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20
4부 204화(1820화)
16.
춘생식행이 통조림을 팔아 떼돈을 번다고 해봐야 산업계 전체로 따져 보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진짜로 돈을 크게 버는 산업은 역시 제철업, 제재업, 그리고 방직업이니까. 물론 칠기나 식기 같은 고급 공예품 수출도 여전히 활발하다. 다만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사치품 교역에는 한계가 있다. 홍삼만 해도 여전히 인기 있는 효자상품이지만, 막말로 홍삼 한 뿌리보다 면포 두 수레를 파는 쪽이 훨씬 쉽지 않은가.
게다가 일반 산업에서는 고용화는 노동자 수도 많다. 대부분의 사치품 생산이 ‘장인의 한 땀 한 땀 손으로 뜨는’ 작품인 데 반해 방직공장에서는 미숙련 노동자들이 기계를 가동해서 포목과 비단을 쏟아낸다. 어린아이들도 일한다. 원평 9년, 조부는 모든 사내아이는 소학당에 다녀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보통교육의 시작이었지만, 학교에서는 학생을 하루 종일 데리고 있지 않았다. 늦어도 오후 2시까지는 모든 수업이 끝났고, 그러면 학생들은 대부분 학교해서 집안일을 도우러 갔다.
농촌에서는 당연히 부모의 농사일을 돕는다. 그리고 공장 인근에 사는 학생들은 부모들이 일하는 공장에 간다. 그리고 해가 지고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부모와 함께 일한다. 그렇게 반나절을 일하고 받는 임금은 대개 어른 하루치 일당의 사분의 일이다. 방직공장에서는 여자들도 많이 일한다. ‘베 짜는 일’이 본래 여자들이 하는 일이라는 관념 탓이 크다. 여자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으니 엄마와 언니를 따라 공장에 가서 아침부터 일하곤 한다. 이들은 보통 어른 하루치 일당의 절반을 받는다.
조부는 보통교육을 시작하면서도 아동노동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조부의 관점에서 자식이 부모를 도와 일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부가 보기에는 소를 산에 끌고 가서 풀을 뜯기고 밭에서 김을 매는 일과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일이 똑같았다. 다만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으로서 꼭 지켜야 할 도리는 있다. 그래서 조부는 생전에 그 문제를 규정한 칙령 몇 가지를 이미 내려 두었다. 이는 공장주뿐만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을 고용한 모든 사업자가 꼭 지켜야 하는 법이다.
’16세가 안 된 연소자는 해가 진 뒤에는 일을 시키지 말 것. 저녁때까지 일을 시키면 꼭 저녁밥을 제공할 것, 약속한 임금을 체불하지 말 것….정말이지 딱 농업사회를 기준으로 한 법이구먼.’
조부는 분명 상당히 훌륭한 군주였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보수적이고 고루한 면이 있었다. 조부가 개인적으로는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건, 임금으로서 나랏일을 처리하는 태도가 그러했다는 말이다.
“칙령을 어기는 행수(사장)들은 어찌 되었는가?”
“선황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장형을 내리셨습니다.”
어설픈 벌금 몇 푼보다 곤장을 치는 게 효과가 좋기는 하지. 사람이란 자기 몸이 상하는 데 아무래도 더 민감하니까. 그래도 사업을 경영하는 사장이나 공장주들은 대부분 그 법을 따르는 편이었다. 몇 번째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기를 지주라고 생각하고 노동자들을 소작농처럼 여기는 그 관점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자식들은 자기가 챙겨야 할 ‘동네 애들’인 셈이다.
영국에서 아동노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와 비교하면 정말이지 다른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래 세상에서도 알고 있던 바지만, 영국에서는 지금도 열 살도 안 되는 아이들이 어른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급료만 받고 어른들과 똑같이 공장에서 일한다. 그나마 공장은 약과다. 탄광에서도 좁은 갱도를 기어 다니면서 석탄을 긁어낸다. 다행히 우리는 그런 꼴은 안 본다. 광산에서는 남자 어른이 아니면 갱도에 들어가 일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상식이다. 애들이 하는 일은 기껏해야 바깥에서 석탄 부스러기를 줍는 일 정도다.
