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80
4부 164화(1780화)
20.
“자네, 현순옹주한테 장가들고 싶다고 했지?”
“뵙진 못했지만, 황빈께서 그리 미인이시니 당연히 현순옹주도 미인이시지 않겠습니까?”
하진교의 아내 선택 기준은 순전히 외모였다. 이 본능에 충실한 놈 같으니. 하기야 다른 기준을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으리라. 어차피 정략결혼이고, 본국을 배경에 둔 황녀인 이상 하진교 눈에는 다 고만고만할 게 분명하다.
물론 하와국에서 세자빈이, 왕비가 된 뒤에 정치질을 좀 하기는 해야 할 거다. 하지만 그 재주를 지금 알 도리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하와국에 건너간 뒤에 키워나가야 할 재주다. 그러니 지금 고려할 필요도 없고, 고려할 수도 없다. 그러니 얼굴이나 따질 수밖에.
“폐하께서는 딱히 꺼리지 않으시는 것 같던데, 중전께서 반대하실까요?”
“그야 나도 모르지, 여쭤본 적이 없으니.”
하진교가 자기 속내를 비친 시기는 마침 태황이 현순옹주를 막부에 시집보내서 외손자를 소군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포기한 뒤였다. 그래서인지 꽤 긍정적으로 답했던 모양이다. 어차피 하와국에도 옹두 하나는 보낼 생각이었으니, 현순옹주를 보내면 안 될 이유도 없고. 다만 국혼은 태황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황실의 최고 어른인 조모 쪽 의견도 들어야 하고 법도 상 모든 황자와 황녀의 어머니인 중전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
사노부 때도 그렇지 않았던가. 생모인 인빈 조씨의 뜻보다 더 중요했던 건 중전 의인황후 김씨의 뜻이었다. 중전이 선뜻 찬성했기에 그 혼인을 밀어붙일 수 있었고, 인빈 조씨한테는 상희를 보내 위로나 해주라고 하고 말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현순옹주의 생모가 미주 출신 황빈 홍씨긴 하지만, 대궐 법도로는 중전의 딸이다. 그러니 중전의 의견이 중요할 수밖에.
다만 인빈 조씨가 나한테 별 의미가 없는 상대였던 것과 달리, 황빈 홍씨는 태황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다. 그러니 황빈의 의견도 무척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어쩌면 바로 그 이유로 중전은 황빈의 딸을 바다 건너로 날려 보내고 싶을 수도 있지만.
“허나, 화류병에 걸린 자를 옹주와 혼인시킨다고 하면 중전마마든 황빈 자가든 입을 모아 반대하실 게 뻔하네. 그러니 놀더라도 몸조심은 제대로 해야 해. 알겠는가?”
“예, 전하.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걸린다면……”
“세간에는 화류병을 낫게 하려면 처녀와 관계하면 된다는 속설이 있다던데, 설마 자네가 그런 개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지?”
“무, 물론이죠. 그런 건 안 믿습니다, 하하.”
느닷없이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게 수상한데. 하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까 굳이 추궁할 필요는 없으리라. 개소리라는 내 말 듣고 안 하면 되는 거지. 짚고 넘어가자면, 모든 성병에 걸린 이들이 거세 처분을 받는 건 아니다. 장조 때 유입돼 기존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었던 양매창, 매독 환자만 거세 대상이다. 임질과 같이 웬만큼 치료가 가능한 병은 굳이 거세까지 하지는 않는다.
“거세만 안 하면 뭐하나. 그런 병에 걸렸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자네 혼삿길은 막히는데, 화류병쟁이한테 딸을 주겠다는 어미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건 하와국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하와국에서도 항구에 드나드는 선원들을 통해 심심찮게 감염되는 게 성병이니, 우리가 하와국에 세워준 의학교에서 돌림병에 대처하는 법 못지않게 중점을 두어 가르치는 학과가 성병 치료다.
