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37
4부 221화(1837화)
1.
‘코아 누이’ 호가 하와국 본섬에서 가장 큰 항구인 홀랄루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굴뚝에서는 아직 연기가 솟았다. 입항을 불허한다는 왕명이 내려와 항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기하는 탓이다.
“그러니까, 내가 세자가 아니라고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일찍 도착해서 모후의 영정에 인사를 올리고 모후의 명에 따라 맞아들인 최고의 신붓감과 그 태중에 있는 손자까지 산보이려고 뱃길을 서둘러서 찾아왔더니 세자가 아니라면서 들어오지 말라는 거다.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는가.
“그렇습니다, 태자.”
국사 윤호원의 지시를 받고 급히 달려온 죽은 왕비 칼레이아의 오빠, 즉 세자의 외삼촌인 카마우아와가 격하게 숨을 물아쉬었다. 한양에서 오래 머무르다가 지금 막 돌아오느라 본국 사정을 전혀 모르는 조카에게, 지금의 이 상황이 왜 초래됐는지 그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새 왕비께서는 늘 자기 소생인 쿠아이와 왕자님을 다음 왕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왕비께서 돌아가시고 자기가 중전이 되니 옳다구나 하고 기회를 잡았지요.”
“그 망할 년이?”
하진교는 옛날부터 카네카폴레이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어머니를 왕비 자리에서 끌어내릴 틈만 노리는 욕심 많고 교활한 년을 왜 좋아하겠는가. 당연히 그 소생 자녀들과도 사이가 안 좋다. 쿠아이와 역시 과거 비만하던 하진교를 보고 전혀 왕자답지 않다고 비웃고 놀려댄 패거리 중 하나였을 뿐이다.
“부왕께서는 저하께서 5년 동안 한 번도 귀국하지 않고, 모후께서 돌아가셨는데도 바로 귀국하지 않으셨다면서 불효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어찌 그런 불효를 용납할 수 있는냐며, 태어나서 한 번도 왕궁을 떠나지 않고 매일 효를 다하신 쿠아이와 왕자님을 세자로……”
“부왕께서 노망이 나셨구나!”
외숙부가 말을 다 끝낼 틈도 없었다. 격분한 하진교가 버럭 화를 냈다.
“카네카폴레이 그 망할 것! 내 그년이 부왕께 음탕하게 꼬리를 칠 때부터 알아봤지! 그 불여우 같은 것이 부왕을 유혹하여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리시도록 만들었군!”
‘불여우’가 뭔지 잘 모르는 카마우아와로서는 분노한 조카에게 맞장구를 치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자기가 할 말만 급히 했다.
“전하께서는 세자께서 한양에 눌러앉아 즐겁게 지내느라 돌아오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하고 폐세자를 선언하신 겁니다. 이렇게 돌아오신 줄 알면 분명히 결정을 번복하실 테니, 잠시만 화를 진정시키면서 기다리시면 어떻겠습니까?”
카마우아와의 말은 사실이었다. 국왕은 한양에서의 화려한 삶에 젖은 하진교가 하와국의 세자위 따위에 미련을 두지 않으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도록 왕비가 옆에 붙어서 계속 부추긴 결과이긴 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하진교가 상국의 공주를 아내로 데리고 돌아와 버렸다. 당연히 왕궁이 발칵 뒤집혔다. 지금 왕궁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를 두고 혼란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럼, 지금 내 지위는 어떻게 된 거요, 외숙?”
“저하께서는 일단 지금 다른 왕자 아홉 분과 똑같은 외치에 있는 것으로 되어 계십니다. 지금 입궐하셔서 전하를 알현하시면 두 분 전하께는 물론 새 세자인 쿠아이와 님께도 절을 올리셔야 합니다.”
그나마 부왕도 양심은 있는지 하진교의 왕족 신분을 아예 뺏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생이, 그것도 사이도 안 좋은 동생이 세자가 되었으니 그 앞에 엎드려 절하라는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카마우아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단 피난하자고 제안했다.
