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38
4부 122화(1738화)
3.
의주부는 본래 평양과 안주에 이어 서북 지방을 통제하는 요지다. 고려 때는 ‘보주(保州)’라고 불렀고, 국경을 장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요나 금이 고려를 공격했을 때는 여기가 침략 거점이었고 고려가 여기를 장악하면 방어의 중심이 되었다.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요충지다 보니 여기서 수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 말 이성계의 제2차 요동 정벌도 이곳 의주에서 중단되었다. 원정군이 돌아간 곳, 위화도가 바로 의주부 관내에 있는 섬이다. 조선이 성립하고, 압록강이 국경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다음에는 의주부도 두 나라를 연결하는 상업 거점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사신단이 오가는 길이 육로에서 해로로 바뀌면서 다소 쇠퇴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민간 교역량의 증대로 벌충할 수 있었다.
의주부의 발전에 박차를 가한 건 연이 시절에 이뤄진 요동병합이었다. 명나라의 복수를 명분으로 삼아 건주를 입관시키고, 텅 빈 요동으로 대량의 인구와 물자를 들여보냈다. 그중 가장 많은 이들이 지나간 고을이 의주였다. 의주에서 항구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남방에서 의주까지 수로로 올라온 인력과 물자가 여기서부터는 육지로 이동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본래는 무척이나 보잘것없던 의주항이 크게 성장했고, 고을의 격도 ‘목(牧)’에서 ‘부(府)’로 오를 수 있었다.
의주항이 본래 보잘것없었던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조선의 항구는 대개 기본적으로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망의 일부였다. 하지만 평안도 지방은 잉류(仍留) 지역이라 하여 거둔 세금을 현지에서 소비하고 중앙에 보내지 않으니, 항구가 커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2백여 년 전 요동이 정식으로 우리 땅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군사적인 중요성은 예전보다 떨어졌다지만, 의주는 여전히 본국과 요동을 연결하는 교통의 오지였다. 주변에 자원도 풍부하다. 획기적으로 발전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곳이다.
이렇게 중요한 고을이다 보니 의주 부윤의 품계는 종2품이다. 같은 품계인 평양 부윤, 즉 평안감사가 평안남도 관찰사를 겸임하듯 의주 부윤도 평안북도 관찰사를 겸임한다. 조정에서 겸임하는 사례는 거의 없어졌지만, 관찰사는 여전히 감영이 있는 고을 부윤을 겸임한다. 다만 의주역과 의주부 관아가 자리를 잡은 이 일대는 본래 의주부 치소가 아니다. 사실은 원래 역사에서 신의주시가 있는 자리다. 본래의 의주부는 여기서 압록강 상류 방향으로 약 40리가량 더 올라간다. 철도와 항구를 관리하기 유리한 곳으로 치소를 옮긴 거다.
“의주부는 인근에 철광과 석탄이 풍부하며 목재와 비싼 석재가 산출되고 농토도 넓으니, 어찌 산업이 융성하고 인구가 늘지 않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의주 부윤 임승훈(林丞勳)이 허리가 꺾어질 듯이 절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출발하기 전에 듣기로는 임경업의 후손이라던데, 내가 임경업을 못 만나본지라 별 감흥이 없다. 장조 시기까지는 역사가 크게 안 바뀌어서 그랬겠지만,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그 시기의 다른 장수들처럼 임경업도 원래 역사와 비슷하게 나타나기는 했다. 다만 나하고는 어긋나서 내가 죽고 난 뒤에야 출사했을 뿐이다.
중종 때 확인했지만, 6차 견서사로 유럽에 간 이괄은 30년 전쟁 당시 관전 장교로 유럽에 머물다 왔었다. 수하에 무관 세 명을 거느리고 발렌슈타인을 따라 북부 독일을 돌아다녔다. 그중에 한 사람은 공식적으로 독일에서 ‘병사’했고, 다른 두 사람은 이괄과 함께 8년 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그 둘 중 한 사람이 임경업이었다.
