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45
4부 129화(1745화)
16.
현재 후금에서 가장 유력한 제위 계승 후보는 이패륵인 아파태가 맞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으로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후금 황실이 가톨릭을 국교로 채택하면서 오직 적자에게만 계승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 관습이 그동안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건 적자가 하나도 없는 대칸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후금 황실은 자식 복이 많은 편이어서, 아들을 7명이나 두었던 석새 같은 이 – 그중에 6명이 요절하기는 했지만 – 도 있었고 서너 명씩 둔 이들은 흔했다. 동생을 셋이나 둔 박락의 선황 파아라(巴雅喇)만 해도 4형제 중 막내였다.
다만 여기에는 부작용도 있었다. 건주 황실은 심회맹에 참가한 세 나라 황실 중에 가장 몽골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고 말했는데, 그 말인즉슨 형제간에 화살을 겨누면서도 망설임이 적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석새의 일곱 아들 중에서만 둘이 피를 흘리며 죽었다. 맏형이 낙마사고로 죽어서 대패륵 자리에 올랐던 둘째가 넷째에게 암살당했고, 넷째는 일이 들통나는 바람에 격노한 부친에게 처형당했다. 다른 형들이 죄다 병으로 죽으면서 마지막 승리자는 와극달이 되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사례가 심심찮게 있었다. 부수가 진압한 파포태의 반란이야 말할 것도 없고, 부수의 아들인 파이도는 괜찮았으나 그다음 대에는 또 아들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피가 흘렀다. 둘째였던 특이호가 대칸이 된 배경에 그 다툼이 있었다. 파이도의 장자인 전라탑(傳喇塔)은 속이 좁고 질투가 무척 심했다. 그래서 만사에 유능한 동생을 경쟁자로 여기고 시기했다. 그래서 부황의 명으로 개봉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아우를 죽이려고 자객들을 보내 도중에 습격했는데, 이들이 되려 역으로 당하고 말았다.
돌아온 특이호가 생포한 자객들을 어전에 끌어내 보고하자 파이도는 크게 분개했다. 모든 증거와 증인이 대패륵의 죄상을 명백하게 폭로하니 은폐할 수도 없었다. 다만 아들은 아들이라 처형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졌는지, 형제 살해 ‘미수범’이라는 이유로 두 눈알을 뽑은 뒤에 수도원에 가두기만 했다. 동방전교가 아니라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면서 정작 하는 짓은 비잔티움제국처럼 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이 일이 선례가 되어서인지, 특이호의 4자로서 보위를 이은 선대 대칸 파아라도 경쟁에서 진 자기 형 두 명을 수도워너에 처박았다. 병으로 죽은 맏형만 그 신세를 면했다. 아, 그래도 파아라는 형들을 거세하거나 눈을 뽑지는 않았다. 가족들을 황무지로 추방했을 뿐이지. 지금까지는 그나마 대칸이 낳은 적자들끼리 이런 다툼을 벌이고 형제들은 한 단계 뒤에 물러나 있었다. 대칸의 형제들은 조카 중 한 사람에게 줄을 대고 그 세력으로 합류하는 게 보통이었다. 계승 순위가 조카들보다 뒤지니만큼 그게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서자, 즉 사생아인 조카들보다 숙부들의 순위가 앞선다. 이 상태가 여러 해 동안 계속 되고 있다. 그렇다면 조카들을 밀어줄 게 아니라 동생들이 나서서 직접 제위를 노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전하께서 보시기에도 그게 옳지 않은지요.”
“그게 합당한 도리라 생각되기는 하오.”
단순하고 직설적인 요구다. 하기야 명분은 이들이 가장 강하게 쥐고 있다. 대가 끊어졌을 때 아우가 형의 뒤를 잇는 건 흔한 일이니까. 후금 황실에도 두 번이나 전례가 있고, 우리 대한에도 정종과 태종이라는 전례가 있다.
“대한의 정종께서도 적자가 없어 아우가 그 자리를 물려받지 않으셨습니까?”
“맞소. 그러하오. 정종께는 서자밖에 없으셨소. 그리하여 태종께서 보위를 이으셨지.”
정종이 무리했으면 서자 중 하나를 세자로 책봉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애초에 정종의 보위는 태종이 잠시 맡겨둔 자리일 뿐이었다. 정종이 만약 자기 서자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들었다면, 아마도 한양에서 제3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공산이 크다.
“두 분의 말씀은 알겠소. 그래서 삼패륵께서는 이패륵을 지지하시는 거요? 작년에 한양에 왔던 사패륵은 형님이 아니라 자기가 대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조부의 국상 때 진위사로 찾아왔던 사패륵. 찰니는 조문에 필요한 이상으로 자기 얼굴을 팔고 다녔다. 아파태와 띠동갑이라는 그 젊은 패륵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려니, 장차 자기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고 인맥을 넓히러 다니는 태도가 누가 봐도 분명했다.
