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70
4부 154화(1770화)
17.
주성진과의 회견은 무난하게 마무리됐다. 대명공부에 남은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놓으라고 한 건 좀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차피 지난 2백 년 동안도 실질적으로 우리 땅이었다. 박규원이 주장했듯이, 유구보다는 이쪽이 그 구조를 바로잡을 필요가 솔직히 더 크다.
대명공부로서도 주산진을 내놓는 편이 훨씬 이익이다. 주산의 토족들이 매년 형식적으로 바치는 공물을 돈으로 환산하면 기껏해야 은 1천 냥 – 정말 허울만 갖춘 조공이다 – 쯤 밖에 안 되는데, 내 보고를 접수한 태황은 대명공부에 매년 3만 냥을 내리겠다고 확언했다.
현재 대명공부의 1년 수입이 대략 3만 냥쯤 된다. 대명동에 모여 있는 5천 호에 달하는 식읍 – 대명동에 등록된 명나라 유민의 후손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도 계속 대명공부에 조세를 낸다 – 과 기타 자산에서 들어오는 수입니다. 그게 졸지에 2배로 뛰어오른 거다. 이쯤 되면 쌍방에게 모두 좋은 결과로 마무리된 셈이다. 하지만 동궁에 찾아온 큰 외숙부 김유근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전하. 폐하의 윤허도 없이 대명공자와 멋대로 교섭하심은 월권이 아닙니까. 일단 지금은 폐하께서 기분이 좋으셔서 그냥 넘어가셨지만, 훗날 누가 걸고넘어지기라도 하면…..”
“괜찮습니다, 외숙. 제가 한 건 협상이 아니니까요.”
나는 조성진에게 ‘협상’을 걸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이러 하다’라고 곧이곧대로 알려주고. ‘장차 대명공부가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면 이렇게 움직이는 게 좋을 듯하다’라고 ‘조언’을 제공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협상이란 서로의 조건을 걸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가 원하는 바를 맞춰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번 건에ㅐ서 나는 주성진과 ‘조율’을 하지 않았다. ‘통보’를 했지. 그게 무슨 협상인가.
“부황께서는 저쪽에서 보인 태도에 아주 만족하고 계십니다. 주산진을 바치는 대가로 3만 냥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치르겠다고 하시는 것만 봐도 그렇지요. 저한테 월권이라면서 책임을 묻지는 않으실 겁니다.”
예무부에서는 태황이 용도도 밝히지 않고 갑자기 3만 냥을 만들라고 하는 바람에 난리가 난 모양이다. 하지만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다. 남은 뒷일이 걱정이지.
“대명공부를 설득하는 공을 세웠으니 이제 다른 일은 더 안 해도 된다고 동궁에서 조용히 공부나 하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이진으로 각성한 지도 벌써 8년, 지나간 그 세월 동안 겪은 태황의 성품으로 볼 때, ‘수고했으니 그만 쉬거라’라고 할 사람이 절대로 아니다. ‘그거 했으니 이것도 할 수 있지? 해봐’라고 할 사람이지. 그런 윗사람은 원래 세계에 있을 때도 실컷 모신….게 아니라 내가 바로 그런 상사였다. 원래 세계 말고, 이쪽 세상에서. 일부러 무종이나 장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중종 시절만 해도 최석정이나 김성권 같은 이들을 은퇴직전까지 굴렸었으니.
내가 그런 전력이 있으니 태황이 나를 두고 어떻게 굴릴 생각인지도 빤히 들여다보인다. 북경에 보내기 전에도 수시로 나한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자기 할 일을 안 하던 양반이다. 그런 양반이 나한테 일을 덜 시킬 리가 있겠는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묘당에서 유구 문제로 일본을 설득한다면서 대뜸 한 이야기가 나를 일본과 유구에 보낼 특사로 쓰겠다는 거였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내 운명이 선명하기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청맹과니라는 소리밖에 안 된다.