“분명히 사람 살기에는 이쪽이 더 좋은 세상이 맞는데……”
면포를 비롯한 영국제 공산품이 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오는 데는 저런 저임금 아동노동을 통한 가격 인하가 크게 한 몫 한다. 그게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우리 대한이 코앞에서 증기기관으로 공장을 돌리고 있음에도 후송에서 수공으로 생산하는 포목과 비단을 아직도 압도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기 있는 셈이다. 노동자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건 정말 필요한 일이지만, 그러자면 비용이 들어가니까.
“더 효율적인 기계를 만들 수 있게 독려해야 하나.”
우리 대한의 특허 1호가 장조 때 만든 조면기 아니었던가. 그 뒤로도 방직업에서 필요한 조면기, 방적기, 방직기 등의 개량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재무부 관리들은 우리 기계 자체의 성능은 영국제에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자부했다. 기계 성능은 비등하다. 운송비는 우리가 훨씬 덜 든다. 원료비와 인건비도 우리가 낮다. 우리 노동자 대우가 유럽보다도 좋지만, 전체적인 물가와 인건비가 유럽보다는 아직 낮아서 그렇다.
그런데 후송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워낙 낮다 보니 우리가 공장에서 뽑아낸 포목보다 후송제 포목이 싸다. 후송에서도 철도는 있고 기선도 있지만 그 철도와 기선으로 공장제가 아닌 수공품 면포를 운반한다, 그놈들은. 요즘 후송 돌아가는 거 보면 중국을 세 조각이 아니라 여섯 조각쯤 냈어야 한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건주도 둘이 나니라 셋으로 – 그중 한 덩어리는 도르곤에게 주면 되지 않았을까 – 나누고 강남은 넷으로 나누면 적당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딱 7개국이 되어 전국시대를 재연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으면 국력도 더 약해지고 외부 확장 따위는 꿈도 못 꿨겠지.
하여간 지금은 남을 약하게 만들기보다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쪽에 조금 더 집중해야 할 시기다. 후송과도 당장 전쟁을 벌이거나 할 상황은 아니고, 그런 상황이 초래되기도 하라지 않는다. 지금 전쟁이 터지면 태황이 최고 지휘관이 되는데 그 꼴을 어떻게 보라고.
17.
태황에 대한 내 불신은 유구하다. 올해만 해도 여름에는 군기시 업무를 핑계로 혼자서만 북한산 골짜기에 들어가 피서를 즐기고 나는 대궐에서 일하게 만들더니, 가을이 되니까 또 금강산에 갔다. 이런데 무슨 태황이 전쟁지도를 제대로 하리라는 믿음이 가겠는가. 금강산에 간 핑계도 좋다. 곧 현순옹주와 하진교의 혼사를 치를 예정이니, 그전에 명산에 찾아 마음을 깨끗이 하고 안정을 얻고 싶단다. 황빈 홍씨를 동반한 걸 보면 황빈을 달래러 간 것 같기도 하다만.
어쨌든 태황이 또 자리를 비우니 밀려드는 조정 사무는 몽땅 내 앞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정말이지 군권 빼고 전부 내 몫이었다.
“전하. 유주에서 새로 들어온 소식이옵니다.”
도승선이 오늘 제물포에 입항한 외수사 선편으로 도착한 익문사 보고서와 유럽 쪽 신문, 잡지 무더기를 내밀었다. 지친 기분으로 손을 내밀었다.
“줘 보라.”
과거, 장조 시절에는 유럽에서 배가 오려면 1년에서 1년 반이 필요했다. 계절풍이 부는 시기에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해서 항구에 묶인 채 몇 달씩 기다리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이제는 수백 년 동안 축적된 항해 경험과 항해술, 선박의 발달 덕에 우리 외수사 배들도 최대 6개월 안에 유럽까지 갈 수 있다. 사고가 날 위험이 크다고 해서 한동안 벵골 이서로 가는 항해가 금지되어 있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럽으로 가는 교역량 전체를 외수사 배만으로 해결하는 수준은 아니다. 다른 나라 배들도 오가는 길로 우리도 다닌다는 것이지. 원래 세계의 대한민국에서도 상선 보유량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지만, 물동량 다수가 외국 선박으로 오가지 않았던가.
