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48
4부 232화(1848화)
23.
들것에 실려서 기차에서 내린 태황은 눈을 뜨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오늘처럼 기차역이 경희궁 안에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만약에 늘 북적거리는 용산역이나 남대문역에서 하차해야 했다면 저 태황의 모습이 분명 백성들의 눈에 띄었을 테니 말이다. 나이 들어 연로한 임금이 병에 글리는 거야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임금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백성들이 천지신명이나 하느님, 부처님을 찾으며 비는 것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허구한 날 놀러나 다니다가 낙마해서 중상을 입다니, 이건 정말 망신스러워서라도 공개할 수 없는 일이다. 기차역이 대궐 알에 있어서 이런 모습을 바깥에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물론 대궐 안이라고 해서 조용한 건 아니다. 정거장 앞은 온통 젊은 여인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폐하, 눈을 뜨시옵소서!”
“폐하, 폐하…..으흐흐흑!”
“폐하께서 일어나지 못하시면 신첩은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한달음에 뛰어나온 중전부터 금강산에서부터 태황을 수행해온 숙빈 오씨에 이르기까지, 열두 명이나 되는 후궁들까지 더해서 후비만 열세 명이 일제히 흐느끼며 울어댄다. 여기에 수많은 상궁과 궁녀들까지 합세했다. 그 한가운데 있으니 귀가 아프고 정신이 혼란스럽다.
“어서 침전으로 모셔라!”
태황을 실은 들것 옆에서 따라가는 동안에도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침전에 도착해서 태황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서야 상황이 좀 진정됐다. 그런데 여기서는 또 다른 충돌이 있었다.
“송구하오나 상감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내의원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문 앞을 막았다. 태의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의녀들과 하급 의관들이 바깥의 소란을 진정시켰다.
“지어미인 내가 주상께 갈 수 없다니 무슨 말인가! 어서 길을 비키게!”
“그러게나 말이옵니다, 중전께서 가지 못하실 곳이 이 대궐에서 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의원들을 물리치시고 들어가소서.”
비상사태가 발생하니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대동단결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중전과의 사이에 은근히 불꽃을 튀기던 황진 홍씨까지 중전을 거들었다. 아마 그 속셈이야 자기도 묻어 들어가서 함께 병석을 지키려는 심산이겠지만. 애초에 임금이 병환이 들었는데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부터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아픈 임금 곁에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 그중에 누군가가 허튼짓을 시도할 위험이 줄어든다. 목격자가 많아지니 당연한 일이다.
중상을 입은 태황이 의식을 잃기 전에 시종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다 꺼지라고 외쳤을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처자식들의 접견까지 금지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런 면을 지적받자 의관들이 급히 변명을 내놓았다.
“지금 폐하께서는 마비산을 드시고 주무시고 계셔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시옵니다. 지금 마마께서 들어가셔도 들어오신 줄도 모르실 테니, 부디 깨실 때까지만 기다리시옵소서. 혹 주변에서 폐하를 자극하면 기혈이 넘치시지나 않을까 걱정되옵니다.”
이 시끄러운 와중에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판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약에 취해 자고 있다는 말에 약간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 마비산(痲沸散)은 아편이 주가 되는 마취약을 가리킨다. 진통제 용도로 쓸 때는 예전 상희처럼 환약으로 만들어서 한두 개씩 삼키지만, 수술용 마취약으로 사용할 때는 탕약으로 달여 마시면 서너 시간은 깊이 잠들어서 일어나지 않는다.
마비산이 개발된 건 대략 50여 년 전, 조부 즉위초기였다. 환자들이 고통을 무서워해서 수술을 피하는 사례가 늘자 한성의학교에서 연구 끝에 만들어냈다. 이름은 중국의 전설적인 옛 명의, 화타가 만들었다고 하는 마취약의 이름을 그대로 갖다 썼다. 마비산 덕분에 외과수술 수준이 급격하게 올라갔다. 팔다리를 자르는 정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배를 여는 개복수술이 가능해졌다. 그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자기 배를 열고 창자를 꺼낸다는 상상만으로도 환자가 기겁하는데, 어떻게 산 채로 배를 짼단 말인가.
환자를 수술대에 묶거나 팔다리를 결박하지 않아도 되면서 사지 절단 같은 비교적 단순한 수술도 난이도가 크게 내려갔다. 수술 중에 사망하는 환자도 크게 줄었다. 한성의학교가 마비산 제조에 특허를 걸자 일본에서도 30년쯤 전에 독자적으로 마취제를 개발했다. 일본에서 발명한 마취제는 이름을 통선산(通仙散)이라고 하는데, 마취약으로써의 효과는 우리 마비산보다 확실하지만 대신 독성도 강해서 취급이 매우 어렵다.
“설마 깨어나지 못하시는 건 아닐 테지?”
“물론이옵니다, 전하. 약은 확실하게 썼사오니 꼭 깨어나실 것이옵니다.”
