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8
1부 1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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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일본에서 상황이 좀 안정된 모양이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오우치 쪽에서 사절단이 왔다. 이번에는 신기한 종려나무와 양치류 풀, 화산에서 나온 속돌, 공작 깃털 따위를 공물로 가지고 왔다.
“올 한해 소이전과의 싸움은 크게 진전이 있었는가?”
“많이 몰아붙였습니다. 저들이 기치(旗幟)로 삼고 있는 쇼니 씨의 후계자 쇼니 스케모토는 이제 겨우 16세에 불과한 어린아이입니다. 아직 자기 힘으로 가문을 이끌지도 못하고, 힘 있는 가신들에게 휘둘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
쇼니 스케모토(少?資元, 소이자원)가 그렇게 어린 줄은 최근에야 알았다. 아버지와 형이 다 죽는 와중에 혼자 가문을 재건했다기에, 아 그럴 만한 나이는 됐구나 하고 말았었지.
알고 보니 스케모토는 여기저기 숨어 다니면서 언제가 쇼니 씨가 다시 일어나리라는 희망, 가문의 재흥을 상징하는 마스코트 노릇을 했던 모양이다. 그동안 규슈에서 쇼니 씨가 버틴 건 스케모토가 잘나서가 아니라 신하들이 그만큼 충성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은 있었다. 지금 일본은 전국시대다. 하극상이 만연하고 무능한 주군은 가차 없이 버림받는 시대 아니었나? 거의 망한 가문, 당주도 후계자도 전사한 뒤에 홀로 남은 어린 막내가 어떻게 신하들에게 그렇게 충성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쇼니 씨는 역사가 짧은 가문도 아니고, 3백 년이 넘게 규슈 일대를 다스렸다. 그러니 봉건적인 계약관계 그 이상의 충성을 바치는 신하가 없으란 법은 없다. 그리고 망한 듯해도 사실은 아주 망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고.
“허나 소이전은 아직 그 세가 많이 남지 않았느냐. 한 해를 꼬박 싸우고도 아직 무너뜨리지 못했다면 과연 내년에는 쓰러트릴 수 있겠느냐.”
규슈에는 쇼니 씨와 오우치 씨 말고도 힘센 가문이 여럿 있다. 오우치가 쇼니를 쓰러트린다 한들 여러 적 중 하나를 넘어뜨리는 데 불과하다. 이거, 개입하는 게 맞는 걸까.
“대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전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실례인 점은 알고 있사오나, 쇼니 씨의 배후를 견제해 주시기로 하셨으면서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건 전하가 아니십니까.”
머리를 박박 밀고 승려 복장을 한 사자는 뜻밖에 간이 컸다. 아니, 무례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작년에는 북방 원정을 하셨으므로 규슈에 출병하지 못하신 사정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올해는 그저 휴양하며 군을 쉬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선은 넓은 땅과 천만 백성을 거느린 대국이거늘, 어찌 불과 군선 오십 척을 내어 약속을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하십니까?”
대답이 궁했다. 매년 전쟁을 하는 경우도 허다한 저들 입장에서야 당연히 저런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중신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저 건방진 왜인을 당장 끌어내소서! 사신으로 온 주제에 어찌 저리 무례하단 말입니까!”
“소이전이고 대내전이고 모두 똑같은 왜인들입니다! 자기들끼리 무슨 짓을 하건, 개입하지 마시고 부디 그냥 버려두소서!”
“당장 저 주제를 모르는 것들과 모든 관계를 끊게 하소서!”
벌떼처럼 일어나서 성토하는 신하들 때문에, 내가 말을 하더라도 내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 난장판을 당장 수습할 방안은 하나뿐이다. 내가 역관을 노려보자 역관이 멈칫하더니 곧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전하, 신을 죽여주소서! 신이 왜인의 말을 잘못 전해 올렸나이다. 저들도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놀랐사오니, 신이 얼른 다시 바른 내용으로 올리겠나이다.”
머리는 나빠도 눈치는 빠른 놈이로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역관이 처음 전달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시 입 밖으로 내놓았다.
“대내전의 사절 존광(尊光)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북으로 출병하여 큰 땅을 얻으셨으니 그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하지만 구주에서도 전하께서 미치시는 성덕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역관이 사절의 발언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사실상 내가 시켰고, 추후에 적당히 마무리만 한다면 문제될 일은 없다.
“또한 존광은 ‘일찍이 전하께서 군사를 내어 구주 평정을 도와주겠다고 하신 말씀이 눈앞에 선연합니다. 부디 군선 오십 척으로 소이전을 공격해 주소서. 그리하면 소이전이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나는 오우치 씨와 정식으로 동맹을 맺지 않았다. 군대를 보내 전쟁을 돕겠다고 확약한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보낸 제안에 대해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은 치고 싶다. 수없이 왜구를 보낸 쇼니 씨에게 복수하고 싶고, 세력 범위를 넓히고 싶고, 인력도 뺏고 싶고, 동남아로 가는 항로도 얻고 싶다. 하지만 그 관계에서 동맹 따위를 맺어서 묶이고 싶지도 않다.