다만 유럽으로 가는 항로에서는 여전히 범선이 다수다. 기선은 항해 일정을 계획적으로 잡을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연료비가 많이 드는 데다 상품 전체에 필요한 공간을 석탄이 차지하는 문제 때문에 아직은 선호가 덜하다.
‘수에즈 운하가 열리기 전에는 이런 추세가 유지될 테지…..’
가장 물동량이 많은 항로는 대서양 항로라지만, 동서 세계간 교역도 원래 역사보다 많이 늘었다. 우리와 청나라, 일본, 후송 등이 세수를 늘리느라 경쟁적으로 대외교역을 늘렸으니 한중일 모두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그 세계보다 교역이 늘어난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동양으로 오는 물동량이 늘어난 만큼 당연히 유럽에서도 수에즈 운하를 파고 싶은 생각이 일찍들 들 테지. 문제는 누가, 어떻게 파느냐는데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파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문제는 일단 뒤로 미뤄두었다.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신문 뭉치도 일단 놓아두고 익문사 보고서부터 펼쳤다. 그랬더니 예상하지 못한 보고가 맨 첫 장에 적혀 있었다.
“잉글국에서 노예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기로 했다고……?”
노예무역은 이미 25년쯤 전에 금지됐다. 영국 해군이 단속을 맡아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노예선을 나포하고 노예들을 해방했다. 그러더니 결국 영국 영토에서 노예제를 폐지하기로 한 모양이다. 언젠가는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던 일이긴 했다.
“우리도 이제 노비를 없애면 어떨까 하는데,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사실 노비제 유지 문제는 그동안 꽤 논란이 된 주제 중 하나였다. 어차피 막대한 노비세 부담 때문에 남아 있는 노비도 거의 없는데, 그만 노비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주로 남인들이 이를 주장했다. 하지만 조부는 ‘예로부터 내려온 제도’를 없애는 데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대한은 여태껏 신분제가 남아 있는 나라고, 조부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유지하려고 했다.
“전하, 이는 이 땅에서 천 년이 넘게 이어진 제도를 없애는 중대한 일이옵니다. 어찌 이리 가볍게 문제를 논하려 하십니까.”
국상 남공철이 당황한 기색을 삼키지 못하고 먼저 나섰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즉위도 안 한 태자가 뜬금없이 황당한 소리를 한다고 여긴 게다.
“국상께서는 노비를 몇 명이나 거느리고 계시오?”
“…..한 명도 없사옵니다. 집안의 일을 맡은 가복들은 모두 누대에 걸쳐 저희 집안에 속한 이들이기는 하나, 지금은 모두 양민입니다.”
그것 보라니까. 국상 장도 되는 양반도 집안에 진짜 노비는 한 명도 두지 않는 세상이다. 대대로 내려오던 노비라고 해도 서류상으로는 일단 양민으로 해 두고 일을 시킨다. 노비를 유지하는 건 현토도에 간 소왕처럼 과시하기 좋아하는 극소수의 인간들뿐이다.
“재무대신께 묻겠소. 우리 본국에 남아 있는 공노비와 사노비의 수가 얼마나 되오?”
소심한 우리 장인어른의 심기를 배려하여 최대한 부드럽고 온건하게 물었다. 다행히 우리 장인게서는 떨지 않고 대답해주셨다.
“속령은 제외하고, 본국에 있는 공노비의 수는 11만 1,857명입니다. 사노비는 2만 984명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인신을 관리하는 내무대신이 아니라 재무대신이 노비 숫자를 잘 파악하고 있는 건 여전히 노비가 재산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노비 1인당 50냥이라는 막대한 세금까지 내고 있으니, 당연히 재무부가 관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직사에 속한 내수사 노비는 얼마나 되오?”
“내수사는 소신의 관할이 아니오라….대력 8만 명가량 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공노비와 내수사 노비를 합쳐서 대략 20만, 그 인원을 몽땅 속량하고 양민으로 풀어준 뒤 재고용한다면 국고에서 상당한 예산이 지출되리라. 하지만 그동안 공노비들도 봉급 한 푼 안 받고 일한 건 아닌지라, 생각보다는 많지 않을 거다.
