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27
4부 211화(1827화)
10.
왕위 계승자에게는 배워야 할 게 많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을 바라보는 빅토리아 공주의 수업 시간표도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에다 음악, 역사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잠시 휴식할 짬을 얻은 공주가 의자에 앉아 푸념했다.
“후우, 사람이 이렇게 하루 종일 공부만 하면서 어떻게 살지.”
빅토리아 공주는 모친인 켄트 공작부인이 ‘훌륭한 군주가 되려면 한국 황실만큼은 공부에 시간을 써야 해!’ 라면서 통제하는 바람에 공부 말고 다른 활동은 하나도 못 하고,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그런 까닭으로 어머니에 대한 앙심이 깊다.
“내가 여왕으로 즉위하면, 어머니를 당장 궁정에서 추방할 테야.”
모친도, 모친에게 동조해서 자신을 한국식으로 공부시키는 모친의 심복 존 콘로이도 모두 혐오스러웠다. 그들 모두 공주에게는 억압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내가 남자였으면 좀 더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지금 왕위에 있는 백부 윌리엄 4세부터가 젊은 시절을 마음껏 자유롭게 보낸 사람이다. 자기도 만약 남자였으면 백부처럼 자유롭게, 아니 세상을 구경하러 나라 밖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었으리라. 그랜드 투어, 부유층 청년들이 세상을 보고 견문을 넓히러 가는 여행, 옛날에는 프랑스를 지나 이탈리아 로마까지 가는 게 보통이었다. 좀 더 멀리까지 가보고 싶은 이들은 독일가지 갔다가 돌아왔다. 나중에는 러시아에 가보는 이들도 나왔다.
세계가 넓어지면서는 이들이 여행하는 범위도 더 넓어졌다. 아메리카나 인도, 아시아까지 가보는 이들도 있다. 이쯤 되면 일상적인 그랜드 투어가 아니라 그냥 장거리 모험 여행으로 봐야겠지만 말이다. 빅토리아의 공부방 책장에도 그런 여행기 몇 권이 꽂혀 있었다. 가끔 세상이 궁금할 때면 하나씩 꺼내 읽곤 했다. 모친은 딸이 그런 책을 읽으며 밖에 나가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의 모험적인 여정(Adventuring expedition)』, 이게 가장 재미있었는데.”
4개나 되는 대문자 A로 강조한 책 제목이 눈에 띄어 골랐던 책, 이건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노퍽에서 새 농법을 연구하며 살고 있는 초대 레스터 백작, 토모스 코크의 저서다. 백작은 본래 부유한 평민 집안 출신으로, 17세였던 1771년에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본래 코크는 당장 여행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이튼을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던 그에게 가문의 재산을 쥐고 있던 고모할머니가 제안했다. 만약 네가 ‘악덕의 소굴’인 대학에 간다면 한 푼도 안 주겠지만, 여행을 간다면 매년 5백 파운드를 주겠다고.
고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코크는 당장 짐을 쌌다. 그리고 5년 동안 세계를 누비고 돌아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건너갔다가 인도, 동인도 제도, 한국, 카타이, 일본을 방문하고 다시 미주, 누에바 에스파냐, 뉴잉글랜드 식민지를 거쳐 귀국했다. 토머스 코크 이전에는 이렇게 세계를 여행한 영국인이 없었다. 상인이나 뱃사람이 일하러 간 사례야 많았지만 순전히 ‘여행’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온 일반인은 코크가 최초였다. 더구나 코크는 돌아오자마자 여행기를 출간해서 세간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코크는 당시 국왕 조지 3세에게는 미움을 샀다. 그가 전부터 품고 있던 소신에다 뉴잉글랜드 식민지를 방문한 경험이 더해지면서 미국 독립을, 아니 엄밀히 말하면 양국의 ‘평화와 화해’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 3세는 죽을 때까지 코크를 싫어했다. 국왕에게 미움을 샀어도 코크는 정치가이자 농정 개혁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귀족 작위도 받아 레스터 백작이 되었다. 그런 사람의 저술이다 보니 이 여행기도 지금껏 인기가 좋다. 빅토리아도 두 번이나 읽었다.
