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82
4부 266화(1882화)
19.
직업에 따른 귀천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현대에서도 경원시 되는 직업은 분명히 존재했고, 지금 시대에서 도축업에 종사하는 백정은 경원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직업이다. 그래서 백정은 여전히 천민으로 취급된다. 그런 세상이지만 양무공 임꺽정의 후손들은 가업인 도축업을 대대로 계승했다. 임꺽정이 터를 잡은 마장동에서, 서울에서 가장 큰 도축장까지 보유하면서 말이다.
내가 임꺽정에게 포상하는 의미로 내주었던 금군에 독점적으로 쇠고기를 공급하는 권한은 임꺽정 사후에 회수되었다. 하지만 임꺽정의 후손들은 그런 특혜 없이도 잘해 나갈 기반을 이미 쌓아두고 있었다. 명성과 실력이 이미 높아서 이들을 찾는 고객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명륜동에는 이들이 경영하는 이라는 서울에서 가장 큰 고깃집이 있을 정도다. 그 상호는 당연히 임꺽정의 시호인 양무공에서 따온 것으로, 옛날에 임꺽정이 소 잡을 때 썼다는 철추(鐵鎚)를 가게 안에 당당하게 걸어놓았을 정도다.
가게가 하필이면 명륜동에 있는 건 도성에서 제일 번화한 동네가 명륜동이라서 그렇다. 명륜동은 태학 ? 옛 성균관 ? 이 있는 곳이니만큼 학문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어야 할 것 같지만, 실은 조선 초부터 가장 놀기 좋은 장소였다. 반촌그룹이 왜 여기에 들어섰겠는가. 태학에 다니는 유생들은 이 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당연히 자기들이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질 동량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있으며, 대과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합격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양무관에서는 이 점을 이용해 홍보를 펼쳤다. ‘일개 백정에서 일신의 재주만으로 당상관 자리인 정2품 상장까지 오르고 무묘에 모셔진 양무공의 집’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여기서 식사하면 관운(官運)이 크게 트인다’라는 속설을 퍼뜨린 거다. 그리고 그게 통했다!
태학에 다니는 생도라고 해서 전부 명문대가 출신은 아니다. 지방에서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했거나 도성 거주자라도 부친의 관직은 한미한 이들이 숱하다. 이런 이들은 백정 출신 무관에 불과했다고 해도 임꺽정이 이룬 전인미답의 출세가 부러울 수밖에 없다. 덕분에 양무관은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다. 생고기도 팔지만, 그것 외에도 숯불갈비와 갈비탕, 꼬리곰탕, 육개장 등의 갖가지 고기 요리도 유명하다. 임꺽정 사후에도 후손들이 부단하게 노력한 결과다. 같은 백정이지만 명륜동의 ‘박힌 돌’이라고 할 수 있는 반인(泮人)들은 당연히 양무관이 번창하는 모습을 아니꼬워했다. 이들은 예로부터 성균관에 고기를 대면서 이를 배경으로 큰 권세를 누렸는데, 양무관이 그 위상을 심각하게 침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측이 주먹다짐을 벌인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매번 양무관이 이끄는 마장동 백정들이 이겼지요. 이들은 죄다 시위대 아니면 등선군 출신이니 반촌에서 배나 두드리던 반인들이 이길 재주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방법을 바꿔 봤습니다만….”
반인들은 직접 식당을 세워 ‘성균관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고기’라는 표어로 양무관과 경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홍보는 두 가지 면에서 도리어 해가 되었다. 일단 소비자가 될 고객들이 그 고기가 진짜 성균관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고기인지 믿지 못했다. 두 번째로 성균관 측에서 ‘좋은 고기는 직영하는 식당으로 빼돌리고 성균관에는 질 떨어지는 낮은 고기를 납품하는 게 아닌가?’라며 포도청에 고발을 넣어버렸다.