통선산은 조금만 잘못 처방해도 사람이 죽거나 실명한다. 마비산은 그 정도로 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간혹 사망자가 나온다. 자칫 마비산의 부작용으로 태황이 죽기라도 하면 수행한 의관들은 다 죽는다고 봐도 될 거다. 독살 혐의를 쓸 수도 있다. 그런데도 저렇게 의식을 잃을 만큼 마비산을 투여했다는 건 그만큼 태황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뜻이리라.
“나도 들어가지 못하게 할 셈인가?”
“태자마마께서도 잠시만 기다려주시옵소서.”
의원들은 나도 막아섰다. 하지만 막혔다고 안 들어가면 그야말로 불효자 인증이고 삶이 엄청나게 고달파진다. 현대였다면 정말이지 갈 데 없는 갑질에 진상이겠지만,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부황께서 무어라 지시하셨는지는 모르겠다. 헌데 그대들은 다들 목이 일곱 개즘 되는가? 내가 잡인(雜人)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나는 이 대한의 태자다. 그런 내가 아바마마께서 눈을 뜨실 때까지 곁에서 모시겠다는데 그대들이 어찌 감히 내 앞을 막으려 드는가?”
소란을 피울까 봐 걱정이라는데,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안에서 소란을 피울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다. 화를 낼 것도 없고 목소리를 높일 것도 없다. 그냥 차분하게, 꾹꾹 눌러 가면서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의원들이 벌벌 떨었다.
“지금 아바마마의 배를 열고 수술이라도 할 거라면 내 기꺼이 밖에서 기다리겠다. 하지만 그대들도 그저 기다리겠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함께 기다리겠다. 여기 할마마와 어마마마만 모시고 들어가겠으니 어서 길을 열어라.”
“태자의 말을 들었으면 어서 비키거라!”
내가 자기를 조모 다음으로 대우하겠다는 티를 내자 중전이 얼른 조모 뒤에 와서 섰다. 한참 울던 참이라서 얼굴에 드러나도록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 배려에 기뻐하는 기색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당연히 다른 후궁들은 불만스러워했다.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알겠…..사옵니다. 들어가시게 해드릴 터이니 부디 폐하의 심기를 흩트리지 말아 주소서.”
망설이던 의관들이 결국 뒤로 물러났다. 조모를 맨 앞에 세우고 나는 중전보다 살짝 뒤에 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길이 열리자 다른 이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태황의 침전은 사람으로 가득 차 버렸고, 조용하게 안정하는 것 따위는 바랄 수 없게 되었다.
“조용히, 조용히들 해주십시오!”
태의들이 간절하게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당장 열두 명이나 되는 후궁들부터가 침상을 빙 둘러 태황을 붙들고 눈물을 뽑아내고 있는데 무슨 진정이 가능하겠는가. 여기에 근 스무 명에 달하는 이복동생들이 더해지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중신들까지 더해졌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몰려왔으니 침전 안에는 사실상 발 디딜 자리도 없을 정도였다. 다만 내 자리는 태황의 침상 바로 옆에 넉넉하게 있었다. 그래서 주변 분위기에 맞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태황의 상처를 살필 수 있었다. 계획대로 조모와 중전까지 세 명만 들어왔으면 의원들의 요구한 대로 구석에 ‘목석처럼’ 서서 그저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시끄럽게 하지 말랬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태자의 일반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엎드려 울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거 진짜 중상은 중상이로구나…..
들것 위에 있을 때는 몸을 모포로 덮어놓아서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상태가 심각했다. 열이 오른 이마는 마치 불처럼 뜨겁고, 사지의 뼈가 몽땅 부러져서 부목을 대고 묶었다. 절벽에서 구르며 바위와 나무에 부딪혔다는 말이 확실히 거짓이 아니었다. 상태를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꾀병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아픈 척이나 조금 계속하면서 지금 하는 내 대리청정을 연장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옆에서 보니 아닌 게 확실하다. 내가 백 년 동안 죽고 다친 사람을 일이백 명 본 것 같은가. 보면 지금 상태가 어떤지 웬만큼은 안다. 태황은 절대 좋은 생태가 아니었다.
“혹 지금도 피를 토하시는가.”
“예, 태자마마.”
사고가 일어난 지 이제 여드레다. 그런데 아직도 피가 난다는 건 아딘가 안쪽에 큰 탈이 났고 출혈이 멈추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장 파열로 내출혈이 일어난 건가. 언뜻 보니 복부가 팽만한 것 같은데 요즘 살이 너무 쪄서 구분이 잘되지 않는다.
“정확한 증세는 어떤가?”
“복통이 심하여 음식을 거의 드시지 못하시고, 열이 심하시며 오한, 오심, 구토 등의 여러 증세가 보이시기도 합니다.”
내가 의사가 아니다 보니 이것만 듣고는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내 앞에 선 태의가 어려운 의학용어로 뭐라고 막 열심히 떠들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간단히 알아들을 말은 아니었다. 희망이 없는 건 아니라는 부분만 알아들었다.
“으음, 음…….”
“폐하께서 깨어나셨다!”
그대 무슨 이유에선지 태황이 꿈틀거리며 눈을 떴다. 아직 마비산 기운이 덜 깬 듯,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주변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폐하, 폐하!”
“눈을 뜨셔서 정말 다행이옵니다!”
