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32
4부 216화(1832화)
17.
“내년도 올해만 같아라!”
“천세!”
조홀국 수도 제홀(制?)에 있는 왕궁에서는 질펀한 잔치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왕명으로 새로 지은 서양식 궁전, 태서궁(泰西宮)의 낙성 축하연이다. 앞서서 연회를 주도하는 사람은 이 궁전을 지으라고 명한 조홀국왕 정윤진이다. 정윤진은 선대 국왕 정인선 – 본국에서 충정왕(忠貞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의 장자로, 원평 45년(1827)에 노환으로 사망한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나이는 올해로 마흔넷이다. 살아서 어른이 된 선왕 정인선의 자녀는 총 4남 4녀다. 그중 중전 궁본씨(宮本氏) 소생 적자녀가 절반인 2남 2녀다. 정윤진은 이 팔남매 중 가장 맏이다.
“우리 조홀국의 번영을 위해 다들 고생이 많았소. 그대들 모두 마음껏 드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천세, 천세.”
정윤진은 올해도 두둑한 돈이 국고로 들어와 기분이 좋았다. 이건 근래 들어 조홀국에서 본국으로 가는 주석 수출이 엄청나게 늘어난 덕분이다. 본국에서 석관식 생산이 급증하면서 깡통 원료인 주석의 수요가 폭증했다. 주석은 예로부터 비싼 물건이라, 예전에도 일용품 제조에 사용하거나 청동 생산에 원료로 쓰는 등 상당한 수요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처럼 그 수요가 폭증할 일이 있을 줄은 정말 아무도 몰랐다. 그것도 매년 수요가 더 늘고 있다.
덕분에 주석에 부과하는 수출세로 조홀국의 금고는 풍족해졌다. 그만큼 정윤진이 멋대로 쓸 수 있는 돈도 많아졌고. 정윤진은 남아도는 돈을 사치와 향락에 아낌없이 퍼부었다.
‘전하. 선황께서 늘 하셨듯이, 병(兵)을 기르고 산업을 권장하는 데도 돈을 넉넉히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정 신하 중에는 정윤진에게 사치보다는 선왕 정인선처럼 나라를 발전시키는 일에 돈을 쓰라고 달래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정윤진은 코웃음을 쳤다.
‘땅을 파기만 하면 주석을 캘 수 있고, 벼는 심기만 하면 거둘 수 있고, 지나가는 배들이 항구에 들어오게만 하면 입항세가 들어오는 이 나라에서 왜 굳이 따로 돈을 써 가며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한단 말이오?’
심지어 국가 발전의 근본인 철도조차 놓지 않았다. 조홀국 내부에 부설된 철도는 오로지 주석광산과 항구를 연결하는 노선뿐인데, 그것도 죄다 선왕 시절에 부설한 것이었다. 추후 예정돼있던 추가노선 공사는 전부 최소 됐다. 군대에 돈을 쓰자는 제안 역시 마찬가지로 거부당했다. 정윤진은 군대 양성에 따로 돈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우리 군대는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외적이 바로 우리 수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정도면 충분하오! 해사도에 있는 천병이 우리를 지켜주는데, 무슨 걱정이오?’
조홀국 수도 코앞에 있는 해사도에는 상국인 대한에서 파견한 군사들이 늘 머물고 있다. 적어도 30척에 달하는 대소함선들과 8천에 달하는 육해군 군사들이 늘 주둔하는 요지가 바로 해사도다. 해사도에 주둔한 대한군은 해협을 지나는 항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물론 유사시에 조홀국을 지원하는 것도 이들의 임무였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든든한 힘이 되기에 아직 실제로 나서서 싸울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남쪽의 숙적 아체도, 안심할 수 없는 이웃인 북쪽의 섬라도 해사도와 안남에 각기 주둔한 대한군의 힘을 두려워해서 조홀국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조홀국이 굳이 대군을 유지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선왕인 정인선은 해사도에 대한군이 주둔하고 있는데도 자기 휘하에 3만 명의 상비군을 별도로 유지했다. 이만한 병력은 있어야 유사시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정윤진은 지난 6년 동안에 그 숫자를 1/3로 줄여버렸다. 조홀국 인구가 백만이 안 되는데 군사만 그렇게 많아서 뭣에 쓰느냐며, 지금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이다.
‘우리 조홀국에 적이 어디 있느냐? 위협적인 적도 없는데 병비를 굳힌다면 되려 상국에서 우리를 의심하지 모른다. 혹시 양이(洋夷)와 손을 잡고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정윤진은 이런 논리로 군비를 줄였다. 감축된 병사들은 대부분 오래 복무한 탓에 급료가 비싼 고참 왜병들이었고, 이는 당연히 조홀군의 전략이 급격히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군대의 주축을 날려버렸는데 어떻게 전력이 유지되겠는가. 다시 고용할 수도 없다. 이 숙련된 용병들은 대부분 곧바로 다른 나라로 떠나버렸으니까. 덕분에 술루나 안남, 내달령 동인도 등 주변국들이 횡재를 했다. 아예 동쪽으로 멀리 떠나 신불랑으로 가버린 자들도 꽤 있었다.