유곽에는 드나들더라도 몸 관리 잘하라고 잔소리를 실컷 해서 하진교를 돌려보내고 나니 대화중에 계속 언급했던 중전 박씨 생각이 났다. 중전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려나. 내가 일본에서 머무는 동안 후지산이라도 분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중전은 전 아시아의 왕좌에 자기 외손자들을 앉히겠다는 태황의 허무맹랑한 계획에 관해 당연히 모른다. 태황이 그 소망을 농담처럼 거론했던 적이 있어서 막연하게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게 진심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태황과 마주 앉아 독대하면서 협상안을 준비하는 과정은 그다지 곱게 보지 않았다. 중책을 맡아 처리하면서 내가 입지를 다져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게 다 당장이라도 내가 즉위하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 그냥 나랑 사이좋게 잘 지내면 내가 나중에 용이랑 전이한테도 잘해줄 텐데 왜 쓸데없는 미련을 자꾸 품는 걸까. 공연히 헛수작이라고 부리다가 들키면 자기 자식들 목숨 달아나는 결과밖에 안 나타날 텐데.
내가 직접 보고 듣지 못했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편전에서 양위 소동이 벌어질 때마다 중궁전에서도 중전의 심장이 한 번씩 덜컥 내려앉았으리라. 정말로 태황이 나한테 양위하고 상황으로 몰러 앉아버리면 자기 자식들한테는 어떤 기회도 없을 테니 말이다. 기회는커녕 보위에 오른 내가 누명을 씌워서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거다. 아니다. 그 어린 몸으로 머나먼 북변이나 남변, 동변에 보내져서 죽어라 고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곧바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 뭐, 중전이 무슨 생각을 하든 행동으로 옮기지만 않으면 나야 상관없다. 공연히 할 거 안 해서 불효자 소리 들어봐야 손해는 나마 보니까.
21.
전례가 될 옛 조약문이 두 개나 있으니 이번 조약도 비교적 순탄하게 준비되었다. 예전에 중종 때는 귀한 신분에 어떻게 그런 일을 직접 하겠느냐면서 직접 문구를 수정하는 일 같은 건 부사로 따라온 관원들에게 시켰는데, 이번에는 내가 직접 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일본 측에서 주장한 바에 따라 변경한 내용이 약간 있기는 해도 기본은 내가 가져온 초안 거의 그대로다. 내가 백 년 이상 임금 노릇한 경험을 바탕으로 적성한 문서다 보니, 저들이 보기에도 딱히 불공평한 부분이 없었던 탓이다.
『대한국과 대일본국은 을미조약 이후 백 년, 경인조약 이후 백 이십 년간 이웃의 도리로 서로를 도우며 예의를 다하였다. 앞으로도 이러한 우호를 지켜나가기 위하여 서로 준수할 바를 규정할 필요가 있기에 대한국 태황과 대일본국 대군은 새로이 조약을 맺기로 하였으며 그 내용을 하기한 바와 같이 조정하였다.
1. 을미조약 및 경인조약에 의거하여 대한 태황이 통치를 위임받은 북구주 3주는 두 조약에서 규정한 바에 따라 현재의 위임 상태를 유지함을 대군의 이름으로 인정한다. 또한 대마도와 일기도 두 섬은 적법하게 대한 태황에게 양도, 승계된 대한령임을 인정한다.
2. 을미조약 및 경인조약에 의거하여 개설한 개항장 10개소 외에도 세관이 설치된 모든 항구에 양국 선박이 자유롭게 입항할 수 있도록 한다. 각 항구에서 드나드는 배와 사람이 지켜야 할 법규는 기존의 것을 준용한다.
3. 대한국 황가와 대일본국 대군가의 국혼에 따른 예물로 기존 을미조약 및 경인조약에 의거하여 한일 양국이 유구국 및 아모국에 가지고 있던 권한을 교환한다. 유구국은 대한의 번국으로, 아모국은 대일본의 번국으로 귀속하도록 한다.