“오아후에 있는 하와첨사진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하와첨사를 통해 임금께 지금 벌어진 상황을 알리시고 도와달라고 청하시는 겁니다. 저하께서는 임금 폐하와 친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폐하께서 바로 글을 내려 전하를 꾸짖으시고 세자로 복위시켜주실 겁니다.”
이건 외숙부가 임의로 결정한 제안이 아니고 ‘왕과 공들을 가르치는 자’인 윤호원이 직접 고안한 해결책이었다. 누구도 피를 보지 않으면서 조용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온당하고 합리적인 대안이다. 하진교가 이대로 배를 돌려 하와첨사진으로 가면 항구에 있는 하와국 전선들은 혹 붙잡고 싶어도 손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 지금 하와국 수군이 보유한 배라고 해 봐야 전부 ‘코아 누이’보다 작고 느리니까. 무장도 빈약하고.
지금 상황을 태황에게 알리면 바로 해결해 줄 것도 분명했다. 부왕이 따르기를 거부하면 바로 하와첨사진에 주둔한 병력을 움직여 부왕을 끌어내려 주리라. 하지만 하진교는 작금의 산태를 그런 수동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저하…..어떻게 된 건가요? 저희는 왕궁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가요?”
“오! 아니오. 금방 들어갈 거요. 선실에서 잠시만 더 쉬고 계시요, 공주.”
대화가 끊어졌다. 세자빈, 아니 이게 번국의 일개 왕자의 아내가 된 현순공주가 문가에서 초조한 기색으로 기웃거렸기 때문이다. 하와어를 하지 못하니 남편과 시외숙부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뭔가 불안한 낌새를 느낀 모양이었다. 서둘러서 문 앞으로 달려간 하진교가 급히 아내를 품에 안았다. 산달이 코앞에 다가온 건 아니지만, 무거운 몸으로 배를 오래 타려니 너무 힘겨웠으리라. 하진교가 아내를 위로하며 시녀들을 불렀다.
“누워서 쉬고 계시오. 괜히 무리하지 말고…..여봐라! 공주를 모시지 않고 뭣들 하느냐!”
“예, 저하!”
한양에서 데려온 시녀들에게 아내를 넘긴 하진교가 한숨을 쉬며 외숙부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건 너무 시간이 걸려요. 지금 당장 한양에 배를 보내고 바로 돌아온다고 해도 석 달은 걸릴 겁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어요. 공주가 품은 아이는 장차 하와국의 군주가 될 세손인데 왕궁 밖에서 태어나게 둘 수는 없단 말입니다!”
공주를 처음 본 순간 바로 마음이 동했다. 공주 역시 사나이다운 하진교의 풍채가 마음에 들었던 듯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그토록 즐기던 색주가도 혼인하자마자 발을 딱 끊고 오직 공주에게만 마음을 쏟았다. 그 몸에서 태어날 아니, 장차 하와국의 왕이 될 귀한 아이도 소중했다. 그 아이가 왕궁이 아니라 대한군 군영에서 태어나다니, 말도 안 된다. 정통성에 큰 흠이 될 우려가 있다.
“게다가 임금께 빚을 지기도 싫습니다. 그러니 당장 왕궁을 들이치겠습니다.”
“저, 저하?”
카마우아와가 흔들리는 눈으로 조카를 쳐다보았다. 설마 이따위로 막 나가는 행동을 벌일 줄은 생각지 못한 탓이다. 윤호원까지 나서서 차분하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하진교에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황을 이대로 두고 시간만 끄는 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 더 유리한 대응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을 끄는 동안에 무슨 짓이든 벌여서 현재 상황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력충돌로 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쪽에서 병력을 모으는 동안 저쪽에서도 병력을 더 모을 수 있다. 그러면 싸움 규모가 커지고, 그만큼 뒷일을 수습하기도 더 힘들어진다.
“태자 전하께서 제게 자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상국에서 무인지변이 터졌을 때, 역도가 아직 성친왕이시던 중종 폐하를 잠저에서 제대로 처리했으면 그 뒤는 일사천리였을 거라고 말이지요.”
