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39
4부 123화(1739화)
5.
행궁 안마당에는 대낮처럼 불이 밝혀졌다. 옻칠한 식탁 위에는 의주부에서 정성껏 마련한 산해진미가 차려졌고 앞에서는 무희들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춤을 추었다. 여기에 악사들이 연주하는 악곡까지 덧붙여지니 참으로 흥겨운 연회였다.
“그래도 평양보다는 못한 것 같습니다, 전하.”
수행원으로 따라온 셋째 외숙, 김좌근이 살그머니 속삭였다. 그동안 늘 나하고 함께하는 외가 쪽 사람은 큰 외숙부 김유근이었는데, 이번에는 막내인 김좌근으로 바뀌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장수생 신세였던 김좌근이 마침내 대과에 합격하면서 관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외조부 김조순과 큰 외숙 김유근은 김좌근이 대과에 합격하자 ‘드디어 집안의 큰 시름을 덜었다.’라며 환호하더니 곧바로 북경에 가는 내 수행원으로 집어넣었다.
‘전하를 모시고 세상을 보고 돌아오거라!’
김조순이 이렇게 일갈했다던데, 글쎄 김좌근이 공부는 좀 못했어도 세상 보는 눈이 크게 어두운 편은 아닐 텐데, 그동안 내가 본 바로는 정치적인 역량 같은 것도 꽤 있는 편이고. 내가 알기로, 김좌근은 방에서 공부만 한 게 아니고 여행도 꽤 즐겼다. 조선 팔도 – 아직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 에서 명승지라면 안 가본 곳이 없고, 북한(만주) 지방에서도 여기저기 많이 가 봤다. 너무 멀어서 그런지 미주는 안 갔지만, 구주랑 유구에는 가 봤다.
따지고 보면 여행에 빠져서 공부를 안 한 셈이다. 본인 주장으로야 여행할 때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랬는지 알 게 뭔가. 내가 같이 간 것도 아니었는데. 하여간 서른넷이나 먹고서 드디어 대과에 붙은 덕분에 김좌근도 당당하게 관직을 받고 내 출장에도 따라올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김유근만큼 믿음직스럽지는 못하지만, 별소 있나, 김유근을 평생 내 옆에서 시중만 들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종사관으로 따라온 김좌근은 이 고을 저 고을에 들를 때마다 자기가 여기에 관해서 아는 바를 내게 귀띔해주곤 했다. 지금 내게 속삭이는 것도 그 일환이다.
“역시 기생들이 선보이는 가무(가무)는 평양 기생들이 최고입니다. 의주 기생들은 역시나 질이 떨어집니다.”
내 외숙들은 대체로 태황과 사이가 껄끄러운 편이다. 어처구니없는 짓으로 소중한 누이를 죽여 놓고서도 일부러 한 건 아니었다며 태연한 사람한테 어떻게 호감을 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중 한 사람, 김좌근은 그나마 다른 형제들보다는 태황과 가까운 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여행과 두문자가 같은 유흥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그렇다. 매형인 태 황만큼 유흥을 즐기는 성품인지라, 종종 태황의 밤 행차에 따라 다니곤 한다.
태황은 두 손위 처남이 자기를 싫어하는 걸 잘 알아서 그런지, 형들보다 한참이나 어리고 자기보다도 한 살 아래라서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쉬워 보이는 김좌근을 종종 불러내서 같이 놀았다. 김조순과 김유근은 이를 마땅찮게 여겼으나, 대놓고 금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괜히 평양이 색향(色鄕)이라 불리겠습니까, 외숙.”
과거 평양이 흥청거리는 도시였던 건 조정에 세금을 바치지 않았던 덕이 컸다. 그 법이야 이미 진즉에 폐지되었지만, 평양은 여전히 흥청거리며 번영하는 도시다. 도시 남쪽에 붙은 탄광을 기반으로 가장 먼저 산업화한 도시인 데다 평안남도 일대의 상업 중심지기 때문이다.
평양을 기반으로 하던 상인집단을 가리키는 유상(柳商)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장조 시기 이후 송방에 지나치게 힘이 몰리면서 한동안 그 밑에서 예속되다시피 한 시기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머리를 내밀기 시작해서 어느 정도 세력을 확보했다.
