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55
4부 139화(1755화)
20.
피서산장, 즉 열하 별궁 일대의 경치는 정말로 뛰어났다. 산과 숲과 초원과 호수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풍토가 다르니 풍경이 다른 건 당연한데, 뭔가 좀 아쉽기는 하네.”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에는 역시 말이 가마보다 낫다. 청나라 쪽에서 야외 연회를 준비하는 동안 잠깐 양해를 구하고 말을 빌렸다. 익위사 군관 십여 명에 안내를 맡은 청나라 군관 두 명을 거느리고 주변을 한참 돌았다.
“하려고만 했으면 여기까지 다 차지할 수도 있기는 있었을 텐데…..”
만약에 내가 성이한테 ‘기회만 오면 대륙을 차지해야 한다!’라고 반대로 가르쳤으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내가 걱정한 대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에 먹혀 다른 정복왕조들이 겪은 운명처럼 흡수됐을까, 몽골처럼 본토로 밀려났을까, 성공적으로 중원을 지배했을까.
모를 일이다. 성공했을 수도 있지만 실패했을 수도 있다. 해보지 않고서야 세 가지 중에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알 수 없다.
“이젠 내가 한 일에 대해서도 ‘만약에’를 생각하게 되는구나…..”
이 윤회? 환생? 하여간 반복되는 인생을 살면서 기본적으로 품은 마음가짐이 ‘나라면 그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을 텐데’였다. 하지만 이 짓도 벌써 네 번째가 되고 보니, 이제는 그 대상이 나 자신이 되고 있다.
‘경인왜란 때 남부지방 군사들을 좀 더 잘 조련해 두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정찰대를 내보내 오다의 계획을 미리 파악했다면, 아예 선제공격으로 규슈를 먼저 제압했다면….’
예전에는 이런 회상에 시달리지 않았다. 바로 임금 자리에 떨어져서 나라를 다스리거나 살아남기 위해 피동 싸며 노력하느라 과거를 회상하는 것도 배부른 소리였다. 그러니 자꾸 옛일들이 하나씩 생각났다. 가정할 수 있는 주제에는 끝이 없었다. 어디 경인왜란 하나뿐인가. 백 년이 넘게 보위에 앉아 내린 판단 중에, 그리고 보위에 앉기 전에 내린 판단 중에 지금 되새겨보면 후회되는 결단이 어디 한둘인가.
‘종성순을 좀 더 깊게 배려했다면, 폐열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에 좀 더 유의했다면, 홍이를 조금만 더 신경 써서 보살폈다면…..’
나를 죽인 요인들. 한때는 종성순이 다시 살려내서 죽이고 싶을 만큼 저주스러웠고, 다시 한때는 궐 밖에서 데려온 사생아로 인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릴 뻔한 것을 종성순 덕분에 모면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종성순이라는 인간 자체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종성순의 심정을 좀 더 생각했다면 그 놈한테나 내 1회차에서나 인생을 좀 더 낫게 마무리할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상희에게도.
과연 상희는 자신의 4회차를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혹시 상희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나도 모르게 북경 거리를 메운 행인들의 물결 속을 눈으로 뒤지는 내가 있었다.
자금성 안에 걸린 청나라와 후금 황족들의 초상화도 주의 깊게 살폈다. 혹시 상희가 나와 달리 건주 황족으로 태어난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수십여 개나 되는 공주, 옹주, 친왕비, 군왕비, 태자비들의 초상 중 상희는 없었다.
과연 상희는 어디에 있을까. 내 예상보다 눈을 뜨는 시기가 더 많이 어긋난 걸까.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아주 먼 외국에서 눈을 뜬 걸까. 이 시름을 어디다 털어놓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말을 달렸다. 덕명이 직접 내준 한혈마답게 지치지도 않고 달리는 것이 정말 명마였다. 한참 달리는데 연회 준비가 되었다는 포성이 울렸다. 고삐를 잡고 말머리를 돌렸다. 마침 배도 고팠다.
21.
야외에서 여는 연회는 식사보다 거기 덧붙는 여흥이 더 즐겁게 마련이다. 고려 때 무신의 난만 해도 의종이 보현원으로 나들이를 가다가 도중에 무신들에게 수박희를 시킨 게 사태를 폭발시킨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오늘도 그런 선례에 따라 여흥이 덧붙었다. 악공들이 연주하는 악곡에 맞춰 미희가 춤을 추는 그런 흔한 게 아니라 기병들이 마을 달리며 격구를 즐기고 마상재 솜씨를 한껏 뽐내는 그런 여흥이었다.