오우치는 분명 조선에 대해서 상당한 친근감을 보이고 있다. 다른 일본 영주들보다는 훨씬 우호적으로 대할 수 있는 상대인 건 맞다. 하지만 동맹을 맺어서 정식으로 일본 정치에 얽혀 들어가기 시작하면 문제가 커진다.
내게 있어서 최우선 과제는 새로 얻은 북쪽 땅을 확실히 영토로 다지는 일이다. 그러자면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상황인데도 전국시대, 그 끝없는 전쟁 속으로 끌려들어간다고?
들어가는 전비 이상으로 비용을 받아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오우치를 위해 싸운다면 그건 오우치의 용병일 뿐이다. 단연코 내 백성을 용병으로 팔고 싶지는 않다. 내가 전쟁을 한다면 그건 나라를, 백성들을 위해서 할 때뿐이다.
“사자에게 전해라. 소이전을 치는 건 대내전 측 사정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우리가 원할 때, 적절한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판단될 때 칠 것이다. 그 시점은 언제일지 알 수 없다.”
역관이 내 말을 전하자 대호원존광(大護院尊光)이라 하는 오우치의 사절은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문득 그 매끈한 머리를 보면서 호기심이 하나 일었다.
“내 듣기로, 왜 땅에서는 여전히 유력가 자제들 중 집안을 물려받지 못한 자들이 출가하는 사례가 많다고 들었다. 그대도 혹시 대내전의 일가인가?”
고려에서는 그런 사례가 꽤 있었다. 왕자들 중에도 출가하는 사례가 꽤 있었고, 개중에는 대각국사 의천처럼 승려로 명성을 떨친 이도 있지만 현종처럼 절에서 다시 궁으로 돌아와서 왕이 된 사례도 있다. 최씨 정권에서 세 번째로 권좌를 차지한 최항도 승려였다.
조선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기는 하다. 일단 가장 유명한 케이스로 효령대군이 있고, 공주나 왕실 비빈들 중 출가한 경우가 꽤 있다. 초기에는 그래도 세력을 유지하던 불교가 중종 이후 완전히 몰락하면서 그런 사례도 없어졌지만.
“그렇습니다. 저는 대내전 당주 대내의흥의 친동생입니다. 허나 속세에서 사용하던 이름은 이미 버렸습니다.”
음? 이 승려가 요시오키 친동생이었어? 국서에 있는 이름은 법명으로 기재해 놓으니 이게 누군지 알 도리가 없었지. 알았으면 나도 대우가 좀 달랐을 텐데.
그러고 보니 대마도에서 받은 정보 중에 몇 년 전에 오우치에서 몇몇 가신들이 이 동생을 내세워서 요시오키를 타도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물론 제압당했고, 당주 자리에 옹립될 예정이었던 동생은 다른 다이묘 밑으로 도망쳤다고 했는데…?
“풍문은 들었다. 그대는 형에게 쫓겨나 대우씨(大友氏, 오토모 씨) 밑으로 들어가 환속하지 않았는가?”
“아닙니다. 일시 몸을 피했던 것은 사실이나, 형님께서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애초에 역신들이 멋대로 제 이름을 도용했을 뿐이고, 제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다시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알 만하다. 내게 군사를 재촉하는 일 ? 자칫 수틀리면 내 손에 목이 달아날 수 있는 ? 과 같은 중요하면서 위험부담이 큰 임무를 주려고 반역한 아우를 살려둔 건가.
아마 요시오키는 동생에게 이 임무를 내리면서 그가 내게 붙어 다시 오우치 가를 차치하려 시도할지 모른다는 위험부담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모양이다. 사실 그 판단이 정확하다. 나는 오우치 가 계승다툼 따위에 끼어들 생각이 없으니까.
“알겠다. 부디 형제간에 우애가 회복되기를 바라노라.”
다만 오우치에도 여차하면 개입할 빈틈이 하나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존광이 충심으로 형 앞에 무릎을 꿇을 리가 없다는 정도는 알았으니까. 이만하면 뭐 충분한 가치가 아닐까.
“분명 소이전보다 대내전을 아끼는 내 마음은 변치 않았으니, 바로 귀국하여 그대의 형에게 내 말을 잘 전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존광이 절을 하고 물러났다. 아아, 접견은 끝났지만 이제 정말로 귀찮은 절차가 남았구나. 통역을 잘못하여 어전을 모독한 역관을 벌하라는 청이 빗발치겠지. 별 수 없는 일이다.