“보고 싶다…..세상 반대편, 그래도 한국에는 안 갈 거야. 레스터 백작은 무척 재미있었다고 했지만, 나는 싫어. 어머니 때문에 한국이라는 말만 들으면 진절머리가 나.”
레스터 백작이 한국을 찾은 건 1774년 봄이라고 했다. 그때 한국 임금은 기사왕의 손자 철도왕이었다. 철도왕이란 재위 중에 대대적으로 철도를 부설했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다. 본래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개항장과 수도 한양만 왕래할 수 있다. 다만 백작은 돈을 내고 동인도회사 사원증을 발급받는 편법으로 이를 회피해서 한국 국내를 여행할 수 있는 6개월 기한부 특별 허가증을 받았다. 그리고 신나게 여행을 즐겼다.
잘 깔린 철도망 덕분에 한국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가보았다. 독립 공국인 심왕부에 갔을 때는 한양에 있는 동물원보다 더 크고 화려한 동물원도 보았다. 호랑이와 사자, 표범, 검고 희고 갈색인 세 가지 곰이 모두 있는 동물원은 유럽에도 없었다. 여기서 국경을 넘어 아시아 유일의 기독교 국가인 카타이까지 방문했다. 거기서는 라틴어 성가를 합창하는 몰골인 기병대라는 참 상상도 하지 못할 존재를 직접 보고 오기도 했다.
한양에 돌아와서는 서양식 왕궁도 구경했다. 진짜 동인도 회사 직원들이 임금을 알현하러 입궁하는 길에 슬쩍 따라붙어서 건물과 정원은 물론 그 안에 장식된 온갖 미술품도 구경할 수 있었다. 빈 전투 당시 사용했다는 기사왕의 갑주와 검도 있었다. 동인도회사 상관장의 연줄 덕분으로 한국 왕립대한 대학생들과의 토론 같은 경험을 치르고서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배에 올라 다음 여행지인 일본으로 갔다고 했다.
“한국은 가기 싫지만, 뉴홀랜드는 어떤 곳인지 조금 궁금하네, 우리 식민지니까.”
공주는 책장 위에 있는 지구본을 손가락으로 돌려보았다.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나갈 수 있다면 참 멋질 듯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해군에서 배 한 척을 세계 일주에 내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레스터 백작의 여행과는 반대 방향, 서쪽으로 갔다고 들었다. 비글호라고 했던가? 지질학 조사를 하러 남아메리카로 간다면 그 배는 지금 어디 있을까 벌써 플리머스로 귀환했을까? 아직 세상 반대편 어딘가에 있을까?
공주의 공상은 가정교사인 레첸 여남작이 방으로 들어오면서 중단되었다. 휴식은 끝났고, 다시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11.
루이 19세는 모든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절대군주로서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려면 뒷전에 앉아 위세나 부릴 게 아니라 통치자로서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루이 14세 시절처럼 부와 권위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왕권을 과시할 때가 아니다. 한국 임금들처럼 온종일 일하는 능력으로 군주의 능력을 입증할 때다. 오늘도 그랬다. 그런데 국왕의 얼굴이 오늘따라 무척 밝았다. 형식적인 개회사를 끝내고 난 루이 19세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대신들에게 낯선 젊은이 한 사람을 소개했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안건이 있소. 외무성에서 올라온 이 제안을 그대들과 함께 검토해 보고자 하오. 제안자가 아주 젊은 청년이긴 한데, 그 착상이 무척 뛰어나고 우리 프랑스에 큰 영광과 이익을 안겨줄 수 있을 듯하여 그대들에게 직접 설명하라고 불러올렸소.”
“영광입니다, 국왕 폐하.”
