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67
4부 151화(1767화)
12.
반촌다점 2층에서 내려다보는 거리는 여전히 활기차다. 한두 해 정도 흉년이 든다고 해서 한양에 불경기가 닥칠 일도 없는 세상인데, 올해는 대풍년이 들 전망이기까지 하니 한층 더 흥청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주변에 들리지 않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들 팔자가 좋구나.”
거리를 오가는 남녀노소가 모두 흥겨워 보인다. 하기야 해가 벌건 이 시간대에 반촌에서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면 먹고살려고 아등바등 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 그게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저기 저놈은 시골에서 반촌 구경 한번 가겠다고 기차 타고 올라온 놈인가 보군.”
치렁치렁한 도포를 입었는데 옷고름이 바닥에 끌릴 만큼 길다. 치렁치렁한 도포야 그렇다 치더라도, 저렇게 긴 옷고름은 도성 길바닥에서 자휘를 감춘 지 백 년이 넘었다. 그런 옷을 입고 나타났으니 시골에서 온 티를 낸다고 보일 수밖에. 도성에서도 권세가가 많은 북촌이나 서촌 양반들은 비교적 옷고름을 길게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다. 갓 크기도 저거보단 작은 편이고, 귀고리도 그렇네.
요즘 도성 유행은 귀고리 크기를 줄이고 대신 세공에 공을 들인다. 거는 방법도 귓불에다 구멍을 뚫어서 거는 대신 고리를 사용해서 건다. 다만 이건 남자들 이야기고, 여자들은 여전히 귓불에 구멍을 뚫는다. 다만 귀고리 크기는 되려 남자들 것보다 작다. 하기야 크고 화려한 귀고리는 더 무거울 수밖에 없으니, 너무 큰 고리를 달고 다니다 보면 귀가 찢어질지도 몰라서일까.
귀고리가 작은 대신 여자들은 비녀를 비롯한 머리 장식과 반지, 옷에 다는 노리개에 힘을 주는 편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간혹 손목에 작은 팔찌를 착용하는 사례도 있다. 다만 목걸이는 보기 힘들다. 한복을 입으면 동정이 목을 가려버리기 때문에 목걸이 같은 건 해봐야 잘 보 이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탓이다. 목걸이를 드러내려면 양장을 착용해야 하는데, 아직은 일반인 중 일상에서 양장을 입는 여인네는 없다고 봐도 좋은 정도니까.
요즘은 얼굴에 덮어쓰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고 어깨에 망토처럼 걸치고 다니는 사례가 태반이지만, 장옷과 쓰개치마가 아직도 외출용 여성 정장의 일부인 게 현실이다. 그런 판에 목을 드러내는 양장 같은 게 일상복이 될 리 있겠는가. 양장은 어쩌다 여자들끼리 신기한 경험 삼아 입어 보는 옷, 유럽계 귀화 가문들이 집에서 입는 옷 정도 위치다. 장조시절 건너온 귀화인들도 대한 사회에 녹아들다 보니 외출복으로 입는 옷은 그냥 한복일 때가 많다. 독립적인 집단으로 존속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었다.
예외인 곳이라면 부안에 있는 내달인 마을 정도일까. 그쪽에서는 지금도 16세기 네덜란드 복장이 일상복이다. 태손 시절에 한번 가봤는데, 2백여 년 전 모습 거의 그대로라 쓴웃음을 지었었다. 이민자들의 생활 풍습이 이민 시점으로 고정된다는 산 증거를 내가 볼 줄이야.
“나리, 여기 주문하신 가배와 설고이옵니다.”
여기도 예외지. 여전히 반촌다점에서 제복으로 쓰는 16세기 체코식 드레스를 입은 다녀가 커피잔과 카스텔라 접시를 얹은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장조 때, 체코 출신 이민자들의 정착을 도울 겸 해서 상희가 체코계 처녀들을 고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제복이 된 옷이다. 물론 지금은 다녀 대부분이 한인이다. 체코인 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수백 년 동안 체코인 다녀만 채용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다녀라는 직업이 사회적인 대우가 높은 것도 아니고, 일하던 이들도 혼인하면 그만두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 구성이 바뀔 수밖에.