– 4 –
역관은 결국 울릉도로 귀양을 갔다. 처음 신하들이 요구한대로 불경한 장본인을 벌하자니, 외교사절인데다가 요시오키의 동생이기까지 한 존광을 죽이거나 귀양 보낼 수는 없었다. 이는 곧 암묵적인 동맹이고 뭐고 다 깨고 오우치와 원수가 되자는 소리나 매한가지니까 말이다.
조정에서도 이런 사정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대간들이 그래도 명백한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면서 들고 일어났을지 모르지만, 요즘 대간들은 알아서 길 줄 알았다. 부패한 관리들을 고발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이제 개입하지 않는다.
중신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죄를 덮어쓰는 주역은 역관이 되었다. 다행히 그도 순순히 벌을 받았다. 사실 왜인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으로 인정된다 해도 벌이 떨어질 것은 빤했기 때문이다. 그런 무엄한 말을 임금에게 그대로 전한 것 자체가 죄였으니까. 거참.
역관 입장에서야 이번 일이 날벼락일 터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마침 이용하기 적절한 사태이기도 했다. 그동안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표착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매번 강원도 관찰사가 배를 보낼 때까지 그냥 묶어서 가둬두기만 했기 때문이다.
통역할 인원을 보내 달라는 청이 몇 차례나 올라왔지만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절해고도에 귀양살이를 스스로 가려는 자가 있을 리 있겠는가? 몇 년을 고심하던 참에 ‘적당히 큰’ 죄를 지은 후보자가 손에 들어왔으니, 이것 참 인간만사 새옹지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황이를 안고 경회루를 거닐고 있으려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착하고 귀여운 아이에게도 누구를 죽이고, 벌주고, 내쫓는 일을 가르쳐야 하겠지. 과연 착하게만 자라면 그걸 할 수 있을까.
다행히 황이는 온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도 그 품행이 참 올발랐다. 어머니인 중전 신씨가 잘 가르친 덕이겠지만, 상대가 누구든 존중하고 예의바른 아이로 자라고 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을 유지하면서.
나 자신이 백성과 군사를 숫자로만 여기며 국정을 논하다가 이런 황이를 보면 힐링이 된다. 가끔 불안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식교육 방침을 바꿀 생각은 없다. 이 아이도 자라서 공부를 하고 현실을 알면 자기가 어떤 관점으로 행동할지 알게 될 테니까.
설마 그 귀결로 석가모니처럼 출가를 하겠다고 나서진 않겠지만, 설사 그런 결정을 내린다 해도 나로서는 막을 생각이 없다. 그것 역시 이 아이의 선택이니 말이다. 임금 자리야 동생들 중 하나가 이으면 된다. 얼마 전 태어난 넷째는 그만 죽었지만 아직 그 위가 있다.
그러고 보니 숙의 이씨 소생인 양평군 이인(李仁)도 황이처럼 예뻐해 주어야 할까. 하지만 그 아이는 내가 자주 보지를 못한다. 왕자들이 궁 밖에서 자라는 전통 때문에 지금은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장남이자 사복시 제조 정미수의 집에 있다.
사실 황이도 그러자는 이야기는 있었다. ‘나’ 역시 월산대군 집에서 자랐다. 물론 내 기억에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 전통에 따르자면 황이 역시 궐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내가 만약 그대로 했다면 나는 늘 아들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테고, 그러면서도 막상 만나면 서먹한 사이가 되었을 거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바로 내 주변에서 본 사례가 있었으니까. 바로 사촌형 이야기다. 한국에 있는.
사촌형 부부는 맞벌이한다고 애들을 큰아버지 댁에 맡겼다. 그런데 주말마다 찾아갔는데도 애들이 부모한테서 멀어지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내가 만들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맏아들 황이라도 매일 얼굴 보며, 매일 안아주며 키우고 싶다.
황이를 품에 안은 두 팔에 꼭 힘을 주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이 아이는 내가 끝까지 품겠다고. 물론 사람 구실 못 하는 마마보이를 만들 건 아니다.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학습 계획을 세워 가르치기 시작할 거다. 왕세자로서 배워야 할 온갖 것들을 말이다.
– 5 –
“왜 이리 늦은 거요? 벌써 한참 전부터 여기 도착해서 그대들을 기다렸는데.”
해변에서 기다린 지 여드레 만에 우데게 사냥꾼들이 나타났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보니 이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 불과 20여 명으로, 수백 명이라고 착각한 그날 밤의 일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아마 밤이라 시야가 좁아 착각한 모양이다.
어쩌면 그때는 정말 수백 명이었고 지금은 적은 수가 찾아왔을 수도 있지만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겠지. 유담년은 지금 우데게 야인의 수 따위에 신경을 쓸 수 없을 만큼 몸이 달아 있었다.
“자, 우리 전하께서 내리시는 선물이오.”
선창에 쌓아두었던 화살촉, 단도, 솥 따위가 내려졌다. 선물을 받은 우데게 사냥꾼들은 기뻐하면서도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작년에 선물을 교환했던 그 사냥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왜 주나? 대가를 원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