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63
4부 147화(1763화)
5.
근정전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대체 신하들이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황이 뭔가 기가 막힐 일을 저지르려고 하니 말려달라는 뜻인가? 적어도 지금까지 실제로 뭔가 저지르지 않은 건 분명했다. 조보에 인쇄야 안 됐다고 해도 저지른 일에 대한 소문조차 퍼지지 않을 리를 없으니까. 개성까지 오는 동안에도 아무 팔이 없었는데 한양에서만 뭐가 터졌을 리는 없지 않은가.
“태자가 실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그대들은 이를 경하해야 마땅하리라.”
태황은 아주 뿌듯한 얼굴로 신하들 앞에서 자식 자랑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래도 이게 아비 노릇을 하는구나 하고 적당히 넘겼을 텐데, 신하들의 불안한 눈길을 보고 나니 그것이 쉽게 되지 않았다.
“정녕 공이 크십니다. 태자께서는 동서를 오가며 종횡무진으로 천하를 살피셨으니, 참으로 유례가 없는 활약을 펼치셨습니다.”
조정의 우두머리인 국상 장약용이 먼저 나서서 한마디를 했다. 사실상 태황에게 옆구리를 찔려서 나선 셈이었다. 어서 내 아들을 칭찬하라는.
“이제까지 전하와 같이 천하를 널리 주요하신 태자는 없었습니다. 이는 돈을 주더라도 살 수 없는 경험이니, 장차 성군이 되실 바탕이 될 것 입니다.”
예무대신 한숭인도 합세했다. 한숭인도 그렇고, 국상 정약용부터 시작해서 근정전에 있는 대신 대부분이 낯이 익었다. 조부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에 임명된 이들이 아직도 조정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다. 태황이 즉위한 지도 벌써 1년이다. 조부가 붕어한 날이 음력으로 작년 6월 2일, 즉위식을 치른 날이 6월 8일이었는데 오늘이 6월 7일이니까. 그래서 며칠 전에 첫 기제사가 있었고, 그날 의주에 있었던 나는 혼자 남쪽으로 절을 올렸다.
아니,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여튼 태황은 아직도 조정에 자기 사람을 채워 넣지 않았다. 보위에 올랐으면 자기 입맛에 맞는 신하들을 발탁해서 요직에 앉히고 이들을 써서 나라를 다스리는 게 상식인데, 태황은 전혀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북경에 다녀오면 그동안에 자기 사람을 뽑아서 개각을 단행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약간은 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북경에 가기 전에 본, 그 사람들이 그대로 근정전을 채우고 있었다.
밀린 조보를 보면서 인사 발표가 전혀 없어서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도 안 바뀌었을 줄이야. 태황이 정말로 조부의 중신들을 신뢰하거나, 사람을 새로 뽑기 귀찮거나 둘 중 하나인 건 분명하다. 과연 어느 쪽일까. 아니, 둘 다 인가?
“그대들도 보았다시피, 태손은 외방(外邦)에 가서 매번 그곳 군주들과 논의하여 훌륭하게 협상을 마치고 돌아왔다. 짐으로서는 참으로 기대가 크다.”
잠깐, ‘기대가 크다’라고? 그게 그냥 나중에 임금 노릇도 잘할 것 같다고 칭찬하는 표현인 거 맞나? 사신으로 또 내보내겠다는 뜻 아니고? 미주에 다녀오고 중국에 다녀왔으니 다음에는 일본이나 유럽에 보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갑자기 들었다. 여행은 이제 충분히 했으니 어느 쪽이든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다.
“태자는 열심히 학문을 닦은 덕으로 천하에서 통용되는 말 중 못 하는 말이 없고, 사람을 대하는 솜씨도 뛰어나다. 그러니 어찌 만인의 추앙을 받지 않겠는가.”
내가 지금 한국어 말고 할 줄 아는 말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다. 표트르랑 한창 어울릴 때는 러시아어도 조금 했는데, 그 뒤로 쓸 일이 없어서 잊어버렸다. 중국어나 만주어, 일본어는 모른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어만 해도 외교 회담에는 별 지장이 없다. 게다가 여차하면 한문으로 필담을 해도 되니까, 내가 천하에서 통용되는 말 중 못 하는 말이 없다는 태황의 말이 완전한 허풍은 아닌 셈이다.
칭찬과 별개로 문제는 태황의 발언이 나를 또 외교 사절로 내보내겠다는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는 점이다. 아니, 정말로 안 가고 싶다. 혹시 상희를 만난다는 보장이라도 있으면 야 기꺼이 가지. 하지만 그런 보장도 없다. 이번 북경행에서도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한 조각의 기대를 품었지만, 결과는 실망뿐이었다. 유럽이나 일본이라고 해서 다르리라는 생각은 안 든다. 그쪽에도 상희는 없겠지.
상희도 못 만나는 상태로 세계를 돌아다녀 봐야 내 영혼만 더 갈증에 시달리며 피폐해질 뿐이다. 그러느니 태황이 이상한 짓거리를 벌이지 못하도록 살피면서 본국에서 지내는 편이 훨씬 낫다.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공연히 새 여자라도 건드리면 그것도 골치가 아픈 일이고. 다만 이런 고민은 역시 나 혼자서만 하는 거였다. 태황은 고민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는 얼굴로 당당하게 선언했다.