“불문곡직하고 반촌으로 들이닥친 포교들이 반인들의 푸줏간을 발칵 뒤집어 놓으니, 대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씩이나 혼꾸멍이 난 반인들은 다시는 양무관에 손을 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무대신 유현동이 일러주었듯, 임꺽정의 후손들은 크게 번성했다.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좋은 것만 물려받지는 않았다. ‘양무공의 후예’라는 호칭은 물론 명예로웠지만 어떤 면에서 그들에게는 족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충무대왕의 후예’와 마찬가지다. 이순신의 후손들이 조상의 위명 때문에 반강제로 해군에 복무하듯이 임꺽정의 후예들 ? 이들은 임꺽정의 본향에서 따온 양주 임씨(楊州 林氏)라는 본을 칭하게 되었다 ? 은 군역을 임꺽정이 속한 부대였던 시위대나 등선군으로 치러야만 한다. 그게 가문 전통이다.
심지어 강무관에도 가면 안 된다. ‘양무공 어른께서 일개 군졸로 시작하여 출세하셨으니’ 후손들도 죄다 군졸로 입영해서 군교나 군관이 될 때까지 복무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문의 명실상부한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자격이 생긴다. 품계를 얻어야 하는 건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벼슬을 못 해서 신분이 천민으로 다시 떨어진다면 당상관까지 올랐던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그러니 신분이 떨어지지 않도록 종9품 참교직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다. 기왕이면 정7품 참위까지 받는 편이 좋고. 임병진은 임꺽정의 10대손으로, 올해 47세가 되는 원숙한 사내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서 군졸로 초모에 응한 뒤 열심히 복무해 중대장급인 종5품 정위까지 승진하는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가업을 잇겠다고 미련 없이 사직, 마장동으로 돌아갔다.
임병진이 이번 봉선에 참여한 건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처리하기 위해 따라온 50명이나 되는 백정 집단의 지휘자로서였다. 마장동 백정 40명에 명륜동 백정 10명으로 구성한 이들 무리는 수천 마리나 되는 소와 양, 말 등을 도살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이들이 조달한 뼈와 살, 내장이 있었기에 여기 모인 2만여 명이 뜨끈한 설렁탕으로 매끼 배를 채우면서 고기도 몇 점씩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은화와 비단으로 넉넉히 포상하기로 약속해 두었는데, 그것과 별개로 씨름에도 출전한 거다.
“하와국왕과 좋은 승부가 될 듯하구나.”
임꺽정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았는지, 임병진은 하진교보다 덩치가 더 컸다. 키는 네 치쯤 더 크고 그에 걸맞게 체구도 건장했다. 웬만한 하와인 장사들은 상대가 안 되었다. 전에도 언급했지 싶은데, 오군영 체육대회에서 날리는 장사들은 절반 이상이 하와인이다. 타고난 체구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다 보니 한인들이 상대가 안 된다. 현대 세계에서 일본 스모판을 하와이 출신 장사들이 장악했던 것과 같은 결과다.
하지만 임병진은 그 하와인 장사들을 몇이나 쓰러트리고 결승전까지 올라왔다. 하진교가 가지고 있는 신분이라는 이점도 없이, 순수한 자기 기술과 힘만 가지고 말이다.
“시작!”
“낭군님 힘내셔요!”
심판을 맡은 관원이 호령하자 현순공주가 크게 외쳤다. 아, 왜 부끄러움은 나와 화원공주 두 사람의 몫인 건가. 그나마 사방에서 터지는 다른 함성 때문에 그 목소리가 멀리 퍼지지 못해서 다행일 뿐이다.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가 하진교에게는 가서 닿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부쩍 힘을 내더니 자기보다 덩치가 큰 임병진의 허리를 번쩍 들어 올려서는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바로 사방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하와국왕 전하, 승!”
환호성이 울리는 가운데 하진교가 두 팔을 쳐들고 승리감을 만끽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놀라운 모습이 하나 비쳤다. 나이가 자기 반도 안 되는 하진교에게 패한 임병진이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는데, 얼굴에 낭패감이라곤 없었다. 태연하기만 했다.
