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73
4부 257화(1873화)
27.
학교든 뭐든, 국가에서 계획한 개발사업을 시행할 때 대상 지역 땅값이 올라가는 첫 번째 요인은 토지를 수용할 때 뿌리는 돈이다. 강제수용은 민심을 악화시키므로 적당한 가격을 쳐줄 수밖에 없는데, 지주들은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땅값을 올리려고 시도하게 마련이다. 다만 이번 사업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이화학당은 은이가 원종으로 추존되어 종묘로 옮기기 전에 위패를 두었던 사당인 경모궁 자리에 짓는다. 숙명의숙은 용산에서 새로 땅을 매입해서 지었지만, 용산 땅값은 사대문 안에 비하면 훨씬 싸다.
그러니 동촌 지역 집값이 오른 건 학교를 세우느라고 토지를 매입한 탓이 아니다. 정말로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내가 생각도 못 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자면, 여학교 설립 계획은 초등학교 역할인 소학당 대신 아가씨 학교인 이화학당과 직업학교인 숙명의숙부터 짓는 것으로 바뀌었다. 두 학교 모두 1차 입학생은 100명씩이었다. 그중 숙명의숙은 항아반이 60명, 훈도반과 의원반이 각각 20명씩이었다. 이들을 선발하면서 내가 자연스럽게 떠올린 생각 하나는 기숙사가 필요하겠다는 것였다. 기숙사가 왜 필요하냐고? 당연한 거 아닌가. 학생들 거기서 살아야지. 자고로 ‘여학교’하면 기숙사잖아!
숙명의숙 쪽에서 기숙사가 필요한 이유에 관해서라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궁녀가 되어 입궁할 아이들이다. 그러니 학교에서부터 일찌감치 단체생활을 하는 게 당연하고, 꼭 필요하다. 훈도반이나 의원반에 들어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개가 살림에 보탬이 되기를 희망하는 넉넉하지 않은 집 딸들이고, 특히 의사반은 통학할 시간도 아까울 만큼 공부해야 할 양이 많을 거다. 게다가 집이 도성 밖이라면 통학의 어려움이 더 커진다.
남학교이긴 하지만 국자감, 강무관, 사부학당도 죄다 학생 전원이 재사(齋舍,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서학당은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지만 이들도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한다. 그러면 이화학당이라고 해서 기숙사를 운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여기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상식도 한몫했다. 원래 세계에서 살면서 본 소설과 영화, 만화 속에서도 그런 고급스러운 여학교들은 하나같이 기숙학교였으니까 말이다. 원래 역사에서 구한말에 외국인들이 세운 여학교들도 기숙학교였다.
더구나 태황태후와 황태후가 함께 후원하는 학교 아닌가. 그래서 100명으로 정한 입학생 정원을 채우기도 어렵지 않았다. 지원자 숫자가 정원보다 많아서 고를 수 있을 정도였다. 종친과 경화사족만으로 학교가 채워지지 않도록, 일부러 지방 출신자들도 좀 섞었다. 그러니 기숙사도 당연히 성황이리라 생각했다. 조모를 믿고 딸을 새 학교에 보내기로 한 부모들이니 안심하고 딸을 재사(齋舍, 기숙사)에도 맡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내 순진했던 생각은 출발하자마자 좌초했다.
“주상. 주상의 누이들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참 곱게 간수해야 할 시기에 어찌 대궐 밖에서 지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학당이 절이나 수녀원은 아니지 않습니까? 학당에는 나가되, 그날 수업이 끝나면 마땅히 대궐로 들어오는 게 도리입니다.”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혹시하도 딸이 바깥을 나돌다가 잘못되면 어떡하느냐고 노심초사하는 태후를 보자니 그런 학교는 본래 다 기숙사가 기본이라고 대꾸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생각났다. 구한말에 생긴 여학교들이 기숙학교였던 이유가 말이다. 일단 그 시절 여학교 태반이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였다. 게다가 공부 그만두고 시집이나 가라고 가족들이 학생을 강제로 끌고 가거나 학교에 못 나오게 하는 사례가 워낙 잦았으니, 기숙사가 학생을 지키는 수단 중 하나였다. 사실상 여학교가 반쯤 수녀원이었던 셈이다.