“자, 그러면 다들 경회루로 갑시다. 태자가 돌아왔으니 마땅히 연회를 열어 위로부터 해야 하지 않겠소?”
심양과 북경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결과 보고부터 정식으로 받아야 할 게 아닌가 싶지만, 태황은 그런 건 급하지 않다고 했다. 어차피 여정 중에 계속 보고를 보내지 않았느냐며, 별 큰일도 없지 않았냐고.
“짐에게는 고생한 태자를 치하하는 일이 훨씬 더 급하다. 그러니 보고는 내일 아침조회를 마친 뒤에 하도록 하여라.”
사실 태황의 말도 맞기는 하다. 이번 서행의 ‘공식적인’ 명분, 명황릉 및 역대제왕묘 방문 같은 게 ‘시급하게 보고해야 할 ‘일은 아니니 말이다. 정말 중요한 부분은 후금 황실 내에서 피어오르는 갈등인데, 그런 이야기를 꺼내놓기에는 듣는 사람이 너무 많다. 적어도 비변사 정도 되는 곳에서 은밀하게 나눌 이야기다. 그 뒤에 상황을 보고 필요에 따라 관계자를 불러 가며 논의해야지. 약쟁이 놈들 처벌 문제도 마찬가지다. 돌아오자마자 대뜸 꺼낼 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엎드려 감사를 표하고, 태황의 뒤를 따라 경회루로 이동하며 생각했다. 그래서 조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6.
경회루에 도착하니 주성진과 하진교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둘은 종묘나 근정전에 들를 필요가 없으니, 우리보다 조금 늦게 역을 출발해서 느긋하게 움직였음에도 경회루에 도착하는 건 우리보다 빨랐다. 늦게 도착한 우리가 자리에 앉아 바로 연회가 시작됐다. 내 자리는 태황의 왼편이고, 내 왼편에 하진교가 앉았다. 태황의 오른편에는 주성진이 앉았다.
“상을 들이도록 하라!”
어명에 따라 하나씩 들어온 상은 아주 호화판이었다. 심양전석처럼 요리 가짓수가 많지는 않아도 정성껏 요리한 최고급 궁중요리임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올해 농사가 풍년인 까닭도 있겠지만, 조부의 첫 기일이 지났으니 안심하고 사치를 부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심양전석보다는 좀 초라할지 모르겠으나, 정성껏 준비하였다. 이만하면 그래도 어디 가서 뒤떨어지는 수준은 아닐 테니, 마음껏 들도록 하여라.”
태황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심양전석을 언급했다. 그건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나서기 전에 내 왼쪽에 있는 하진교가 선수를 쳤다.
“대한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나라입니다! 어찌 폐하께서 베푸시는 연회를 보고서 초라하다 하겠습니까? 이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실로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하와이에서 처음 본국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이런 말은 못했었다. 공부를 얼마나 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하와국에서는 하진교가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국에 와서 사람이 바뀌었다. 요즘은 자기가 필요할 때면 서슴없이 이런 식으로 상대의 비위를 맞춘다. 과연 누구한테 이런 말주변을 배웠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나는 글만 가르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면 하진교는 말솜씨만 는 게 아니다. 살도 무척 빠졌다. 나하고 처음 만났을 때 하진교는 키가 175cm에 체중은 120kg쯤 나갔었는데, 지금은 키는 그대로지만 체중은 대략 90kg까지 줄었다. 아직 좀 통통한 편이기는 해도 이만하면 뭐 성공이지.
“소인, 한실에서 우리 대명공부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오늘도 이리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해주시니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태황의 오른편에서는 주성진이 이런 식으로 태황을 칭송했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할지언정 겉으로는 정중하게 ‘신하의 예’를 바치는 주성진의 모습을 보니, 태황과 마차 속에서 나눈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났다.
“북경에 간 대공자가 명조(明朝)의 옛 영광을 그리워하면서 이를 되살리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치지는 않더냐?”
‘청태자가 은밀하게 일러주기를, 자금성 안팎을 쉼 없이 오가며 구슬과 같은 눈물을 계속 흘렸다고 하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말은 없었고, 소자 앞에서는 그런 모습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함께 다니면서 보니, 주성진은 아린 나이에 비해서 의지가 굳고 침착한 편이었다. 그러니 아비인 대명공 대신 북경에 보내진 거겠지만. 아비인 주계신이 아무리 우리 황실에 굽실거리기 싫었어도, 실수를 범할 게 빤한 자식을 북경에 가라고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주성진은 이 연회 자리에서도 계속 웃으며 태황의 질문에 응대해주고 있다. 분명히 듣기 거북할 질문인 ‘자금성과 명황릉에 직접 본 감상이 어떠한가?’라는 질문에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웃으면서 답을 한다. 태황 이 새끼, 일부러 한 질문이지, 그거?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화기애애하고 흥겹게 진행되는 연회였다. 꽤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장악원 악공들의 연주와 무희들의 춤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다들 무척 뛰어난 솜씨였다.
