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06
4부 190화(1806화)
12.
에도에 보낸 서한의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조정은 평소와 같이 돌아갔다. 그 말인즉슨, 태황의 책상 위에 쉴 새 없이 쌓이는 행정문서들을 내가 받아서 읽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동안 태황은 보료 위에 편히 누워있었다.
“요즘 내가 손수 정사를 돌보고는 있으나, 조만간 네가 물려받아야 함은 명백하다. 그러니 편전에서 회의를 참관할 뿐 아니라 올라오는 문서들도 모두 읽어봄이 마땅하다.”
그리고 또 그놈의 지긋지긋한 ‘평균수명’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성 주민의 평균수명이 약 40세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올해 서른여덟 살이 된 자기도 슬슬 내게 자리를 넘겨줄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성 주민의 평균수명 40세는 46세였는데, 내가 중종으로 75세까지 살고 영이가 58세, 조부가 65세를 살면서 평균을 좀 더 끌어올렸다. 아, 이쪽은 만 나이 기준이다.
그러니 태황은 적어도 앞으로 10년 이상은 더 살 게 분명하다. 건강 상태를 보면 20년도 너끈히 살 것 같다. 그런 인간이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구는 꼴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아바마마께서는 만수무강하실 텐데 어찌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아직 손자도 못 보셨는데요. 보위를 물려받을 태손을 어서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식적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런 자리에서 ‘아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이다. 젠장, 그러고 보니 이 인간을 아버지로 두고 살아온 세월이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그러다보니까 이런 입에 발린 인사말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었다.
“태손이라. 후손이 생기는 건 다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니 내가 서두른다고 될 게 아니다. 너인들 내가 낳고 싶다고 생각해서 낳았겠느냐? 자식이 언제 생길지, 아들일지 딸일지, 그 심성이 어떨지는 하늘의 뜻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따라 왜 또 자상한 아버지 같은 태도인가. 사람 마음 약해지게. 태황을 보는 내 감정은 참으로 복잡하다. 하는 짓을 보면 분명 천하의 개쌍놈이 맞는데….그렇다고 완전히 갱생할 수 없는 개새끼로 취급하기에는 또 이외로 본성이 최악은 아니다. 얼마든지 더 나빠질 수 있건만, 자기 나름대로는 선을 정해놓고 행동한다는 느낌이다.
“너도 나이를 더 먹으면 알게 되겠지만, 인생은 일종의 연극과도 같다. 맡은 역할에 따라 살아가면 꿈과도 같이 지나가지. 너도, 나도 한번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지는 허상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남가일몽, 일장춘몽, 한단지옹이라는 말이 공연히 있겠느냐.”
태황이 거론한 세 고사성어 모두 ‘인생이란 꿈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주제를 가진다. 평소 내일이란 없는 거처럼 오늘만 즐기자는 태도로 살던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저 인간이 얼른 죽어 사라지길 바라는지, 마음을 고쳐먹고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길 바라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10년이라는 세월의 힘인지, 어느 정도 정이 들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네가 보위에 앉는 것도 하늘의 뜻이라, 그때가 과연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 고로 너는 당장이라도 보위에 앉아 나라를 이끌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이것도 읽거라.”
다음 순간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서류 무더기 하나가 또 내 앞으로 밀려왔다. 젠장, 좋게 생각하려던 거 다시 취소. 이 인간은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도 정떨어질 짓을 찾아내서 하는 재주가 있다. 한숨을 속으로 삼키면서 앞에 놓인 두루마리들을 한 권 한권씩 읽어나갔다. 그러던 중에 문득 낯익은, 하지만 근래 들어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색깔의 두루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겉은 비단으로 싸고 붉은 도장으로 ‘금(禁)’자가 찍혀 있다. 어, 이게 왜 여기 있어…..?
“손이 멈췄다. 읽어야 할 문서가 이렇게 많은데 왜 딴생각에 빠져 있느냐?”
태황이 자기 자리에 누운 채 핀잔을 줬다. 하지만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아, 아바마마. 그것이…..”
