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87
4부 271화(1887화)
6.
“최근에 귀국에서 소요가 몇 차례 일어났다던데….”
“흉년에는 언제나 소요가 따르는 법이지요. 기근 때문에 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뭉쳐 난을 일으키는 건 어느 나라에서든 종종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규모도 크지 않았고, 다 조기에 진압했으니 임금께서 크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봉선을 하러 오는 동안 일본 관수인 오쿠보 다다이치(大久保 忠一)와 나눈 대화다. 분명 일본 내에서 심상찮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걸 내가 아는데 무조건 괜찮다고 한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일본에서 벌어진 이번 기근은 근래에 유례가 없는 고난이다. 그런데 막부는 잇속을 차려가면서 곡식을 풀고 있다. 그러다가 잇키, 민란이 줄줄이 터진 거고. 시골에서 벌어진 소소한 소동, 막부나 각 번의 관군이 곧바로 진압할 수 있을 만큼 작은 민란뿐이라면야 오쿠보의 말대로 별문제가 안 되겠지.
하지만 오사카가 쑥대밭이 될 정도가 아니었는가. 무려 시가지 절반이 불탈 정도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진. 그 문제에 관해 소식이 들어왔을 때 우리 조정의 반응은 뭐…참 불쌍하게 여겼다는 표현 정도로 축약할 수 있겠다. 고작 백성 수백이 일으킨 난리로 일본 제2의 대도시인 오사카가 불바다가 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하도 기가 막히니 불쌍하게 여길 수밖에.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대한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새 도성까지 갔다가 다시 온 막내 외숙부 김좌근이 혀를 찼다. 도성 쪽 업무 몇 가지만 정리하고 다시 합류하기로 한 건 맞는데, 여기서 따라잡힐 줄은 몰랐다. 삼성부에서나 만날 줄 알았지. 물론 나는 걸어서, 혹은 배를 타고 느긋하게 움직였으니 가장 빠른 기차를 타고 따라오면 한양에 다녀왔으면서도 나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 북평에 도착하는 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본인이 피곤할 뿐이지.
다만 김좌근 본인은 그다지 피곤해 보이지는 않았다. 함께 끌려온 박규원이 반쯤 죽을 것 같은 몰골로 계속 내 옆에 있던 사촌 동생 박규수와 인사하는 모습과 참으로 비교되었다.
“도성에 가서 들어보니, 대판에서의 난리 이후로 그 사건의 영향으로 일어난 민란의 수만 20여 회쯤 된다고 합니다. 분명히 관군이 주모자인 대염(大?, 오시오)을 사살하고 그 목을 효수했음에도, 그 죽음을 믿지 않고 그 이름으로 난을 일으킨 자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일인들은 죽었다고 알려진 누가 실은 죽지 않고 먼 곳으로 떠나 숨었다는 이야기를 너무 즐기는 듯합니다. 죽었으면 죽은 거지, 왜 그리 죽은 사람을 붙들고들 싶어 하는지….”
당장에 떠오르는 사람만 해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리 ? 얘는 이쪽 세상에는 없지만 ?, 그 밖에도 수많은 인물이 실은 죽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이 수없이 많았다. 이쪽 세상에서도 그런 설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모양이고. 하긴 생존설이 실제 사실이었던 경우도 있기는 있었다. 시마즈 토시히사가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우리 쪽으로 와서 항왜장이 된 사례가 있었으니 말이다. 토시히사의 행방을 두고 일본 내에서도 꽤 논란이 있었다고 했고, 끝내 금의환향하면서 일본 천하를 놀라게 했다.
나중에 다시 각성하고 보니 행방이 묘연해진 놈은 반대 진영에도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 수군 총대장 구키 요시타카나 고토 해적의 두목 고토 스미하루 같은 놈들. 구키 요시타카야 직위 때문에라도 족칠 대상이었지만, 고토 스미하루는 문자 그대로 우리 원수였다. 그놈의 안내로 왜군 제1진이 전라도로 오는 바람에 적이 분명 동래로 올 줄로만 예상하고 세운 우리 방어계획이 몽땅 어그러졌다. 우리 초기 패전이 다 그놈 탓이었다.
그래서 잡기만 하면 찢어 죽일 셈이었건만, 우리 군대가 고토 열도를 샅샅이 뒤져도 놈은 나오지 않았다. 그놈도 구키 요시타카처럼 그 흔적이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두 놈이야 은밀하게 살아남았건 말건 이제 상관없는데…상관이 있는 놈이 하나 있다. 지금이야 그놈도 나름대로 불쌍한 놈이었구나 하고 있지만, 만약에 그때 잡혔으면 임해군과 함께 살과 뼈를 조각냈을 놈이다. 김좌근이 먼저 그놈 이름을 거론했다.