사실 장악원은 요즘도 가난한 집 딸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팔자를 고치는 경로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처음 돈을 주고 사람을 채용하기 시작한 장조 시절과 마찬가지다. 개중에는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부업으로 매춘에 나서는 이들도 간혹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겸업하는 이들은 등통나면 바로 쫓겨난다. 장악원 전체가 기생집 취급을 받는 불쾌한 사태를 피하기 위함이다. 술잔과 노랫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흥겨운 잔치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7.
귀에 익은 새소리가 잠을 깨웠다. 숙취 때문인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몸을 일으키니 머리맡에 놓여있는 자리끼가 눈에 들어왔다. 주전자에 든 꿀물을 손수 따라 한잔 들이켜니 속이 좀 가라앉으면서 정신이 들었다.
“어제는 너무 놀았나…..”
잔치를 즐기는 데 몰두하다가 그만 조정 중신들이 나를 그렇게 애달픈 눈을 하고 맞이한 이유를 알아보는 일을 깜박 잊어먹고 말았다. 물론 내 오른편에는 태황, 외편에는 하진교가 앉아있었다고는 하지만 하려고만 했으면 누굴 불러서라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뭐 하루 차이 정도로 나라가 말한 만큼 크고 엄청난 일을 저지른 건 아닐 테니, 오늘 나가서 알아봐야지. 오늘 사정전에 가서 태황 앞에서 이번 북경 방문에 관해 보고할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어제 연회 자리에서 본 태황이 생각이 났다. 내게 술을 따라주면서 건넨 말까지.
‘네가 무사히 돌아와서 대행이다. 네가 없어서 무척 힘들었느니라.’
예전보다 초췌해진 얼굴로 이런 말을 하니 왠지 가엾어졌다. 머릿속에서는 이 새끼가 일 시킬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구나, 나한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그러는 게 분명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가슴 한쪽은 약간 동정심이 생겼다. 그래도 혈육이라는 건가.
미처 술도 다 깨지 않고 머리로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하니 심경이 복잡해진다. 짜증 섞인 한숨을 토하면서 머리를 긁으니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기침하셨사옵니까. 전하?”
“아…..일어나셨소, 비궁.”
내가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제대로 이야기도 못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건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던 권씨가 옆으로 누운 채 내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의 동침이라 힘들었을 법도 한데, 간밤의 힘겨워하던 모습과는 달리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음….무겁….지 않으셨소?”
내 불어난 체중 때문에 권씨가 힘들이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몸에 실리는 무게가 갑자기 확 늘었으니 무거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렇게 숨찬 소리를 냈을 테고. 하지만 권씨는 생긋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내 손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소첩은 괜찮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이 몸의 지아비신데,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고맙소.”
결심했다. 얼른 살을 빼야겠다. 그래야 권씨와 다른 후궁들을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하지. 물론 내 건강에도 그편이 더 좋고. 권씨와 어젯밤에 나누지 못한 여행 이야기를 즐겁게 나눴다. 상자 째로 주기만 하고 갔던 선물을 함께 열어보고, 여행 중에 겪은 즐거운 일들에 관해 들려주었다. 그러다가 조반상을 맞이하고 나서 조회에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신 태자, 폐하의 명을 받아 북경에 가서 역대 천자들께 예를 올리고 돌아왔사옵니다.”
그동안 제출한 보고서나 마차 안에서 태황과 마주 앉아 한 보고 같은 건 다 중간보고다. 정식으로 하는 귀환 보고는 조정 중신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 거다. 공식적인 보고니까 인원도 더 붙었다. 내 뒤에 김정희와 박규원, 김좌근, 박규수 등 함께 북경까지 갔던 주요 수행원들이 서서 함께 보고했다. 우리 일행이 지난 여정과 도중에 받은 대접, 심양과 북경 양 도시에서 건주 측 대표단을 만나 오간 대화 내용 등에 관해서.
보고 내용은 꽤 상세했다. 공식적인 방문 목적에 따른 제사 일정에 관한 보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누상촌 관광 같은 개인적인 일정은 빠졌다. 물론 김좌근이 쌍고검을 사서 가져온 이야기 같은 것도 당연히 빠졌다. 앞서 말했듯 실직적인 방문 목적인 양측 황실과의 밀담 부분은 이런 자리에서 밝히기에는 너무 중요한 이야기라 빠졌다. 후금 군왕과 패륵들의 원조 요청 같은 건 나중에 비변사에서 공개하고 대책을 논의하게 될 거다.
“고생했다. 태자, 와서 앉도록 하여라.”
“예, 폐하.”
무난하게 보고를 끝내자 태황은 나를 어좌 아래에 있는 내 자리에 앉게 했다. 그리고 내 귀가 번쩍 뜨일만한 무서운 말을 했다.
“자, 그러면 유구국을 폐하여 확실하게 우리 발아래 놓는 문제에 관하여 계속 논하도록 하시오.”
이거였어? 중신들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본 이유가 이거였냐고? 유구국을 우리 발밑에 놔? 정확하게 무슨 의미야,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