않았다. 가깝기도 하고, 수천 년 전부터 같은 하늘을 떠받들며 살아온 이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이나 미주에 있는 국가들은 앞서도 말했듯이 다른 세상에 있는 나라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외교에서도 도리어 상하관계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서로 누가 윗자리에 있는지 치열하게 재고 따져야 하는 상대지만, 유럽은 그냥 남이었다. 그만큼 정식 외교 관계 같은 걸 맺어야 할 동기도 부족했다. 저쪽에서 특사를 보내면 받고 우리 쪽에서도 꼭 보내야 할 용무가 있으면 보냈다. 하지만 외교관을 상주시키는 항구적인 외교 관계 같은 건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수백 년 동안 동인도회사 주재관들이 총영사 노릇을 하는 정도로 넘어갔다. 영국 외에 프랑스나 네덜란드, 덴마크 등이 모두 그런 체제였다. 국경을 맞댄 데다 과거에 황실 간에 피가 섞인 인연으로 얽힌 러시아만 예외였다. 이번에 영국, 미국, 누벨 프랑스 등과 외교관을 교환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세 나라 모두 자기들 쪽에서 먼저 제안했다. 영국과 미국은 제안만 한 게 아니라 특파대사까지 파견해서 먼저 상주 공관을 설치했다. 우리가 매달리면서 맺자고 한 게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불랑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요. 잉글국이나 합중국처럼 외교관을 파견하지도 않았고, 신불랑처럼 전하를 통해 서신을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과거 숙조 폐하 시절처럼 특사라도 보냈으면 몰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데 우리가 매달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숙조 폐하 시절의 특사’란 루이 14세가 내 부탁으로 파견했던 사절단을 말한다. 서학당의 기본이 그때 건너온 학자들이었고, 군사고문 상당수가 건너와서 우리 육해군의 전력 강화에 큰 영향을 주었었다.
다만 그 후손 – 계보를 따지면 루이 14세의 7대손이 된다 – 인 루이 19세는 우리 대한을 상대로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제국군 출신 고문관들이야 개인적으로 일자리를 찾아 건너왔을 뿐이고, 현 프랑스 왕국 정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분명 조부는 파리에 있는 왕실을 프랑스 정통정부로 인정해서 종종 선물도 보내고 친서도 보내 그쪽의 안위를 걱정해주곤 했다. 나폴레옹을 프랑스 황제는커녕 독립국의 지도자로도 인정하지 않았던 건 내가 말하다가 입이 아플 지경이다.
하지만 프랑스 쪽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선왕이던 루이 18세는 그래도 답장이라도 정성껏 쓰고 답례품도 챙겨서 곧바로 회신했건만, 내가 각성한 다음 해인 원평 41년(1823)에 새로 보위에 오른 루이 19세는 달랐다. 답장도 제때 안 왔다. 자기 부왕과 전혀 다른,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루이 19세를 조부라고 곱게 봤을 리 없다. 조부가 나폴레옹을 인정하겠다고 나섰던 까닭이 어디 내 설득 때문만이겠는가. 루이 19세가 하는 짓이 계속 눈 밖에 난 것도 크게 한몫했다.
“불랑국왕이 시종 그런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폐하께서 굳이 공관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잉글국이나 합중국이 했듯이 사절부터 부내서 공관을 두자고 청해도 받아줄까 말까 한 것을, 어찌 우리가 먼저 청하겠습니까?”
김정희를 비롯한 중신들은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라는 정신에 충실했다. 프랑스 측에서 우리와 외교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싶으면 저쪽이 청해야지, 우리가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저희로서는 아쉬울 게 없으니까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난번에 편전에서 우려를 표한 외무대신 심세원이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루이 19세 측의 반응을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 대부분은 태황과 마찬가지로 아휴 자기들이 아쉬우면 말하겠지 하는 태도였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도 별 이의가 없었고.
“전하, 곧 의주역에 도착한다고 하옵니다.”
“알겠다.”
방송설비 따위는 없다. 그런 게 생기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서 열차가 정차할 때가 되면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이번 역은 어디라고 소리쳐서 알린다. 물론 이 열차는 일반 열차가 아니라 황실 전용 특별 열차이므로 그 역할은 내관들이 맡았다.
“의주에서는 평양처럼 요란한 환영 행사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승님.”
“신도 동감입니다, 전하.”
