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01
4부 185(1801화)
18.
태황의 자숙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백부와 숙부들을 불러들여서 한바탕 굿을 벌이더니 –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권씨 덕분에 그날 바로 알았다 – 그 며칠 뒤에 바로 밤외출을 재개했다. 호위를 맡은 무예별감 두 명만 거느리고 말이다. 무예별감은 무종 시기부터 있었던 오래된 직책이다. 원래 역사에서는 이게 조선 후기에나 생긴 관직이었나 그랬을 텐데…..내가 출궁할 때 호위를 맡길 인력이 필요해서 선전관청 소속 무관을 증원하고 무예별감(武藝別監)이라고 명명했었다. 첫 무예별감이 장호석이었던가?
그 뒤로도 많은 무예별감이 나를 비롯해 여러 임금의 호위를 맡았다. 선전관청 소속만이 아니고 다른 군영에 속한 무관들도 무예별감 직책을 받곤 했다. 조선의 특색, 반란을 막기 위한 군권 분산 정책 덕분이다. 지금은 친위대, 시위대, 백위대의 세 금군 군영에서 선발한 최정예 무관들을 무예청으로 편성하고 이들에게 무예별감의 직책을 준다. 무예별감은 금군의 정예 중의 정예인 셈이다. 현재 숫자는 120명쯤 된다.
‘그만한 호위라면 종성순을 만나도 당하진 않겠지.’
그때 일을 냉정하게 돌이켜 볼 때, 종성순이 그렇게 뛰어날 검사는 아니었다. 생각도 안 한 기습이었던 데다 상희 문제 때문에 내가 정신이 혼란스러웠고, 그놈이 제정신이 아니라 무지막지한 힘을 낸 탓으로 당했을 뿐이다. 나도 분명히 칼을 빼서 막기는 막았었다고.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칼이 호신용 창포검이 아니라 제대로 된 환도기만 했어도 그렇게 무기력하게 베이지는 않았으리라. 그 딱 한 번만 제대로 막았으면 그 자리에 있던 군사들이 종성순을 저지했을 테니 죽지도 않았을 테고.
하여간 그 지나간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지금 꺼내 봐야 아무 의미 없다. 그러니 괜한 미련은 이쯤 하고 버리고, 지금 일에나 신경을 쓰자.
“설마 누가 폐하를 해하려고 들겠습니까, 혹 그런 정신 나간 놈이 있을까 봐 무예별감이 두 사람이나 따라다니지 않습니까.”
김좌근은 그 자신이 태황의 밤나들이에 자주 따라다니는 동료다. 그렇다 보니 태황 옆에 있는 무예별감들의 실력도 잘 알았고, 당연히 아무도 태황을 해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나는 김좌근과 생각이 다르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는가.
“칼이나 활을 겨누는 대신에 폭탄을 던지거나 불을 지른다면 폐하 곁에 무예별감이 붙어 있은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내구.”
순도가 높은 고성능 군용화약은 시중에 유통되지 않는다. 하지만 민간에서 직접 제조해서 쓰는 저질 화약이라고 해도 양만 많이 넣는다면 사람 서넛 잡을 정도 위력의 폭탄은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그런 걸 터트린다면…. 경호가 의미가 없지. 이제껏 대한에서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노리고 폭탄을 터트린 사건은 없었다. 그 이유야 뭐…..딱히 없다. 원래 역사에서도 구한말의 민승호 폭살사건 이전에는 그런 테러가 없었으니 같은 이유겠지.
폭탄이 부담스럽다면 기생집 같은 곳에 있을 때 불을 질러 버리고 화재로 위장하는 간단한 방법도 있다. 태황이 움직이는 동선만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그게 폭탄보다 더 확실할 수도 있다. 훨씬 쉽기도 하고. 내가 이런 걸 알고 있는 이유야 잠행하는 임금이 어느 부분에서 가장 취약한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홧김이기는 해도 태황이 하는 게 뭣 같으면 제거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고.
“딸을 일본에 시집보내라는 명을 받았다고 해서 전황이 설마 그런 짓을 벌이지는 않을 것 같고.’
이건 입 밖에 내기 않았다. 증거도 없는데 숙부를 역적으로 의심하는 모습을 김좌근에게 보여줘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겨우 딸을 외국으로 강제로 시집보낸다는 이유로 역적이 되겠다고 나서는 건 너무 정신 나간 행동 아닌가. 이종은 양순한 사람이다. 속으로야 어떤 생각을 하건, 겉으로 드러내 폭발시키지는 못할 거다. 더구나 상대가 태황 아닌가. 이종은 임금이자 형을 상대로 활을 겨눌 사람이 못 된다. 아마도 기껏해야 자기 안방에서 욕이나 하고 말겠지.
‘그보다는 그저 자기도 임금이 되고 싶다는 쪽이 훨씬 합리적인 역모의 동기겠지.’