“하지만 폐하, 원가 놈도 실은 살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근래 있지 않습니까?”
“저도 들어는 보았습니다, 내구.”
본래 악당 두목 정도의 뜻이던 ‘원흉(元兇)’이라는 단어를 자기 별명으로 만들어 버린 놈, 원균. 본래 그놈은 을미동정 시기 비와호 호반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그놈이 살아남았을 거라는 주장이 나왔다. 최근에. 이름이 뭐더라, 정 모라는 한 할 짓 참 없었던 것 같은 국자감 원생이 내놓은 주장인데, 원균의 일기인 「왜지일록」? 출판된 적은 당연히 없는데, 누군가가 베낀 필사본이 돈다 ? 을 꼼꼼히 분석해 보니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고자 하는 원균의 삶에 대한 의지가 너무도 강했다는 것이다. 그런 놈이 순순히 싸우다 죽었을 리 없다나.
강무관에 보관된 해골은 원균의 것이 아니라 원균을 수행하던 대역, 즉 카게무샤의 것이 분명하다는 게 그 정씨 원생의 주장이었다. 여기에는 원균이 평소 다이묘급이 입는 갑옷이 아닌 하급 사무라이용 갑옷을 입고 다녔다는 일본 측 기록이 근거로 추가되어 있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놈이 살아남았다고 한들 그 행방을 밝힐 방법은 없다는 게 유감이지요. 화살에 맞아 깨진 두개골에서 원래 얼굴을 찾을 수도 없는 일이고.”
정 모가 역사 전문 시보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자면 원균은 시쳇더미 사이에 숨어 있다가 은밀하게 도주했다. 그리고 승려로 위장하여 여생을 일본에서 보냈을 게 분명하다고 했다. 읽어보니 그럴듯한 주장이기는 했다. DNA 검사 기술이 생기기 전에는 증거가 없을 뿐. 그 두개골과 DNA를 비교할 상대로는 미주로 이주한 원사웅의 후손들이 적절하긴 한데…과연 그 양반들이 원균의 두개골 진위를 가리기 위한 검사에 호응해 줄지 모르겠다. 아마도 치를 떨며 거절하지 않을까.
“그 대역이라는 자도 원흉 원가와 마찬가지입니다. 하필이면 얼굴에 총탄을 맞는 바람에 본얼굴을 잘 알아볼 수가 없어서, 죽었다는 관부의 발표가 먹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시오의 이름을 내건 민란이 수십 건이나 잇달아 일어난 거다. 하지만 막부 측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아서, 오사카처럼 일이 크게 번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존왕파에 속한 영주와 무사들이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듯하다는 풍문이 살짝 전해지고 있습니다. 막부에서도 그 부분을 경계하고 있고요.”
김좌근은 지금 정3품 외무부 참의다. 6년 전에 정6품 좌랑이었던 걸 상기하면 엄청나게 빠른 승진이지만…일단 임금의 외숙이고 보니 이 정도는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다. 더구나 대한 제일의 명가라고 할 수 있는 장동 김문의 사실상 수장이 아닌가. 큰외삼촌 김유근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한 상태지만 그게 전부다. 그래서야 가문의 좌장 노릇을 하기는 무리다.
둘째 외숙인 김원근은 이미 죽었으므로 김좌근이 가주 노릇을 할 수밖에 없긴 한데…이게 아무래도 좀 미덥지 못하다. 김좌근이라는 인물이 원래 역사에서 벌인 행각이 있는 데다, 이쪽 세상에서 내가 본 김좌근도 능력은 있을지언정 인품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 되어서…. 하지만 어쨌거나 외척이고 내 지지 세력이니 최대한 곁에 두고 활용할 수밖에 없다. 정말 갱생 불가능한 망나니로 판명되면 나중에 쳐내면 되는 거고.
어쨌든 능력은 기본적으로 있는 편이다 보니 지금까지는 큰 탈 없이 측근 역할을 해주고 있다. 게다가 그동안 주로 근무한 부처가 외무부다 보니 내가 외교 면에서 결정을 내릴 때 꽤 보탬이 된다.
“어떻습니까. 존왕파를 일컫는 자들이 막부에 이번 민란의 책임을 물어서 반기라도 들 것 같습니까?”