이런 반대가 태후한테서만 나온 것도 아니었다. 창경궁에 있는 선화으이 후궁들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목소리를 전한 딸 가진 종친과 고관들도 하나같이 ‘딸이 학당에 가는 건 괜찮지만 집 밖에서 밤을 보내는 건 곤란하다’라고들 나왔다.
결국 도성 규수들은 다 집에서 통학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왔다. 통학차량을 따로 운행할 필요가 있는지 논의했지만, 집에 마차 서너 대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소리가 나오면서 통학차량 운용 제안도 백지화되었다. 그래도 내 생각에 기숙사는 필요할 것 같았다. 입학생 중에 사대문 안에서 사는 규수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장 한양을 둘러싼 5유수부 출신만 해도 매일 통학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당장은 없지만, 나중에는 대남도나 마주에서 학생이 찾아올 수도 있고.
그런데 학부형들이 기숙사에 애를 안 들여보내겠다고 한다. 심지어 동래, 평양, 심양에서 오는 애들도 기숙사에 안 들어가겠다고 한다. 친척이나 친지의 짐에서 머물겠다는 규수들도 있지만, 태반은 도성에서 집을 사겠다고 한다. 집값이 갑자기 뛴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아니, 거저 지낼 수 있는 재사를 두고 왜 일부러 수백 냥, 수천 냥씩 돈을 들여 일부러 집을 산단 말인가?”
두 학교 모두 학비는 없다.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학교인지라 그렇기도 하고, 태황태후와 황태후, 중전이 자기 이름을 걸고 후원하는 학교에서 째쩨하게 수업료를 받을 이유도 없다. 당연히 기숙사비도 없다. 숙명의숙은 되려 소액이긴 해도 학생들에게 별도로 품위 유지비를 지급할 예정이다. 이곳 졸업생들은 궁녀가 되거나 교사, 의사로 일할 테니 자기 집업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 가체가 학비를 갚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업료와 숙식비를 굳이 따로 요구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화학당에서 학부형들에게 ‘기부금’은 받을 예정이다. 태황태후께서 훌륭한 일을 진행하시는데 한몫 보태고 싶은 이가 있다면 기꺼이 그 청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액수와 상관없이 성의가 중요한 거니까. 이렇게 하면 학부형들은 집안 체면 때문에라도 얼마씩 내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그러면 학비를 따로 받는 것보다 들어오는 돈은 도리어 많아질 테고, 그만큼 학교를 휘황찬란하고 내실 있게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말이다.
“규수들이 이화학당에 재학하는 기간은 기껏해야 3년인데, 그 3년 동안 지내겠다고 굳이 집을 사려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소한 수백 냥은 들여야 건흥옥이라도 괜찮을 걸 마련할 수 있을 텐데, 그 큰돈을 들이느니 재사에서 거저 지내는 편이 낫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학생들이 마음만 바꾸면 백 명 전부 기숙사에 넣어줄 수 있다. 모두가 복방을 쓸 수는 없지만 2인 1실 정도는 가능하다.
“그게, 다들 꿍꿍이가 있습니다.”
도승선 김채선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결국 이들이 원하는 건 금전적인 이득이었다. 딸의 취학은 명분을 제공한 핑계였을 뿐이다.
“서울 집이야 사놓기만 하면 쓸 대야 많지 않습니까. 아들이 과거에 급제해서 서울에서 벼슬을 하면 어차피 지낼 곳을 마련해야 하고, 급제한 아들이 없으면 세를 주어도 됩니다. 경가(京家)를 마련해두어서 손해 볼 일은 없으니, 이참에 기회를 잡는 것이지요.”
꼭 자기 아들딸이 지내는 게 아니더라도 친인척들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비워두는 것보다 누구라도 들어와 사는 게 집 관리에는 더 나으니까 말이다. 하기야 이쪽 세계에서도 서울 집값은 오르면 올랐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건흥옥과 관련되어 언급했듯이 인구가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성 인구도 당연히 는다.