그 일 하나만이 아니다. 과거 역사에서 있었던 여러 사건을 언급하며 가장 중요한 장소와 가장 중요한 사람을 손에 넣는 게 대병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해 가르쳤다. 그렇게 배운 덕분에 지금 조언을 얻을 사람이 없음에도 하진교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하와첨사진으로 물러난다면, 카네카폴레이 그 망할 년은 바로 자객을 보내서 저를 암살하려고 할 겁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공주와 복종 아기까지 함께 없애려고 들지도 모르지요. 그런 짓을 벌이게 둘 수는 없습니다.”
“대국의 공주를 말입니까? 후환이 상상할 수도 없을 텐데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요?”
“저를 폐위한다는 정신 나간 짓도 저질렀는데 다른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보다 더 안전하고 간단한 길을 택할 수도 있겠군요. 부왕을 죽여버리는 것 말입니다.”
지금 부왕 칼라니오푸가 눈을 감는다면 그 자리를 계승할 세자는 쿠아이와다. 쿠아이와가 얼렁뚱땅 즉위해버리고 나면 대한 본국에서도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세자를 바꾸는 것보다 왕을 바꾸는 게 힘들고 귀찮은 일임은 누가 보더라도 알 게 아닌가.
“하지만 왕궁에는 3백 명이나 되는 친위대가 있습니다. 저하, 저하께는 군사가……”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군사들이 말이지요.”
하진교가 눈을 빛냈다. 태자가 딸려준 40명, 그들 모두 여러 전선에서 싸워본 경험 많은 전사들이었다. 익위사에 근무하면서 지난 5년 동안 태자 곁에 붙어 살다시피 한 하진교와도 깊은 친분을 쌓았다. 난신적자들을 때려잡고 국체를 회복하는 대업도 기꺼이 도우리라. 다만 제대하고 집에 가는 길이라 다들 무기가 없다. 배에 실린 무기도 수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 전원을 무장시키기 어렵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해결할 수 있다.
“아무래도 태자 전하께서 이런 상황을 내다보시고 군사를 딸려주신 것 같습니다. 숫자가 부족하고 무장도 빈약하지만, 반적들에게 붙잡혀 계신 부왕을 구출하려면 떨쳐 일어나야만 할 때입니다.”
외숙부도 하와이 전사였다. 처음에는 좀 망설였지만, 하진교가 이토록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자 그도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까짓거, 사내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는가.
“좋습니다! 해보지요!”
카마우아와는 당장 본가에 전령을 보내 병력을 모으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하진교가 그를 말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시간, 공연히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들이쳐라!”
“우와아아아!”
한양에서 태자가 선물해준 갑옷을 입은 하진교가 칼을 빼들고 호령하자 전사들이 그대로 왕궁 정문을 향해 짓쳐들어 갔다. 방책 뒤에 있던 전사들도 무기를 들고 맞섰지만, 하진교의 부하들 쪽이 사기와 경험에서 훨씬 우세했다.
“꺼져라, 풋내기들!”
한 차례 총격을 교환한 뒤에 곧바로 백병전이 벌여졌다. 곤봉이 뼈를 부수고 칼과 창이 살을 찢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하진교의 외침이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하와국의 정당한 세자 카나이나다! 무도한 아우 쿠아이와가 부왕을 감금하고 자기 멋대로 왕위를 노리기에, 토벌하고자 한다! 어서 문을 열어라!”
하진교는 ‘꼭 무사히 돌아오겠다’라고 현순공주를 안심시킨 뒤에, 한양에서 데려온 전사 40명을 거느리고 막무가내로 상륙했다. 그리고 아직 왕궁에서 입항해도 좋다는 허가가 오지 않았다며 자기를 막아서는 항구 담당 관리를 한 주먹에 때려 쓰러트린 다음 선언했다.
‘나는 왕세자 카나이나다! 지금 왕궁에 변고가 일어나 부왕께서 위기에 빠지셨으니, 당장 입궐하여 사태를 바로잡고자 한다. 너희는 지금 바로 나를 따르라!’