“고맙네.”
우리 자리에 쟁반을 들고 온 다녀도 한인이었다. 아직 일을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됐는지, 손놀림이 좀 서툴렀다. 수고한다 싶어서 미소를 지어주었더니 곧바로 앳돼 보이는 얼굴이 홍조로 붉게 물들었다. 거, 이 정도로 부끄럼을 타서야 이런 데서 계속 일하기 힘들 텐데.
“흠.”
반대편에서 들린 헛기침 소리에 화들짝 놀란 다녀가 몸을 움찔하더니 맛있게 드시라면서 꾸벅 인사를 올리고는 서둘러 나갔다. 방문 밖에서 대기하던 신헌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디에고나 하와병들 대신 신헌을 데리고 나온 건 최대한 주변에서 눈길을 안 끌고 싶어서다.
“전하…..어니, 서방님과 함께 여기 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너무 기쁘옵니다.”
헛기침으로 다녀를 쫓아낸 권씨가 새침한 표정을 풀고 생글거리며 웃었다. 나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기쁘다니 참으로 다행이오.”
권씨도 처녀 시절에는 여기 여러 번 왔었다고 했다. 동년배 집안 처녀들끼리 반촌극장에 와서 연극을 보고 – 당연히 나이 지긋한 부인 두 사람이 인솔자로 붙었다 – 나서 반촌다점 여성 전용 공간 – 한때 없어졌다가 다시 생겼다 – 에서 차를 마시곤 했다나.
가게 안쪽에 있는 여성 전용 공간은 – 나도 예전에 가봐서 알지 – 내외하기 좋고 방음도 잘 된다. 하지만 여기처럼 노대(露臺, 발코니)에 앉아 길을 내려다보며 거리를 구경할 수는 없다. 사회적인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미주에 다녀온 뒤로 전….서방님께서 계속 바쁘셔서 함께 하는 시간이 없었는데, 이처럼 시간을 내서 함께 해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감사하옵니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닌 일이오. 이런 쉬운 일도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려.”
스트레스가 너무 쌓였다. 유구 문제를 두고 그 빌어먹을 태황이 내 속을 마구 긁어대는데 그걸 버텨내는 수가 없다. 너무 짜증이 나서 후궁 처소에 들었는데도 밤일도 제대로 치르기 힘들 정도였다.
‘전하, 어찌 이리 심기가 불편하시옵니까. 소첩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사옵니까?’
‘아니요. 내가 요즘 고민이 좀 있어서 그럴 뿐이니 그렇게 신경 쓰지 마시오.’
심리적으로 피로가 너무 심했다. 애꿎은 짐승들 피는 그만 좀 보고 더 부드러운 방법으로 이걸 좀 풀어볼까 싶었다. 그래서 권씨에게 둘이 함께 몰래 대궐 밖에 나가서 놀고 오자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신첩이 어찌 거부하겠나이까. 말씀만 주시면 바로 준비하겠나이다.’
처음으로 받은 데이트 신청에 권씨가 뛸 듯이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혼인한 지도 어느덧 3년이 다 되었는데, 그렇게 따로 시간을 보낸 적은 거의 없었다. 늘 태손, 태자였고 태손빈, 태자비였다. 미주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니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도 공적인 신분으로 다닌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우리 둘이 함께 일반 민간인인 척 꾸미고 바깥을 구경하러 다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권씨가 태황이나 나처럼 당당하게 미복 차림으로 대궐 문을 나설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권씨의 할머니, 신혜옹주에게 권씨가 몰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올해 예순여섯이 된 신혜용주는 흔쾌히 손녀의 부착을 들어주었다.
‘그런 일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야 하는 법이지요. 이 할미도 해보고 싶었지만 못 한 일인데, 동궁께서 그리 배려하신다니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꼭 해보시도록 이 할미가 마마를 돕겠습니다.’