임경업은 귀국한 뒤에는 정충신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 옛 상관인 이괄이 우리 영토가 된 요동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아 용명을 떨친 것과는 달리 아주 엉뚱한, 그러면서도 원래 역사의 임경업과 비슷한 행동으로 명성을 떨쳤다. 바로 명나라 출진이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중원의 혼란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 연이는 그전부터 건주 측과 밀약을 맺고 있었고, 중원 제압은 건주군의 몫으로 남겨두고 자기는 칭제건원과 관제 개편 등 내정에만 집중했다. 임경업이 이괄과 함께 귀국한 게 바로 그때였다. 이괄은 그런 사정은 상관하지 않고 중원에서 비롯된 혼란이 자기한테 내줄 출세의 기회를 잡는 데 몰두했다. 그래서 준비해 두었다가 요동 제압 당시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임경업은 달랐다. 임경업은 ‘상국’이 무너지려는데도 방관하는 조정의 처사에 크게 분개하여, 상관인 정충신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벼슬을 집어던지고 뛰어나갔다.
“천자께서 이 나라를 위해 베푸신 은혜가 한둘이 아니거늘, 그 은혜를 잊으면 내가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경인 왜란 당시 명나라가 우리를 도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도움이 원래 역사에서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명나라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우리 힘만으로도 일본군을 물리칠 수는 있었다. 물론 훨씬 쪼들리고 가난한 싸움을 하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정치적인 관계라는 게 있으니 명나라 측의 도움은 실제보다 과장해서 칭송되었다. 그리고 양응룡의 난이라든가 사르후 전투 등에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보답도 이루어졌다.
물론 이런 파병들은 우리 조야에서 명나라의 평가를 떨어트리는 역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순전히 군사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가 된 게 아니고, 명나라 사회 자체가 꼭대기에 있는 황제부터 밑바닥에까지 싹 다 썩었다는 사실을 우리 군사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20여 년, 만력제는 물론이고 그 아들 태창제도 썩어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그 꼬라지를 바로 옆에서 본 우리 조야 대부분은 저따위 천자 망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젊은 데다 그동안 유럽에 갔다 온 임경업은 달랐다.
“아무리 썩었더라도 천자는 천자요!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이가 혼군(昏君)이라고 하여도, 그 사직을 유지한다면 얼마든지 현군(賢君)을 옹립해 나라를 되살릴 수 있소. 지금 우리가 군사를 보내 황실을 구출하고 도리를 바로 세우면 대국의 스승이 될 거요!”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임경업 하나뿐인 건 아니었다. 그동안 명나라와 함께 보낸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 ‘그래도 천자는 천자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임경업은 이런 이들을 수백 명이나 모아서는 함께 중원으로 건너갔다.
“천자와 황실을 보위하여 대조선 남아의 기상을 천하에 떨칠 것이다!”
뜻은 참 좋았지만, 이 거창한 계획은 당연히 성공할 수 없었다. 대한의 전군이 몰려가도 힘들었을 일을 겨우 수백에 불과한 의용군 군사로 어떻게 해치운단 말인가. 다이샨이 이들을 받아들여서 자기 진중에 자리를 마련해 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이들이 원했던 바와는 달랐다. 이 의용군들이 원했던 건 명나라 황실을 복위시켜서 대국의 스승이 되는 거였지, ‘오랑캐 군대’의 일익이 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이들이 피바다가 된 화북을 뒤로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건 중원으로 건너간 지 3년 만인 건원 4년(1635)이었다. 건주가 그 본거지를 아예 화북으로 옮기는 광경을 보고서야, 이제 명나라 부활은 글렀다고 체념하고 돌아온 거다. 당시 조정에서는 임경업과 그를 따라 중원으로 건너가 싸운 사대부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다. 사직 상소가 정식으로 수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무리를 결성하고 무장을 갖추어 나라 밖으로 싸우러 갔기 때문이다.
“폐하, 통촉하시옵소서. 대명의 천자께서 이 나라를 위해 막대한 전량을 보내주신 게 고작 40년 전 일입니다. 당장, 이 편전에 있는 노실들부터가 천자께서 보내주신 은으로 병장기를 갖추고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저 그 은혜를 갚고자 한 자를 어찌 벌하겠습니까.”
원래 역사를 생각하면 정말 뜻밖이지만, 내부대신이던 김자점이 나서서 이들을 강력하게 변호했다. 호부대신 심기원도 합세했다. 조정과 중추원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윤허도 없이 벼슬을 버린 것은 큰 죄입니다. 엄중히 벌해야 합니다.”
“경업이 비록 무식한 무부였다고 하나, 그 기상이 과거 신릉군이 조나라를 구원하고자 한 것과 같으니 높이 평가함이 옳습니다.”
