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13
4부 197화(1813화)
3.
비궁이 낳은 첫아이가 딸이라고 해서 크게 놀랍지는 않다. 예전에도 처음 얻은 아이가 딸이었던 적은 있으니까. 중전 소생 첫째는 다행히 아들일 때가 많았지만, 후궁들은 딸을 더 낳곤 했다. 무종 때도, 장조 때도, 중종 때도 중전 소생의 첫째는 언제나 아들이었다. 물론 그중에서 장조 때 성이는 내가 아니라 경성군 시절에 태어난 애라서 나한테는 반쯤 의붓아들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적서를 나누지 않고 진짜 첫아이를 따진다면…..무종 때 황이와 중종 때 은이는 적장자면서 첫아이였다. 장조 때는 중전이 낳은 막내딸인 정혜공주가 진짜 내 첫아이였다. 이번 생에는 작년에 최씨가 낳은 딸이 첫아이다. 그렇게 보니 남녀가 반반이다. 어쨌든 이번 생은 처음으로 첫 적통 소생이 딸이다. 그래도 나는 별 상관없었다. 나이도 나나 비궁이나 둘 다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 내가 만 17세, 비궁이 만 19세 – 뭐 어떤가. 아들이야 천천히 낳아도 되는 거지. 결혼 7년 차라지만 전반기는 솔직히 어린애였잖은가. 다만 엄마인 비궁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겨우 낳은 첫아이인데 딸이라서 미안하다고 울면서,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애써 다독였다.
“밭에서 벼가 나고 보리가 나는 볍씨를 뿌리느냐, 보리씨를 뿌리느냐에 달린 문제지 밭의 토질과는 관계가 없소. 비궁이 딸을 낳은 것은 내가 딸이 될 씨를 그대의 밭에 뿌렸기 때문이니 원인은 나에게 있는 거요. 비궁이 죄스러워 할 필요가 전혀 없소.”
두 손을 꼭 잡고 위로해주니 겨우 권씨의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나갔다. 그리고 모두가 나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당연하면서 기운 빠지는 현실을 접했다.
“태자. 이 할미가 벌써 칠순이 다 되어갑니다. 태자가 혼인한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는데 이제 겨우 군주 하나라니, 언제쯤에나 증손자를 볼 수 있겠습니까? 이 할미는 과거 아들을 셋이나 낳았지만 남은 아들은 하나뿐입니다. 어서 아들을 낳으셔야 합니다. 그것도 많이요.”
조모는 내게 자식을 얻은 데 대한 축하보다는 ‘그래서 아들은 언제나 낳느냐?’는 재촉을 시전했다.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로서의 입장과 대를 이어야 하는 집안 어른으로서 가지는 입장은 꼭 일치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작년에 최 재인이 낳은 아이도 딸이었지요. 태자가 분발해야 합니다. 좋은 싹을 틔우려면 밭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씨가 중요해요. 그러니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단련하고 비궁과 후궁들에게 남편 구실을 충실히 하세요.”
그렇다고 태황처럼 밖으로 나돌면서까지 과하게 여색을 탐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염려도 덧붙었다. 아무려면 내가 그럴까. 내가 태황처럼 되는 게 무서워서라도 지금도 잠행을 나갈 때 색주가는 절대 안 들르는데.
“알겠사옵니다, 할마마마.”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숙인 뒤에도 조모의 걱정은 한참을 이어졌다. 혹시라도 이 황실의 대가 끊어질까 봐 걱정하는 줄은 알겠는데 적당히 좀 해줬으면 싶다. 내가 지금 서른일곱쯤 됐으면 모를까. 이제 겨우 만으로 열일곱 아닌가. 여유는 넉넉하단 말이다.
“괜찮습니다, 태자. 첫아이가 딸이면 어떻습니까? 두 분 양주가 아직 젊으시니, 다음에는 아들을 낳으실 겁니다. 그러면 된 거지요.”
중전 박씨가 보인 반응은 조모와 정반대였다. 대비전 – 경희궁에 설치된 대비전은 별도의 건물인 동궁, 태손궁과 달리 본궁 안에 있다 – 에 머물러 있던 조모와 달리 중전은 동궁에 직접 와서 비궁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해주고 칭찬까지 해주었다.