그래도 평소였다면 기껏해야 몇십 채 졍도의 수요 때문에 집값이 확 뛰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딸을 이화학당에 보낼 정도의 집안들이 딸을 지내게 할 용도로 찾는, ‘적당히 크고 반듯하고 깔끔한’ 집을 찾는 사람이 일시에 몰리니 가격이 뛸 수밖에.
“짐이 생각이 짧았다. 규수들을 재사에 넣을 생각만 하다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미처 몰랐구나.”
“괜찮사옵니다, 폐하. 앞으로 경험을 더 쌓으시면 그런 것들도 다 보이시게 될 겁니다.”
김채선의 생각과 반대 같은데. 내가 딸을 핑계로 서울에 집 한 채 사두겠다는 놈들의 그 의도를 들여다보지 못한 건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가 아닌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쪽 세계에서는 원래 세계 현대에서 처럼 주택 관련 투기가 심하지는 않다는 거다. 혹 부동산에 투자하더라도 집을 여러 채 사기보다는 전국 각지에 있는 농토나 광산을 사는 게 보통이다. 다만 그 구매 범위가 대남도나 누손주, 미주까지 뻗치는 거고.
이는 사대부들의 도덕관념 때문이다. 직접 농사를 안 짓더라도 선비로서 농토를 소유하는 거야 합당한 일이고 장사꾼에게 상가를 임대하는 것도 괜찮지만,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여러 채씩 소유하고 세입자들에게 직접 원세를 받는 건 훨씬 천박한 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런 부류의 임대업자들은 거의 전부 중인이나 상민? 건흥옥 이야기 때 잠깐 언급한 단칸방 형태의 임대용 건흥옥이나 명목상으로는 창고로 등록된 건물을 살짝 개조한 싸구려 쪽방 따위를 빌려주다가 포도척에 붙들여오는 놈들 말이다.
어쩌나 여학교 생도 선발에서 시작된 논란이 부동산 투기로 뻗어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여기서 뭐 엉뚱한 게 또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28.
백두산 봉선은 결국 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제삿날은 내년 단옷날. 날짜 맞춰서 기차 타고 백두산까지 가서 노새타고 천지까지 간다. 그리고 천지 기슭에서 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낸다. 봉선을 마친 뒤에는 북한으로 가서 동북부 일대를 순회하고 도성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는 상세한 봉선 예법을 아무도 모른다는 데 있다. 중국에서도 8백 년 동안 아무도 안 지낸 제례인데 우리가 그 예법을 알 리가 있는가. 그래서 환구단에서 하던 기존 천신례 예법에 옛 삼한의 전례를 가미해서 적당히 만들어내기로 했다.
너무 일찍부터 논란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으므로, 조보에 실어 공표하는 건 내년 봄에 하기로 했다. 봉선은 알리는데 의의가 있는 행사이므로, 천지까지 관람객들을 줄줄이 끌고 올라갈 수는 없지만 수만 군중의 한송을 받으며 떠날 필요는 있다.
“폐하를 수행하는 제관과 시종, 군사의 수가 적어도 3천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기록에 이르기를 환웅이 하늘에서 데리고 내려온 무리의 수가 3천이라 했으니, 폐하께서도 그에 맞춰 준비하심이 옳겠습니다.”
“예무부에서 좋을 대로 정하도록 하라.”
전례 없는 행사를 기획하는 젓만큼 귀찮은 일도 없다. 그런 귀찮은 일은 계획을 제안해서 일을 시작한 놈이 맡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다만 아예 북한 지방 순행을 하기로 한 이상 인원이 넉넉히 필요할 것 같기는 하다. 내가 명색이 임금인데 순행이랍시고 겨우 수십 명쯤 데리고 나가면 그쪽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더구나 그 일대는 여전히 임금의 칼로서 충성을 다하는 오도리 부족 영지가 펼쳐져 있다. 최후의 최후까지 가더라도 황실을 배반하지 않을 두 칼 – 다른 칼은 왜인여진이고, 걔들은 지난번 북경에 제사 지내러 갈 때 이미 만났다 – 중 하나인 오도리들을 보러 가는데 초라한 행색으로 갈 수는 없는게 아닌가. 그나저나 3천이면…..지난번 북경 갈 때만큼 열차를 동원해야겠구나. 산에 올라갈 때는 노새와 낙타가 또 얼마나…..참, 북쪽에 간 하진교가 해우고기를 가지고 오면 그것도 가지고 가야지. 가장 귀한 제물이니.