선언 뒤에는 곧바로 항구 안에 있는 노예사냥 부대 무기고를 털었다. 거기서 꺼낸 무기로 자기 병사 40명을 무장시킨 뒤 곧바로 마가궁을 향해 달렸다. 세력을 모으고 어쩌고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저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하기 전에 들이쳐야 했다. 그리고 그 결단은 대성공이었다. 마가궁을 지키는 포대에서는 비탈을 달려오는 하진교와 40인의 전사들을 보고서도 저게 누군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판단하지 못했다. 덕분에 하진교와 군사들은 총탄 한 발 맞지 않고 왕궁 정문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물러나라! 내가 진짜 왕세자다!”
“저, 저하?!”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처음에 그와 마주친 전사들은 그가 진짜 왕세자 하진교임을 믿지 않았다. 돼지처럼 투실투실 하던 그가 단단한 전사의 몸을 하고 돌아왔으니 곧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가 황태자를 따라 한양에 간 세자임을 다들 알았다.
“쿠아이와가 감히 부왕의 뜻을 사칭하였다! 이 하와국의 왕세자는 나다!”
하진교가 호령하자 친위대 군사들이 크게 흔들렸다. 과거에 하진교가 세자 자리에 앉기는 했을지언정 정말 인기 없는 세자였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전사가 되어 돌아왔으니 전사들이 생각을 바꿀 만도 했다. 편을 바꾸는 전사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누가 감히 왕궁을 범하느냐!”
승기가 하진교 쪽으로 넘어가려는 때 문득 반전이 일어났다. 국왕인 하민상이 궁전 2층에 나타나 아래를 내려다보며 호령을 터트렸다. 국왕의 상징인 녹색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이 불효자 놈! 네가 감히 너를 낳아준 아비에게 칼을 겨누느냐!”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부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하진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미 피로 물든 장검을 치켜들고 뒤를 돌아보면서 크게 외쳤다.
?”전하께서는 병환이시다! 어서 안으로 모시고, 역괴 쿠아이와와 간부를 찾아 묶어라!”
간부(奸婦)란 당연히 현 왕비 카네카폴레이를 가리킨다. 둘 다 도망갈 틈은 미처 없었을 터, 아직 궁에 있을 게 분명했다. 남들 앞에서 으스대기를 좋아하던 쿠아이와의 성품이라면 더더욱 도망치지 못하고 여기 나설 것이다. 도망은 곧 패했다는 선언이니까.
“누가 감히 나를 역괴라고 부르는가!”
역시나, 쿠아이와가 나섰다. 하진교처럼 전신을 갑옷으로 두르고 창을 들고 있었다. 그가 의기양양한 자세로 호령했다.
“너는 불효하고 불충했기에 폐위되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부왕께 용서를 빌면 그 구차한 목숨을 살려줄 것이되, 계속 방자하게 군다면 당장 네 목을 베어 바다에 상어밥으로 던져버리겠다!”
“교언영색으로 부왕의 눈과 귀를 가린 주제에 잔말이 많다! 내 칼이 답하리라!”
두 왕자가 맞대결하는 상황이 되자 뒤섞여서 싸우던 양편 군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곧 지름이 서른 자(9m) 가까이 되는 큰 원이 생겼다. 그 원 한가운데 두 형제가 무기를 맞대고 서 있었다.
“목숨을 건질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죄를 인정하고 무릎을 꿇어라!”
“너나 꿇어라!”
다음 순간 창과 칼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찌르고 베며 막아내고 피하는 광경이 정말 긴박하게 이어졌다. 양편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자기편을 응원했다.
“세자 저하 천세! 어서 저 역도를 베어버리십시오!”
“세자 저하 천세! 어서 저 불효자식 놈을 꿰뚫어버리십시오!”
“아니, 이 자식들이!”
“또 해볼 테냐!”