이렇게까지 군비를 아껴서 남은 돈은 당연히 죄 사치에 들어갔다. 이 태서궁 외에도 여러 전각을 새로 짓고 후궁을 줄줄이 들였으며, 이들의 환심을 사느라 비싼 의복과 보석을 마구 사들였다. 다른 사치는 말할 것도 없다. 선왕인 정인선이 아끼던 중신들은 당연히 이런 정윤진의 통치를 마땅찮게 여겼다. 하지만 정윤진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되레 부왕을 보필하던 노신들을 거의 쓸어내고 자기 입맛에 맞는 신하들로 조정을 채웠다. 그리고 그저 주지육림을 누릴 뿐이었다.
“전하의 치세는 말 그대로 태평성대입니다! 부디 만수무강 하소서!”
“주상 전하 천세! 천세!”
“그대들의 충성을 내 늘 갸륵히 여기는 바요!”
진수성찬이 탁자 위를 채우고 향기로운 술이 넘쳐났다. 시중을 드는 미녀들의 교태 어린 웃음소리가 주변을 채웠다.
“아체 놈들은 지난달에 대지진이 일어나 쑥대밭이 되었다지? 그게 다 천벌이오. 알라인지 뭔지 하는 괴력난신이나 믿고 있으니 그따위 꼴을 당하지!”
“옳습니다!”
지난 10월 14일, 양력으로는 11월 25일에 아체가 있는 수마트라섬의 인도양 쪽 기슭에서 지진이 일어나 그쪽 해안이 쑥대밭이 되었다. 지진이 동쪽 기슭에서 일어났다면 조홀국에도 피해가 컸겠지만, 무사했다. 여기서도 하늘이 조홀국을 지켜주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자, 그러니 신나게 마시고 즐깁시다. 다들 외치시오. 자, 내년도 올해만 같아라!”
“내년도 올해만 같아라!”
함성과 함께 술잔을 든 손이 하늘로 쭉 뻗었다. 진심으로 태평성대를 즐기는 몸짓이었다. 다만 이 잔치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여기 동조하는 건 아니었다. 왕의 하나뿐인 동복동생 관탄공 정윤성과 세자 정호연은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18.
과거 디에고 1세 시대, 술루국에서는 군대를 총 8개 연대로 편제했었다. 인구는 고작 10만, 병력은 5천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연대 수가 훨씬 늘었다. 보르네오섬, 즉 볼내도 북동부 1/4가량을 정복하며 영토와 인구가 증가한 만큼 병력도 늘어났고, 당연히 연대 숫자도 늘었다. 지금 술루군에는 18개 연대로 편제된 3만 병력이 있다. 이중 상당수는 용병이다.
인구가 두 배나 되는 조홀국이 겨우 1만 명을 유지하는 데 비하면 인구 40만인 술루국이 3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보유하는 건 확실히 좀 과도한 규모기는 하다. 하지만 술루 왕실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국왕 가스파르 1세가 병사들을 사열하며 침착하게 공언했다.
“본래 우리 술루는 대한의 남방을 지키는 칼이자 방패였소. 수호자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힘이 있어야지.”
정식 혼인에서 태어난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위를 상속받지는 못했지만, 술루 왕국의 시조인 디에고 1세는 기사왕, 건흥제의 장자였다. 술루 왕실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그들의 자부심을 채워왔다. 물론 이를 빌미로 본국의 제위를 욕심내는 자도 없었다. 사생아에게 계승권이 없다는 건 동서양 어디의 상식으로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생아였던 디에고 1세에게 술루국을 영지로 주고 왕으로 봉해준 것만 해도 엄청난 배려였다.
다만 역대 국왕 중에 한양의 통제에서 벗어나 따로 독립하고 싶어 했던 이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선선대 국왕인 펠리페 1세가 그런 야망을 품었었다. 이미 핏줄도 많이 멀어졌는데, 한양에서 받는 책봉을 거부하고 완전히 독자적인 나라를 이끌어보겠다고 말이다. 그 욕심을 좌절시킨 계기가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선대 태황 원평제는 대군을 동원해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진주하고 프랑스 혁명정부가 범접하지 못하게 했다. 술루군에도 동원령을 내려서 3개 연대를 파견했다.
펠리페 1세는 그때 깨달았다. 만약 자기가 반기를 든다면, 지금 동인도 제도로 간 함대와 병력이 고스란히 술루로 몰려올 거라고. 그리고 술루국으로서는 그 압박을 당해낼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아무도 모르던 반란 계획을.
술루국 6대 국왕, 이원석 가스파르는 부왕이 생전에 은밀하게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욕심을 부렸던 걸까. 겨우 쉰 살이라면 딱 노망이 들거나 할 나이도 아니었을 텐데. 이제 겨우 스물여덟인 청년 군주로서는 조부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건흥제 옆에 있던 측근 중 측근의 후손을 조모로 두고 한인 출신 모친을 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했다니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스페인계 조모와 모친을 둔 자신도 그런 생각은 없는데 말이다.
