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86
4부 270화(1886화)
4.
쇼군 이에츠구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한황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참관하는 사자로 간인노미야를 보내는 계획을 취소한다. 조정에 통보하라.”
“쇼군, 이미 계획한 바를 취소한다면 조정에서 마땅치 않게 여길 게 분명합니다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상황이 그러하다.”
대한 황실에서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린다는 관수(館首, 일본에서 외국 주재 공사를 부르는 명칭)의 보고를 받고, 처음에 막부에서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되려 환영했다. 대한의 지원이 이번 기근을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이를 갚을 계기로 보았다. 자고로 이런 행사는 손님의 격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법이다. 그러니 쇼군의 조카이자 천황의 당질이며 대한 황실의 사위인 간인노미야를 보내 행사를 참관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간인노미야는 이미 한성에 다녀온 경험도 있으므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인선이었다.
물론 간인노미야 본인도 한성 방문을 꺼리지 않았다. 지난번에 사자로 갔을 때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데 바다를 건너기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중에 말썽이 생겼다. 그것도 막부에서 절대로 바라지 않는 종류의 말썽이 말이다.
“지금 교토 거리에는 땅에 누운 아사자가 즐비하고, 오사카에는 유랑민이 밀려들고 있다. 이는 호상들의 매점매석과 부패한 봉행들이 벌이는 학정 때문이다. 이들을 처단하고 저들이 숨겨둔 쌀을 꺼내 기민(飢民)을 구제하자!”
“구제하자!”
“오시오 님을 따르라!”
“호상 놈들을 죽여라!”
2월 19일, 한때 오사카 봉행소의 요리키(寄騎,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로 복무한 바 있는 오시오 헤이하치로라는 자가 오사카에서 난리를 일으켰다. 기근이 몇 년 동안 계속 이어져 막대한 피해가 나는 데도 적극적으로 구호에 나서지 않는 막부 당국에 대한 항의였다. 오시오는 꽤 명성 있는 학자인 데다, 그 자신이 행정관으로 직접 근무한 경험이 있으므로 백성 구제에 효과적인 조치를 많이 제안했다. 창고에다 쌀을 쟁여둔 호상들이 쌀을 내놓게 하고, 막부가 외국에서 들여온 쌀도 싼값에 시중에 풀라고 했다.
하지만 오사카 동정봉행 아토베 요시스케는 이런 제안을 모두 거부했다. 막부에 상납금을 최대한 많이 진상해야 자기에 대한 평가가 더욱 올라갈 것이고, 그래야 출세할 수 있으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시중의 쌀값이 내려가면 막부가 방출하는 외국산 쌀을 비싼 값으로 팔 수 없어진다. 그런 까닭으로 아토베는 상인들도 쌀을 싸게 시중에 내놓지 못하게 했다. 돈 생길 기회만 노리는 호상들로서도 나쁠 게 없는 조치니, 이들 역시 쌀창고 문을 닫았다.
비싼 쌀값을 부담할 수 없어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아토베에게도. 호상들에게도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결국 오시오는 5만 권에 달하는 자신의 장서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기민(飢民)을 구휼하는 한편 무기를 모았다. 무장을 갖추는 명분으로는 먼저 오사카 내에서 잇키가 발생한다면 관군을 도와 진압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다. 그리고 산짐승을 사냥해서 얻은 고기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서 은밀하게 포술 훈련을 했다.
실제로 오시오와 제자들은 산에 올라가 멧돼지를 잡아다가 고기를 나눠주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래서 봉행소(奉行所)에서도 깜박 속고 말았다. 오시오가 책을 팔고, 짐승을 사냥해 빈민을 돕는 행위가 자기 명성을 올리려는 의도라고 생각한 아토베는 그저 비난만 했다. 그 뒤로도 오시오는 몇 차례 더 아토베에게 백성들을 위해 자기 제안을 받아들여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토베는 이제 대답도 하지 않았고, 오시오가 에도에 서한을 보내 쇼군에게 직소하려고 하자 그 우편을 중도에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
아토베는 끝내 자신의 헌책(獻策)을 무시하고, 쇼군에게서는 회답이 없으니 ? 아토베가 자신이 쓴 서신을 가로챈 것은 몰랐다 ? 오시오로서는 이제 방법이 없었다. 무력으로 현재 상황을 뒤집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오시오는 제자들과 자기에게 은혜를 입은 일부 빈민들 등 동조자 3백여 명을 규합하여 봉기했다. 첫 표적은 원수인 아토베였다.