내 눈앞에 놓인 건 금위사 보고서였다. 도승선을 거쳐 보고되고 나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극비문서. 아니. 취소다. ‘나 외에는’이 아니라 ‘현직 임금 외에는’이지. 실제로 태황도 그동안 내게 숱하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도 금위사 보고서는 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문서가 섞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보지 못할 것이 섞여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두루마리 무더기 사이에서 금위사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묶은 끈을 풀지 않고 두 손으로 공손히 태황에게 바쳤다. 하지만 태황은 흠낏 고개를 돌리더니 금방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손을 내저었다.
“됐다. 그것도 펼쳐서 읽어라.”
“하오나 아바마마, 이것은 금위사…..”
“그것이 금위사 보고서인 줄은 어찌 아는고?”
입이 콱 막혔다. 그렇다. 나는 ‘이번 생에서’ 이걸 공식적으로 처음 본다. 그러니 이 검은 두루마리가 뭔지도 몰라야 한다. 그런데 ‘금위사 보고서’라고 정확하게 짚어내면서 태황에게 반환했으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헌데 태황의 반응도 내 예상 밖이었다.
“네가 그동안 나 몰래 금위사 보고서를 본 적이 있으니 그게 금위사 보고서임을 알아보는 것이겠지. 되었다. 상관없으니 펼쳐서 읽어라. 네가 금위사에 직접 명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보고서를 읽는 것뿐인데 그게 무슨 문제냐.”
금위사, 의금부, 어사대, 군기대 등에 대한 통제권은 군권에 이어 임금의 가장 큰 권한 중 하나다. 당연히 그쪽 계통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도 아주 중요한 기밀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태황은 서슴없이 내게 보라고 했다. 아무리 대리청정까지 했다지만 이건 미친 거 아닌가.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네가 보위에 앉아야 하고, 그때 네가 이것들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허둥댄다면 그만큼 큰 망신이 없다. 그러니 직접 명령을 내리진 않더라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현황은 알아두어라.”
내가 성이나 은이한테 후계자 수업을 시킬 때도 이런 식으로 금위사 보고서를 던져주지는 않았었다. 내가 먼저 보고 필요한 것만 알려줬지. 이건 관대한 건지 게으른 건지 모르겠다. 태황의 성격 자체가 내 기준을 너무나 크게 벗어난 존재라, 도저히 평가하기가 어렵다. 하여간 보라니까 봐야지. 봉인을 풀고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딱히 특이하거나 긴급할 건 없는 사항들을 죽 읽어나가다 보니 문득 눈에 확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아바마마….이건 지금 바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곧 일본과의 사이에서 국혼을 치르게 될 소왕 이청의 집에 수상한 자들이 여럿 드나들고 있다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거, 역모 아냐?!
황위 계승권을 쥔 가까운 종친이다. 그런 사람의 집에 꾸준히 드나드는 이들이 있다. 그 수가 근래에 확 늘었다. 무슨 뜻이겠는가. 그 집에서 뭔가 꾸미고 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청은 조만간 일본 쇼군가와 혼맥을 맺는다. 지참금이라는 형태로 수중에 들어올 막대한 자금과 쇼군 가문과의 연계를 생각하면, 자칫 우리 내부의 폭탄이 될 수 있다. 혹, 이에츠구가 우리 ‘황가’가 아니라 ‘소왕가’를 연맹 상대로 생각한다면…..?
“아바마마. 중대한 일입니다. 어서 읽어보시옵소서. 지금 도성에서 역모가 진행되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소왕의 건 말이냐? 되었다. 알고 있다.”
“네?”
눈을 크게 떴다. 소왕이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도 그 수작을 그냥 내버려 뒀다고? 자식을 쇼군가에 장가보내겠다는 요청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대체 무슨 배짱으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랬더니 태황이 자리에 누운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작년부터 소왕의 집에 드나드는 종자들은 죄다 덜떨어진 반편이들이다. 실력으로 과거에 붙을 재간도 없으면서 분경이나 하러 다니는 것들이지. 그런 놈들이 조금 드나든다고 해서 무슨 위협이 된단 말이냐.”