“역시 대한 기병만큼 말안장 위에서 부리는 재주가 뛰어난 군사들이 없습니다. 우리 만주 군사들도 말은 꽤 탑니다만, 재주부리는 솜씨는 역시 한군(韓軍) 기수들이 최고입니다.”
격구는 단순한 공치기가 아니고 마상재는 단순한 서커스가 아니다. 아직 내연기관이 전혀 보급되니 않았으니만큼 기병은 여전히 중요한 군사력이고, 격구와 마상재는 기수의 실력과 체력을 보여주는 무력 시범에 가깝다. 우리 기병 전력을 과시하는 행사라는 의미다. 공간이 부족한 열차에 말까지 실어올 여유는 없어서 우리 일행은 말을 데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금위에서 나온 익위사 무관쯤 되면 처음 보는 말이라고 해도 5분만 길들이면 탈 수 있다. 조금만 더 공을 들이면 격구나 마상재도 가뿐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우리 금국 기병들도 솜씨가 상당하긴 하지만…..”
륵극덕혼의 눈빛에 욕망이 가득했다. 자기도 휘하에 저런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싶다는 욕심 말이다. 경쟁자인 숙부들이나 이복동생들과 달리 물려받은 자산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가장 밀리는 부분이 이런 무력수단이니까.
“허허, 금국 기병이야말로 우리 세 나라 기병 중에 가장 튼튼하고 억세다고 이름이 높지 않소. 우리 군사들이 정예이긴 하나, 거친 전장을 헤쳐 나가는 솜씨는 귀국 군사들만 못 할 수도 있소이다.”
거칠고 용맹한 ‘북방 기병’의 본성을 가장 잘 간직한 게 후금 기병인 건 맞다. 우리 군대 기병들은 훈련이야 잘 받았으나 평화가 오래되다 보니 실전 경험이 다소 부족하고, 청나라 팔기병들은 실전은 자주 치르지만 2백 년 동안 귀족화되면서 배에 기름이 끼었다. 하지만 후금 기병들은 지금도 여전히 생업으로 손수 가축들 도살하고 숲과 초원에서 말을 달리며 짐승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그만큼 거친 생활과 살육에 익숙하다. 싸움에 임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살육이란 건 꼭 사람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내가 직접 해봐서 아는 거지만, 살상 대상이 짐승이라고 해도 계속 피를 보는 데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안 든다. 나와 아무 관계가 없고, 죽여야 할 상대라면 말이다. 그런 거친 기병을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후금이다. 그래서 청나라가 매번 후송과 전쟁을 치를 때마다 대가를 지급하고서라도 후금에서 기병을 빌리는 거다.
물론, 거기에는 청나라 자신의 병력 소모를 줄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자국 내에 있는 수천만 한족을 억제하려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군사력인 팔기를 아껴야 하니까. 덕명이 말한 바에 따르면 현재 청나라 인구는 대략 1억이다. 그리고 핵심 지배층인 기인(旗人)은 만주인에다 몽골인, 왜인에 한인까지 다 합쳐도 6백만이 채 안 된다. 나머지 인구 9천 4백만은 거의 한족이다.
물론 이들은 이제 청조의 총치에 완전히 순응하여 입관 초기와 같은 대규모 민란 같은 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반기를 들 만큼 성질이 드센 자들은 지난 2백 년 동안 다 죽었거나 강남으로 건너갔다. 머리카락도 대부분 변발로 바꿨다. 기인이나 벼슬아치들처럼 거의 다 깎아 치발(?髮)로 만들지는 않지만, 앞쪽 절반은 다 민다. 뒤쪽 머리카락만 남겨서 잘 땋아 음양두(陰陽頭)로 만든 게 청나라 한족 남자들의 일반적인 머리 모양이다.
한족들이 이처럼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후송과 대결하는 최전선에서 팔기군을 빼내고 녹영병을 주로 투입하고 있다. 만주인과 몽골인 등 핵심 지배층의 인력을 보존하고 한족들을 총알받이로 삼기 위해서다. 팔기는 후방에서 전략예비대 노릇을 한다. 이는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거나 녹영에 입대한 한족들에게도 환영받는 조치였다. 이들은 몸을 바쳐 싸우는 대가로 벼슬이나 전리품, 토지와 같은 실제적인 보상을 받는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인 셈이다.
