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785
4부 169화(1785화)
7.
우리 유구첨사진에 속한 함선과 군사들이 총동원되어 열린 환영식은 내 예상을 벗어나는 대규모였다. 나하 항구 앞바다에 크고 작은 함선 30여 척이 늘어서고, 예포 포성이 바다를 뒤흔들 자 4천여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뱃전에 늘어서서는 나를 향해 환호를 올렸다.
“태자 전하 천세!”
“천세! 천세!”
사실상의 관함식이다. 덕분에 눈앞에 늘어선 우리 배들을 뿌듯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본국이나 대남도, 누손주 등에는 2천 톤을 넘어가는 대선도 여러 척이다. 하지만 일전에 언급했듯이 유구첨사진에서는 가장 큰 배가 7백 톤급 중선이다. 유구를 지나치게 위압하지 않고 일본이 지나치게 경계하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타협의 결과다. 다만 크기가 작을 뿐이지 전력도 약한 건 아니다. 배치한 함선 중에서 8척은 선체 전체를 장갑판으로 덮은 기갑선이고, 나머지 배중에도 선체 양 측면에 기동성을 저하시키지 않을 수준으로 장갑판을 붙여 방어력을 강화한 배들이 여럿이다.
사열 분비를 마친 함대 선두에는 첨사 좌선인 유린(有隣)이 있었다. 나를 마중하러 나온 두 척과 같은 1등 중선으로, 이 배도 선체에 1치두께 철판을 두르고 그 위에 옻을 칠했다. 거, 저 옻칠만 보면 나대용 생각이 난단 말이지.
이 배를 타는 유구첨사도 하와첨사와 마찬가지로 정3품 참장이다. 하지만 유구 족이 훨씬 본국에서 가까울 뿐더러, 휘하에 거느린 전력은 육상전력까지 포함하면 거의 하와첨사진의 4배에 달한다. 고로 실질적인 위세는 유구첨사 쪽이 더 강하다.
“어서 오시옵소서, 태자 전하. 곧 오시리라는 연락을 받고 손꼽아 기다렸사옵니다.”
“오랜만이오, 이 첨사.”
유구첨사 이희성은 하와첨사 이희권과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8대손이다. 다만 이희권은 이순인의 장남 이회의 후손이고, 이희성은 내 사위였던 덕수위 이면의 후손이었다. 양 가문은 많이 멀어지기는 했지만 같은 충무공파에 속한 후손으로서 무척 가깝게 지낸다. 이희성과 안면을 익힌 건 북경에 다녀와서 본국에 있는 동안이었다. 그때 태황은 나한테 일본 출장 준비를 시키면서도 이 관청 저 관청에 드나들며 신하들 얼굴을 익히고 각 관청이 맡은 업무를 익히게 했다. 겉핥기라도 좋으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아두라는 거였다.
나야 그런 거 안 해도 어느 부서 업무든지 눈감고도 처리할 수 있지만, 대놓고 그런 티를 낼 수도 없으니 시키는 대로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밀고 다녔다. 그리고 삼군부에서 참모로 근무하는 이희성을 만났다. 이면의 후손이라는 건 곧 내 피, 장조의 피가 섞인 후손이라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무려 8대손이라 내 피는 거의 안 남아있겠지만, 내 머릿속에 이면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 보니 친근한 감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만난 이희권보다 조금 더 반가웠다.
장조 때 내 친손자였던 정일한을 만나고서도 내 손자라는 게 도무지 실감이 안 나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큰 차이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사람 간에는 직접 만나서 관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긴 한 모양이다.
“언제 여기로 온 거요?”
“이제 한 달이 되었습니다, 전하.”
겨우 한 달 동안 있었던 것 치고는 아주 기강을 확 잡았구먼, 배는 완벽하게 손질돼 있고 군사들은 자세가 아주 정연하다. 내가 조정에서 대비 태세를 검열하러 나온 경차관(敬差官)이었다고 해도 트집을 잡을 게 없을 만큼. 겉으로 보니 선체만 정비한 것도 아니다. 옮겨 타서 갑판에 올라가 보니 돛과 아딧줄에 화포까지 완벽하게 손질해놓았다. 선체 안에 있는 증기기관도 마찬가지다.
전체적으로 둘러본 인상은 이순신을 떠올리게 했다. 이순신이 왜란 직전에 여러 수영의 수사직을 다 맡아 죽 돌면서 수군 전체 분위기를 쇄신하던 그 시절을 보는 듯하다.
‘군사들이 피 좀 말랐겠구먼.’
중종 때도 덕수 이씨 출신 군관들은 대체로 깐깐하고 엄격했다. 물론 본성이 그런 이들도 있었지만, ‘충무대왕의 후예’라는 부담감 때문에 의식적으로 이순신처럼 행동하다가 그렇게 틀이 잡히는 사례도 흔했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평소에 장비를 잘 손질해두지 않았다가 필요할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기계를 쓰지 않는 범선이라면 아예 작동하지 않을 일은 없다. 하지만 증기기관은 정비가 제대로 안 되어있으면 사고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 기관이 폭발하거나 석탄 창고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배가 침몰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종종 일어나는 사고다.