그게 누가 한 말이더라. 유방의 부하였던 영포가 반란을 일으켜서 진압하러 온 유 방한테 그렇게 말했던가. 번드르르 한 명분 따위 없는,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드러낸 반역 사유였다. 따지고 보면 태종도 그랬고, 세조도 그랬고, 예왕도 그랬다. 겉으로는 무슨 명분을 내세워 거병했건, 진짜 속셈은 자기가 보위에 앉고 싶다는 거였다.
백부와 숙부들도 아마 전에는 마찬가지 생각을 했을 거다. 태황이 원체 말종이라 태자위 폐위가 될락 말락 했으니 더 기대가 컸겠지. 뭐 제대로 돌아가는 머리가 있다면 지금쯤은 그 꿈을 다 접었겠지만.
“전하께서 이토록 든든하게 이 나라의 근본을 세우고 계시는데 감히 누가 역적이 되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염려는 하실 필요 없습니다.”
김좌근은 굽실거리면서 내 비위를 맞췄다. 거참, 그래도 명색이 외숙인데 적당히 좀 하지. 아무리 지금 자기 관직이 정6품 외무부 좌랑밖에 안 된다지만 조카한테 너무 굽실거리는 거 아닌가. 왠지 거북해서 주제를 조금 돌렸다.
“내구께서는 왜 소왕 숙부께서 자청해서 쇼군과 혼사를 맺겠다고 나섰다고 보십니까?’
“그야 돈 때문 아니겠습니까? 안토부인의 전례도 있으니, 그쪽에서 혼수를 아주 두둑하게 준비해 오리라고 믿고 나선 거겠지요.”
그러고 보니 차차가…..엄청난 돈을 가지고 왔었지. 정확한 액수는 기억이 안 나지만, 무척 많은 돈이었던 건 분명하다. 동래에서 한양까지 오는 길에 고을마다 돈을 펑펑 뿌려서 관대하고 자비롭다는 평판을 얻고도 돈이 남았었으니까. 일본에서 또 계속 돈이 왔었고. 내가 알기로 소왕이 돈이 부족하진 않다. 출궁할 때 조부가 넉넉히 먹고 살 만큼 재산을 내준 걸로 안다.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4대 뒤, 종친 신분을 상실할 때는 분가할 때 받은 부동산은 모조리 내놓아야 하니 그전에 미리 대비하고 싶은 심리는 누구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설마 그 지참금을 군자금 삼아 역모라도 일으키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19.
무네츠구와 상육은 한양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 그리고 태황은 수시로 이들에게 한양을 비롯한 각지의 풍광을 구경시켜주겠다면서 대궐을 빠져나가 유람을 즐겼다. 그때마다 나는 꼼짝없이 편전에 나가서 대리청정으로 나랏일을 처리했다.
“국정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느냐?”
이 상황에 대한 태황의 변은 간단했다. 그리고 나는 태황이 새로 임명한 대신들과 마주 앉아 소리 없는 한숨을 쉬면서 산 같은 나랏일을 처리해야 했다.
“국상, 그 문제는 이렇게 처리하면 어떻겠소.”
“태자 전하의 뜻은 알겠으나, 신은 그 문제에 관해 다르게 생각하옵니다.”
새 국상은 좌참정대신이던 남공철이 그대로 올라왔다. 이 양반도 올해 나이가 예순일곱이 된 사람인지라 그다지 오래 재직하지는 못할 것 같지만, 태황은 별 망설임 없이 남공철에게 국상 자리를 맡겼다.
“전하, 이 문제는 국상의 뜻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예무대신 홍의직이 남공철의 편을 들었다. 조부 시절에 예무대신으로 취임하여 무려 77세가 되도록 그 자리를 놓지 않았던 전임 예무대신 한숭인이 드디어 사직하자 그 자리에 대신 올라온 노인이다. 그래도 67세니 한숭인보다는 한참 젊다.
“아니옵니다, 전하. 신은 전하의 뜻이 옳다고 생각하옵니다.”
내 큰 외숙, 김유근이 아주 당당하게 내 편을 들었다. 김유근은 예상대로 이번에 대신으로 영전하긴 했는데….무려 내무대신을 제수 받았다! 11명에 달하는 각부 대신 중 서열 1위라고 할 수 있는 내무대신 자리를 처남에게 주다니, 이건 정말 태황의 배려라고 해야 할 일이다.
“신이 생각하기에도 전하의 뜻이 옳사옵니다. 뜻대로 진행하소서.”
이쪽은 내 장인 권세직이다. 태황은 권세직에게는 재무대신 자리를 주었다. 조정 중신 중 가장 실세라고 할 수 있는 두 자리를 외척이자 내 측근들에게 내준 셈이다. 이는 나쁘게 보면 외척이 권세를 잡게 해주는 거나 다름없는 조치다. 하지만 수시로 여기 외서 대리청정을 맡을 내 입장에서는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양팔이 생긴 셈이었다.