결국, 논란 끝에 이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준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이들이 죄를 지은 건 명백하다. 그래서 ‘벌도 없고 상도 없는’ 결과로 끝났다. 그래서 임경업은 이괄과 달리 봉작도 받지 못하고 벼슬도 한직을 전전했다. 하지만 ‘의사(義士)’라는 명성은 얻었다.
임경업의 후손들은 ‘대명의 마지막 충신’이라면서 임경업을 크게 칭송했다. 사회적으로도 임경업은 상당히 추앙받는다. 다만 황실에서는 임경업이 저지른 ‘공식적인 잘못’을 고려해야 하는 사정 탓으로 포상이나 벼슬을 내린다거나 하지는 앓았다.
‘옛 명나라 황릉을 참배하러’ 가는 이번 순행에서 만난 의주 부윤이 하필이면 그런 임경업의 후손이라니,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승훈은 열심히 허리를 숙이며 온갖 미사여구를 주워섬겼다.
“소인이 이 의주 고을을 맡은 지 어언 3년, 그동안……”
“그대가 충민공의 후손이라지?”
내 뒤에서 나선 대명공부 대공자 주성진이 반색하면서 나섰다. 충민공(忠愍公)은 조부가 비록 임경업이 잘못은 했으나, 그 기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며 내려준 시호다. 충렬사라고 이름을 지은 사당도 하나 지어주었다. 백 오십여 년이 지나서 겨우 좀 인정받은 셈이다.
“우리 대명공부에서는 충민공에게 하염없는 감사의 염을 품고 있네. 그 후손을 만나보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네.”
언뜻 보면 주성진은 내 신하로 보인다. 곤룡포를 입은 내 뒤에서 사모관대 차림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하지만 흉배에는 삼조룡을 수놓고 있다. 보통이 아닌 주성진의 혈통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치다. 하지만 그 혈통과 하는 짓이 눈꼴신 건 별개 문제다. 보기 싫은 꼴은 중단시켜야지.”
대공자께서는 익숙하지 않은 기차 여행이 피곤하지 않으시오? 일단 숙소로 가서 휴식을 좀 휘하는 편이 어떨까 싶은데.”
“아….알겠습니다. 태자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면 먼저 객관으로 가 있겠습니다.”
딱히 화를 내지도 않았다. 평온한 목소리로 딱 한 마디 건넸을 뿐이건만 주성진은 알아서 어물거리며 물러났다. 그래, 네가 나서서 잘난 척할 자리가 아닌 줄은 알아야지.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네 신하가 아니라 내 신하가 될 이들이라고.
“그래, 그대가 의주부에 부임한 지 3년째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소인이 부윤이 된 뒤로 이곳 의주부에 거주하는 거민(居民)의 수효가 4천 명이나 늘었으며…..”
내가 다시 대화를 이어가자 임승훈은 신이 나서 열심히 주워섬겼다. 경국대전에서부터 죽 이어져서 지금 대전통편에도 명시된 수령의 7대 의무,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자기가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 태자에게 선보일 이 좋은 기회를 왜 놓치겠는가. 임승훈만 이런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다. 개성 부윤과 황주 목사, 평양 부윤, 안주 목사 모두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고을을 얼마나 잘 다스렸는지 자랑하느라 한참을 보냈다. 조금이라도 내게 더 잘 보이려고 다들 난리였다.
“전하. 이다음은 의주부 관아에서 말씀드리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그러도록 하라.”
다행히 임승훈의 보고는 쓸데없이 길지는 않았다. 적당한 위치에서 끊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차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마차에 오르니 의주부 관원과 순검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행진하는 길가에는 의주 백성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와 환호하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천세!”
“천세! 천세!”
처음 겪는 것도 아니지만 참 뿌듯하면서도 부담을 주는 광경이다. 벌써 네 번째다. 과연 이번에는 저들에게 얼마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선사할 수 있을까. 무거워지는 마음을 억지로 추스르면서 좌석에 기대앉았다. 마차 밖에서 울리는 환호성은 계속 귀를 울렸다.
4.
앞서 만난 네 사람이 모두 그랬듯, 임승훈도 자기 집무실에서 커다란 의주부 지도를 벽에 걸어놓고는 의주부가 얼마나 크고 번영하는 고을인지 열심히 설명했다. 나도 지도를 살피며 그동안 강서원 및 시강원에서 배운 바를 임승훈의 설명과 뒤섞어 되새겼다.