“기묘년의 변 같은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소관이 맡은 수영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기묘년의 변’이란 11년 전인 원평 37년(1819) 기묘년에 일어난 대한 해군 사상 최악의 사고를 가리킨다. 누손주에 막 배속된 남부통제영 소속 2등 대선 한 척이 느닷없이 터진 화재로 인해 항구에서 정박 중에 전소되면서 백여 명 가까운 인명피해가 났다. 군기대가 수사한 끝에 밝혀낸 사고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관리 부실에 따른 실화(失火)였다. 갓 건조한 최신 전함이 어처구니없이 날아갔으므로 보고서를 받아 든 조부는 당연히 노발대발했고, 선장부터 남부수군통제사까지 줄줄이 모가지가 날아갔다.
그 사건은 내가 각성하기 3년 전 일이라 나중에 간접적으로만 접했지만, 조부가 화를 낼만 한 일이긴 했다. 해군총사령관 격인 대한수군통제사와 삼군부 도총사가 자리를 지킨 것만 해도 다행일 지경이다. 이회성의 태도를 보니 적어도 유구첨사진에서는 그런 황당한 사고가 터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돌아가서 태황에게도 그렇게 일러야지.
“그럼, 이제 항구로 들어가세나. 유구인들이 조바심이 난듯하군.”
와글거리는 사람의 무리가 여기서도 보인다. 환영 준비가 아주 성대한 듯하다. 내가 전할 소식을 생각하니 저기 나온 사람 숫자만큼 내 양심에 짐이 더해졌다. 제기랄, 정말로 기분 참 무겁구먼.
8.
항구에 들어오기 전부터 무거워졌던 내 기분은 육지에 오르자 더 무거워졌다. 맞닥뜨린 상대가 내게 보인 지나칠 만큼 공손한 태도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태자 전하.”
작년에 국상을 맞아 급히 귀국할 때 만나고 한양에서도 만난 유구 황태자 상육이 내 앞에 서서 허리를 깊게 숙였다. 주변에 보는 사람만 없으면 바닥에 엎드리기라고 할 기세였다.
“예도 지나치면 비례가 되오. 그만 일어나시오.”
내가 도리어 당황해서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이며 상육을 달랬다. 아니, 아직은 양쪽 다 태자니까 맞절만 해도 충분할 텐데 이거 너무 급발진 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대국의 태자께서 직접 오셨는데 소국의 사람으로서 어찌 소홀히 대하겠습니까. 마땅히 올릴 수 있는 예라면 무엇이든 다 함이 옳습니다.”
중종 시절이나 지금이나 유구 황실에서는 우리를 대할 때 ‘상국(上國)’이라는 말은 절대 쓰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하는 모습을 보니 그게 무슨 차이가 있나 싶다. 형식적으로 단어 한두 개 안 쓴다고 해서 실질적인 속국 노릇이 달라지는 게 뭐 있는지. 그래도 예전 같았으면 내가 부담을 크게 느낄 일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정말로 마음의 짐이 무겁다 보니 내 부담이 더 크게 느껴진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고맙소.”
상육이 안내하는 대로 걸어가니 또 가마가 십여 대나 놓여 있었다. 예전에 성친왕 시절에 여기에 와서 탔던 것과 거의 똑같이 붉은 비단과 금박으로 장식된 가마를 보고 내가 발길을 멈추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상육이 급히 나서서 해명했다.
“어서 타십시오. 전하와 같은 귀인을 모시기에는 낡고 초라하지만, 저희 유구에 있는 가마 중 가장 괜찮은 것입니다.”
“아,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없겠다 싶어서 입을 다물고 그냥 가마에 올랐다. 한양에서는 거의 퇴출되다시피 한 가마를 이웃한 다른 나라에서는 방문할 때마다 타게 되니 이것도 나름대로 기분이 묘해지는 부분이다.
‘슈리성까지 가는 길은 상당한 오르막인데 가마꾼들이 힘들겠구나…..’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가마꾼들이 우렁찬 구령과 함께 번쩍 일어섰다. 그런데 가마가 출발하는 모습을 보니 영 이상했다. 내 가마가 왜 가장 선두로 나서는데?
“이봐, 멈추어라. 너희 태자께서 앞장을 서셔야지, 어찌 나를 태운 너희가 앞서 나가려고 하느냐?”
이용하는 탈것이 가마건 마차건, 맨 앞에 가는 건 가장 격이 높은 사람이다. 신분이 낮을수록 뒤에 서는 게 당연하다. 암살 방지용으로 똑같은 가마나 수레 여러 대를 한꺼번에 쓸 때도 있긴 하지만 – 진시황 시절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방법이다 – 그렇다고 신분이 낮은 사람을 앞에 세우지는 않는다.