“볼내공. 저놈, 웃고 있지 않은가?”
“그런…듯합니다.”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당황해서 짓는 헛웃음이나 애송이에게 패배한 씁쓸함을 곱씹는 쓴웃음이라면 모르겠는데 너무도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임병진이 첫판은 탐색전으로 치르느라 적당히 져 준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확 하고 들었다.
“선수 앞으로!”
다음 순간 두 번째 판이 시작됐다. 그리고 혹시나 했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전 정위 임병진 승!”
불길한 예감은 역시나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두 번째 판에서도 하진교는 먼젓번과 같은 수를 쓰려고 했는데, 임병진은 선수를 쳐서 되려 자기 몸으로 하진교를 깔아뭉개버렸다. 그 움직임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하진교는 당황하다가 발목이 꼬이면서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방금 끝난 세 번째 판 역시 마찬가지다. 앞서 두 판과 달리 시간을 끌며 다리 기술을 써 보려던 하진교는 되려 상대방의 교묘한 다리 기술에 역으로 당해 무릎을 꿇었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결승전이 생각보다 복잡해지고 있었다.
“폐하, 신이 등선군 출신 장수들에게 가서 들어보니 저 임가는 등선군에서도 씨름꾼으로 유명했었다고 합니다. 양무공을 떠올릴 만큼 칼도 잘 쓰고 힘도 좋아 제발 계속 복무하라고 사방에서 붙들었다는군요. 그런데도 효를 지켜야 한다고 미련 없이 떠난 자라 합니다.”
“씁. 진작에 좀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대단한 씨름꾼인 줄 알았으면 하진교에게 좀 더 주의를 줬을 텐데. 하지만 기회는 이미 지나갔다. 역시나 첫판은 하진교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려는 탐색전이었던 게 분명해 보인다. 그 뒤로 계속 상대도 안 되게 밀리고 있지 않은가.
“낭군님! 힘내셔요!”
현순공주가 아까보다 훨씬 애타게 외쳤다. 결승전은 5판 3선승제로 하기로 했으니까 이번 판을 꼭 이겨야 하는데, 하진교가 계속 밀리기만 하고 제대로 반격을 펼치지 못하니 답답한 마음이 생겨서 급하게 호소하고 싶어진 모양이다.
“오!”
첫 번째 판처럼 되려나 싶었다. 아내의 애끓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하진교가 물러나기를 멈추고 다시 임병진과 정면으로 맞붙었다. 하진교는 잠시 첫 번째 판처럼 임병진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일 뿐이었다. 공격으로 나서면서 방어 태세가 흐트러졌고, 임병진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그가 팔에 힘을 주었고, 근육이 불끈거리며 솟아나는 순간 하진교의 큰 덩치가 허공에 치솟았다.
“전 정위 임병진 승!”
환호성이 사방을 메웠다. 너무나도 완벽한 시합 결과에 나도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큰대자로 바닥에 뻗은 하진교는 일어나지 못했고, 임병진은 두 팔을 쳐들고 신나게 승리를 과시했다. 아까 첫째 판을 이긴 하진교가 했던 것처럼.
“도성에 돌아가면 우승자에게 황소를 한 마리 하사하도록 하라. 그 몸에는 자주색 비단을 두르고 뿔에는 금줄을 달아 장식하여 그 위상을 빛내도록 하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지시를 내린 뒤 두 선수를 내 앞으로 불렀다. 정신을 차린 하진교는 설마 자기가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지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참으로 멋진 승부였다. 어떤가. 다시 출사하여 금군에서 근무할 생각은 없는가? 그대의 조상인 양무공도 한때 내금위에서 일했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신에게는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재주가 없고, 나이 드신 어머님을 모셔야 하니 벼슬은 사양하고 싶사옵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솔직히 욕심이 났다. 하지만 본인이 안 하겠다는데 별수 있나. 장조 때 같으면 끝날 틈도 없이 싸워댔으니, 강제징집으로 처리하면 간단했겠으나 지금은 그럴 수 있는 때도 아니다. 소나 잡고 고기나 팔며 조용히 살겠다는데 억지로 끌어낼 명분도 없다.