이곳 의주를 기반으로 한 만상(灣商)도 마찬가지다. 연이어 터진 전쟁으로 북방이 박살이 나면서 이들도 그 혼란 때문에 세력을 크게 잃었다. 하지만 2백여 년에 걸친 평화와 번영은 송방에 눌려 위축됐던 유상, 만상, 내상(萊商, 동래상인) 등의 성장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애초에 장조 시절에 송방, 즉 송상이 경제계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했던 것도 개항과 교역을 막 시작하는 시점에서 당장 필요한 대규모 자본을 축적한 집단이 그들뿐이었던 탓이 컸다. 다른 상인들도 시간과 방법만 주어진다면 성장할 기회가 있는 거다.
다만 나는 중종 시절까지만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관심이 없었다. 독점자본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만큼 송방의 9대 상단은 종종 막대한 원납전을 바치면서 굽실거리곤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벗겨 먹는 수준으로 지나치게 탐욕스럽지만 않으면 봐줄 만했다. 헌데 영이는 그걸 좋지 않게 보았던 모양이다. 영이 치세 후반기부터 시전 상인과 송방의 경제 독점을 타파하는 칙령이 내려지기 시작했고, 이들 세력의 자본에 눌려 있던 다른 지역 상인들이 한숨을 돌리고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이가 송방을 억누른 건 부의 편중이 사회적인 불만을 가져오리라고 판단한 탓이 컸다고 한다. ‘독점의 폐해’를 운운하는 현대 자본주의보다는 ‘지나친 부유함은 해를 가져온다’라는 전통적인 성리학 쪽 관심에 가까웠다고 말이다.
하여간 그로 인해 유상, 내상 등은 부활할 기회로 잡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경제계에서 송방이 차지하는 비중이 60%라면 다른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40%는 된다. 주도권은 개성에 있어도 다른 지역도 행세할 만큼은 된다. 이 경쟁의 결과 송방 내에서도 상당한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9개나 되던 송방 내 상단 숫자는 이제 5개로 줄었다. 분야에 따라서는 독과점이 심해졌지만, 그만큼 다른 지역 상단이 파고들 틈도 생겼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지금 의주가 보이는 번영이다.
의주가 이렇게 성장한 결과로 당연히 유흥가도 번성했다. 하지만 ‘전통과 품격’이 쌓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아직 세간에서는 ‘평양 기생’을 ‘의주 기생’보다는 몇 단계 위에 둔다. 고정관념이란 게 본래 그런 거다.
“어떻게, 음식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임승훈이 앞에 나타나 굽실거렸다. 내가 아직 나이가 많지 않다 보니 차마 술을 올리지는 못하고 수정과를 올리는데, 태도가 꽤 가상했다.
“그대의 대접이 괜찮구나. 내, 돌아가거든 부황께 그대의 충심에 관해 잘 아뢰어 올리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정말 고마운지, 임승훈이 까만 사모를 쓴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다. 격식을 갖추고 나를 접대하는 자리인지라 평소 근무할 때 착용하는 흑립(黑笠)과 도포 대신 격식에 맞춰 단령을 입고 사모까지 갖춰 쓰고 있다.
“이 잔치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다. 위화도에 있는 태조 고태황 폐하의 사당을 얼마나 잘 돌보았는지 내가 빤히 보지 않았는가. 그 이야기도 부황께 아뢰겠다.”
가서 보니, 위화도에 있는 사당은 ‘순천사(順天祠)’라고 하는데 건물 크기가 강녕전만큼 컸다. 담장을 두른 경내는 넓이가 경회루 주변 연못에 마당까지 합친 정도였다. 유지용으로 딸린 재산이 꽤 있다고는 하지만, 이만한 사당을 관리하는 게 쉬울 리 없다. 재물을 삶는 커다란 청동 솥을 지나 이성계의 옥상(玉像)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려니 하늘에 있는 이성계가 지금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참 궁금했다. 내가 자기 후손이 아닌 줄은 이성계도 다 알고 있을 텐데, 과연 뭐라고 생각할까.