다른 대신들이라고 뭐 특별히 반항적이거나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태황은 새로 묘당에 사람을 뽑으면서도 새로운 인재를 뽑아 획기적인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기존 신료 중에서 연공서열이 높은 이들을 순서대로 위로 올렸다. 참으로 무난하면서 게으른 인사였다.
무능한 이들은 아니다. 아예 무능하면 그 자리가지 올라오지도 못하니까. 하지만 그동안 해온 바에 따라 굳어진 자기 방식들이 있는 사람이 태반이라서 내 말을 잘 안 듣는 이들이 많았다. 내가 아무리 평이 좋다고 해도, 이 노인들에게는 그래봐야 아직 어린애인 거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사람을 실권을 쥔 요직에 둔 건 정말로 태황의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정식으로 즉위한 것도 아닌데 조정 전체를 내게 맞춰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확실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 두 개만 내게 맞춰놓았으리라.
태황이 그동안 나한테 적립한 불만과 짜증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앉혀 나를 돕게 한 건 확실하게 내게 도움을 준 일이다. 물론 이것도 자기를 위해서 한 일이지 나를 위해서 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고마워해야 할 건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태황이 내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 한 일이 하나더 있다. 우리 대한에서는 태자 앞에서 신하들이 ‘소인(小人)’이라고 자칭하는 게 관례였다. 헌데 태황이 칙명으로 명하길, 대리청정을 맡은 태자 앞에서는 신하들이 ‘신(臣)’을 칭하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래 이 대한에서 휘하에 신하를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태황 한 사람뿐이다 태자라고 해도 절대 안 된다. 만약 태자에게 ‘신’이라는 칭호를 쓴다면 태자를 부추겨 역모를 꾸미려는 반역도로 간주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황은 그 관례를 깨고, 대리청정에 임할 동안은 신하들이 나를 대할 때 ‘신’으로 자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리청정은 문자 그대로 임금 대신에 국정을 담당하는 기간이니 신하들의 주군으로서 대우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런 식으로 수업과 대리청정을 반복하던 와중에 귀한 손님들이 떠날 날이 왔다. 그리고 당연히 성대한 송별연이 있었다.
20.
태황은 경회루에서 아주 크고 화려한 연회를 열어 일본과 유구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들을 환송했다. 이들이 한양에서 보낸 백여 일은 무척이나 길고도 화려한 나날들이었다. 여기는 나도 한몫 끼어 즐길 수 있었다.
“세사는 우리 산하를 둘러보면서 어디가 가장 인상 깊으셨소?”
“임금께서 직접 안내하신 금강산의 절경이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금강산이 멋지기는 하지. 정작 나는 한 번도 못 가봤지만. 백두산, 한라산은 갔어도 아직 금강산은 못 가봤다. 과거로 와서 네 번재 생인데도 말이다. 무종 시절, 명나라에서 시신으로 온 조선 출신 환관들이 금강산 유람을 요구해서 준비를 잔뜩 갖춰 보내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게 내가 금강산에 관해 가진 가장 특별한 기억이다.
그대는 한양에서 금강산가지 열흘쯤 걸려서 말을 타고 갔다. 지금은 동북선 열차를 타고 철원을 거쳐 원산까지 가고, 거기서부터 배를 이용해서 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게 보통이다. 그게 가장 편하게 금강산에 가는 길이다. 원래 세계에서는 철원역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가 따로 부설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쪽 세계에서는 그 노선이 아직 없는데, 내가 즉위하면 그쪽 노선도 만들면 좋을 듯하다.
“정말 장관이었지요. 그래도 일본에는 금강산에는 비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여러 명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우리 유구에는 그런 산이 아예 없어서 이번에 정말로 새로운 경지를 보았습니다.”
상육이 거들었다. 요즘 상육이 태황 앞에서 보이는 태도를 보면 슈리에서 내게 ‘제발 이 나라가 국체를 유지하게 해 달라’라고 애원하던 그 사람은 어디에 갔나 싶다. 아주 철저하게 아첨군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함께 다녔으면 좋았을 것을.”
일만 하지 않고 나도 좀 놀고 싶었다는 말을 간단히 한 뒤, 태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황이 공들여 준비한 연설이 이제 곧 시작될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술기운이 살짝 오른 태황이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일찍이 장조께서 우리 세 나라 사이의 인연을 굳게 다지신 이래로, 일본과 유구는 우리 대한의 충실한 이웃이었소.”