분경(奔競)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벼슬을 얻고자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행동을 뜻한다.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는 표현 쪽이 현대 세계에서는 더 익숙했지. 성종 때 제정된 경국대전에서 분경을 금지하기는 했다. 그 뒤에 법이 몇 차례 개정되면서 금지 대상이 축소되었다. 이청과 같은 종친들은 실권이 없다 보니 되려 분경 금지 대상에 걸리지 않는다. 물론 분경이 금지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을 많이 모아도 되는 건 아니다. 유력한 종친이 패거리를 모아 난을 일으킬 위험은 언제나 있으므로, 주변에 사람을 모으는 종친은 언제나 금위사가 감시하는 대상이 된다. 무인지변이 남긴 쓰디쓴 교훈이다.
“아바마마,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 많이 모이면 뭔가 문제가 터질 소지가 있습니다. 국혼을 치르기 전에 만사를 깨끗이 하는 의미에서 조사를 명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일 없다. 소왕에게 몰려가서 알랑방귀를 뀌어대는 그놈들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이 도성에 있을 성싶으냐? 그 버러지 같은 놈들은 내게 쫓겨나니 그 쪽박을 채울 곳을 찾아 소왕에게 빌붙었을 뿐이다.”
소왕도 재산이 상당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일본 쇼군의 조카를 며느리로 들이기로 하면서 막대한 지참금도 받게 되었다. 그 소식이 세간에 퍼진 지도 벌써 1년이니, 그 국물을 핥고 싶은 자들이 그 밑에 모이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닌가. 태황은 아주 느긋하게 그렇게 말했다.
“모이는 자들이 조정이나 중추원의 고관들이라거나 오군영 장수들이라면 나도 불안하게 여겼겠지. 하지만 죄다 백두(百頭)의 한량들이 아니면 시중의 건달들밖에 없다. 늙은이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것도 제대로 출세하지 못한 자들뿐이더라.”
태황은 죄다 힘도 권력도 없는 자들이라며 코웃을 쳤다. 하지만 내게는 그 부분이 더 불안하게 다가왔다. 아예 벼슬을 받지도 못했거나 출사해도 고위직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던 이들, 그런 이들이라면 힘은 없을지 몰라도 원망과 반감, 복수심은 더 클 게 아닌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놈들이야말로 더 위험하다. 가진 것이 많은 놈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망설이지만, 가진 게 없는 놈들은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냥 생각대로 내질러서 폭발할 위험이 더 크다는 말이다. 하지만 태황은 여유만만이었다.
“네가 소왕이라면 지금 역모를 꾸미겠느냐? 자기 손에 군사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혹시 소왕이 미쳐서 대역을 도모한다고 치자. 그게 지금일 이유가 있느냐? 네 재산보다 세 배나 되는 지참금을 가져온 며느리가 도성 밖에서 혼례가 열릴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혹시 뭔가 일으키더라도 그 재산부터 일단 온전히 손에 넣은 뒤에 시도하지 않겠느냐?”
사람을 모으지도 않는다. 무기나 탄약을 모으지도 않는다. 소왕의 집에 병장기가 있기는 하지만 일가 사내들이 사냥 때 쓸 정도 분량밖에 안 된다. 그 정도쯤은 집마다 다 갖추고 있는 거라 역모의 증거로 볼 수 없다.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 자기들끼리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소왕에게 술잔이나 얻어먹자고 모인 놈들이 분명하니.”
“알겠사옵니다.”
‘
태황은 아무렇지 않게 취급했지만 나는 영 찜찜했다. 하지만 태황의 말마따나 이청한테는 딱히 역모를 시도할 동기도 없고, 하고 싶어도 일으킬 능력도 없는 건 맞아 보였다. 적어도 지금 내가 아는 바로는 말이다. 태황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이청이 정말 뭔가 구미고 싶다면 도쿠히메의 지참금이 자기 손에 들어오고 쇼군과의 사이에 고리가 생기기를 기다릴 거라는 그 말, 그렇다면 일단 지금은 별일 없으리라는 말이 된다. 어차피 태황이 괜찮으니 놓아두라는데 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조치는 아직 없다. 그러니 태황의 예측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13.