내 후손도 아닌 놈이 감히 이 나라 보위에 앉았다고 펄펄 뛰고 있으려나? 아니면 누구건 무방하니 그저 나라만 잘 다스리면 상관없다고 생각할까? 신경도 안 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이성계 앞으로 바친 제사가 수백 번은 족히 될 텐데 어떻게 매번 신경을 쓰겠나? 그냥 그놈이 올린 제사가 또 올라왔구나 하고 말겠지.
다만 이성계를 생각하면 기분이 좀 불안해지는 건 사실이다. 나중에 내가 정말로 죽어서 저승에 갔을 때, 이성계와 마주친다면 과연 그 양반이 나를 어떻게 다룰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가니 말이다. 그래서 찝찝한 기분을 털어낼 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래, 대공 자개서는 잘 쉬셨소?”
“태자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히 보냈습니다.”
내가 위화도에 다녀올 동안 주성진은 먼저 행궁에 와서 쉬고 있었다. 본인은 객관에 가서 쉬겠다고 했지만, 애초에 숙소는 행궁이었다. 아마 나한테 핀잔을 듣고는 쫄아서 말이 잘못 나온 모양이다. 주성진을 위화도에 데려가지 않은 건 내 고의였다. 공연히 끌고 갔다가 거기서 주성진이 쓸데없는 자부심만 부풀리는 꼴을 보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분명 위화도 회군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한 의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원정에 반대한 주역이었던 이성계 본인의 발언인 ‘사불가론(四不可論)’에 들어 있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라는 문구가 문제다. 본래 이성계의 뜻도 그랬고, 지금 우리도 이를 단순히 ‘힘이 약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싸우면 패할 수밖에 없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대명공부의 후계자인 주성진이 그 문구를 보고 사대주의적인 관점으로 이해한다면? 무척 기분이 나빠지지 않겠는가?
지금도 위화도 사당에는 사불가론을 쓴 편액이 매달려 있다. 사당 건립 이후 두 번쯤 새 편액을 만들어 걸었고. 지금 걸린 새 편액을 쓴 장본인이 바로 나와 동행하는 사조사 정사 김정희다. 그걸 본 주성진이 ‘역시 명이 대국이고 한은 소국’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크다. 그래서 아예 놓고 갔다. 태조 이성계의 사당에 걸린 편액을 보고 저 애송이가 헛된 꿈을 꾸지 못하도록 말이다. 대명공부에서는 그저 자기네 옛 조상들에게 제사나 지내고, 조부가 프랑스산 샴페인과 함께 즐겨 마시던 대명주(大明酒) – 대명공부에서 양조한 독한 고량주 – 나 잘 진상하면 되는 것이다.
“잠시 행궁 안팎을 둘러보니, 간소하면서도 또 장엄한 것이 참으로 훌륭하였습니다.”
의주 행궁은 전체 면적이 3백여 칸에 달하여 행궁치고는 꽤 큰 규모다. 임금이 행차할 때 임시숙소로 쓰는 다른 행궁들은 오십여 칸도 안 되는 게 보통이라서다. 의주 행궁이 이렇게 커진 건 순천사 탓이 크다. 순천사 창립일에 조부가 와서 친히 제사를 올릴 예정이었으니, 어찌 그 규모를 작게 하겠는가. 이것도 정약용의 솜씨다.
하지만 이 큰 행궁에 본래 주인이 와서 머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조부는 순천사를 처음 세웠을 때 한번 오고 그 뒤로 두 번쯤 더 왔다. 머문 기간을 다 합쳐봐야 한 달도 안 되니, 거의 빈집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의주부에서는 이 행궁을 평소에 향시를 치르는 과장(科場)이나 평북병영 군사들이 훈련할 때 임시 숙영지로 썼다. 돌림병이 돌면 병원으로, 홍수, 화재 등 재해가 닥쳤을 때는 이재민들을 받는 수용소로도 썼다.