“세간에서는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고들 하지요. 정차 두 분께 큰 기쁨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중전마마.”
사실 말이 좋아서 새어머니고 시어머니지, 나이로 따지면 중전은 비궁에게는 언니뻘밖에 안 된다. 고작 5살 차이니까. 침대 옆에 앉은 중전은 비궁에게 네 번에 걸친 가지 출산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진짜 언니처럼 산후에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 작년에 나와 담판을 지은 뒤로 중전과 내 사이는 괜찮은 편이라, 자연스럽게 고부간도 사이가 좋은 편이다.
“이만 중궁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디 몸조리 잘하시고 편히 쉬세요.”
“감사합니다, 중전마마.”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중전의 미소가 순수한 축하의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아마 내가 속이 삐뚤어진 인간이어 서리라. 내가 아들을 얻지 못하면 제위는 동생들에게 넘어가게 될 가능성이 있고, 그러면 중전 소생인 용이와 전이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생기니까 말이다. 물론 꼭 동생들이 재위를 물려받는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그 녀석들의 아들 중 하나, 즉 조카 중 하나를 내가 입적해서 양자로 삼는 쪽이 가능성이 더 크다. 숙조가 나를 태제로 책봉한 게 되려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느 쪽이건 중전의 아들 또는 손자가 그 후보가 될 수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중전이 우리 부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설사 내가 아들을 낳더라도 자기 자식들과 내가 사이가 좋아서 손해가 될 건 없으니까. 그래도 그동안 중전이 보인 성품이나 행동거지로 보면 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도록 의원을 시켜 은밀하게 약을 쓴다거나 무당을 불러 저주한다거나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따위 효과도 불확실하면서 위험부담만 큰 시도를 하느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나으니까 말이지.
위험부담이 큰 모험을 함부로 시도하다간 작년에 소왕이 보인 것 같은 결과를 맞이한다. 중전이 바보도 아닌데 설마 소왕 같은 짓을 저지르겠는가.
“괜찮다. 괜찮아. 짐도 네 어미에게서 처음 낳은 자식은 네 누이였느니라. 하지만 곧바로 아들을 낳았고, 무려 셋이나 연달아 낳지 않았느냐.”
이 기분 나쁜 위로를 건넨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아니, 아무리 내가 결혼한 지 7년째에 접어들도록 아들을 못 낳아서 주변에서 걱정하도록 만들었다지만, 죽은 생모를 여기서 왜 언급해? 그것도 자기가 죽인 사람을?
“남녀를 결정하는 문제는 결국 손아귀에 숨긴 엽전의 양면과 같아, 쥔 주먹을 펼치는 그 순간까지 어느 쪽이 위로 올라올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아들을 얻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궁금하냐?”
실은 적혀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다.
“알려주신다면 감사히 듣겠사옵니다.”
“간단하다. 많이 낳아라. 엽전을 계속 허공으로 던지다 보면 앞면이 안 나올 수가 없듯이, 자식도 계속 낳다 보면 아들이 몇은 나오게 마련이다.”
“알겠…..습니다.”
엽전(葉錢)은 재질과 상관없이 금속제 주화를 가리키는 통칭이다. 본래는 모래를 굳혀서 제작한 틀에다 쇳물을 붓는 전통적인 화폐 주조 방식 때문에 붙은 이름이지만, 조폐 방식이 서양식 압인법으로 바뀐 지 오래인 지금도 주화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쓰인다.
“너도 나처럼만 하여라. 그러면 후사가 어쩌고 운운하는 꾸지람은 절대로 들을 일이 없을 테니까, 핫핫핫.”
그야 그렇지 태황의 아들은 지금 있는 숫자만 해도 아홉…..아니, 열 명이나 되니까. 작년 봄에 후궁들 뱃속에 들어있던 둘은 하나는 아들, 하나는 딸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뱃속에 둘이 들어있다. 아마도 태황은 이 대한의 역사에서 가장 자식이 많았던 임금이 될 듯하다. 그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한숨을 쉬는데 태황이 일이 많아 이제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혼자 가지 않았다. 나한테도 따라 나오라고 했다.
“아바마마. 소자는 비궁의 곁에 좀 더 있어 주고 싶사옵니다만…….”