소왕의 집에 드나드는 놈들 문제와는 별개로, 태황이 쇼군과 벌인 2라운드, 배짱 튕기기 베틀에서는 태황이 또 승리를 거두었다. 혼례를 이틀 앞두고 도착한 쇼군의 편지, 이쪽에서 먼저 편지를 보낸 지 18일 만에 돌아온 그 편지는 태황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상례를 치르느라 혼례를 연기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생각하기에도 혼례를 연기하는 편이 옳은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번에 돌아가신 고창후는 장차 대한의 보위에 오르실 태자의 외조부님이 아니십니까. 마땅히 조의를 표해야지요…..」
어째 내용을 듣다 보니 기싸움에서 우리가 이겼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이에츠구가 답서에 적은 내용을 깊게 새겨보면 ‘상대편에서 실례를 범했음에도 너그럽게 받아들여 준 나야말로 진정한 군자’라고 자랑하려는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문론 근본적으로 양측이 지닌 격의 차이도 있다. 명목상으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한다고는 하지만, 각 잡고 격을 따져보면 태황의 격이 쇼군보다 높은 건 맞으니까.
슬쩍 고개를 들어 편전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여기 있는 중신 중 절반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표정으로 다 떠오르니까 알지. 하지만 태황은 모르는 듯했다. 그저 저쪽에다 혼례 날짜를 연기하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다.
“대군이 참으로 예의를 아는 사람이로구나. 감사하는 의미로 내 황양현주의 혼수를 좀 더 얹어주고, 경희궁에 있는 성혼사 일행에게도 재물을 내려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두 달 동안 혼례가 미뤄지면서 추가로 들어갈 성혼사 체류비 액수 때문에 울상이 되어있던 장인어른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아니, 우리 정인어른 너무 소심하신거 아닌가. 자기 딸이랑 엄마는 그렇게 괄괄한데 중간에 낀 장이어른만 왜 저럴까. 그나마 태황이 그 비용은 자기 내탕금에서 지출하겠다고 선언해서 장인어른이 졸도하는 결과는 피했다. 뭐, 내수사가 관리하는 자산 총액이 천만 냥쯤 되니 그 정도 비용은 사실 껌값이기는 하리라. 아, 이쪽 세상에 껌은 아직 없기는 하다만.
혼례가 연기되자 내 주변에서 가장 난처해한 사람은 큰외숙 김유근이었다. 소왕에게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나.
“그것뿐입니까. 대군가에 아쉬운 소리를 하시도록 하여 폐하께도 죄를 지었으니 너무나도 송구할 뿐입니다.”
“괜찮습니다, 내구. 당연한 일이니 너무 죄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일본 쪽에서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는가. 외숙부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안심하라고 했다. 전혀 폐가 되는 일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그래도 송구하옵니다, 태자 전하.”
“괜찮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뵈었을 때 둘째 외숙이 몸이 안 좋으신 것 같던데 지금은 좀 어떠십니까.”
“지금은 일어났습니다. 크게 힘들어하지는 않습니다.”
둘째 외숙 김원근은 전부터 그다지 건강한 편이 못 되었다. 그런데 급히 부친상을 치르게 되면서 무리했는지 몸이 더 안 좋아졌다. 자칫하면 외가에서 줄초상을 치를 판이라, 불안한 마음이 들어 김유근에게 둘째 외숙을 잘 부탁한다고 몇 번을 당부했다.
반대로 혼례가 늦춰져서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신부인 도쿠히메가 있다. 경희궁에 다녀온 비궁이 전하기를, 혼례가 미뤄지니 무척 안도하더라고 했다. 결혼으로 부담을 느끼기 전에 조금이라도 천천히 적응할 여유가 생긴 셈 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나도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별일 없이 지내다 보니 금위사 보고서를 보고 솟았던 이청에 대한 경계와 불안감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실제로 별다른 일을 벌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의심생암귀라고, 태황이 옳았는데 내가 공연한 사람을 의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내 의심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어느 날 소왕의 저택에 돌연한 불이 나서 막대한 피해를 내고 겨우 꺼졌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