아마 내가 곧 내려온다는 통보를 받고 행궁 안팎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정리하느라 애 좀 먹었으리라. 평상시에 행궁을 다른 용도로 쓰는 거야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는 일이지만, 황태자가 머물러 왔는데 정비해놓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대명공께서는 잠자리가 쓸쓸하지 않으시오? 원하신다면 감사에게 일러 수청을 들 기생을 넣어드리라고 하겠소이다 만.”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태자께서도 홀로 적적함을 참으시는데 어찌 제가 그런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나와 주성진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둘 다 아내를 집에 두고 혼자 먼 여행에 나섰다는 점이겠다. 혼자 가라는 명을 받고 그건 쓸쓸하다, 한 사람이라도 데리고 가면 안 되겠냐고 질문했더니 태황이 딱 잘라 거절했다.
“미주에 갔을 때는, 신불랑인들과 그쪽 법도에 따라 사교를 나눌 필요가 있기에 태자비가 함께 가게 했던 거다. 하지만 북경에서 태자비나 네 후궁들이 무슨 할 일이 있느냐? 마땅히 도성에 놓고 감이 옳다.”
미주에서 상희하고 재회하지 않을까 해서 놓고 가려고 할 때는 네 명 전부 데리고 가라고 난리더니, 일단은 지금 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살자고 노력하려니까 단 한 명도 데려가지 말란다. 그런데 그 논리를 보면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해서 답이 궁했다. 그런데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어물거리고 있으니까 태황이 못마땅했는지 혀를 찼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내 귀에 입을 갖다 대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 못난 녀석아. 바깥에 나갔으면 바깥 밥을 먹어야 할 게 아니냐, 너는 늘 집에서 퍼간 밥만 먹으려고 하느냐? 이참에 바깥 밥을 좀 다양하게 먹고 오란 말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북경에 다녀오는 여정 도중에 여자 생각이 나면 현지에서 조달해서 적당히 해결하라는 소리였다. 아니, 이게 지금 미성년자인 아들 앞에서 할 소린가?
정말이기 이 애비라는 인간은 감정이 좀 좋아질 만하면 이런 식으로 자기 호감도를 왕창 깎아내리는 발언을 한다. 태자비 권씨와 후궁들을 놓고 온 아쉬움과는 별개로 태황이 보인 이런 태도가 참으로 마땅찮은 건 분명했다. 나하고 비슷한 이유겠지만, 주성진 역시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아내를 대명동에 놓고 온 처지다. 아내는 진양옥의 후손인 마씨 집안 – 진양옥은 대명동에서 양자를 들여 따로 대를 이었다 – 출신으로, 대명동에서는 손꼽는 명가의 후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북경에 누워계시는 황조(皇祖)의 선도들을 뵈러 가는 길인데 어찌 그 도중에 여인을 탐하는 천한 짓을 하겠습니까. 조상들께서 이를 아시면 분명 불호령을 내리실 겁니다.”
“그러시오. 알겠소.”
내가 주성진을 처음 본 건 조부의 장례 때다 조부가 앓았을 때도 문병하러 왔었다지만 그대는 내가 본국에 없었고, 조부가 눈을 감은 직후에 문상하러 왔다가 내가 귀국한 다음에 다시 한번 왔을 때 처음 만났다. 부친인 현 대명공 주계신과 함께 왔더라. 주계신은 내가 상주 노릇을 하는 광경을 보고 무척 당황한 듯했었다. 그야 자기 아들하고 비슷한 또래인 나를 대한의 태자로 높이는 게 내키지 않았겠지. 그때 보인 주계신의 태도로 미루어볼 때 이번 북경 방문에 자기 대신 아들을 보냈다고 판단한 것이고.
아들인 주성진은 그에 비하면 나았다. 내게 선뜻 절을 올리고 공대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나왔다. 어리기는 해도 상황 파악이 빠르고 퍽 똑똑했다. 이번 북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용차까지 내준 뜻을 잘 이해했는지 전용차 안에서 아주 조용히 지냈다. 숙소에 들어가서 나와 잠시 대화를 나눌 때도 열심히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잘 지내던 녀석이 저지른 첫 번째 실수가 오늘 나와 임승훈 사이의 대화에 공적인 대화에 끼어든 거였다. 아직 남은 여정이 한참인데 그런 일이 또 벌어지면 곤란하니, 오늘 연회가 끝나면 잠시 진지한 대화를 나누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