‘하진교 그놈 또 귀국 미루겠네……’
내기해도 좋다. 그놈 분명히 자기도 봉선에 따라간다고 귀국 미룰 거다. 하와국에서 오는 보고를 보면 국정을 위임받은 윤호원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있어서 아직은 별문제가 없지만, 임금의 공석이 너무 길어지면 분명 문제가 생긴다. 그러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이때 편전에서는 몰랐다. 북바엥 대려가 달라고 할 사람이 하나 더 있다는 걸 말이다.
예전에는 후궁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내 침소 일정을 짜는 상궁들에게 윽박지르다시피 하면서부터 동침 횟수를 똑같이 맞췄다. 그런 내 행동 탓에 상희가 되려 역차별을 당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런 규칙을 세우지 않았다. 그저 그날 내가 누구랑 하고 싶으냐에 따라서 내키는 대로 잠잘곳을 택했다. 혹시 예전 생의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게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 왜 이러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으니까.
오늘은 현비 최씨 침소에 들었다. 최씨는 중전과 동갑, 나보다 두 살이 더 많고 키도 큰 미인이다. 비록 딸이지만 내 첫아이도 낳았다. 넷째도 최씨가 낳았으니 다섯 아이 중 둘이 최씨 아이다. 만약 최씨 소생인 예지가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다행히 원자가 얼마 안 가 태어났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만약 내게 아들이 예지뿐이었다면 후궁전 내에서 다소 살벌한 상황이 벌어졌을 공산이 있다. 후금같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지.
“폐하, 청이 있사옵니다.”
방사가 끝난 뒤, 내 팔을 베고 누워있던 최씨가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무슨 내용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북당으로 가는 내년 순행에 신첩을 데려가 주실 수 없겠사옵니까?”
“순행에 따라가고 싶다고? 현비, 짐은 봉선 의식을 치르러 가는 것이지 나들이를 가는 게 아니오. 대궐에 머물러 있도록 하시오.”
“하지만 후궁전에서 폐하를 모실 사람을 누군가 데려가신다면 그들 중 제가 가장 낫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최씨의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중전이야 도성을 떠날 수 없으니, 그동안 내 시중을 들 사람을 따로 데려가기는 해야 한다. 세 후궁 중 1~2명, 혹은 셋 다 전부.
“신첩은 북방 출신입니다. 심양 출신이다 보니 동쪽 사정은 직접적으로는 잘 모릅니다만, 그래도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폐하께 소소한 도움이라도 보태고 싶으니 부디 소녀가 바친 충정을 용납하소서.”
“알겠소. 별다른 사정이 없다면 그대를 데리고 가리다.”
괜히 현지에서 수청을 들겠다 어쩐다 하는 소리라도 들으면 귀찮다. 최씨를 데리고 가면 적어도 저 문제로 내게 접근하는 놈들은 없어지겠지. 최씨가 중간에서 다 막아줄 테니.
최씨를 순행에 데려가기로 한 뒤로 별다른 일은 없었다. 이것저것 쌓인 일들을 정리하고 내년 봄을 준비하는 일상적인 업무만 하면 되었다. 이대로 겨울을 편안히 보내면 되겠다고 다들 은근히 기뻐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급보가 들이닥쳤다.
“폐하! 주산진에서 급히 파발이 달려왔사옵니다. 후송에서 급변이 생겼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후송 황제 조형윤이 지병으로 누워있다가 눈을 감았단다. 세상에, 그렇게나 고생하면서 나라를 겨우 일으켜놓고 갑자기 저렇게 가면 이제 후송 어떻게 되나. 과연 후계자는 조형윤만큼 부지런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