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18
4부 202화(1818화)
13.
삼년사이 사람 잡는 관습인 거야 익히 아는 바다. 어디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엘리트를 잡아먹는 사례가 더 많으니 더더욱 곤란한 관습이다. 하지만 대한의 기본 이념이 성리학인 이상 법으로 금지하거나 제한하기도 당장은 어렵다.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한다. 생각해보면 작년에 김조순의 상을 치렀을 때도 이미 김원근은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 두 번째 시묘살이를 감행했으니 탈이 날 수밖에.
“모두 제 탓입니다, 태자마마. 아우가 아니라 소인이 시묘살이를 나섰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내구. 어찌 내구께서 죄스러워하십니까. 전부 나랏일 때문 아니었습니까.”
장남인 김유근이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굳이 차남인 김원근이 시묘살이를 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태황이 부친상을 맞아 삼년상을 치르겠다는 김유근의 사직 상소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김유근은 조정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이유였다. 태황이 사직 상소를 받아주지 않자 난감해진 김유근 대신에 둘째인 김원근이 시묘살이를 했다. 김유근이 나랑 같이 미주에 갔을 때 외조모가 사망해서 외조무상도 김원근이 받아서 치렀건만, 또 이렇게 되고 말았다.
중간에 3년을 띄웠다고는 해도 시묘살이란 게 워낙 힘들고, 김원근의 건강도 좋지 않아서 좀 조마조마했었다. 그래도 겨울도 어찌어찌 잘 넘겨서 괜찮으려나 했는데 그만 이번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가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자기 태만 때문에 동생이 죽었다며 애통해하는 김유근을 뒤로 하고 쓸쓸하게 대궐로 돌아왔다. 장인이 죽었을 때도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던 태황은 처남이 죽었다고 해도 딱히 큰 슬픔을 보이지는 않았다. 의례적인 애도를 표했을 뿐이다.
“잘 다녀왔다. 참군은 아직 젊은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그래, 병명이 뭐라 하더냐?”
한성부 참군(參軍)은 김원근이 받았던 벼슬이다. 정7품으로, 한성부 관할 구역의 도로를 정비하고 수로를 청소하며 쓰레기를 치우고 다리를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 정원은 6명이다. 김원근이 명문 장동 김문의 적자면서 이런 일을 맡은 건 그저 과거시험 성적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김조순이 생전에 마음만 먹었으면 편한 자리 하나 정도 마련해주는 건 쉬웠지만, 그런 건 옳지 않은 일이라며 해주지 않은 탓이 크다.
셋째 외숙인 김좌근은 태황이 새 놀이 친구로 삼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눈에 들어 벼슬도 빠르게 높아졌지만, 김원근은 그것도 없으니 말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과거에 붙자마자 외조모의 시묘살이로 만 2년을 보냈으니, 승진에 필요한 근무 일수도 모자랐고. 그나마 김원근 본인도 부친의 처사에 불만이 없었던 게 다행이다. 자기 성적에는 정7품도 빠른 거라며, 그저 열심히 일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먼저 가고 말았다. 거참.
“학질이었다고 합니다.”
분명 무덤가에 지은 여막(廬幕) 안에 모기장을 치기는 했다. 그런데 그 모기장이 낡아서 구멍이 뚫린 것을 아무도 몰랐던 모양이다. 양식을 가져온 하인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고 했다.
“늦게 발견한 데다, 몸이 약해져 있어서 친초피로도 효험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태황은 정말 안 됐다는 듯 혀를 찼다. 하지만 딱히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삼년상이 얼마나 사람의 피를 말리는 관습인가에 대한 성토가 더 컸다.
“부모가 키워주신 은혜를 갚고자 하는 뜻이 있다고는 하나, 후손에게 주는 무리가 너무도 크다. 툭하면 상을 치르다가 자식이 죽는데 어느 부모가 그걸 효도라고 느끼겠느냐?”
몸이든 혼이든, 자식을 잡아먹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면서 태황이 열을 냈다. 이번 김원근의 죽음을 기화로 삼아서 이놈의 삼년상을 법으로 금지할 계기로 만들까 한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아무리 어명이시라고 해도, 조정과 중추원에서 절대로 듣지 않을 겁니다, 아바마마.”
시묘살이는 워낙 힘든 일이니까 모두가 하지도 않고, 하라고 강제하지도 않는다. 그거야 누구나 동의하는 일이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강제하면 그건 문제가 커진다. 각자가 알아서 할 개인적인 집안일을 국가가 나서서 강요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니까.