이런 서 두를 내세우면서 거의 1각에 걸쳐 이어진 연설의 요지는 앞으로도 세 나라가 이 좋은 관계를 잘 이어가자는 거였다. 뭐, 좋다면 좋은 이야기다. 유구가 다른 둘에게 일종의 배신을 당했다는 부분을 제쳐놓고 생각한다면. 유구를 제물로 삼아서 일본과의 관계는 더 친밀해지긴 했다. 태황이 계획한 국혼도 결국 우리가 유구를 흡수하는 대신 일본과 더 든든한 고리를 갖고자 하게 된 거였으니 말이다.
그 국혼에 관한 실제적인 논의는 무네츠구를 태워 갈 배를 몰고 온 막부의 로주, 미즈노 타다나리(水野忠成)하고 했다. 세사인 무네츠구는 아직 그런 교섭을 수행할 역량도 권한도 없으니까. 태황과 타다나리가 몇 차례에 걸쳐 논의한 끝에 합의한 결과는 이랬다.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있으니, 양국의 혼인은 내년 좀에 한다. 양국 신부의 지체가 차이가 있으니만큼 히로시마 번주 요시하루의 딸이 먼저 오고, 그 배로 이종의 딸이 일본에 건너가 혼례를 치른다. 양국 모두 신랑은 상대국에 가지 않는다. 혼례식을 치른 뒤에는 처가 쪽 나라에 인사를 갈 수 있다. 다만 그 시기는 부부의 건강을 비롯한 제반사정에 따라 늦어질 수 있으므로, 그 일시를 미리 정하지는 않는다.
그 외에 양국의 동맹과 관련된 추가적인 조약 같은 건 없다. 이번에 내가 가서 맺은 2차 경인조약으로 충분하다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건너오시면 같이 호랑이라도 잡으러 가시지요.”
“감사하오, 세자.”
어느새 친해진 하진교는 무네츠구와 호랑이 사냥 약속을 잡고 있었다. 태황이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무네츠구를 사냥터에 데려가지는 않았는데, 무네츠구는 그게 퍽 아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별수 없지 않은가? 하와국 왕자가 호환을 당한 일로도 그 곤욕을 겪었는데, 만에 하나라도 무네츠구가 호랑이나 곰을 만나 다치기라도 하면 엄청난 문젯거리가 될 테니까.
그래도 무네츠구도 홍제원에 가서 호랑이를 직접 보기는 했다. 그리고 한양에 왔다 가는 기념으로 태황이 호랑이 한 마리를 선물하기로 했기 때문에 좋아 죽으려고 하는 중이다. 그 선물 받은 호랑이와 별개로 사냥을 한번 해보고 싶기는 한 모양이지만.
“저희 유구에서도 태자께서 베푸신 후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상육이 조용히 내 잔에 술을 따랐다. 태황을 대할 때와 다른, 예전 슈리에서 처럼 점잖고 소극적인 태도였다.
“두고 가는 아우를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이 많습니다.”
“염려 마시오. 내 잘 돌보리다.”
상육의 동생 상돈은 한양에 온 지 한 달쯤 지나고서야 실은 자기가 여기에 남을 볼모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연히 크게 실망할 줄 알았는데….이놈이 정말 긍정적인 성품이었다. 글쎄, 자기가 잘해서 태황의 눈에 들면 형 대신 중산왕으로 봉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더라.
‘동생의 속을 모르는 상육이 불쌍하구먼’
굳이 이런 이야기를 상육에게 들려줄 필요는 없으니, 그저 좋게 답했다. 어차피 상육은 태황의 사돈이 될 터, 상돈에게 왕위를 빼앗길 걱정은 없으니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걸고 맺은 혼약입니다만……”
상육이 쓴웃음을 지었다. 태황은 정말로 태어나지도 않은 상육의 왕자와 중전 소생 막내 공주를 혼인시키자고 약속했다. 그 아이는 올해 세 살이다. 과연 적당한 시일 안에 상육이 그 아이하고 혼인할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태황은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너무 늦으면 파혼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아예 유구하고 국혼을 안 하겠다는 말은 아니고, 상육이 아들을 늦게 낳아서 나이 차이가 너무 벌어지면, 이번 약혼은 파기하고 그 밑으로 새로 태어날 다른 옹주를 붙여주면 된다는 태도였다.
뭐, 상육으로서도 이번 혼사에 불만은 없어 보였다. 대한의 적통 공주를 며느리로 데려갈 수 있다면 유구 왕실의 지위는 확실히 탄탄해지리라고 안심하는 표정이다. 다만 중전은 이 혼약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었다. 문안 때 말하기를, 딸을 가까운 곳에 두고 싶었다고 했다. 뭐 그거야 상희도 마찬가지였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그래도 유구 정도면 비교적 가까우니 마음만 먹으면 자주 왕래할 수 있을 거다. 며느리가 친정에 좀 가겠다는데 상육이 제지할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오늘 연회는 내가 맡은 이번 외교 사업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행사인 셈이다. 제법 잘 정리한 듯하여 괜찮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