역시나 신혜옹주도 보통 성격은 아니었다. 하기야 손녀를 국모로 만들겠다면서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조기교육에 들어갔다니, 그게 어디 평범한 할머니겠는가. 며칠 안 돼서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손녀가 무척 보고 싶다’라고 적은 신혜옹주의 편지가 궁으로 들어왔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던 나는 속으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잘못 걸리면 기군망상이다!
하지만 신혜옹주도 나이가 있는지라, 태황은 별 의심 없이 흔쾌히 권씨보고 며칠 사가에 다녀오라고 출궁 허락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도 병문안을 핑계로 해서 처가에 갔고, 대궐에 비하면 경계가 허술할 수밖에 없는 처가에서 둘이 같이 빠져나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서방님과 함께 보니 《노 공자와 주 공녀》도 예전보다 한층 더 재미있었사옵니다. 제가 그런 불우한 처지에 빠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겨지던 지요.”
이제야 자연스럽게 나를 ‘서방님’으로 부르게 된 권씨는 두 눈을 빛내면서 아까 본 연극 이야기를 했다. 다른 세 후궁은 제쳐놓고 자기만 내 옆에서 이런 여가를 즐기는 게 정말로 기쁘고 행복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권씨도 만으로 열여섯 살, 이제 확실한 이팔청춘이로구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에 정말 가슴을 떨면서 공감할 나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기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
즐거워하는 권씨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이렇게 옷만 갈아입고 다른 사람인 척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아마 다음 세대에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사진이 나올 텐데, 군주의 얼굴이 사진으로 돌면 사람들이 금방 그 얼굴을 알아볼 게 아닌가.
“나도 그렇소이다. 그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무척이나 즐겁소.”
대궐을 벗어나 평범한 차림으로 저자를 돌며 휴식을 즐기는 것도 스트레스를 푸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예전에 은이가 왜 그리 자주 안나를 데리고 잠행을 나갔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황태자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었구나.
내가 보위에 있을 때 나가던 잠행은 스트레스 풀려고 밖에 놀러 나가는 것보다는 민생을 살핀다는 목적이 더 컸다. 그래서 은이가 자주 밖에 나가는 걸 알고도 ‘이놈이 벌써 민생을 살피러 다니니 참 대견하다’라고만 생각했지, 스트레스가 그토록 심한 줄은 몰랐었다. 내가 황태손, 황태자 신세가 되고 보니 은이가 과거에 받았을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지 겨우 짐작이 간다. 그 점잖은 녀석이 왜 그리 술을 퍼마셨는지도 그때 내가 녀석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주고 더 안아줬어야 하는데.
“그런데 저야 혼인하기 전에 이곳저곳 다녀본 적이 있지만…..서방님께서는 어찌 바깥일이 이리 익숙하시옵니까? 혹 자주 다니실 일이 있으셨는지요?”
자기 몰래 나들이를 나와 다녀들한테 추근대기라도 한 건 아닌지 불안한 모양이다. 이게 태황의 전과가 있다 보니 권씨가 불안해할 법도 한지라,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와 맺어지기 전에 두어 번 바깥 구경을 했을 뿐이라오. 어디 보자….슬슬 저녁 시간이 되어가는구려. 반촌주점으로 자리를 옮겨서 내달주라도 한잔하고 들어가면 어떻겠소.”
“기꺼이 따르겠사옵니다.”
동궁에서도 가끔 맥주 한잔 장도는 같이 마셨다. 덕분에 권씨도 이제는 차게 식힌 맥주를 사양하지 않게 되었다. 차게 식힌 맥주에 무종계 두 마리 정도면 저녁으로는 충분하겠지. 귀궐은 좀 늦어지겠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통으로 ‘처조모 문병’으로 일정을 빼놓았으니까. 밖에서 저녁까지 먹고 늦게 돌아가도 된다. 대궐에서는 다들 처가에서 밥을 먹고 오는 줄 알 테니까.
“자, 그럼 계산하고 나갑시다.”