후금군을 차병(借兵)하는 것도 후금 기병들이 강한 것도 있지만 팔기의 손실을 줄이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한 조치다. 전리품을 좀 나눠주는 대신에 청나라 쪽에서는 병력 손실이 확 줄어드니까 말이다. 그 의도는 후금 쪽에서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출병을 꺼리지 않는다. 돈 몇 푼 때문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워 전리품을 빼앗는 일이야말로 사나이의 자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칸에서부터 말단의 일개 전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리 생각한다.
“저도 몇 차례 출전했습니다. 싸워 얻은 영예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만.”
륵극덕혼은 여기서 유일하게 – 내 경험은 전생에 한 거니까 – 실전 경험이 있었다. 부황 박락이 공을 세우게 하서 후계자가 될 자격을 갖추게 해주려는 의도인지, 가벼운 싸움터를 골라 서장자를 몇 번 출전시킨 덕분이다. 주로 준가르 전선이었다. 요즘 준가르는 예전과 비교하면 참 한심한 처지다. 영토도 준가리아 일대밖에 안 남았고, 동쪽에서는 건주 양국에 밀리고 서쪽에서는 코칸드 칸국에 밀린다. 남쪽의 티베트에 있는 호쇼트부도 틈만 나면 털어먹으려고 노린다. 북쪽에는 러시아도 있다. 본거지에 남아있는 패거리보다는 분가인 남쪽, 벵골에 있는 준가르 라자국 쪽이 몇 배나 강성할 정도다. 물론 그쪽의 인구 대부분은 인도인이지만.
“준가르가 예전만큼 강성하지 않다 보니, 싸움 규모도 작습니다. 크게 위험한 일도 없어서 긴장감도 적습니다. 남적을 치는 일에 나섰으면 더 큰 공을 세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그러다 죽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 이 애송이야. 내가 전군의 선두에 서서 십만 대군을 향해 창을 들고 뛰어든 경험도 있지만, 아무리 이길 싸움이라고 해도 나한테 재수가 없으면 죽는다. 그건 어떻게 쉽게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다. 하지만 륵극덕혼이 칸이 되고 싶어서 눈에 불을 켠 상황이라고 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는 일이다. 든든한 외가도 없는 자신이 대칸이 되려면 아무리 작은 공적이라도 있는 편이 도움이 되니까.
“공연히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오. 그대는 대칸의 명백한 장자가 아니오? 그러니까 부황의 자리는 당연히 그대가 차지하여야 할 터, 쓸데없이 무리하실 필요 없소.”
덕명이 슬쩍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칸위 계승 문제에서 청나라가 륵극덕혼 편에 서기로 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자, 식사는 대충 마치신 것 같으니 다음 일정을 진행해 볼까요. 이봐, 상을 치우도록.”
내관들이 분주하게 오가면서 자리를 정돈했다. 군사들은 말을 끌고 왔다. 배부르게 밥을 먹었으니 이제 꺼트려야 할 차례였다.
22.
열하에서 보낸 엿새는 무척 즐거운 휴양의 시간이었다. 덕명은 연회 외에도 사냥, 격구, 경극 관람 등 수많은 접대 코스를 준비해놓았다.
‘경극으로 보는 고다지전이라니.’
세월이 흐르다 보니 타국에서도 그 줄거리를 본떠 비슷한 작품이 나올 때가 되긴 했다. 고다지전이 웬만큼 인기를 끌었어야 말이지. 사실 인기 있을 요소란 요소는 다 들어 있는 작품 아니던가? 정말이지 의인황후가 글 솜씨 하나는 참 대단했다. 청나라 경극은 내가 기억하는 원래 세계 경극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기반은 장조 때 본 곤극이었으니, 크게 낯선 형식도 아니었다.
달라진 거라고 하면 강소성 방언이던 대사가 북경 방언 – 명나라 시절의 관화가 아니라 만주어 영향을 크게 받은 이쪽세계 북경 방언 – 으로 바뀌고, 무대장치나 의상 같은 데서 우리 한극(韓劇)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정도가 있겠다.