“놈을 벌집으로 만들어라!”
이날은 오사카 절반을 책임지는 서정봉행이 교체되는 날이었다. 신임 서정봉행이 인사를 올리러 오자 아토베가 선임자로서 아량을 보인답시고 보행소 정문까지 나와서 맞이했는데, 오시오 일당은 바로 그 자리를 노렸다.
“쏘아라!”
멧돼지 사냥으로 사격 연습을 한 숙련된 포수 20여 명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구식인 화승식 철포라지만 사람이 맞으면 죽는 건 똑같았다. 10발 이상을 맞은 동정봉행은 그대로 즉사했고, 옆에 있던 신임 서정봉행 호리 도시카타도 치명상을 입었다.
“됐다! 봉행소를 접수하라!”
진압을 이끌어야 할 봉행 두 사람이 한자리에서 몽땅 죽어버렸으니, 진압이 제대로 될 리 없다. 봉행소 소속 군사들은 당황해서 적이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도시 밖으로 도망쳤다. 삽시간에 두 봉행소 모두 오시오의 손에 들어갔다. 오시오와 함께 궐기한 백성들이 함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서 뒤늦게 달려와 동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앞에 선 오시오가 사자후를 발했다.
“봉행소 창고를 열어 빈민에게 쌀을 나눠주겠다! 그리고 쌀을 숨긴 호상들은 당장 창고를 열지 않으면 이제 열 기회도 없을 것이다!”
환호와 칭송이 그를 에워쌌다. 하지만 이들의 기쁨은 길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망동이냐? 당장 진압하라!”
오사카 시가지 동쪽에는 막부의 핵심 거점 중 하나인 오사카성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그 성은 저격당한 두 부교가 관리하지 않고, 수성봉행(戍城奉行)이라고 칭하는 책임자가 따로 있었다. 그 휘하에는 2천 명이나 되는 정예 관군이 별도로 있었고 말이다.
“이곳 오사카는 쇼군께서 각별히 생각하시는 곳이다. 난적(亂賊) 따위가 차지하게 둘 수 없으니 당장 출성하여 토벌하라!”
수성봉행인 카이쇼 히데야스는 단호하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이때 오사카 시내를 장악한 오시오의 무리는 이미 5천 이상으로 늘어나서 자기 병사들보다 두 배가 넘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휘하 장교들이 말렸으나 그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히데야스님, 적이 너무 많습니다. 주변에 지원을 청하는 사자를 보냈으니,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 철옹성을 지키면서 적을 견제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적은 대비가 허술하다. 지금 저들은 호상의 창고를 마구 약탈하는 등 엉뚱한 짓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 틈을 노려 일거에 적괴의 목을 베면 오합지졸들은 일제히 흩어져 도망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카이쇼 역시 아토베처럼 공적을 세워 출세할 욕심으로 가득했다. 행정관인 아토베가 상납금 액수를 기준으로 자기 공적을 평가했다면, 무관인 카이쇼는 베어낸 수급의 숫자를 기준으로 생각했다는 점 정도가 차이였다.
“적은 오합지졸이다! 밀어붙여라!”
오시오의 반군은 수성군이 출성하자 곧바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빈약한 무장을 갖추고서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반군들은 전열을 구축한 보병들의 일제사격에 무더기로 쓰러지면서 시체의 산을 쌓았다. 대포가 쏘는 산탄이 일거에 수십을 쓰러트리기도 했다. 오시오는 오사카성에 있는 정규 관군이 봉행소 군사들과 수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사카성을 공격하지 않았건만, 몇몇 다른 지도자들은 이 기세로 달려들면 관군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무모한 시도가 이런 비극을 빚었다.
“불을 질러라! 불을 질러서 관군의 접근을 막아라!”