그동안 다소 무계획적으로 발전하던 의주부를 통째로 뒤엎다시피 한 주역이 바로 국상인 정약용이다. 조부는 정약용을 시켜 부산과 동래를 먼저 재개발해 하나로 합쳐 종2품 부윤이 맡는 부산부를 만들었고, 그 성과를 칭찬한 뒤에 새 일거리로 의주부 재개발을 맡겼다.
새 의주부는 과거처럼 압록강과 맞닿은 평안북과 일부만 관할하는 고을이 아니다. 원래의 의주부 권역에다 현대 지명으로 하면 황금평, 용암포, 위화도, 심지어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중국 도시인 단둥시와 동강시까지 전부 의주부에 속한다. 정약용은 조부의 바람에 맞춰 이 광대한 면적의 토지에 산업지구와 상업지구, 거주지구를 배치하고 이를 뒷받침할 기반 시설을 만들었다. 그 결과로 의주부의 인구는 단박에 세 배로 늘었고, 산업 생산도 급증했다. 개성보다도 먼저 가스등이 들어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정약용이 세운 업적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전국을 돌며 철도, 도로, 운하 등을 정비하고 필요하면 신설했다. 수원에서는 화성을 건축했고, 여기저기 있는 행궁들을 손보고 수리하는 작업도 맡았다. 조정에서는 그와 관련된 법제 정비에서도 활약했다.
이처럼 큰 공적을 세웠으니 그 보기 드문 ‘벽상삼한삼중대광’을 제수받은 게 아니겠는가. 다만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그 못지않은 유능한 인재였던 정약전은 이처럼 쉴 새 없이 일을 맡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동생을 보고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놈의 관직을 붙들고 앉아 저 고생을 하는고.”
정약전은 딱 50세가 된 뒤에는 관직을 그만뒀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물고기와 고래 같은 해양생물학 공부에 매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자기는 그렇게 즐겁게 살았으니 동생이 끙끙거리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게 마땅찮아 보였으리라. 정약전의 삶도 개인적으로는 뭐 나쁠 게 없겠다만 국가적으로는 정약용 쪽이 더 긴요하긴 하다. 그러니 벼슬이든 품계든 내려 그 공을 예우하는 게 마땅하고, 조부에 이어서 태황도 정약용을 계속 국상 자리에 두어 예우하고 있다.
물론 시스템을 처음 만든 사람만 공이 있는 건 아니다. 유지하고 관리하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임승훈은 확실히 꽤 유능한 관리자에 속했다. 애초에 정말로 무능한 인간 같으면 의주 부윤 같은 자리에 올라오지도 못한다.
“알겠다. 지금 의주부가 발전하는 데 그대의 공이 무척 큼을 알 수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임승훈의 공을 치하했다. 내 칭찬이 기쁜지 상기된 얼굴을 한 임승훈이 다음 일정을 안내했다.
“행궁에서 저녁 연회가 준비되어 있으나,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전에 잠시 위화도에 들르시어 태조께서 대업을 처음 이루신 장소를 기리시면 어떨는지요.”
“그것도 좋겠구나.”
위화도에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대규모 사당이 세워져 있다. 이는 위화도 회군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이성계의 의거였다는 게 황실의 공식적인 입자이기 때문으로, 쉽게 말하자면 황실에서 만든 일종의 성지다.
중종 시절까지만 해도 이런 시설은 없었다. 이것도 조부가 정약용을 시켜 만든 것으로, 대대적인 의주 재개발 당시 사당도 들어섰다. 조부가 직접 기차를 타고 와서 제사도 올렸던 전례가 있다. 이를 고려하면 내가 위화도에 가서 태조의 영전에 제사를 올리는 건 합당한 태도가 맞다. 이런 일정까지 다 고려해서 의주에서는 이틀을 머물게 된 것이니, 어서 다녀오도록 하자.
1)수령칠사
1.농상이 진흥됨[農桑盛]
2.호구가 늘어남[(戶口增)
3.학교가 일어남[學校興]
4.군정이 잘 닦임[軍政修]
5.부역이 균등함[賦役均]
6.송가가 간편함[詞訟簡]
7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없음[奸猾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