“대칸께서는 사패륵이 어리고 욕심이 없다고 생각해서 한양에 사절로 보내셨지요. 하지만 그 철없는 놈이야말로 양가죽을 덮어쓴 이리였습니다.”
사패륵이 작년에 도성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지 않느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그랬으니 이번에는 찰니가 아닌 자신들이 환영 사절로 온 거라면서 말이다.
“알겠소. 대칸께서 사패륵 대신 그대들을 파견하신 이유가 사패륵이 내게 붙어 군사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해서란 말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박규수가 살그머니 귀엣말로 속삭였다.
“혼자 보내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으니, 서로 견제하라고 일부러 두 명을 보낸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처럼 둘이 결탁해버리면 아무 소용없다. 보아하니 두도는 형이 대칸 자리에 오르도록 지지하는 대신 뭔가 반대급부를 받기로 약속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하기야 지금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기보다는 그게 훨씬 확실하겠지.
“그런데 그대들은 왜 북경이 아니라 심양에서 나를 보자고 했소? 성도에서는 북경이 훨씬 가깝잖소.”
대칸인 박락은 카라코룸에 있다. 고로 나와 만나는 장소를 어디로 정할지는 이들 둘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내게 심양에서 만나고 싶다고 연락한 것도 이들 둘이 의논한 바였다. 뭔가 내가 생각지 못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은 했다. 그리고 정말 생각지 못한 대답을 들었다.
“북경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건주 양국의 정신적인 수도 노릇을 하는 도시인 북경이 자기들한테 안전하지 않다고? 왜?
17.
“아시겠지만, 세 군왕과 저희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동안 다른 대칸들은 자기가 낳은 서자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지 않았다. 재산이나 조금 떼어주고, 적당한 중하급 귀족으로 책봉해서 편안히 살게 해주었을 뿐이다. 서자들도 그리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는 것만 받고 조용히 살았다. 하지만 박락은 달랐다. 적자가 없어서 그랬는지, 세 서자를 죄다 군왕으로 봉하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도 무척 귀하게 대했다. 아들이라고 대놓고 부르지만 않았을 뿐이지 공공연하게 아들로 대한 셈이었다.
“그거야 그럴 수도 있지 않소. 천륜이 이어진 건 사실이니까.”
“그 정도일 뿐이라면 다행이겠지요. 문제는 대칸께서 정도 이상으로 세 군왕을 아끼시고 이를 숨기지도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박락이 서자인 자기 아들들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는 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 법도에 따르고자 했다면 진즉에 아파태를 태제로 삼아 대패륵으로 책봉했을 터였다. 어머니가 서로 다른 박락의 세 서자도 이 상황에 심히 불만을 품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주변국 중 서자라고 해서 계승권을 인정하기 않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오직 후금만 서자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들로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군왕들이 분개하는 건 알고 있고, 그럴 수 있다고 이해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대금에서 이 풍속을 정립한 지 이미 2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단 몇 사람의 불만 때문에 정해진 법도를 깨트릴 수 있겠습니까?”
대칸이 자기 희망대로 서자 중 하나를 보위에 앉히려면 그 아이를 적자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자를 적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서자를 낳은 측복진과 정식으로 혼인해서 대복진으로 만들거나, 대복진인 청나라 공주가 그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거다.
“하지만 전자를 행하려면 대복진께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말도 안 되지요. 군왕 중 하나를 양자로 들이실 의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두 분 사이는 갈수록 악화 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박락은 대복진에게 몇 번이나 부탁했다고 한다. 셋 중에 누구를 골라도 괜찮으니까 제발 하나만 골라 양자로 들여달라고. 그러면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주겠다고.
“하지만 대복진께서는 계속 거부하시다가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대노하여 일갈하셨다고 합니다. 어디 감히 더러운 첩년의 피를 내 앞에 들이밀려고 하느냐고 말이지요. 대칸께서도 화가 치밀어서 얼굴이 시뻘게진 채 처소를 나오셨다고 합니다.”
청나라 황실의 적서 차별 따위 없이 모든 황자에게 친왕지위를 줄 뿐만 아니라 계승권도 장자를 우대하지 않고 똑같이 준다는 점을 생각하니 청나라 공주인 대복진의 태도는 언뜻 이해가 안 간다. 되려 자기 쪽에서 나서서 양자를 들이는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모를 일이다. 후금에 시집와서 형식상으로나마 지키는 일부일처제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거기 맞춰 살려고 노력하다보니 사고방식이 바뀌었는지도.
“그런 일이 있었던 뒤로 대칸께서는 대복진의 침소에도 들지 않고 계십니다. 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으셔서 서로 노려보고만 있는 처지지요.”
더불어서 대본진은 시동생들과도 사이가 나쁘다. 두도의 설명에 따르면, 대복진은 이들이 대칸 자리에 욕심을 품고 자신이 불임이 되도록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저주라고 하였소?’