양쪽 군사들이 다시 서로를 향해 어르렁거렸지만 두 왕자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결투에 집중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쿠아이와의 얼굴에는 갈수록 진땀이 흘렀다. 당연하다. 지금 하진교는 쿠아이와의 기억에 남아있는 그 얼간이가 아니었으니까. 이에 반해서 하진교는 여유만만했다. 날카롭게 급소를 피고드는 태자의 칼에 비하면 쿠아이와의 창 따위는 어린애 장난이었다. 다음 순간 하진교가 창대에다 칼날을 대고 싹 ?어 올렸다. 쿠아이와는 손가락을 날리지 않기 위해 창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받아라, 역괴야!”
다음 순간 창대를 타고 흐르던 칼날이 그대로 방향을 꺾어 쿠아이와의 목을 향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쿠아이와가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목을 가렸고, 강철 칼날이 그대로 팔뚝을 파고들었다. 쇠사슬을 만든 팔 보호대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끄아아악!”
“그, 그만!”
쿠아이와가 피가 흐르는 왼팔을 붙들고 주저앉는 순간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여자 하나가 자기 몸으로 그를 덮었다. 두 번 볼 필요도 없었다. 쿠아이와의 어미, 카네카폴레이였다.
“네가 이겼다! 네가 이겼어! 제발, 제발 살려다오!”
하진교가 칼을 치켜든 채 고개를 들어 부왕을 바라보았다. 형제가 결투랄 시작했던 바로 그때부터 2층 난간이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어서 잡고 있던 부왕은 하진교과 눈이 마주치자 힘없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하진교의 얼굴에 승리감이 어렸다.
“시종들은 당장 전하를 방으로 모시고 시의를 불러 용태를 살피도록 하라! 그리고 이 두 대역죄인은 당장 감옥에 처넣어라! 다른 병사들은 모두 사면한다!”
“예, 저하!”
하진교를 둘러싼 ’40인의 전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하진교가 득의만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여 정신이 나간 부왕은 일단 침실에서 푹 쉬도록 하였고 두 죄인은 어찌 벌하면 좋을지 지시를 청한다고……”
모자를 화산에 던지거나 상어법으로 만들지 않은 것만 해도, 하와국이 좀 더 문명화된 것 같기는 하다. 예전 같았으면 서슴없이 그렇게 했을 텐데. 아니, 이건 내 옆에서 오래 머문 하진교의 개인적인 영향 탓이려나? 뭐 하여튼 변화는 변화다.
“하와세자가 참으로 장하다. 역도들을 토벌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았으니, 그 죄인들을 벌하는 일은 짐이 맡겠다. 사슬에 묶어 한양으로 압송하도록 하라!”
보고를 들은 태황은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사위의 일 처리하는 솜씨가 마음에 아주 쏙 든 모양이다.
“또한 이 일의 양상을 보니, 현 하와국왕이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 재주가 없음도 분명해 보인다. 하와국에 있는 국사 윤호원에게 국왕의 상태를 잘 살펴 국왕이 제대로 일하지 못할 상황이면 세자에게 양위하고, 편히 정양하라고 권하기를 명하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사실상 지금 양위하라고 압박하는 거구먼. 하민상이 계속 왕위에 있으면 어떻게든 반격을 시도할 것 같으니, 아예 내쳐버리고 하진교의 지위를 다지려고, 하기야 나라고 해도 똑같이 처리하긴 했으리라. 그게 안전하니까.
그나저나 내가 챙겨준 갑옷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니 다행이다. 종종 때 입었던 폴란드제 갑옷을 군기시에서 본뜨게 한 물건이니, 필시 하와이제였을 하원교가 입었다는 갑옷은 분명 품질로는 상대가 안 되었으리라. 다만 품질은 품질이고, 그 더운 하와국에서 그걸 입고 몇 시간을 싸웠다는 게 대단하다. 나도 성친왕 때 하와국에 가서 그거 입고 돌아다니긴 했지만, 싸움까지 치를 생각은 도저히 안 들었는데 말이다. 하진교 그놈이 정말 난 놈이기는 난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