정말이지 태황을 대하는 감정이 죽 끓듯 하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나한테 잘해줄 때는 고마운데 배알이 꼴릴 때는 또 그렇게 증오스러울 수 없다. 그 음주운전 교통사고가 남긴 PTSD에다가, 자기 할 일까지 떠넘겨 부려 먹으려는 티가 너무 노골적이라 그런 모양이다. 태황의 안색만 봐도 그 속이 다 들여다보인다. 내가 막 귀국했을 때만 해도 살이 빠지고 초췌해 보이던 얼굴이, 그새 살이 불고 윤기가 흐른다. 나한테 일을 떠넘길 생각에 신이난 나머지, 떠났던 입맛이 돌아오고 잠도 잘 자나 보다. 밤에 눌러 나갈 기운도 생기고.
“전하께서 북경에 가 계신 동안 폐하께서는 정말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입맛이 없다며 수라도 잘 들지 않으시고,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밤도 무척 많으셨지요. 바깥나들이도 거의 끊으셨었고요.”
하지만 태황의 변모에 대한 김유근의 해석은 이처럼 달랐다. 멀리 보낸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에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하다가, 내가 무사히 돌아오니까 안심하고 다시 원래 하던 대로 지낸다는 건데….그럼, 왜 나를 또 내보내려고 하냐고. 그게 설명이 안 되잖아.
분명 태황은 내가 내정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솜씨를 보인 걸 확인했으니 앞으로 계속 자기 대신 굴릴 생각에 신이나 있을 거다. 그래서 요즘 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한 거겠지. 안색만 좋아진 줄 아는가? 살도 쪘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태황도 키가 꽤 큰 편이다. 한 170cm쯤 되려나? 체중은 눈대중으로 부면 80kg쯤 될 것 같다. 예전에는 훨씬 탄탄한 체형이었는데, 정식으로 임금이 된 뒤로는 운동을 그만두더니 지금처럼 살이 붙기 시작했다. 운동도 조부한테 잘 보이려는 수단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순원황후께서 가신 일 이래…..전하께서 폐하께 원망이 많으신 줄은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참으셔야 합니다. 천륜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닙니까.”
‘김유근도 내가 태황에게 유감이 많은 줄은 안다. 드러내 말한 적은 없지만,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랫동안 내 옆에 붙어있던 김유근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리학이 기반이 된 사회인 대한에서 부자간의 관계는 부친 쪽이 절대적인 갑이 될 수밖에 없다. 김유근이 나를 다독이는 것도 그런 현실을 인정하라는 뜻이겠지.
18.
중전 박씨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주 순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태자가 북경 방문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고 기다려보았지만, 막상 닥친 결과는 역시나 아무 일도 없었다.
“어찌 그 긴 여정에서 불미스러운 일 한 번이 없었답니까?”
기차도 가끔 사고가 난다. 모서리를 돌다가 탈선하기도 하고, 기관이 터지기도 한다. 간혹 화재가 발생해서 차는 물론이고 싣고 잇던 화물까지 태워버리는 사례도 있다. 물론 철저하게 정비하는 황실 전용 열차가 기관이 터질 일은 없다. 하지만 평소에 달려본 적이 없는 북방이나 타국의 철로를 달린다면, 아무리 숙련된 기관사라도 탈선 사고 정도는 일으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먼 길을 오가면서 사고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번 미주행에서도 그러더니, 이번 서행까지 무사하게 마치고 돌아오다니….정말 하늘이 내린 운을 타고난 태자란 말입니까. 참으로 대단합니다.”
앞에 앉은 오라비 박규원은 겸연쩍은 듯 고개를 숙였다. 중전은 오라비에게 태자의 북경 방문에 동행하는 김에 태자에게 흠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조사해 오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성과도 없으니 중전이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경험도 없을 텐데, 건주 양국 황실과의 회견에서도 실수 한 번을 하지 않다니….”
이것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 아닌가. 머리도 좋고 학식도 제법 풍부하다고 하지만 외교 경험은 아직 많이 부족할 터였다. 그런데 어찌 심양과 북경에서 두 나라 황실을 대할 때 그리 능숙하게 행동했다는 말인가. 물론 태자는 그전에 미주에 건너가서 신불랑 황제를 만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신불랑은 시골뜨기 출신인 황제가 전공으로 벼락출세해서 건립한 나라다. 그런 나라 황실에서 제대로 된 예법을 배워왔을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서양 예법과 동양 예법은 애초에 다르다.