“알겠다. 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변하다 보면 백성들의 생각이 바뀔 테니 어서 그럴 때가 오기만 기다려봐야지. 그나저나 그날 하와세자와 함께 간 군기시 나들이는 어땠느냐.”
무종 시절부터 기술 개발의 첨병이던 군기시다. 열기창이 본래 군기시의 일개 부서였으며 수많은 기계 제작이 군기시에서 그 첫발을 내디뎠다. 지금은 서학당과 민간의 수준이 올라오면서 전반적으로 기술 분야의 상향평준화가 이뤄진 덕분에, 군기시는 순전히 군사기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자면 군기시 본연의 역할로 돌아간 셈이다.
“괜찮았습니다. 할바마마께서 계시던 시절부터 만들던 비행선이 드디어 다 완성되어가는 듯하여 기뻤습니다.”
군기시에서 비행선 개발에 착수했던 계기는 조부의 명령이었다. 바람을 타는 보통 기구로 대한해협을 건너려는 시도가 숱한 실패를 초래한 뒤, 조부는 ‘바람을 거스르고 날 수 있는 하늘의 배’를 새로이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그래서 이름이 비행선이다.
“그러고 보니 선황께서 비행선을 만들라고 처음 명을 내리신 게 을축년(1805)이었던가. 내가 네 어미와 처음 혼인하던 해였지.”
다만 조부는 비행선 제작을 시급한 국책사업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게다가 철도 부설과 신도시 건설 등 돈이 들어갈 다른 곳이 많다 보니 할당된 예산도 적어서 진행이 느렸다.
“한 대만 망가져도 비단값으로 수백 냥씩 날아갔으니 어찌 연구가 빨랐겠느냐. 선황께서 상황이 어찌 진척되는지 물으실 때마다 장인들이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하고 쩔쩔매던 생각이 나는구나.”
태황이 피식거리면서 좀처럼 이야기한 적이 없는 과거를 회상했다. 그에 따르면, 초기에 나온 아이디어 중에는 길이 잘 든 사냥용 독수리들을 기낭 앞에 매달아서 비행선을 끌도록 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마치 산타클로스의 썰매를 끄는 순록들처럼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죄다 각하되고, 결국 가벼운 증기기관을 사용하자고 결론이 났지. 그 가벼운 기관을 만드는데 또 시간을 한참 잡아먹었고, 그 완성한 기관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결론이 안 나온 모양이지만.”
기관을 개발하고 추진기관을 결정하느라고 보낸 그 세월이 순전히 낭비된 건 아니었다. 그동안 군기시 기술진은 적어도 기낭 부분은 확실하게 완성해놨으니 말이다. 보통 기구에서 쓰는 것처럼 구형 기낭이 아닌, 멋진 방추형 기낭을 말이다. 이동을 전제하지 않는 보통 기구는 형상이 구형이다. 그 형상이 가장 공간의 낭비가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향을 정해 움직이려면 구형보다는 원추형이 유리하다. 군기시 장인들은 우리 군이 수백 년 전부터 쓰던 종형단(鐘形彈), 즉 미니에탄을 통해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추진기관도 없는데 어떻게 비행선 형태부터 연구했느냐고? 그야 간단한 일이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 기구를 띄우고 기구가 그 바람을 어떻게 타는지 조사하면 추진기관이 없어도 비슷한 연구를 할 수 있다. 현대 항공기 개발에서 하는 풍동 실험처럼 말이다. 몰론 실험 중에 추락한 기구도 있었고, 사망자도 몇 나왔다. 군기시 안에 설치된 사당인 승혼사(昇魂祠)에는 옛날 무종 시절의 증기기관 폭발 사고를 비롯하여 각종 개발 중 사고로 순직한 이들의 위폐가 죽 모셔져 있는데, 이들도 그 뒤에 늘어서게 되었다.
내가 대리청정을 명받고 군기시에 처음 갔을 때, 이미 비행선의 기낭 부분은 이들의 희생 덕분에 형태를 잡고 있었다. 적당한 성능의 증기기관도 만들어 놓았다. 남은 문제는 태황의 표현 그대로 ‘어떻게’ 사용하느냐, 즉 어떤 추진기구를 채택하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프로펠러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제껏 쌓아온 경험에 천착한 군기시 장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바람개비’는 풍차를 돌려 양수용 수차를 움직이는 동력원일 뿐이었다. 그런 게 허공에서 배를 움직일 추진기관이 된다는 생각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더구나 그들이 보기에 나는 귀하신 분이된 ‘쇠 만지는 일’ 따위는 하나도 모를 게 분명한 애송이였다. 그러니 내가 하는 말이 더더욱 안 먹혔을 수밖에 없다.