예로부터 공노비 중 가장 많은 숫자는 농사를 지었다. 각 관청에 속한 토지를 경작하면서 관청 운영경비를 조달하는 게 공노비들의 역할이었다. 관청에서 직접 근무하며 세습직 하급 공무원으로 일하는 공노비의 수는 일부에 불과했다. 지금도 많은 공노비가 똑같은 일을 한다. 다만 이제는 재정이 일원화된 만큼 개별 관청에 소속되어 해당 관청의 토지를 경작하는 게 아니고, 맡은 토지에서 나온 수입을 재무부에다 직접 납부한다. 국가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인 셈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신분을 양민으로 풀어준다고 하여 조정이 손해를 볼 일도 없지 않은가. 양민이건 노비건 농사를 지어 세공을 나라에 바치는 의무는 똑같이 지지 않소.”
“그건 그렇사옵니다. 하오나 전하, 어찌 내수사 노비까지 혁파하려 하시옵니까?”
권세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의미를 깨달은 나는 일단 뒤로 물러섰다.
“어찌 내가 내수사를 혁파한다고 하겠소. 내수사는 부황께서 관할하시는 곳이니 내가 그 귀추에 관해 말할 자격이 없소. 단지 그 현황이 궁금하여 물었으니, 경들은 행여 오해하지 말도록 하시오.”
내수사는 현직 임금의 소유다. 고로 내가 내수사 노비를 없애자느니 어쩌니 하면 태황의 권한을 정면으로 침해하게 된다. 태황은 이제껏 내게 대리청정을 명하면서도 내수사 관리를 시킨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자기 마음대로 돈 쓰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그렇다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 그러니 내수사에 관련된 문제는 미리 조심해야지. 다만 모든 대신이 노비제 혁파에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쌍수를 들고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하. 노비제를 완전히 혁파하는 게 좋겠다는 전하의 말씀에 신은 기꺼이 동의하나이다. 폐하께서 환궁하시면 꼭 말씀드리시어 윤허를 받아내도록 하시옵소서.”
남인에 속하는 사람인 공무대신 박영균은 얼굴에 흥분하는 빛까지 띄웠다. 귓불에 매달린 십자가 귀걸이가 격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옛말에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하였고, 천주께서도 만민은 평등하다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어 벌을 받는 이는 어쩔 수 없겠으나, 본인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노비가 되어 대대로 고통 받는 이들의 고난을 면해줌은 실로 성군의 행동일 것입니다.”
“신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남인에 속한 신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자기들이 오래 품어온 숙원이 드디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에 기쁜 모양이다. 옛날 조부 시절부터 남인들이 노비제 폐지를 주장한 배경에 종교 문제가 있었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크리스트교 사상에 따르자면 노예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장조 시절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대는 신자 개인이 소유한 노비를 해방하는 정도로 그쳤던 것이, 이제 노비의 숫자 자체가 격감하면서 반향을 걱정할 필요가 줄어들자 제도 자체를 폐지하자는 쪽으로 변화한 거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대부 중에도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은 꽤 많다. 평등사상에 공감하기도 하고, 노비제 자체가 별 효용이 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전하. 이제 나라에 남은 노비도 거의 없으니, 황명을 내려서 노비를 폐지해도 피해를 볼 사람도 없습니다. 부디 세상에 성인의 도리가 흐르게 하소서.”
“아닙니다. 엄연히 세상의 질서가 있사온데 어찌 섣불리 손을 대려 하십니까. 이는 깊이 생각하고 논의한 뒤에 결정할 일입니다.”
한발 늦게나마 반대하고 나서는 이들도 많았다. 나도 이 자리에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지금 나서서 말다툼을 벌이지는 않았다.
“알고 있소. 부황께서 돌아오시면 조정에서 이런 논쟁이 있었다고 말씀드린 뒤에 지시를 청할 것이오.”
혹시 반발이 심해서 노비제 폐지가 당장은 곤란하다면, 대신에 노비세를 더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해결책일 듯하다. 지금 1년에 50냥이니 한 80냥쯤으로 올리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