“폐하! 2차전을 하게 해 주십시오. 비록 1차전에서는 졌지만, 설욕하고 싶습니다!”
하진교가 끼어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하게 있더니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인정한 모양이다. 보복전을 펼칠 궁리를 꾸미다니.
“씨름을 한 판 더 하려고 그러는가?”
“아닙니다, 폐하. 마땅히 종목을 바꾸어 다시 결판을 내야지요. 두 번째 판은 주량 대결을 청하나이다.”
술고래 시합만큼 의미 없는 싸움도 없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 긴 세월 살면서 술 때문에 속병 나서 죽은 사람을 한둘 봤던가. 특히 은이, 은이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쓸쓸하게 아려 온다. 하지만 술을 얼마나 오래, 많이 마시는가를 사나이다움의 상징으로 보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내 절친 하진교 역시 그런 부류였다.
“어떤가! 그대는 내 도전에 응하겠는가!”
“물론입니다, 전하. 마침 목이 마르던 차,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미 제사를 지낸 행사장 주변은 술잔치를 벌이는 자들로 가득했다. 씨름을 구경하느라 흥분한 자들 역시 태반이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안주를 앞에 놓고 있었다. 하진교와 임병진 앞에 술상이 놓이는 것도 금방이었다.
“술 말고 다른 시합은 어떤가? 투창이라거나….”
술 대결 시합을 말릴 생각으로 하진교가 조금이라도 유리한 종목을 찾아서 제시했지만 둘 다 거절했다. 하진교와 임병진, 둘 다 자기가 상대보다 술이 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상대를 밟아버리겠다고 말이다.
“제, 젠장할.”
하진교가 뒤로 자빠졌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임병진이 텅 빈 술잔을 들어서 땅에 대고 흔들었다.
“우와아아!”
하진교는 결국 2차전인 술 대결에서도 패하고 말았다. 하진교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는데도 상대인 임병진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이지 강한 사내였다.
“진짜 양무공의 재림 같구먼. 안 그런가, 볼내공?”
“그러게나 말이옵니다, 폐하.”
다시 한 번 현역 복귀를 권해봤으나 이번에도 임병진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소나 잡고 노모를 봉양하면서 살고 싶은 모양이다. 47세면 아직 기력과 솜씨가 다 한창일 나이인데 왜 이리 고집을 피우는지 원.
“폐하, 3차전을 치르게 해주시옵소서! 사내의 위신이 있지, 이대로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끝낼 수는 없사옵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하진교가 재도전을 부르짖었다. 이놈 참 끈질기다고 생각하면서, 과연 이번에는 무엇으로 붙을 생각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생각도 안 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소인은 본래 선비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대부는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3차전은 폐하께서 내린 시제(詩題)에 따라 시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야, 이건 너무 너한테 유리한 시합 아니냐? 하지만 내가 나무랄 틈은 없었다.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임병진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인은 글을 잘 몰라 시문을 짓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와국왕께서 세 번째 시합을 무난히 이기신 것으로 하겠습니다.”
“만세! 제가 이겼습니다, 폐하!”
내가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하진교가 승리를 선포해 버렸다. 따지자면 부전승을 거둔 셈인데, 하진교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이런 식의 잔치가 이틀간이나 더 이어졌다. 제사를 지내고 사흘째인 5월 8일이 되어서야 우리 일행은 하산을 시작했다. 행사에 참여한 제관과 군사들, 참례객 대부분은 남쪽 비탈로 삼지연을 향해 갔지만 우리는 북쪽 기슭을 택했다. 본격적인 북방 순행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