태황의 계획에 따라 유구를 번국으로 내리게 되면 당연히 내가 상육보다 더 윗줄이 된다. 하지만 아직 안 하지 않았는가. 일본과 합의를 보긴 했지만, 그 결과를 유구 측에 통보하고 인정하게 하는 절차가 끝나지 않았다. 아직은 유구도 황제국이라는 이야기다. 이럴 때는 상육의 가마가 주인 된 도리로서 앞서 나가며 선도하는 게 예의다. 내 가마가 앞서가는 건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급히 가마를 세우려는데 상육이 급히 달려왔다.
“아닙니다, 전하. 마땅히 전하께서 앞서가셔야지요. 어지 제가 대국에서 오신 귀한 손님을 뒤에 오시도록 하고 태연하게 앞서가겠습니까?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전하를 슈리로 모시지 않고!”
뒤쪽의 명령문은 유구어였다. 태자의 지시에 입을 모아 대답한 가마꾼들은 급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방석에 몸을 기댔다. 성에 도착한 뒤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9.
“대한의 태자 전하를 모십니다!”
가마를 타고 슈리성에 도착하니 내 눈앞에는 예전에 성친왕으로 찾아왔을 때보다 거창한 환영행렬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무 관원, 궁인, 병사들까지 해서 천 명은 족히 모인 듯 했다.
“전하를 슈리에 모시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자, 이쪽으로 드시지요.”
나보다 뒤쪽에서 가마를 내린 상육이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와 안내를 시작했다. 어느새 내 옆에 달라붙은 하진교가 내게 속삭였다.
“전하. 어째 유구 태자가 전하를 모시는 모습이 저희 왕궁에서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그저 접대 규모가 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분명 유구는 아직은 우리와 같은 급의 나라라 할 수 있건만, 정식으로 신속한 번국 왕실보다 더 눈치를 보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진교도 그동안 여기저기 다니며 쌓인 경험이 있으니만큼 그 정도는 눈에 들어온다는 거다. 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하진교는 하와국 건국 이래 가장 외교 경험이 풍부한 왕이 될 듯하다. 사실 그동안 하와국은 외교라고 할 만한 걸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겨우 우리 본국과 연락하는 정도를 가지고 외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미국 영사관도 들어섰고, 갈수록 태평양으로 들어오는 서구 세력의 움직임도 늘어날 거다. 그걸 생각하면 하진교가 이렇게 경험을 쌓는 건 확실하게 장차 하와국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이번 유구건만 해도 하진교는 요점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 그렇게 몇 달을 따라다니면서 모를 수도 없지 않은가. 유구가 우리 번국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반색하면서 대뜸 꺼낸 말이 잊히지를 않는다.
“그럼 유구국이 넷째 번국인 겁니까?’
제1 번국 하와국, 제2 번국 술루국, 제3 번국 조홀국에 이은 넷째 번국이냐는 소리였다. 하진교는 ‘중종께서 처음 방문하신’ 하와국이야말로 여러 번국 중 첫 번째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당장에 디에고가 반대하고 나섰다. 황실의 피를 받은 술루국이야말로 대한이 거느리는 여러 번국 중 가장 앞에 선다고 말이다.
“전하께서는 누가 위라고 보십니까?”
“…..모르겠다.”
이 문제는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답이 다를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마음껏 언쟁을 벌이도록 선실에 놓아두고 혼자 갑판으로 나가버렸었다. 어떤 결론을 내든지 둘이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신경을 껐다.
그때 오간 이야기가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이미 자기네가 번국이 된 것처럼 구는 상육의 태도를 보았기 때문일까. 이놈들, 아무래도 한양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은 게 아닐까? 유구 신속 같은 중대한 문제는 기밀을 유지하는 게 맞다. 하지만 태황은 경솔하게 함부로 입을 놀렸고 그 탓으로 도성 안팎에 소문이 퍼졌다. 그게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 당연히 유구 황실도 그 소식을 들었으리라. 도성에는 유구 공사관이 있지 않은가.
비록 공식 발표로 부인하기는 했으나, 유구 측에서 그 부인 발표만으로 안심할 가능성은 적다. 2백 년 동안 거인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눈치가 있지 않은가. 설마 상황을 모르겠는가. 일본에 어떤 연유로 가시느냐고, 무슨 용무이신지 제발 알려달라고 청하는 유구 관원들의 방문이 내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있었다. 그걸 고려하면……지금 상육의 이런 태도는……
‘체념하고 마음을 정했나 보군.’
대국의 손짓 한 번에 소멸할 수 있는 소국의 처지를 인정하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황제 지위를 포기하고 우리 번국이 되기로 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선뜻 앞자리를 내게 양보하고 계속해서 낮은 자리에 있기를 자처하는 게 아니겠는가. 유구 측에서 무릎을 꿇을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럼 남은 과정을 최대한 부드럽게 진행해 보자고 생각하면서 상육의 안내를 받아 궁궐로 들어갔다. 성친왕 시절, 상희와 함께 이 문을 들어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