“군사들의 훈련 상태는 어떤가?”
“완벽합니다, 전하. 내년 봄에 예정된 갈로도 출정에서 멋지게 솜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탈리아 연대 연대장 조르조 벨라르디 대령이 우렁차게 외쳤다. 각 연대는 디에고 1세 시대에는 실제로 정병들의 출신지에 따라 국가별로 연대를 조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는 못 하고 있다. 이탈리아 연대, 카스티야 연대라고 해도 실제 그 지역 출신자는 거의 없다. 지금은 장교와 병사 대부분이 술루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이다. 물론 신분 차이는 있어서 연대장을 비롯한 고위 장교는 거의 유럽계지만 중하급 장교나 하사관은 한인이나 일본인이 많다. 일반 병사들은 천주교도인 안남인이나 필리핀인들이 다수다.
덤으로 아예 왜병으로만 구성한 연대도 몇 개 있다. 조홀국이 군축을 진행하자 그쪽에서 해고된 병사 다수를 이쪽에서 고용하고, 그 김에 새 연대를 몇 개 구성해버렸다.
“대체 조홀국왕은 무슨 생각일까요, 전하.”
“나도 모르지. 아마 번신으로써 해야 할 의무를 잊어버린 모양일세.”
나폴레옹 전쟁으로 본국이 동인도 제도에 출병했을 때, 조홀국도 5개 연대 병력을 차출해 보냈었다고 들었다. 지금처럼 군대를 줄여버렸다가 그런 사태가 터지면 대체 어떻게 하려는 생각일지, 가스파르 1세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듣기로는 유지비가 부담스러워서 그랬다고 한다. 술루국보다 훨씬 넓어서 농사도 잘 짓고 광산도 많고 항구도 많아서 훨씬 부유한 조홀국이 겨우 3만 병력을 유지할 돈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 가지만,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하지만 정말 돈이 없다고 해도 방법은 있다. 본국에 지원을 청해도 되지 않는가. 술루국 역시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의 절반은 한양에서 받고 있다. 인구와 경제력에 비해서 병력이 많은 탓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그 대가로 갈로도를 비롯한 본국령 필리핀 남부 지역의 평정을 돕고 있다. 해사도에도 1개 연대가 상주한다. 뇌주 일대의 해적 토벌에도 일부 병력을 파견한다. 조홀국도 그렇게 해서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하지 않았을 뿐.
지금이야 한양에서 아무 말 없는 게 당연하다. 군대의 수를 늘리든 줄이든 그거야 번국의 내정이니까 번국의 내정 자치권을 중시하는 본국 조정에서는 아무 말 없을 거다. 하지만 그 인내는 조홀국이 번국으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끝나리라.
“우리 술루는 그럴 일 없다. 임금 폐하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까.”
“물론입니다, 전하.”
벨라르디 연대장이 허리를 숙여 군례를 올렸다. 그도 옛날 디에고 1세 시절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조상을 두고 있다. 젊었을 때는 선왕 아우구스틴 1세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어서 혹시 펠리페 1세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듣곤 했던 양반이다.
“그런데 한양에 계신 볼내공께서는 영 돌아오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런 모양일세.”
숙부인 볼내공 디에고는 가스파르보다 겨우 네 살 위다. 조모를 병으로 잃은 조부가 늙은 나이에 새장가를 들었는데, 그 혼인에서 얻은 늦둥이라서 그렇다. 부왕인 아우구스틴 1세는 어린 이복동생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지만, 가스파르의 모친인 왕비 발레리아는 디에고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자기 아들을 둘이나 어려서 잃은 모친에게는 아들들과 같은 연배의 시동생이 왕위를 빼앗아 갈 경쟁자로 보였던 까닭이다.
셋째인 가스파르가 다행히 무사히 자라자, 모친은 남편을 붙들고 시동생인 디에고에 대해 온갖 참소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끝없는 바가지에 지친 부왕은 결국 디에고를 본국으로 보내버리고 말았다. 자기와 어린 동생, 둘 다 지키기 위해서였다. 가스파르의 생각으로도 부왕이 숙부를 한양으로 보낸 건 잘한 일이었다. 모친의 성정으로 볼 때, 숙부가 계속 여기 라 이사벨라에서 지냈다면 몰래 독약을 먹여 죽여버리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가끔이라도 다니러 오시면 좋을 텐데요. 참 훌륭한 검객이셨는데.”
벨라르디는 옛날에 볼내공의 검술 스승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정도 깊지만, 모후가 너무 싫어하다 보니 제대로 연락도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대신 그대가 한양으로 만나러 가면 되지 않겠는가. 내년 봄에 한양으로 갈 정기 사절단 단장으로 넣어줄 테니.”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예정된 갈로도 출정은……”
“그거야 부연대장이 대신 출정하면 되지 않는가. 그대는 이미 네 번이나 연대를 이끌고 갈로도에 다녀왔으니, 내년에는 쉬어도 괜찮을 걸세.”
“감사합니다!”
아들처럼 챙기던 공작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벨라르디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내년 봄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