회의에 임한 대신들은 고작 서른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대체 무슨 제안을 했기에 국왕이 이토록 흥분했는지 궁금했다. 대신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물리자 제안서 뭉치를 손에 쥔 청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긴장했는지 청년의 목구멍에서 제대로 된 음성 대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풋 하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지만 누가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낯이 더 빨개진 청년이 잠시 헛기침하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는….페르디낭 마리 레셉스라고 합니다. 최근까지 이집트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그곳에서 깨달았습니다. 동양으로 가는 항로의 주도권을 우리가 쥘 방법을요.”
“그게 뭐요, 무슈 레셉스?”
질문을 받은 레셉스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직속상관인 외무대신은 뭔가 좀 미심쩍다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의 제안을 국왕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국왕은 기가 막힌 착상이라면서 기뻐해 주었다. 과연 이 대신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운하를 파는 겁니다. 지중해에서 홍해로 통하는 운하를, 수에즈 지협에 말입니다. 거기에 운하를 판다면, 마르세유에서 인도까지 가는 항로가 1/3로 줄어듭니다. 엄청난 이득이지요. 영국을 앞지르고 동양 무역의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레셉스는 운하가 열어줄 수 있는 화려한 미래를 열과 성을 다해 펼쳐 보였다. 대신들도 그의 발표를 집중해서 들었다. 하지만 레셉스가 기대했던 것만큼 열광적인 환영이 나오지는 않았다. 먼저, 이런 질문이 나왔다.
“수에즈 지협은 이집트 영토인데, 이집트 측에서는 그 제안에 관해 어떤 반응을 보였소? 이집트의 종주국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집트는 본래 오스만 제국에 속한 일개 지방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한바탕 전란이 휩쓴 이후로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졌으나, 술탄에게 이를 진정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된 알바니아인 장군 메흐메트 알리가 이를 평정하고 이집트 총독이 되었다. 술탄의 의도야 메흐메트 알리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총독이 되는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메흐메트 알리는 술탄에게는 형식적인 충성만 바치면서 이집트를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는 실질적인 군주가 되었다. 칭호만 왕이 아니라 총독일 뿐이었다.
메흐메트 알리의 지위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진압군을 파병하면서 더 확고해졌다. 술탄은 이집트 총독의 지위를 세습하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이집트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영국ㆍ프랑스ㆍ러시아가 함께 개입하는 바람에 반란 진압에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도 술탄에게는 이집트를 제압하고 메흐메트 알리를 축출할 힘이 없었다. 지금 메흐메트 알리는 그리스에서의 패배를 추스르고 어서 힘을 회복하고자 진력하는 중이다.
“이집트 측과는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도 당연히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은 제 착안일 뿐입니다.”
레셉스의 대답을 들은 상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이 계획은 탁상공론이잖소. 땅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로 운하를 팔 사업 계획을 꾸미다니. 숲을 모르는 자가 쓸데없이 숲에 가는 격이로군.”
‘숲을 모르는 자가 쓸데없이 숲에 간다’라는 말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이가 멋대로 나서면 일이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레셉스가 외교에도, 토목에도 경험이 부족한 주제에 그 큰 사업에 욕심을 냈다고 비웃는 거였다.
“하지만 각하, 이 운하는 정말 혁명적인 시설이 될 겁니다. 유럽과 아시아가 아프리카를 거치지 않고 왕래할 수 있게 된다고요.”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땅 주인의 허락은? 거기 들어갈 비용은? 그건 어떻게 할 거요?’
프랑스가 이집트와 전쟁을 치른 게 바로 몇 해 전이다. 영국 및 러시아와 연합한 프랑스 함대가 이집트 함대를 박살냈다. 그 덕에 패배 직전이던 그리스 독립군이 살아났고 이집트 측은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그 원한이 벌써 사라졌을 리 있겠는가. 이집트로서는 프랑스에 득이 되는 사업을 허락할 생각이 없으리라.
“그 점은 생각해보았소, 무슈 레셉스? 그 운하, 아무래도 현실성이 부족한데.”
이제 막 운하에 관한 아이디어를 냈을 뿐인 레셉스로서는 해답을 낼 수가 없는 문제였다. 프랑스 왕국 전체가 나서도 시간이 걸릴 문제를, 일게 공무원일 뿐인 그가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다행히 그 시점에서 국왕이 끼어들어 그의 곤란을 구해주었다.