빈 접시와 잔을 놓아두고서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범한 호위인 척, 문밖에서 지키고 있던 신헌이 짧게 예를 올리고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아까 언급했듯이 이건 들통이 나면 기군망상으로 치도곤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태황 성격을 보면 정말 걸려도 그냥 넘어갈 것 같기도 하다. 자기도 밖에서 기생을 끼고 노는 게 일상인 사람인데, 아들이 남도 아닌 며느리랑 좀 놀았다고 뭐라고 하겠는가.
태황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또 답답해 온다. 왜냐고? 나랑 너무 똑같아서. 예전에 내 모습이 생각나서.
13.
태황은 여러모로 나와 다른 사람이다. 내가 나로 눈을 뜨지 않고 태황의 진짜 아들, 태자 이진으로 계속 자랐으면 더 닮았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생판 달라졌다. 그러면서도 닮은 점은 국정을 운영하는 태도다. 내 언제의 모습이냐고? 그야 당연히 무종 시절이다. 갓 각성해서 정치질이고 뭐고 잘 모르고, 임금이라는 힘과 권위로 밀어붙이기만 했던 시절.
어떻게든 유구를 우리 땅으로 만들고 말겠다고, 신하들이 반대하든 말든 밀고 나가는 그 태도를 보니 증기기관 개발을 비롯하여 온갖 사업을 마구 밀어붙이던 내 생각이 났다. 내가 지금 태황을 보는 눈이 그때 신하들이 나를 보는 눈이었겠지. 그것만이 아니다. 중신들 앞에서 지랄이니 뭐니 하면서 비속어를 마구 뱉는 모습을 보니 무종 시절의 내 추태가 생각났다. 서자 차별을 정당화하는 중신들에게 ‘서자보다 서자들을 만들어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네놈들의 ….가 더 더럽다!’라고 욕을 퍼부었었지.
그때는 분명 시원했지만, 몇 십 년이 지나고 보니 나중엔 내가 왜 그랬을까 싶어서 이불을 쥐어뜯었을 뿐이다. 지금도 ‘무종께서 그대 범인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하교를 내리시어….’라는 말만 들으면 쥐구멍을 찾고 싶다. 내 부끄러운 면을 생각나게 하는 태도와 별개로…..태황은 어떤 면으로 대단하기는 대단한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존경할 수는 없어도 그 부분은 인정할 수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기는 했지만…..’
개인이 몸담은 조직과 성향이 안 맞으면, 아니 솔직하게 표현해서 굴러가는 게 뭐 같으면 때려치우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뜻의 속담이다. 이게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절’이 등장하는 걸 보면 아마 불교가 성했던 고려시대부터 쓰지 않았을까 추측하긴 한다. 지금 대한에서도 종종 쓰는 표현이지만 원래 내가 살던 현대에서도 자주 썼었다. 그리고 그 뒤에 관례처럼 따라붙는 구절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 하는 게 마음에 안 들면 네가 위에 올라가서 바꾸든가.’
절이 굴러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들면 주지가 될 때까지 버티라는 소리다. 주지, 그러니까 남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다음에 밑에 있을 때는 못 했던 것들을 해치우라는 뜻이다. 학교건 군대건 직장이건, 정말로 그렇게 하려면 막대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니 아무나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물론 그 힘든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흔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걸 해낸 사람이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다. 그게 내 아비, 태황이다. 태황은 33세가 되어 보위를 물려받을 때까지, 20여 년 동안 태자 자리에 있으면서 아주 고분고분한 아들로 살았다. 술ㆍ담배ㆍ사냥ㆍ여자처럼 개인적으로 놀아나는 거 말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단 한 번도 조부의 뜻에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조정 중신들은 태황의 국정 운영 방향이 조부와 똑같으리라고 생각했다. 대리청정 기간에도 조부의 평소 방침을 그대로 실행하기만 했으니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보위에 오르고, 조부의 상을 치른 지 1년을 다 채우게 되니까 태황도 드디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참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주지가 되었고 선황에 대한 예의도 지켰으니, 이제부터는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겠지. 문제는 태황이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로 한 건이 하필이면 수백 년 동안 내려오는 우리의 외교 기조를 단박에 뒤집는 내용이라는 거다. 아 정말 왜 하필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