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21
4부 205화(1821화)
18.
태황은 금강산, 아니 풍악산 구경을 마치고 스무날 만에 아주 즐겁게 돌아왔다. 그 뒤를 따라 열차에서 내리는 황빈의 얼굴이 어째 붉게 상기된 게 영 수상쩍다. 아니, 저 양반들이 내리기 직전까지 기차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거지. 경희궁 안에는 전용 열차역이 따로 있다. 그래서 중간에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다른 역에 내리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전용열차 안에서 떡을 치든 방아를 찧든 상관은 없는데, 그래도 내리기 직전까지 저러고 있으면 체통이……
“편안히 다녀오셨사옵니까, 아바마마.”
“오냐.”
깊이 생각해봐야 내 속만 끓을 것이기에 그냥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냥 눈 감고 넘어가자. 어디, 신경 쓸 일이 그거 하나뿐이더냐.
“황빈이 다행히 마음을 돌렸다. 선뜻 현순옹주를 하와국에 보내겠다고 하니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니냐.”
태황을 따라 침실로 들어가니 대뜸 그 이야기부터 했다. 제일 총애하는 후궁이라 그런지 황빈에게는 은근히 신경을 많이 쓴다. 태황이 황빈에게 안겨주는 패물의 양을 보면 중전이 받는 양을 능가한다. 황빈이 몸에 휘감고 다니는 보석, 모피, 비단 등등을 보고 있으면 황빈이 미주 출신이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만약 본국 세도가 출신이었다면 그 위세를 과연 누가 담당했을까. 황빈 소생 황자를 태자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관연 없었을까?
비궁이 궁에서 모아온 소문에 따르면, 모친인 순원황후가 사고로 급사하자 황빈 측에서 태자비 자리를 욕심내기는 했었다고 한다. 태황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었으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허탕이 되었다. 일단 친정 쪽 배경이 부족했다. 미주 출신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위기가 여전한데 계비라고는 해도 태자비, 그리고 장차 중전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둘째는 조부의 분노였다. 조부는 품행이 방정한 새 태자비를 들여서 태황의 못된 습관을 조금이나마 바로잡고 싶어 했다. 태황과 죽이 맞아 어울려 지내는 기존 후궁들을 태자비로 올리면 태황이 버릇을 못 고치고 놀아날 텐데, 그렇게 놓아둘 리가 있겠는가. 다만 그런 의도와는 별개로, 새 태자비로 들어온 중전은 조부의 소망을 전혀 이루어주지 못했다. 태황이 무슨 짓을 하며 놀건 눈 딱 감고 외면했으니까 말이다. 괜히 잔소리질이나 퍼부었다간 자기만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될 거라는 눈치를 깨닫고 한 일이겠지만.
눈치가 빨랐던 덕분에 중전은 태황에게 존중받는 아내가 되어 편히 잘살고 있다. 황빈이 받는 것보다는 덜 받아도, 패물도 아쉽지 않을 만큼은 받고 말이다. 조부야 생전에 중전의 그런 태도를 마땅치 않아 했건만, 평생 같이 살 사람이 누굴지 생각하면 중전이 현명했다.
“황빈께서 선뜻 받아들이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바마마.”
태황이 환궁한다는 연락을 받고 준비해두었던 자료로 간략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젠 이것도 익숙해졌구나 싶어서 왠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백 년 동안 브리핑을 받기만 하던 내가 이제 아주 능숙하게 브리핑을 준비하게 되어버리다니. 태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동안 조정에서 진행된 사안에 관하여 보고를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보고 내용이 노비제 폐지 문제까지 갔다.
“…..하여, 이만 우리 대한에서도 노비를 철폐함이 어떨까 하옵니다. 비록 잉글국과 우리는 예의와 도덕에서 다소 차이가 있으나, 도덕이란 본래 궁극적인 경지로 오르면 서로 통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실리적으로 보아도 노비를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노비들을 해방해도 현재 하는 일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국유지를 경작하던 이들에게는 소작 계약을 무기한으로 체결해주고, 관아에서 일하던 자들에게는 종신 고용을 보장해 준다. 그리고 그 권한은 자식 중 1명이 세습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 정도면 충분한 조건이다.
“지금 공노비로 있는 자 중에도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을 터이니 그자들은 원하는 일을 하도록 허용하고, 혹시 빈자리가 생겨 인원이 더 필요하면 공모를 거쳐 뽑으면 됩니다.”
내 말을 들은 태황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공노비를 없애면 궁녀는 어디서 뽑을 생각이냐?’