“아이를 비궁이 낳았지, 네가 낳았느냐? 낳을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렸고 낳은 뒤에 한껏 위로해주지 않았느냐. 그럼 되었지 뭘 더 하려고? 어서 편전으로 오거라. 볼 것이 많다.”
젠장, 세종대왕은 공노비한테도 아내가 애를 낳으면 한 달 동안 출산휴가를 줬는데 나는 고작 한나절도 못 쉬는 건가?
4.
태황은 외조부 김조순의 장례를 치르고 국혼을 치르는 동안까지는 비교적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명주공 이결과 도쿠히메의 혼례가 끝나고 우리 쪽 성혼사 일행이 일본 측 성혼사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자 다시 일을 팽개쳤다.
“짐이 올해 겪은 일이 너무도 많고 힘겨워서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다. 이는 모두 짐이 덕이 없는 탓에 하늘이 벌을 내리신 것이라, 잠시 국사에서 손을 놓고 뉘우치며 수양해야 할 것 같으니 태자가 한동안 대리청정을 맡도록 하라.”
다만 태황이 일을 놓은 데는 그저 힘들고 귀찮은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일본 측과 혼수 액수를 놓고 벌인 ‘돈지랄 배틀’에서 져버려서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불행을 당하신 소왕 전하와 그 일가께 저희 역시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사정이 있었으니 신랑이 바뀌는 것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임금께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하는 조건이 한 거지 있습니다.”
“무엇이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혼인 상대를 바꿔야 할 것 같다는 태황의 설명을 들은 타다나리는 뜻밖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거기에 조건을 하나 붙임으로써 태황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말해 보시오. 어려운 게 아니라면 들어줄 터이니.”
“귀측에서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혼례식 직전에 정혼 상대가 바뀐 게 좋은 일은 아닙니다. 혹시 부부의 앞날에 액이 낄 수도 있으니, 액막이를 위해서 귀국 황실 원찰(願刹)인 원각사에 공납품을 바쳐서 복을 빌고 싶습니다.”
“좋소. 원대로 하시오.”
저쪽이 선뜻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혼례식 직전에 신랑을 바꾸겠다고 나선 건 명백하게 우리 쪽이 저지른 결례였다. 그래서 태황은 죄책감도 덜 겸 바로 수락했다. 그리고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처절한 후회를 했다.
“아니, 이게 무엇이오?!”
“전에 말씀드린, 원각사에 바칠 공납품입니다, 임금 폐하.”
태황의 눈앞에 나타난 건 높이가 다섯 자쯤 되는 거대한 금동제 불탑이었다. 절에 물품을 공납한다니 돈으로 얼마 내고 말겠지 하고 편하게 생각했던 태황의 뒤통수를 거하게 쳐 버린 셈이었다.
“이…..이 장식이 전부 보석이오?!”
“그렇습니다, 임금 폐하.”
내직사에서 급히 뛰어온 전문가는 그 금동탑의 가치가 7만 냥은 족히 되리라고 감정했다. 구리로 만든 탑신에다 순금박을 입히고 장식을 덧붙인 테다 여기저기 보석을 박았다. 꼭대기에는 금강석까지 달았다. 그랬으니 그만한 가격이 나올 수밖에.
“참으로…..대단하오. 대군에게….원각사에서 감사해하더라고 전해주시오.”
“감사한 말씀입니다.”
똑같은 값어치의 선물로 받아치려면 칠 수야 있겠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런 급의 물건을 만들려면 적어도 작업시간이 몇 달은 필요한데 전왕과 황양현주가 일본에 건너갈 날은 겨우 한 달 남짓밖에 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분도 없다. 명백한 태황의 패배였다.
하려고만 하면 돈이나 패물을 그만큼 얹을 수도 있지만, 저쪽에서 예술품을 보내 체면을 세우는데 이쪽에서 현금으로 응수하는 건 명백하게 격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서 올해는 흉년임이 명백해진지라 과시적인 돈쓰기 같은 건 지양해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태황은 이를 갈면서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것까지 포함해서 상한 자기 기분을 푸느라 우리 성혼사가 황양현주 – 관례는 관례인지라, 출국하기 전에 황양공주(黃壤公主)로 책봉되었다 – 를 데리고 일본 측 성혼사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떠나자마자 정무에서 손을 놓고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니 또 내가 대리청정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9월 1일 – 양력으로 9월 24일 – 부터 시작된 이번 대리청정은 경희궁으로 가는 이삿짐을 싸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 청을 들은 태황이 경희궁으로 이어한다는 명을 내렸는데, 이사할 준비는 하나도 안 해놓고 손을 놓아버린 탓이다. 여기에 역모 뒤처리까지 있었다. 태황은 나라의 경사를 앞두고 사람을 죽이는 건 길하지 않다고 하여 사형에 처할 죄인 30여 명을 의금부에 가둬두고 있었는데, 이들의 사형 집행도 내 몫이었다. 진작에 장살을 당한 남응중을 뺀 전원이 한강변에서 목이 잘렸다.