누가 처음 지시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관군에게 밀려 혼이 빠진 반군 중 누군가가 관군을 저지할 욕심으로 의도적으로 방화를 저질렀다. 관군도 건물 내부에 숨어서 저항하는 반군을 간단히 처리하는 방법으로 불을 질렀다. 그러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으니까. 이순신이 쳐들어왔을 때도 불타지 않은 오사카가 일본인들끼리 벌인 싸움으로 절반 이상 불타버렸다. 나중에 집계한 바로는 분명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양민이었는데 불에 타 죽은 피해자만 천여 명이 넘었다.
관군을 저지하려고 지른 불은 되려 이쪽을 곤란하게 한 데다, 전투에서는 일패도지했다. 사기가 무너진 반군은 마침내 와해되었고 생존자들은 흩어져 도망쳤다. 오사카는 사흘 만에 다시 관군이 통제하게 되었다. 패장이 된 오시오는 산속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포로들을 심문하여 오시오가 주동자임을 알아낸 관군이 끈질기게 뒤를 쫓았고, 추격을 피해 산속을 헤매다가 결국 토벌군의 일부인 군마번 군사들에게 포착되었다. 곧 포위망이 그를 에워쌌고 도망칠 길은 없었다.
끝까지 스승을 지키던 제자들과 군마 병사들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제자들은 맹렬히 싸웠지만 숫자도, 무기도 뒤떨어졌다. 전원이 죽거나 중상을 입고 붙잡혔고 오시오 역시 살아남지 못했다. 얼굴에 총을 맞아 용모가 완전히 망가진 시체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사건은 막부의 위신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 오시오가 처음 난을 일으키고 진압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20일 남짓이었다고 하지만, 반적들이 오사카 같은 중요한 도시를 잠시라도 장악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망신이었다. 물론 오시오가 평소 학식과 인품, 잘생긴 얼굴로 민심을 얻었다고 하지만 막부가 제대로 일을 했다면 그런 반란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막부는 이미 위신이 꺾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오시오는 양명학자라서 주자학을 신봉하는 존왕론자들과는 별 교류가 없었다는 부분이다. 하지만 존왕론자들이 오시오의 건을 좋은 먹이로 삼아 막부를 공박하는 데 쓰고 있으니, 그것도 막부로서는 안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시오가 사냥대로 위장한 사병대 소수와 흥분한 난민(亂民)들만으로 오사카라는 큰 도시를 일시적이나마 장악했다는 사실이 저들에게 막부를 얕보게 만들 수 있다는 부분도 문제였다. 그러니 본보기를 보이면서 저들이 일어설 길을 막아야 했다.
난리가 완전히 끝났다는 보고를 받은 이에츠구는 오시오를 비롯한 반군 수뇌부의 수급을 오사카 동봉행소 앞에 내걸어 효수하게 했다. 그놈이 하필 얼굴에 총을 맞는 바람에 수급이 가짜 아니냐는 소리도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진짜 맞으니까. 더불어 결정한 조치가 대한 태황의 봉선에 보내기로 했던 간인노미야의 출국 취소였다. 존왕론자들이 막부의 체면을 깎아내릴 기회만 엿보고 있는데 틈을 내줄 수 없다는 취지다.
“간인노미야가 한양에 가서 막부의 능력을 폄훼한다면 큰일이라는 지적이 너무 심하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번 행사에는 한성에 주재하는 관수가 본 쇼군을 대리해서 참석하도록 하고, 사자는 다음에 우리 상황이 좀 안정된 뒤에 보내겠다.”
“예, 쇼군.”
이에츠구 자신은 간인노미야가 한양까지 가서 막부를 깎아내리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존왕론자들의 준동 때문에 예민해진 막부의 신하 중에는 이를 걱정하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 이들의 빗발치는 반대에 쇼군인 이에츠구도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황실과 조정에서도 이 사태를 두고 막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참이다. 안 그래도 후사가 없는 천황의 후계를 정하는 문제로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인데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곤란했다.
5.
본국에 계시는 임금께서 하늘에 제를 올려 나라의 안녕을 비신다고 한다. 장소가 천하의 명산 백두산이라고 한다. 그 소식은 조보에 실려 바다 건너 미주에도 전해졌고 미주 각지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그 문제를 두고 의구심을 표했다.
“그런데, 그 제사가 우리 미주에도 효험이 있나?”
“같은 임금을 모시는 땅이니 당연히 효험이 있겠지.”