“양인 중에 지원하는 이를 뽑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궁녀가 천하게 취급받는 데는 궁녀들 대부분이 입궁 전에 본래 공노비였다는 점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양인 출신 궁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니, 전면적으로 양인 출신을 뽑으면 되는 문제다. 그나저나 노비제 폐지에 관한 제안을 듣고 대뜸 꺼내는 주제가 궁녀 선발이라니, 이거야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그나마 두 번째 질문은 그래도 임금으로서 낼만 한 주제였다.
“하수구 청소 같은 더러운 일을 공노비가 아니라면 누가 하겠느냐?’
“하수구를 청소하고 서울 시가지에서 수거한 인축(人畜)의 분뇨를 초전에 가져다 붓는 것 같은 힘겹고 지저분한 일을 하려는 이가 많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힘들면서 더러운 일에 대하여 그만큼 높은 보수를 치른다면 어찌 응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아무리 더러운 일이라도 보수만 넉넉하면 누군가는 한다. 그리고 여차하면 최후의 수단도 있지 않은가.
“정 사람을 구하기 힘들면, 한공이나 묘노를 투입해서 일을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청나라가 처음 한공을 보냈던 건 교역에 필요한 대금을 치를 수단이 부족해서 그 대신 인력수출을 보낸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청나라도 국내에서 경제개발을 추진한 덕분에 사람으로 물건 값을 치를 필요는 없어졌다. 농산물이나 공업제품이 우리한테 넘어온다. 그래서 요즘 한공은 청나라 조정이 뽑아 보내는 파견노동자가 아니라 정말로 자기 의사로 건너온 이주노동자다. 그래서 지난번 영등포 호떡집 조인처럼 여기 눌러앉는 사람도 나오는 거다. 예전에는 계약 기간이 끝나면 무조건 송환이었다.
묘노는 물론 다르다. 묘노들은 후송 각지에서 계약 노동자 형태로 들어와서 우리 본국에 발을 디디는 즉시 서류상으로 면천되고 대신 빚더미를 뒤집어쓴다. 이들의 처지야 노비제가 폐지되건 말건 변할 게 없으니, 험한 일을 시키기에도 한층 더 유리하다. 그러고 보니까 한공들도 예전보다 상황이 나빠진 부분이 있다. 예전에는 청나라 조정에서 직접 노동자들을 모아 파견했으므로 청나라 조정이 그 안위를 책임졌었다. 우리 조정에서도 우리 최고의 우방인 청나라 측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공들을 조심스럽게 대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청나라 조정이 아니라 일반 상인들이 개별적으로 사람을 모은 다음 우리 내무부에 입국 신청을 한다. 이는 한공들이 청나라 조정의 신변 보호를 예전처럼 엄중하게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물론 출신이 다르니까 묘노처럼 함부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래도 하수도 청소 정도라면 야 거리낌 없이 할 거다.
“흠, 네 말이 틀리지 않구나.”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이던 태황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좋다는 뜻인지 크게 미소를 지었다.
“좋다. 다 없애자꾸나. 공노비고 사노비고 내수사 노비고, 다 없애버리지 뭐. 천하 세상의 대세가 노예를 없애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어찌 우리가 옛 관습을 빌미로 삼아 꼭 필요한 것도 아닌 제도를 유지하겠느냐.”
노비들이 하던 일은 사람을 고용해서 시킨다. 노비가 될 만큼 큰 죄를 지은 자는 노비가 되는 대신 양인 신분을 유지하면서 평생 도형수로 둔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그런데 태자야. 죄지은 자를 노비로 만드는 법을 없앤다면 연좌제를 폐지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하였느냐?”
“물론입니다, 아바마마.”
장조 때부터였던가. 연좌제 범위를 축소하려고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래서 지금은 당사자의 배우자와 부모, 혼인하지 않은 자녀 정도로 적용 대상이 줄어들었다. 이제 시대도 바뀌는데, 연좌 대상이라고 해서 죄인과 함께 북변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연좌하되 과거시험 응시가 제한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노비제 폐지 논란 자체가 더 세간의 눈길을 끄니, 당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수십 년 전부터 폐지를 주장해 온 대소 신료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설 테니, 그 정도 문제는 묻힐 거라고 소자는 생각합니다.”
“좋다. 그럼…..내년 봄에는 노비제를 없애는 방향으로 가보지. 어차피 반발도 없을 것이다. 곁에 두던 노비를 정 내보내기 싫은 자라면 그동안 노비세로 내던 돈을 노비에게 봉급으로 주면 될 테니까.”
1년치 노비세 50냥이면 보통 농민 한 가정의 1년 수입의 열 배에 가깝다. 그만한 돈이면 고용되고 싶다는 사람이 줄을 설 터, 굳이 노비를 둘 필요가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 그 문제는 이제 되었고, 내가 네게 의논하고 싶은 게 있다. 이번 현순옹주의 국혼과 관련된 일이다만.”