“그대들도 레셉스 군의 발상이 참으로 놀랍고 획기적이라는 사실만은 인정하겠지. 아쉬운 건 방금 지적받았듯이 현실성이 좀 부족하다는 것인데, 그건 추후 보완하면 되지 않겠소?”
이집트 총독 메흐메트 알리는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이다. 구원(舊怨) 따위에 얽매일 리가 없다.
“우리가 이집트 측에 줄 수 있는 이익을 제시하면서 총독에게 운하 계획을 설득해봅시다. 총독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것, 콘스탄티노플로부터의 실질적인 독립과 세습 완조의 창설 같은 걸 우리가 도와줄 수 있다고 말이오.”
루이 19세가 왕위에 오른 지도 어느덧 10년이다. 실패를 거듭하던 20대 젊은이는 이제 33세가 되었고, 상당한 통치 경험도 쌓았다. 두 차례에 걸친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자신감도 솟았다. 이제 뭔가 대사업을 벌여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루이 14세께서도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미디 운하(Canal du Midi)를 건설하셨고, 그 운하는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소. 그 후손인 내가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새 운하를 건설한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겠소?”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국왕의 뜻이 모든 법률에 우선한다. 루이 18세가 선포한 흠정헌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 헌법에 직접적으로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어떤 결정도 시행할 수 있다. 이집트에 운하를 건설한다?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하들은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폐하, 그러자면 불비한 조건이…….”
앞서 거론된 문제들 외에도 또 문제가 있다. 아직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있는 바르바리 해적이다. 수백 년 동안 지중해의 골칫거리였던 그놈들이 아직도 살아있다. 물론 요즘은 옛날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다. 해적의 수 자체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해적들은 여전히 수시로 양민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삼고 있다. 지중해 항로의 안전을 위해서도, 기독교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놈들을 박멸해야 할 당위성은 충분했다.
“이참에 그놈들도 토벌하면 되겠군. 병력은……”
호기 있게 선언하던 루이 19세가 잠시 망설였다. 알제리 원정을 감행하려면 적어도 몇 만 명의 병력을 파견해야 한다. 하지만 루이 19세가 쥐고 있는 정규군 병력은 고작 20만 명에 불과했다. 여기서 알제리 원정군을 차출하면 정권이 위태로워질지도 몰랐다. 국내에는 아직도 공화주의자들과 보나파르트 추종자들이 남아있다. 이들은 왕의 군대가 약해졌다고 생각하면 또 봉기할 위험이 있었고, 이 문제 때문에 그리스 독립전쟁을 지원할 때도 육군을 보내지 못하고 함대만 파견했었다.
“폐하. 그러니 이 계획은 일단 미루시고…..”
“군대를 늘리면 되겠군. 한 4만 명쯤.”
신하들이 여러 여건상 진행이 어려우니 운하 계획은 일단 보류하자고 하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국왕은 ‘병력이 부족하면 병사를 더 뽑으면 된다’라는 간단한 주장을 내세우며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폐하, 갑자기 군대 규모를 20%나 확대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돈은 마련하면 되는 법이오. 혹시 증세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국채를 발행하시오. 우리가 한국도 아니고, 국채 좀 발행한다고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지 않소.”
국채 발행을 터부시하는 한국 정부의 성향을 유럽에서는 참 신기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대전쟁 이후 국채 시장도 꽤 안정되어 국채 총량만 잘 관리하면 문제가 될 게 없는데 계속 꺼리니 말이다. 좀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어딘가 답답한 태도다.
“그 정도 푼돈은 운하만 완공한다면 거기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얼마든지 벌충할 수 있소. 얼마나 많은 배가 그 운하를 이용하려고 줄을 서겠소?”
물론 통행권 1순위는 프랑스 배들이 받을 거다. 큰 수고와 비용을 들여 운하를 열었으니 마땅히 그 보상을 받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