“해군부 조선국에서 선박 추진용으로 연구하던 나선장이 좀 더 일찍 나왔으면 군기시에 있는 장인들도 그 결과를 받아들여 소자의 뜻을 납득했을 것 같사옵니다만…..”
유럽에서 건너온 논문이나 신문, 잡지를 통해 스크루를 접하고 관심을 가진 이가 그동안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스크루에 관한 이론적인 관심이 실제 적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일단 스크루선이 외륜선보다 얼마나 우수한지도 아직 결론이 안 나왔다. 익문사 보고서와 타임즈지 기사에서도 확인한 바지만, 영국 해군에서도 아직 스크루선이 우수한지 외륜선이 우수한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해군이라고 딱히 다를 게 있겠는가.
함포 탑재량에서는 확실히 스크루선이 우월하다. 추진기관의 피탄 위험에서도 스크루선이 낫다. 하지만 과연 그 스크루가 제대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 확실하게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외륜선만큼 추진력이 나올지를 세간에서 의심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다. 외륜선은 외륜을 움직이는 축이 수면 위에 있어서 그리로 물이 샐 일이 없다. 하지만 스크루선은 회전축이 수중에서 선체를 관통한다. 당연히 그리로 물이 새어 들어오고, 이를 막는 연구도 필요하다. 그만큼 고려할 게 많다는 말이다.
그러니 영국 해군도 수많은 시제품 배들을 구경한 하면서 간을 보는 중인 거다. 영국에서 지금 실용화됐다는 스크루선도 무슨 대형 전열함 같은 게 아니고, 연안 항해에 투입되는 백 톤도 안 되는 소형선이다. 그게 현재 제대로 돌아가는 스크루선의 한계다. 게다가 우리 해군은 지금 보유한 전력만으로도 주변 각국 해군 및 유럽 여러 나라가 보낸 아시아 파견함대 정도는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스크루선 따위가 급하지 않다. 그동안 해군의 사업 우선순위는 장갑함과 기범선으로 목조 범선을 대체하는 데 있었다.
우리보다 치열하게 갈등하는 유럽 해군도 아직 스크루선을 전면 채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해군 수뇌부는 그 작은 배에 관한 소식을 보고 벌써 스크루선의 가능성을 높이 보고 있다. 그만하면 생각보다 과감하고 진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동안 연구가 제대로 안 됐던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장 만든 시제품은 성능이 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고. 하지만 그건 돈과 시간을 충분히 들이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저쪽에서 이미 특허권을 냈다고 해도, 연구 방향에 따라서 저들이 만든 제품과 충돌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스크루를 개발할 수 있다. 그래서 태황이 마음을 바꾸도록 다시 한번 설득을 시도해보았다.
“아바마마. 잉글국 나선장이라고 해서 지금 대단한 성능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조선국 장인들과 서학당 교수들, 원생들에게 효율적인 나선장 개발을 명하신다면 그 정도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모르기는 하지만, 민간에서 스크루에 흥미를 품고 연구하던 사람도 있을 거다. 어떤 사회든 자기 취미로 뭔가 괴상한 짓을 시도하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태황은 스크루선을 자체적으로 개발해보자는 내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거기에 얼마나 긴 세월과 많은 돈을 들이겠다는 말이냐?”
태황은 내 요청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데 왜 돌아가는 길을 택하느냐는 투였다.
“증기기관 성능이야 우리가 저들보다 더 좋다. 당연하지. 하지만 나선장 개발에 있어서는 출발이 조금 늦었지. 돈 몇 푼으로 그걸 단박에 따라잡을 수 있다면 되려 값싼 게 아니냐.”
태황은 영국인 개발자들이 현재까지 달성한 기술적 수준에 우리가 도달할 때까지 들어갈 개발비보다 그 특허권을 사들이는 비용이 더 싸게 먹힐 거라며 내 요청을 칼같이 거부했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쳤다.