평양에서 황태자의 방문을 환영한답시고 성대한 환영 행사를 연 거야 뭐 좋았다. 문제는 행사 중에 ‘석전(石戰)’이 끼어 있었다는 거다. 자고로 평양은 안동, 김해와 더불어 대한에서 석전으로 유명한 3대 고장이 아니던가. 평양부에서 유명한 석전꾼들을 싹 모아다가 준비했다는 그 싸움은 무려 6백 명에 달하는 석전꾼들이 두 패로 나뉘어 벌인 혈전이었다. 하도 오랜만에 직접 보는 석전이라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승패가 났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중상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고 들었습니다. 도대체가 그놈의 석전은 그만두라고 해도 그만둬 지지가 않으니……”
장조 시기만 해도 석전꾼들은 예비전력으로 비상한 가치를 발휘했다. 갑옷 때문에 화살을 맞고도 잘 쓰러지지 않는 적병들을 단박에 자빠트리는 확실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왜란을 맞아 석전꾼들이 돌과 척탄을 던지며 얼마나 활약했던가. 하지만 중종 때는 이미 석전의 가치가 크게 퇴색했다. 총과 야포의 성능이 더 개선되면서 투석이 가능한 거리로 접근하는 거 자체가 어려워졌고, 척탄병이 담당하는 역할도 예전과는 달라져서다. 군사적으로는 석전이 별 의미가 없어졌다.
조정에서는 이제 군사적인 의미도 없으면서 사상자만 속출하는 이 놀이를 그만두게 하고 싶었지만, 민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천 년이 넘도록 계속된 관습이 겨우 금령(禁令) 서너 번에 없어질 리가 없는 것이다. 조부도 석전을 없애려고 했었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나마 사상자라고 줄이려고 한 조치가 보호장구라도 확실히 착용하라고 한 거였고, 그에 따라 가죽과 솜을 아낌없이 써서 제작한 경기용 투구와 갑옷 덕분에 이번 석전에서도 사망자는 없었다.
“의주는 평양이 아니니까 석전판은 없을 겁니다. 다른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뭐든지 피는 안 보면 좋겠습니다.”
잡담을 주고받은 사이에 열차가 의주역 승강장으로 들어섰다. 개성과 황주, 평양, 안주에 이은 다섯 번째 기착지다. 더불어 네 번에 걸친 내 생에서 처음 찾아와보는 의주기도 하다. 송 내관에게 방에 있는 이들을 모두 불러오게 했다. 함께 내려야 하니까 말이다.
2.
이번 북경 방문은 걱정한 만큼 조야의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되려 환영받았다. 조정에서 신중하게 나눈 논의에 따라 공식적인 방문 목적을 건주 양국에의 ‘입조’가 아니라 북경에 있는 옛 명나라 황릉 및 역대제왕묘(歷代帝王墓) 참배라고 열심히 홍보한 덕분이다. 역대제왕묘는 명나라 가정제가 세운 것으로, 우왕과 탕왕부터 시작하여 역대 왕조를 세운 창업군주 16명의 위폐를 모아놓은 사당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원나라는 칭기즈칸이 아니라 ‘원’을 세운 세조 쿠빌라이가 모셔졌다.
이 사당은 다이샨이 북경을 장악했을 때도 고이 보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원래 없었던 요나라와 금나라 시조의 위패도 더했다. 박화탁 시절에는 창업 군주만이 아닌 다른 황제들도 모시게 되면서 삼황오제부터 명나라 태창제까지 모든 황제와 여러 명신의 위패가 모셔졌다.
가정제가 이 사당을 건립한 해가 가정(嘉靖) 9년 경인년(1530)이었으니, 올해가 정확히 건립 300주년이다. 건립 300주년을 맞이해서 역대제왕묘를 참배하겠다는 건 조정 중신들은 물론이고 유생들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명분이었다. 더구나 나 혼자서만 가겠다는 것도 아니다. 명나라 황실의 적통 후계자이자 우리 황실의 피보호자인 대명공부에서도 함께 가는 거다. 비록 대명공 주계신은 근래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빠졌지만, 그 맏아들인 대공자 주성진이 함께 가게 되었다.
“대명공과 공자 중 누가 가건 별 상관은 없습니다, 폐하. 그대로 가납하소서.”
“옳다. 그대로 받아들이라.”
내 생각으로는 주계신이 새파란 어린애를 상전으로 받을어 모시기 싫어서 빠진 게 아닐까 싶다. 주성진은 나보다 한 살 어리니까 나는 확실히 주계신의 아들뻘인데, 자그마치 2백 년 만에 찾아가는 북경에서 그런 굴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나로서도 동년배 어린애 쪽이 훨씬 다루기 편하다. 서로 좋은 결과인 셈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신하들과 유생들을 설득하고, 건주 양국에 미리 사신을 보내서 내 북경 방문 일정을 알리고, 한 달에 걸쳐서 준비를 마친 뒤에 북행길에 올랐다. 기관차를 3량이나 연결한 특별열차에 몸을 싣고서 말이다. 물론 대내적인 북경행 명분이 명나라 황릉과 역대제왕묘 참배라고 해서 정말 저 두 곳만 방문하고 올 건 아니다. 청나라 황릉도 참배하고 그 앞에 향을 올릴 예정이다. 그거라도 안 하면 대체 무슨 명분으로 건주 양국과의 우호를 증진하겠는가.