여기에 가담 정도가 극히 경미하다고 인정받은 일부가 방면되었다. 이들을 모두 제외하고 남은 숫자가 대략 2백여 명이었는데, 이들의 처분을 놓고 갑자기 태황이 끼어들었다.
“그 역도들은 해군에 보내 배를 젓게 하면 좋겠다. 남은 판옥전선과 거북선이 몇 있으니, 그 배들을 저으며 자신이 지은 죄를 온몸으로 깨닫게 하라.”
범선이 주력이었던 시절만 해도 판옥선은 연안 경비용으로 꽤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증기선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노를 쓰는 판옥선은 거의 선적에서 지워졌다. 지금 해군에 남은 판옥선은 열두 척, 거북선은 세 척뿐이다. 이들도 전투용이 아니라 행사용이다. 행사용이라고는 하나 선체 자체는 현역 시절과 마찬가지로 관리하고 있다. 원래 세계에서 미국이나 영국이 빅토리나 컨스티튜션 같은 유명한 배들을 21세기까지도 기념함으로 계속 보존하듯이 말이다. 승무원도 배치되어 배를 관리하고 운용도 한다.
다만 증기선이 흔해진 시대에 힘들게 노를 젓고 싶은 이가 흔할 리 없으므로, 이 배들은 격군을 구하지 못해서 평소에는 그저 항구에 묶여만 있는 게 보통이다. 행사 때는 다른 배 소속 수족들을 강제로 차출 해다가 쓰고 말이다. 태황은 그 죄인들을 여기 보내자는 거였다.
“아바마마. 가볍다고는 하나 대역에 연루된 자들입니다. 도형(徒刑)에 처하더라고 북방의 탄광이나 옻나무 농장에 보내는 편이 온당하지 않겠습니까?”
나한테 대역죄는 노 젓는 일 따위로 갈음하기에는 너무 큰 죄였다. 전가사변을 면해주고 당사자만 벌하며 가족들은 경기도에 거주할 수 없게 하는 정도로 끝내는 걸 감사해 해야 할 판인데 겨우 배 젓는 일을 시키다니…..다른 벌을 주자고 했으나 태황은 고개를 저었다.
“배를 젓는 일이 어찌 갱에서 석탄을 캐는 일보다 쉽다고 하겠느냐. 사슬에 묶인 상태로 전신의 힘을 쏟아서 배를 젓다 보면 그 죄인들도 자기 잘못을 한 번이라도 더 뉘우치게 될 거다.”
“…..알겠사옵니다.”
태황은 죄인들에게 노를 젓게 하는 데 무슨 로망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일본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된 조정에서도 그건 너무 약한 벌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태황은 까딱도 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대들이 벌이 가볍다고 여기면 대신 오래 사키면 될 것 아닌가? 2백 명이라고 해 봐야 고작 판옥선 두 척밖에 못 젓는다. 통영에 있는 판옥선이 딱 열두 척이니, 엿새 동안 매일 두 척씩 젓고 하루 쉬면 되겠구나. 그렇게 20년쯤 저으면 되겠군.”
그렇게 ‘남응중의 난’에 연루된 잔당들은 20년 동안 갤리선의 노를 젓는 로마 시대 노예 같은 존재들이 되고 말았다. 이걸 보고 웃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주모자인 이청 본인은 ‘자발적인 이주’라는 명분으로 가족과 함께 현토도로 갔다. 일단은 유배가 아니라 ‘이주’이므로 제산도 가지고, 노비들까지 데리고 갔다. 고용인들은 죄다 함께 가기를 거부했지만, 노비들은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이청이 노비를 유지한 득을 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