“하명하시옵소서.”
“현순옹주를 보내는 일로 내가 황빈을 구슬리다가 약속을 한 가지 했다.”
“어떤 약속이시기에 소자에게 의논하고자 하시옵니까?”
“하와국까지 타고 갈 배를 한 척 내가 따로 내주기로 하였지. 결혼 선물 겸 혼수로.”
“마땅히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옵니다만…….”
새 부마의 신분이 하와국 왕세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배 한 척 정도쯤은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 말을 듣는 순간에는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뭐? 아산 조선소에서 막 건조한 최신 함선을 결혼 선물로 준다고?!
19.
십년감수했네.”
교동도는 우리 해군 최강의 함대, 중부통제영의 본영이다. 주변 바다 깊이가 얕아서 정작 대형함은 부두에 대지 못하고 난바다에 정박해야 하지만, 여기가 본영인 건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교동도 앞바다에 있는 진짜 최신 전함, 3천 톤급 장갑함 구경(九經)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태황과 주고받은 대화 생각이 났다. 정말 놀랐었다.
“아바마마. 아무리 하와국이 중요한 번국이고 현순옹주가 아바마마의 사랑하는 딸이라고 하나 구경과 같은 큰 전선을 내줄 이유는 없지 않사옵니까? 해군부에서 그 배를 건조하는데 들어간 막대한 비용을 생각하시옵소서. 그리고 하와국은 그런 배를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하와국에서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배가 3백 톤이었던가? 그런데 난데없이 3천 톤급 대선이라니, 말도 안된다. 아무리 황빈이 예뻐도 이건 도를 넘었다. 내가 아무리 하진교를 소중한 친구이자 아우로 여기지만, 그건 안 된다고 격렬한 반대를 내세우니 태황이 미친놈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 던졌다.
“내가 새로 나온 배를 주겠다고 하기는 하였으나, 그게 구경이라고 누가 그러더냐? 내가 주려고 생각한 배는 동륜(同倫)이니라.”
동륜은 3백 톤짜리 외륜선이다. 속도가 꽤 빠르고 크기에 비해 무장도 충실한 편이어서 하와국 같은 곳에서 장비하기에 퍽 유용한 배이긴 했다. 태황과 내가 서로 다른 배를 두고 입씨름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입이 콱 막혔다.
“아…..그, 그러셨습니까. 송구하옵니다.”
착각이 생긴 원인은 ‘막 건조한 최신 함선’이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내 생각보다 긴장하고 있던 나는 그 표현을 ‘정말로 가장 최근에 완성한 배’라는 뜻으로 들어서 곧바로 이 구경을 떠올려버렸다. 알고 보니 태황은 대충 최근에 나온 배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동륜은 성능은 좋으나 그 외는 그냥 평범한 목조 외륜 기선이다. 하지만 구경은 다르다. 이 배도 외륜선이기는 하지만, 외륜을 포함한 선체 전체를 4치두께의 장갑판으로 둘러싸고 갑판에는 무려 최신형 100근 포를 2문, 40근 포를 12문, 그 이외에 소구경 속사포도 다수 탑재했다. 해군이 정성을 다해 건조한 우리 해군 최강의 전투함이다.
“동방에서 이 배를 상대할 배는 없습지요.”
내 수행원 노릇을 맡은 중부통제영 소속 군관이 자랑스럽게 공언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중부통제사가 직접 골라 보냈을 정도이니 유능한 인재이긴 하리라.
“송나라 철갑선도 이 배에는 상대가 안 될 겁니다. 놈들이 쏘는 포탄은 우리 선체를 뚫지 못하고, 우리 포탄은 놈들의 선체를 뚫어 단박에 불쏘시개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군관이 강조하듯, 우리 해군은 그간 장갑함 건조에 신경을 썼다. 비록 당장 싸울 일은 없더라도, 훗날까지 우세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옆에 늘어선 전열함들도 만만찮다. 범장(帆檣)인 전열함들은 여전히 목선이지만, 우리는 이 선체에 장갑판을 추가해서 장갑 전열함으로 만들었다. 이제 동방에서 우리만 작열탄을 사용하는 게 아니니, 충분한 방호대책이 필요해서다.
이런 대형선에 스크루를 장착할 수 있게 되면, 이 장갑 전열함들은 개조를 통해 스크루를 장착하고 기범선으로 쓸 수 있다. 물론 그건 과도기적인 조치고, 얼마 안 가서 순수한 철제 함선으로 교체되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쓸 만한 전함을 결혼 선물로 받으면 하진교 그놈이 그 배로 뭘 할지 모르겠다. 혹시 남양으로 원장항해를 나갈 때 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