여기에 나와 별도로 ‘공식적으로’ 두 나라 조정에 국서를 올리고 그동안 양국이 우리한테 협력해준 데 대해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할 사절이 또 따로 있다. 김정희가 사조사(사조사) 정사, 박규원이 부사로 뽑혀 동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나를 북경에 남겨두고 김정희만 개봉에 간다거나 할 건 아니다. 청나라 쪽에서 나를 영접하러 나올 접반사를 북경에서 만나 국서를 건네주면 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나와 함께 북경에서 일정을 수행하면 된다.
이 방문을 위해서 준비한 특별 열차는 만약을 대비해서 큰 기관차를 3대나 연결한 삼중련(三重連)으로 준비했다. 혹시 운행 중에 한 대쯤 고장이 나더라도 상관없게 하려는 준비의 소산이다. 연결된 객차와 화차는 총 15량이다. 내 전용 객차가 1량, 회의실 겸 사무공간 1량, 나를 수행하는 문무관들과 하인들이 사용하는 차가 2량, 경호를 담당한 익위사 무관과 군사들이 사용하는 차가 2량, 나를 시중드는 궁인들이 이용할 차가 2량, 여정 도중에 사용할 물품과 나눠줄 선물을 실은 화차가 5량이다.
물론 황태자의 행차에 오직 이 한 편성만 움직일 리가 없다. 태황은 내가 탑승한 이 열차 앞뒤에 금군 소속 정예병을 1개 중대씩 태운 열차 한 편씩을 별도로 운행하게 했다. 하나는 앞서가면서 방패 노릇을 하고 하나는 뒤따라가면서 배후를 지키라는 지시였다. 나를 직접 호위하는 익위사가 1개 중대 규모니 나를 호위하느라 따라붙은 군사는 사실상 3개 중대, 450명이나 되는 셈이다. 국내에서의 행차라면 이것보다 두세 배는 되어야 위신이 서겠지만, 외국 방문이니 이 정도면 됐다. 전쟁하러 가는 것도 아니니까.
아, 15량이라고 해놓고 13량만 설명했는데….나머지 2량은 대명공에게 주어진 객차들이다. 하나는 대명공부의 시종들이 탑승할 차량, 하나는 대명공의 전용차다. 명색이 대명의 적통 후계자인데 전용차 한 량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대명공부에는 전용 열차 같은 게 없었다. 대명공이 대명동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데 전용 열차 따위가 왜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이번 북경 방문을 앞두고, 태황이 특별히 대명공부에 전용차를 선사했다. 새 차를 제작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탓에 철도 도감에서 보유하고 있던 황실용 예비차량을 간단하게 손보기만 해서 보냈다. 평범한 열차 운행이라면 한양에서 의주까지 하루면 닿는다. 하지만 이 장려한 특별 열차는 여기 의주에 닿기까지 닷새나 걸렸다. 왜냐하면 도중에 있는 큰 고을, 개성ㆍ황주ㆍ평양ㆍ안주에 모두 정차해서 하룻밤씩 자고 왔기 때문이다.
“폐하. 이번 북방 순행은 태자 전하께서 처음으로 북도 백성들을 보시는 길입니다. 그러니 주마간산 격으로 휭하니 지나치실 게 아니라, 주요 고을마다 들러 하루씩 묵으시면서 그곳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돌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미주에서 하셨듯이요.”
정약용은 내가 미주에서 기차를 이용해 여러 고을을 방문하며 그곳 백성들을 위무했음을 상기시켰다. 태황은 지극히 옳은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상의 말이 옳도다. 태자는 도중에 있는 각 고을에 들러 백성들의 삶을 살피도록 하라.”
미주에서는 그래도 정말 하루 거리에 있는 도시에 들렀지만, 여기서는 몇 시간 간격이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고개를 숙여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속으로 배알은 좀 꼴렸다. 태황 자신은 개성 이북으로 한 번도 올라가 보지 않은 걸 내가 아는데, 나한테는 주요 고을에 모두 방문해서 백성들을 살피라고 하니 곱게 들릴 리 있겠는가. 물론 옛날 내가 본 풍경과 달라진 모습을 보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말이다. 그것도 내가 생각해서 가는 거여야 할 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떠맡고 보니 태황이 자기가 맡아 해야 할 순행을 내게 떠넘긴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대리청정에 이어 대리 순행이냐?
하여간, 실제 도시 간 이동에는 몇 시간밖에 안 결렸지만 방문하는 도시에서마다 하루씩 머물러서 자고 왔으니 한양에서 의주까지 닷새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는 하루도 아니고 이틀을 머물렀다가 가게 되어있다.
“국상이 만들어낸 우리 대한 최대의 계획도시니까 말이지.”
의주 부윤을 비롯한 의주 관리들이 내게 굽실거리느라 숙인 허리 뒤로 넓게 펼쳐진 의주 시가지가 보였다. 압록강 양안을 따라 펼쳐진 시가지가 바다까지 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