“그 비용과 시간은 일단 영국제 나선장을 도입한 뒤 그걸 더 좋게 개량하는 데 쓰면 되지 않느냐. 태자는 왜 모든 것을 죄다 우리 손으로만 하려고 드느냐? 우리보다 남이 더 잘하는 것이 있으면 배워다 할 수 도 있다. 그게 교역이 행해지는 원칙 아니냐?”
태황은 그 준거로 조부가 영국에서 뇌홍을 넘겨준 사례를 들었다. 30년간 받은 특허료가 80만 냥에 달했던 이야기를 하며, 저들도 우리 특허를 사는데 우리가 저들의 특허를 살 수 없는 이유가 뭐냐고 호통쳤다. 이거 경제학에서 다루는 비교우의론 아닌가. 비교우위론을 처음 주장한 영국의 경제학자 리카도가 죽은 게 10년 전이었느니, 태황이 나름대로 서양 경제학 공부를 했다고 하면 알고 있어도 신기할 건 없는 일이긴 하다. 설마 태황이 스스로 생각해낸 건 아닐 테니.
14.
호떡집은 엄청나게 부산스러웠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좀 남루하게 차려입고 나온 보람이 있는지, 주인이고 손님이고 아무도 우리 일행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마 평복한 시위대 군사들인 줄 아닌 게지요. 술루인, 하와인, 본국인이 섞여 있으니.”
“그런 모양일세.”
나, 디에고, 하진교. 이 조합으로 돌아다닐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9월에 하진교와 현순옹주가 혼인하고 나면 하진교는 하와국으로 떠날 테니까.
“아닙니다, 전하. 아니 나리.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9월에 혼인하고, 본국에서 겨울을 보낸 뒤에 내년 봄에 귀국 할 거라고 말입니다.”
황빈은 아직도 딸을 하와국에 시집보내기 싫다고 태황에게 울며 조르는 중이라고 들었다. 볼 수 없는 바다 건너 땅에 보내기 싫다는 거다. 하진교의 귀국이 늦어진 건 황빈을 달래는 배려인 셈이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헤어지도록 말이다. 친정도 바다 건너에 있는 황빈에게 딸까지 바다 건너로 보내라는 건 좀 가혹한 요구이긴 했다. 하지만 태황은 이미 하와국에 옹주를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했고, 현순옹주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누이도 없다. 바로 아래 서열인 영빈 이씨 소생의 미순옹주는 이제 막 열 살이 되었다. 열다섯 살인 현순옹주보다 어려도 너무 어리다.
“저보다 열 살이 어린 건 괜찮습니다만, 지금 열 살인 건 곤란합니다. 아내 구실을 하기에 너무 조그맣잖습니까.”
하진교는 느긋하게 중얼거리며 여섯 개째 호떡을 두 조각으로 찢었다. 산동에서 온 한공 출신으로 한양에 정착했다는 주인은 엄청난 매상에 기쁜지 벙글벙글 웃으면서 연신 호떡과 군만두, 마화(꽈배기)가 수북이 쌓인 접시를 들고 왔다. 마화에 설탕 참 많이도 뿌렸구나.
“내 생각에도 그렇기는 하네. 그분, 미주댁에게는 좀 안됐지만, 어쩔 수 없으니 꾹 참고서 받아들이셔야지. 아버지께서도 다음 혼사는 그분을 좀 배려하실 테니.”
나도 꽈배기를 씹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대화하려니 은근슬쩍 돌려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편하게 대화하려면 우리끼리 독실을 쓸 수 있는 은신처를 찾으면 되지만, 그건 그냥 놀러 나온 거지 민생을 살피러 나온 게 아니잖은가. 가게 바깥 탁자에 호위들을 따로 앉혀 두고, 우리 세 사람은 느긋하게 잡담을 주고받으며 다른 손님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 허름한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다.
이곳 영등포에는 철도가 연결되면서 한양에서 필요한 벽돌과 기와, 방직, 피혁, 기계 등을 제작하는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시장이 가깝고 노동력을 조달하기도 쉬우며 철도와 수로를 이용해서 원료와 제품을 운반하기도 쉬우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올해 쌀값은 작년보다는 좀 내리려나 보네.”
“두 해 연속으로 작년 같으면 죽어야지.”
“맞아. 콩 한 포기 심을 땅뙈기 하나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흉년이 재앙이여.”
A에 앉은 노동자들 한 무리가 너스레를 떨었다. 거, 작년에도 구휼 덕분에 죽을 지경은 아니었던 거 뻔히 아는데…..자네들 엄살이 좀 심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