“아마 한성판윤이 강서원 사로 있을 때 잘 가르친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아우들과는 달리, 그 재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니……”
김유근은 능력 면에서는 김조순을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닮지 못한 부분도 많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김조순의 세 아들은 부친의 좋은 점들을 다 나눠 받았다.
뛰어난 업무 능력과 재능은 장남 김유근에게 갔다. 성실하고 과묵한 성정은 둘째 김원근 몫이다. 주변 사람들을 휘어잡는 정치력은 만내 김좌근이 물려받았다. 세 가지 전부 제대로 갖춘 아들은 없었다. 아버지처럼 조정을 주도할 재주는 없다는 소리다. 이는 중전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무리 태자가 자기 외숙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고 해도, 다들 결격사유가 있지 않은가. 첫째는 거만하고, 둘째는 무능하고, 셋째는 태만하다. 이래서야 조정을 이끌며 권세를 잡기 어렵다.
태황은 아직 젊다. 그리고 아무래도 죽은 김씨의 형제들보다는 지금 중전의 형제들 쪽을 더 가깝게 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박씨 집안이 세력을 구축할 시간은 충분했다. 박규원은 그러니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라고 중전을 위로했다.
“제가 함께 북경에 다녀오면서 살피니, 태자께서는 마마께 효심을 다할 생각뿐이었습니다. 두 분 친왕과 두 분 공주께도 참으로 깊은 우애를 보여주셨고요. 그 증거로 선물도 넉넉히 준비하시지 않았습니까?”
중전은 차마 무정하지 못했다. 태자가 북경에서 가져온 선물 중에는 아직 젖먹이인 막내 공주의 몫까지 있었다. 태자가 계모를 경계하고 있다면 준비했을 리가 없는 물건들이다. 중전의 두 아들은 이복형이 갖다 준 선물을 받고 신이 나서 한 달 동안 놀이시간이면 내내 그것들만 가지고 놀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어미의 속이 썩어 들어가는 기분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태자가 속으로는 나를 원망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니요?”
“마마, 생각해 보시옵소서. 태자께서 마마를 원망하실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순원황후 마마의 일에 마마께서 개입한 것도 아니고, 태자 전하와 순친왕 전하께 뭔가 해코지를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태자께서 마마께 원한을 품겠습니까?”
사실이었다. 중전은 속으로는 태자를 제거하지 못해 안달 할지언정 겉으로는 그 형제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다. 좀 차갑고 서먹하게 대하는 부분은 있었지만, 나이 차이도 크지 않은 – 중전은 태자보다 겨우 일곱 살 많다 – 의붓아들을 제대로 자식으로 대우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태자께서 마마를 원망할 일은 없습니다. 원망한다면 다른 사람이겠지요. 자기와 자기 혈육에게 해를 끼친 다른 사람 말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태자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계시니, 속으로 삭이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돌려서 말했지만 ‘그 사람’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박규원도, 중전도 다 알고 있었다. 그게 주상이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태자의 생모를 죽이고 태자도 죽일 뻔한 사람이 바로 그 였다.
하지만 중전은 태황에게 별다른 유감이 없었다. 중전은 절대로 태황이 직접 모는 마차를 타지 않았고, 태황의 계집질에는 그냥 관심을 끊었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전이 바라는 건 오직 세 가지였다. 국모로서의 확고한 자리, 친정의 번창, 그리고 자기 자식에게 물려줄 한층 안정되고 높은 지위. 그거면 충분했다. 그리고 황자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지위하면 보위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나저나, 두 분 친왕께서는 요즘 학업이 진도가 좀 있으신지요.”
누이를 다독인 박규원이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태황이 시강원을 정식으로 설치해주고 난 뒤로 조카들의 교육에서 손을 떼었는데, 북경에 다녀오는 등 바쁘다 보니 최근에는 딱히 그 현황을 확인하지 못했다. 큰조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다 말았는데, 지금은 어떨지.
“용이는 아직 천자문을 다 떼지 못했습니다. 전이는 국문만 떼었고요. 아직 멀었지요.”