4. 유구국과 아모국은 대한국과 대일본의 번국이 된 이후에도 내정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권한을 계속 가진다. 유구국주가 지위를 세습할 권리와 아모국이 대회의에서 국주를 선출할 권리도 모두 인정한다.
5. 을미조약 및 경인조약에 의거하여 한일 양국 백성 및 상행(商行)이 유구국과 아모국에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는 이후에도 보호된다. 이 권리에는 거주권, 여행권, 교역권, 광산 채굴권, 선박 항행권 등이 모두 포함된다.
6. 대한과 대일본은 유구국과 아모국을 번국으로 한 이후에도 서로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군대 배치나 요새 축성 등을 하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추진해야 할 필요가 생겼을 경우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7. 을미조약 및 경인조약의 예를 따라, 이 조약에서 명시하지 않은 부분에서 양국 간에 협의가 필요할 경우 상대국 조정에 서한을 보내 협의를 요청한다. 한일 양국은 갈등이 있을 때는 무력으로 해결하려 시도하지 않고 대화로 논의하도록 한다….. 』
조약문에 쓰인 문자는 당연히 한문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공치사나 고사를 인용한 어려운 문구 따위를 왕창 넣어 공연히 읽기 어렵게 만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문서, 그것도 계약문서라면 누가 읽더라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게 정리하는 게 최고니까. 각 조문이 의미하는 내용에 대한 부연설명 같은 건 굳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어차피 이미 다 아는 내용들이니까. 다만 1조를 보니 약간 쓴웃음이 났다. 이 문제를 두고 내게 접근해서 교섭을 시도한 다른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에서 천황 폐하의 복권을 지지해준다면, 그 대가로 북구주 3주를 계속 보유하도록 해드릴 수 있습니다.’
막부에서 붙여준 경호병들은 내 주변을 철통처럼 둘러싸고 허가받지 않은 이라면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나와 접촉하려고 기를 쓰던 존왕파 인사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 정확한 숫자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자기 신분으로 이 방벽을 뚫을 수 있는 이가 있었다. 하나는 일전에 언급한 이토 번주 나리아키였고,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나리하루(德川??)가 두 번째였다. 막부의 쇼군 다음으로 격이 높은 다이묘인 오와리 번주를 대체 누가 막겠는가. 하지만 나리하루는 나리아키만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본인은 내게 딱히 존왕파로서 할 만한 언사를 건네지 않았다. 나리하루가 데려온 수하 중 하나가 나한테 비밀스럽게 접근했을 뿐이다.
‘중요한 건 국가를 다스리는 대권입니다. 폐하께서 대권을 환수하시는 데 도움만 된다면 그깟 3개 주 정도는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군자의 고리는 옳은 것을 지키는 데 있지 않습니까?’
오와리 측에서 접근한 인사가 은밀히 건넨 이 제안은 존왕파 중에도 파벌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말이지 쉽게 할 수 없는 제안 아닌가. 북구주 3주를 지금처럼 우리한데 ‘빌려준’ 상황을 유지하겠다는 건지, 아예 양도하겠다는 건지는 확실히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의외로 배짱이 있는 놈이었다.
‘강항 공이 전한 학문이 우리를 일깨웠습니다. 그 인연을 보아서라도 도와주십시오.’
이놈은 우에스기령에 있는 강항의 신사를 언급하면서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문득 강항은 일본에 오래 살았으니 강항의 신사에 있는 초상화는 상희는 물론이고 이순신 것보다도 훨씬 묘사가 정확하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놈이 속한 파가 존왕파 중 다수라는 보장도 없고, 혹시 그렇다고 해도 나중에 그놈들이 약속을 뒤집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확실하게 우리 편에서 이이긍ㄹ 챙길 수 있는 상대인 막부와 손을 잡는 게 가장 이득이다.