“아니, 아무리 천제라고 해도 그 큰 대동양 너머까지 힘을 뻗치실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혼백이 바다 못 건너오신다고 조상님 제사도 안 지내는 판에.”
“예끼! 본국에 제사 지낼 조상도 없는 자네가 할 말인가?”
“허허, 그렇던가?”
애초에 미주에 이주한 이들은 대부분 제사 예법 따위도 잘 모르는 하층민이었다. 바로 그 제사와 성묘 문제 때문에 사대부들이 이주를 꺼린 탓이다. 그래서 제사 따위 안 지내거나, 지내더라도 그 형식이 ‘제대로 된 예법’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이후에는 미주 내에서 사대부 계층이 스스로 형성되고, 본국에서 일부 사대부가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최근에는 사대부가 제법 늘기는 했다. 그래봐야 전체 인구 중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예를 지켜 제사를 지내는 이들은 그중에서도 또 일부다.
그나마도 최근에는 합중국에서 개신교가 유입되면서 더 줄었다. 아직 제사를 지내더라도 본국에 있는 먼 조상은 놓아두고서 미주에 이주한 뒤의 조상들에게만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태반이다. 뭐, 본국에 있는 조상은 본국에 남은 본가 쪽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기도 하지만.
“하지만 미주에는 미주의 천신이 따로 있으니 우리 미주에서도 그 봉선이라는 걸 올려도 안 될 건 없지 않나?”
지금 미주에서 가장 콧김이 강한 사람, 딸을 태황의 후궁으로 들여보낸 태원백 김숭신이 담뱃대를 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려서부터 공들여 키운 딸 주희는 동빈이라는 작호까지 받았으나 아직 아들은 얻지 못했는데, 그래서 더 태황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애정에서 비롯된 관심보다는 안타까움과 동정에 더 가깝겠지만 뭐 어떤가. 어떻게든 태황의 눈길을 끌고 한 번이라도 더 동침하면서 총애를 받으면 되는 거지. 그게 딸에게도 좋고 자기 집안, 더 나가서 미주 전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동빈이 지난번 편지에서 전하기를, 분명 폐하께서 장차 미주에 납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했겠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고, 자기 입으로 약속했으니 언젠가 임금이 오기는 올 것이다. 그러면 미주의 명산 중 하나를 골라 그 위에서 제사를 드리자고 청하자.
그의 처가는 미억족 대추장 김대송의 후손이지만, 김숭신의 본가에도 미주 토인의 혈통이 섞여 있다. 이주한 지 오래된 가문치고 토인 아내를 한 번도 들인 적이 없는 가문은 없다고 봐도 좋으니까 말이다. 가세가 성하면 부족장의 딸과, 빈하면 아무 데서나 주워 온 여자와.
그러니 김숭신으로서도 대동양 서편인 본국의 천신과 동편인 미주의 천신은 분명히 다른 신일 게 분명하다는 인식이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제사도 따로 받아야지. 기본적인 전제는 그렇다고 치고,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미주 땅이 원체 넓고 그만큼 높고 험한 산도 많다 보니, 도대체 어느 산에서 제를 올리는 게 좋겠느냐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사실 김숭신은 임금의 미주 방문 약속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이미 몇 차례 미주 각지의 유력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 문제에 관한 그들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다만 결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아예 답장도 없거나, 별 관심이 없다는 사람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답장을 보낸 이들도 다들 자기 동네에 있는 산을 추천했다. 북미주의 타호마산, 남미주의 위타구산, 동변의 태호, 청구호, 황천동…기타 등등.
김숭신 자신도 기왕이면 가까운 곳이기만 하면 아무 산에서나 지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남들 보고 뭐라고 할 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느 한 곳으로 합의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사람을 좀 더 모아봐야겠군.”
임금이 건너오기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와 달라고 요청하는 연명상소를 써서 미주 백성들 전체의 이름으로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러면 임금이 하루라도 더 빨리 오지 않겠는가. 그리고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면 장소도 빨리 정하겠지. 다만 명색이 임금의 장인인데 자기가 직접 나설 수는 없었다. 김숭신은 누구를 맨 앞에다 내세우면 좋을지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외출하려면 의관을 정제하러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