“저희가 시골에 사는 무당들을 고용해서 온갖 비술(?術)로 저주를 걸었기 때문에 지나간 20년 동안 자신이 아이를 단 하나도 낳지 못했다는 거지요. 그리고 자기가 낳았을 자식들을 죄다 우리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십니다.”
아파태는 아들이 둘, 두도는 셋이라고 했다. 당연히 딸도 따로 있다. 대복진으로서는 눈이 뒤집혀도 무리가 아닌 상황인 셈이다. 대복진이 정말 후금 생활에 익숙해져서 사고방식이 바뀐 건 아니었나 보다. 정말 독실한 천주교도가 되었으면 그런 비합리적인 생각은 안 했을 테니. 그보다는 자기 기도가 부족한 탓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대들이 형과도, 형수와도, 조카들과도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건 알겠소.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북경이 위험하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데.”
“북경에 가면 언제 자객에게 당할지 모릅니다.”
자객이라고? 이건 설명이 더 필요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라고 하자 두도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천막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동생이 수상한 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돌아온 뒤에야 아파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 형제는 그동안 숱하게 습격당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이 자객에게 공격받은 횟수만 따져도 여섯 번은 됩니다.”
단순한 강도로 위장하기도 하고 제정신이 아닌 광인(狂人)이 난동을 부린척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어쩌다 한번 터진 일도 아니다. 대금의 패륵이 수시로 목숨을 위협받는 게 정상적인 상황일 리 없다.
“분명 세 군왕이 작정하고 일을 꾸민 겁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무리 호소해도 대칸께서는 자식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불러다 추궁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기는커녕 세 군왕이 얼마나 충실한지 아느냐며,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부인하기만 하시지요.”
박락은 자기 자식들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동생들이 우선적으로 칸위를 계승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동생들이 불행한 사고로 눈을 감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계승자를 찾아야 하지 않는가?
법도대로 하자면 조카들을 양자로 들여서 대를 잇는 게 정상이다. 그다음 순위는 박락의 사촌들이지만, 이들은 이미 선대에 변방으로 쫓겨나 생존 여부가 불투명하므로 다음 대패륵 자리에 오를 수 없다. 고로 아파태와 두도의 아들들밖에는 남은 계승자가 없다.
하지만 박락이 이제껏 보인 태도로 미루어볼 때,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전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적법한 계승자가 없다는 핑계로 세 서자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선포할 가능성이 더 컸다. 아닌 말로, 동생들을 처리한 판에 조카들이라고 못 처리할 이유가 있는가. 박락이 마음만 먹으면 아직 어린 조카들 따위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해치울 수 있을 터다.
“그래서 대칸은 누군가가 그대들을 해치우도록 방관하고 있다는 말이오? 범인이 누구든지 상관없이?”
“저희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파태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심증일 뿐, 확증이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자기들 추측이 틀림없다며, 형 박락은 자기들을 제거할 생각인 게 분명하다고 했다.
“만약 저희가 임으로 반격에 나서다가는 되려 ‘조카를 죽이려고 한 죄’를 물어서 저희들이 역으로 처형당하거나 수도원에 유폐될지도 모릅니다. 과거 원종 폐하를 죽이려고 획책하다 실패한 폐패륵 전라탑처럼 말입니다.”
원종(元宗)은 특이호의 시호다. 파이도가 나와 같은 중종이었고, 박락의 선대인 파아라는 대종(代宗)을 받았다. 참, 부수는 전에도 언급했듯이 성종(聖宗)이다.
“그런데 그게 그대들이 북경에 안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오?”
박락의 서자들이 숙부들을 제거하려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위협을 피하고 싶다는 것과 북경에 가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왜 북경에서 자객을 염려하는가? 그 셋이 북경에 영지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혹시 청나라 쪽에서 그대들을 해치려고 하기라도 하는 거요?”
나로서는 혹시나 하는 의도로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아파태와 두도가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전하께서는 어리시면서도 참 총명하십니다. 저희 둘은 남조(南朝)에서 세 군왕에게 저희를 제거하고 대칸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부추기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청제가 그대들을 죽이려 한다고?”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이야기인가. 타국의 황위 계승에 개입하는 건 내정간섭인데. 서로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 따위는 우리 세 나라 중 누구도 안 가지고 있다. 심양회맹은 세 나라가 동등하다고 규정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청나라 황제 면녕은 박락의 처조카이면서 또 고종사촌이다. 이런 복잡한 관계가 이번 제위 계승 문제에서 박락을 ‘도와주는’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다못한 박락이 고모를 상해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 테니까.
‘박락이 원하는 대로 서자에게 보위를 계승하도록 도와주고, 뒤에서 뭔가 얻어낼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아까까지만 해도 이 둘을 데리고 북경에 가서 청나라 쪽 대표와 함께 삼자회맹 비슷한 걸 성사해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양쪽이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면 심양회맹 때처럼 북경회맹 같은 걸 맺는 건 꿈도 꿀 수 없겠다. 거참, 후금 황실이 선대에 제위를 두고 다투느라 쌓은 업보가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건가. 참 난감하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