침전을 가득 채운 후궁과 그 자녀들, 궁인들, 관원들 모두 기쁨의 한숨을 쉬었다. 태황이 의식을 되찾는 모습을 보고 이제 곧 병이 나으리라는 계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주상!”
누가 뭐라고 하건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태황의 손만 꼭 붙잡고 있던 조모가 맨 먼저 흐느꼈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혼절했던 조모지만, 지금은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폐하! 폐하!”
“주상 폐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폐하!”
침전을 메우고 있던 후궁들과 조정 중신들이 그 뒤를 이었다. 삽시간에 울음소리가 그 큰 침전을 가득 채웠다. 여러 높낮이의 통곡 속에서 어린아이들의 외침도 있었다.
“아바마마, 소자이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소자도 여기 있사옵니다!”
이복동생들이었다. 어린 것들이 저 난리를 치는 걸 보니 순수한 효심에서 저러는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태황의 눈도장을 받아놔야 나중에 한몫씩 챙길 수 있다는 마지막 노력이겠지 싶다. 어미들이 시켰겠지.
“시끄…..럽다. 다들 조용히 하여라.”
삽시간에 침전 안이 조용해졌다. 정신을 차린 태황의 목소리에는 기운도 없고 떨렸지만 한 마디라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긴장이 엿보였다.
“내…..내가 지금 정신이 혼미하여 이 장바닥 같은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모조리 나가고 내가 부르기 전에는 들어오지 마라.”
임금의 병실에 아무도 없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중신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래서 결국 태의와 의녀들 외에 중신 두 사람, 후궁 두 사람이 교대로 머무르고 조모와 중전은 원하는 만큼 머무르기로 낙착을 보았다. 자식들은 하루 두 번씩 병문안을 오고.
“태자는 내 옆에 머무르지 마라. 네 병구완은 필요 없다.”
뜻밖의 말이었다. 내가 뭐라고 반박하려 하니 이런 말로 쐐기를 박았다.
“네가 여기 오면 나랏일은 누가 돌본단 말이냐? 보고고 뭐고 필요 없으니 태자가 만사를 알아서 처리하라. 짐은 기력도 없고 통증과 약 기운 때문에 정신도 없다. 이참에 아예 네게 양위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그것만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아바마마!”
양위, 그 한마디 때문에 병문안하다 말고 갑자기 바닥에 머리를 처박아야 했다. 아니, 그 이야기를 굳이 지금 꺼내야 했나. 정말로 죽어가는 중이라면 뭐 또 모르겠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듯한데 저런 말을 확 꺼내니 이거 혹시 꾀병인가 하는 생각이 또 든다. 아니, 어쩌면 마비산에서 아직 덜 깬지라 조금 멀쩡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약이 깨면 또 모르지.
“거두어 주시옵소서, 폐하!”
“양위 같은 망측한 일은 생각하지 마시고 어서 건강부터 회복하셔야 하옵니다!”
역시나 신하들도 그 한마디에 반응해서는 곧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분위기가 이런데 내가 넙죽 받겠다고 해 봐라, 어떻게 되나. 당장 천하의 불효자식, 보위를 노리고 부황에게 감히 마수를 뻗친 개자식이 되는 거지. 어쩌면 시역(弑逆) 혐의까지 받을지도 모른다.
“알겠다. 하지만 지금 나랏일을 태자가 맡아야 한다는 짐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태자, 너는 공연히 병문안이니 뭐니 하며 대전을 드나들 게 아니라 편전에 앉아 나랏일이나 열심히 처리하여라.”
“예, 아바마마……”
지금 태황의 상태를 보건데 빨리 낫는 건 확실하게 글러 먹었다. 낫는다고 해도 몇 달은 갈 테고, 만약 그 토혈(吐血)이 장파열 때문이라면 상처가 복막염으로 번질 위험이 크다. 그리고 복막염이 제대로 발병하면 백이면 백 며칠 안에 죽는다. 의관들이 제대 배를 째서 수술하면 나을 수도 있지만…..복막염 수술은 생존율이 절반이 채 안 되는 위험한 수술이다. 아무래도 항생제가 아직 나오지 않아서, 조금만 상처를 돌보기를 소홀이 하면 바로 곪기 시작한다. 태의들이 선뜻 복막염 진단을 내리기 어려운 이유다.
“조정만이 아니라 황실의 일도 모두 네가 관장하여라. 내명부의 일은 아직 중전이 있으니 맡겨두고, 종친부의 일은 네 뜻대로 처결해도 좋다.”
“아바마마, 소자에게는 너무 큰 짐이옵니다.”
“다 네가 할만하니 시키는 것이다. 아무 말 말고 시행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내가 뭐라고 못하는 대신 중신들이 나서서 태황을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태황은 그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의관들이 마비산 환약을 챙겨 내밀자 바로 삼켰다. 그리고 피곤하다며 침전을 채누 숱한 이들을 모두 나가라고 재촉했다.
도저히 업무가 진행될 상황이 아니라 일단 동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이거, 선양만 안 받았지 사실상 내가 임금으로 즉위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과연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얼마나 유지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