형인 이용은 이제 여섯 살, 동생인 이전은 다섯 살이다. 천자문을 못 떼는 게 당연하건만, 중전은 애들이 공부는 않고 태자가 갖다 준 장난감만 가지고 논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 자식들이 태자를 뛰어넘는 준재이기를 바라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 속이 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태자는 곧 일본에 간다지요?”
“예, 주상께서 이미 뜻을 정하셨습니다.”
박규원이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또 따라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북경에서 태자를 보좌하여 임무를 잘 수행하였으니, 한 차례 더 일을 맡겨보아도 좋을 듯하다. 어떤가, 어려운가?’
태황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박규원을 바라보며 이렇게 분부를 내렸다. 어느 안전이라고 그 앞에서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어도선을 타고 일본에 가게 될 듯했다.
“이번에도 무사히 다녀오겠지요. 이번에도 또 무사히 다녀올 거예요. 예, 그렇겠지요.”
중전이 맥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안 좋은 일을 당했으면 좋겠다고 소리를 크게 내서 말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한심했다.
19.
태황이 유구 황제를 겸임하겠다고 나서면서 그 문제를 놓고 조정과 중추원에서 은밀하게 논쟁이 벌이진 지도 어느덧 두 달이 넘어서 석 달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결론은 태황이 원했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조정 중신 상당수는 유구에 압력을 가해 신속(신속)하게 만드는 데 여전히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도 태황의 강력한 뜻을 끝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청구신보 보도로 촉발된 시중의 유구 병합 요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민심은 곧 천심이니까.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이라면 좀 그렇고, 돌 하나를 더 얹은 게 대구에서 올라온 대명공 주계신 명의의 서한이었다. 명의 일개 번국이자 변방의 섬나라에 불과했던 유구가 황제국을 자칭했던 것부터가 과욕이었으니, 그 천명을 옳은 방향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쓰고 있었다. 분명 이는 내 ‘조언’에 따른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나와 태황 단 두 사람만 알고 있었으니 조정 중신들은 그저 주계신의 순수한 자의라고 여길 수밖에. 여기에 아직 명목상 명나라 땅이던 주산진을 정식으로 태황에게 양도하겠다는 서한까지 같이 올라왔다.
“그 뜻이 가상하니, 받아들인다. 그 보답으로, 예무부는 앞으로 매년 3만 냥을 대명공부에 지급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로써 예무부가 대체 왜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3만 냥의 용처가 정해졌다. 그리고 태황은 여기서 힘을 얻어 다음 단계로 발을 내디뎠다.
“동평관에 있는 관수는 우리가 보낸 서한에 대한 답장을 가져왔는가?”
동평관은 사실상 일본 공사관이다. 그리고 공사 노릇을 하는 우두머리 주재관을 일본에서 부르는 명칭이 관수(館首)다. 태황은 일본과 유구 문제로 교섭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조정의 반대가 웬만큼 꺾이고 나자 바로 관수를 외무부로 불러들여 사신 방문 일정을 협의하게 했다. 물론 그 사신이 태자라는 사실은 미리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조정에서 아직 논쟁이 다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한양과 에도 사이를 서한이 오가며 내 방문 일정을 잡았다. 일본 측에서도 별다른 거부 없이 우리의 사신 파견 제안을 받아들였기에 교섭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협상이 타결되면, 바로 귀국할 필요 없다. 유구에 들려 우리 요구를 전달하고 답을 받아 돌아오거라. 저들이 무릎을 꿇을 때까지 나하에서 죽치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 거절하면 바로 귀국하여라.”
“예, 폐하.”
태황의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내가 나하에 오래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유구 측에서는 나를 설득, 회유하거나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서 병합 사업의 진행을 지연시키려고 하리라. 태황은 그 기회를 차단하려고 내게 바로 귀국하라고 한거다.
내가 바로 귀국하면, 저들이 지연전술을 쓸 대상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내 귀국은 저들에게 ‘한실(한실)이 분노하였다!’라는 인상을 주어 평정심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 괜히 내가 집에도 못 오고 거기 죽치고 있는 것보다 그 효과가 더 좋다. 나도 편하고. 그나저나 또 내 비빈들은 한동안 생과부 신세가 되는 구나. 일본에 함께 가잘 수도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