만주어로 공연하는 경극 극단은 없다. 만주인들은 배우 따위 직업을 절대로 택하지 않고, 한족들이 만주어를 배우는 일도 거의 없어서다. 한족들이 만주어를 익히는 게 법으로 금지된 건 아니다. 하지만 중국에만 사용해도 딱히 불편한 거 없이 살 수 있는데 일부러 만주어를 익히는 한족은 거의 없다. 조정에 출사해서 고위직으로 올라갈 사람이라면 혹 몰라도 말이다.
이처럼 유희만 즐기면서 엿새를 보내지는 않았다. 진지한 이야기도 상당히 많이 나눴다. 륵극덕혼 – 후금도 청나라처럼 적당히 한화(漢化)됐으면 이름이 좀 부르기 쉽게 바뀌었을 텐데 – 을 도와달라는 거 말고도 다른 거 여럿 말이다.
“사천에서 염정(鹽井) 파는 기술자가 여럿 필요하시다고요.”
내 부탁을 들은 덕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한에서는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다고 알고 있는데 염정 파는 기술자가 왜 필요하냐면서 말이다.
“바다 건너 미주에서는 땅 밑에서 석유가 많이 나는데, 이를 잘 퍼내고자 해서 그러오.”
중국에서 석유(石油)라는 표현은 송나라 때부터 쓰던 거다. 석탄도 송나라 때부터 캐내서 본격적인 연료로 썼으니, 이유야 어쨌건 여러모로 꽤 앞선 시대였던 셈이다.
“알겠습니다. 부황께 알려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다만, 사천의 사정이 조금 좋지 않아서.”
서나라를 무너뜨리고 사천, 귀주까지 진격했을 때는 물론 좋았다. 하지만 청나라는 여기 투입한 대군을 계속 그쪽에 놓아둘 수가 없었다. 개봉과 북경을 수호하면서 팔기의 영지가 주로 분포한 북부 지역을 통제하는데 필요한 병력도 상당수였기 때문이다. 사천이 후송을 쓰러트리는 데 꼭 필요한 요지였다면 혹시 모른다. 하지만 후송의 수도인 남경은 동쪽 멀리 있었고, 후송군은 예전부터 서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선을 단단히 구축해두고 있었다. 이 방어선은 당연히 청군을 상대로도 위력을 발휘했다.
당연히 청나라 조정은 서나라 공략에 투입했던 팔기군 대부분을 도로 불러올렸다. 어차피 서나라는 반격할 능력도 없고, 후송에서 사천을 치겠다고 나설 위험성도 거의 없었다. 이미 후송 도통사들은 거의 군벌이 됐고, 군벌들은 무엇보다 자기 세력을 온존하기를 원하니까. 중원일통이라는 명분도 이제는 남북 양측에서 모두 사실상 포기했다. 지난 2백여 년 동안 서로 싸워댄 결과 어느 쪽도 남진, 북진이 어렵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양 진영의 충돌은 슬슬 타성에 빠진 상태로 진행됐다.
혹시 저들이 공격해오더라도 큰 걱정은 없었다. 후송군의 공격을 막기 위한 성보(城堡)를 잔뜩 구축해둔 건 서나라도 마찬가지였고, 그쪽에만 수비대를 두어도 충분했다. 그래서 청 조정은 녹영군 수비대만 남겨두고 팔기를 북으로 다시 불러올렸다. 문제는 사천인들이 쉽게 청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고 수시로 반기를 든 데 있었다. 일전에 잠시 언급했듯이 서나라나 명나라 황손을 자처하는 작자들이 이끄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백련교 잔당도 있었다. 그냥 도적 떼도 숱하다. 남은 청군은 이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지금 사천 지방은 상당히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다. 덕병이 사천의 사정이 좋지 않다고 스스로 말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래도 잘 찾아보지요. 소금이야 누가 사천을 다스려도 퍼내는 것인데, 어찌 솜씨 좋은 기술자 기십 명을 못 구하겠습니까.”
“꼭 부탁드리겠소.”
내 가장 중요한 용건은 그렇게 처리했다. 후송을 상대로 하는 군사동맹이야 심양회맹애서 필요할 때 서로 돕기로 규정한 바가 있으니 따로 명문화할 필요 같은 건 적고, 륵극덕혼을 돕는 문제는 태황이 결정할 몫이고, 경제적인 건 북경에서 임상옥이 협상하는 중이니까. 덕분에 열하에서는 엿새 동안 편히 쉬면서 즐기기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정을 마치고 북경에 돌아와서는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해동관 안마당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 기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