2조는 양국 간의 경제 겨류를 좀 더 활성화하고자 하는 조문이다. 물론 다른 항구를 새로 연다고 해도 대부분의 배들은 이런저런 기반이 잘 갖춰진 기존 개항장으로 가겠지만, 다른 항구들이 새롭게 발전하는 계기는 될 수 있다. 3조 이후의 내용들을 보면서는 마음이 좀 아팠다. 2백여 년 전에 내가 유구와 아모국에 해준 보장이 사라지는 점이 아쉬워서다. 하지만 그때하고 사정이 달라졌으니 어쩔 수 없다. 아모국만 해도 그렇다. 설마 지금과 같은 못난 꼬락서니로 전락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만 해도 전쟁영웅인 석탈왜 밑에서 아모국이 뭉칠 수 있을 줄 알았다. 분명 인구로는 일본 측과 비교가 안 되지만, 아이누들이 단결하면 일본에 맞서서 자기들을 지킬 저오는 될 테니까. 정말로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로 아모국이 해놓은 일들을 보니 실망스럽기만 했다. 힘을 합치지도 못해서 지리멸렬한 상태로 살아가고, 일본 세력이 카게자키 씨와 미쓰이 상회를 앞세워서 자기네들 내부로 파고드는데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가 계속 지켜주려 해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만 접었다. 이 조약에 따라 아모국이 장차 일본 번국이 된다고 히도 적어도 원래 역사에서처럼 박해와 착취는 안 당할 테니, 그것만 해도 훨씬 나아진 게 아닌가. 문서 최하단에는 오늘 날짜가 적혔다. 연도 표기는 우리 쪽에는 광덕 원년, 일본 쪽에는 분세이(文政) 13년이다. 이제는 명나라 연호 따위를 억지로 써줄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게 양국의 연호가 문서에 적혔다.
논의 끝에 작성한 조약문 최종안을 꼼꼼하게 읽은 후 도장을 찍었다. 이번에 찍은 도장도 경인조약 때 조인에 사용했던 다. 이 도장도 그동안 사용한 흔적이 꽤 쌓여 120년 전보다 약간 낡은 티가 난다.
“태자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고생으로 인해 앞으로 우리 두 나라 사이에서 더 깊은 우정이 싹트게 되었으니 그 보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쇼군의 하나뿐인 친형제, 이에모토가 다가와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에모토는 쇼군가에 남는 대신에 전임 당주가 친자를 낳지 못해 데가 끊긴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됐다. 히토쓰바시는 쇼군가의 분가 같은 존재로, 영지는 있으나 다이묘는 아니다.
“고맙소. 우리 폐하께서는 대군을 마치 형제처럼 가깝게 여기고 계시니, 귀측에서도 부디 그 정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소.”
“물론입니다.”
조약을 체결했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배에 오를 수는 없다. 오사카에 두고 왔던 동진은 자기 혼자 요코하마까지 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체류를 마무리하는 절차는 거쳐야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송별연에 참가해야 한다는 소리다. 이미 쌓인 초대장만 해도 수십 개다. 주로 에도에 머무는 각 번의 번저에서 한번 왕림해 주십사 하는 식으로 보낸 것들이다. 여기 다 방문하려면 봄이 와도 안 끝날 것 같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소. 태자께서 에도까지 와주신 일은 우리 두 나라 사이에서 영원히 회자될 거요. 지난 두 달 동안 에도성에 머무신 것만 해도 기쁜 일이니. 용무를 다 마치고 돌아가시는 귀로가 안전하시기를 신불께 기원하겠소.”
이에츠구는 여기에 덧붙여 한양 가는 길에 자기 아들을 좀 챙겨달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유구에 들렀다 가는 거야 이미 알고 있지만, 나와 동행하는 것 자체가 아들인 무네타케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쨌든 이번 일본 방문에서 해치워야 할 주요 과업은 이로써 전부 끝났다. 유구에서 할 일도 어서 해치우고 한양으로 돌아가야지. 날 기다리는 사람들 앞으로, 내 자리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