“아직은 그럴 위험은 없어 보입니다. 대판(오사카)민란 때문에 크게 망신을 당한 막부가 전국에 경계령을 내리고 혹시 역모를 꾸미는 무리가 있다면 일거에 제압하려고 잔뜩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존왕파들이 지금 일을 도모한다면 바로 치도곤을 맞을 겁니다.”
양쪽 다 바보가 아니니, 지금은 눈치만 살핀다는 말이로군.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은 당연히 막부가 압도적이기도 하고. 심지어 교토에 주둔하는 병력은 2배로 늘렸다고 한다. 아쉬운 건 내 사촌매제인 간인노미야가 이번 봉선에 사자로 건너올 뻔했는데 일본 내부의 눈치 때문에 취소됐다는 부분이다. 일본 황실에서 봉선을 참관하라고 황족을 직접 보냈다면 얼마나 우리 백성들 앞에서 면이 살았겠는가.
다만 일본 쪽 사정도 이해는 간다. 기근 때문에 민란이 일어나서 오사카가 불타는 판인데 간인노미야 정도 되는 사람이 사자로 건너오는 건 무리겠지. 관수를 통해 보낸 일본 측 예물을 돈으로 치면 한 은화 2천 냥어치 정도 됐었다. 하지만 간인노미야가 직접 건너왔으면 막부와 황실의 체면 때문에라도 그 10배는 들고 왔을 테니, 기근 때문에 민란까지 터진 와중에 이게 무슨 낭비냐는 비난이 일본 내에서 쏟아졌으리라.
“일본 쪽 상황이 좀 좋아지면 그때 또 사절이 오가면 되겠지요. 일단은 막부가 더 곤란한 상황에 몰리지 않도록 우리 쪽에서 좀 도와야겠습니다.”
“당장은 양곡을 더 싼 값으로 넘기는 정도면 충분할 것입니다. 올해 누손에서 작황이 꽤 괜찮다고 하니, 그쪽에서 쌀을 보내시지요.”
누손 인구는 6백만이지만 풍작이 들면 거의 2천만 명분에 해당하는 쌀이 나온다. 면적당 수확량은 본국보다 적은데, 열대 기후 때문에 이모작을 넘어서 삼모작까지 가능한 곳인지라 물량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덕분에 말 그대로 쌀이 쏟아진다. 다만 태풍이 몰려와 농경지를 휩쓴다거나 하는 사태가 종종 벌어지기 때문에 매년 저렇게 풍작을 거둘 수는 없다. 하지만 대체로 넉넉한 편이기는 하므로 누손에서는 남아도는 쌀을 활용해서 술을 빚거나 외부에 수출하여 쏠쏠한 수입을 얻는다.
그렇게 큰 돈줄을 현지 출신 마름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보니, 누손에 대농장을 보유한 사족들은 둘째 이하 지차 아들들이나 서자들을 보내 관리를 시키곤 한다. 그로 인한 문제는 그놈들이 현지에 서자녀들을 잔뜩 남겨놓고 본국으로 줄행랑치는 사례도 빈발한다는 거….
다만 이런 안정도 루손섬을 중심으로 한 누손주 북부 이야기다. 남부는 아직 평정이 전부 끝나지 않아서 갈로도를 비롯한 여러 섬이 야만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해적이나 모로족의 습격이 종종 일어나는 등 치안도 좀 불안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쪽으로 들어가는 군사비가 상당하다. 그런 까닭으로 누손주는 옛날 평안도나 함경도처럼 조세를 도성에 보내지 않는 잉류지역이다.
“미주산 기름도 마찬가지겠지요.”
“물론입니다. 우리 쪽으로 들어올 기름 물량을 조금 그쪽으로 돌려도 좋으리라고 봅니다.”
기름이 일본 상선들이 미주에서 많이 수입하는 상품 중 하나인 건 여전하다. 기름 대금을 금은이 아니라 사람으로 치르는 것도 여전하다. 다만 값은 되려 낮아졌다. 성친왕 시절에 여자 1명에 기름 3통이더니, 지금은 2통이라고 한다. 기근 때문에 사람값이 싸진 모양이다.
“어쨌든…당분간 일본 내에서 급박한 사태가 터질 일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당장 크게 뭐가 터질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후금에서 칸위 계승권을 두고 숙질간에 으르렁거리는 거야 한두 해 된 일도 아니고, 청나라는 안정적이고, 후송에서 일이 터진다면 외부를 향하기보다는 내부에서 날 테니. 일본도 내부적인 문제 아니냐고 하겠지만, 막부를 쓰러트리려는 파가 우리한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후송이야 어느 편이 집권하든 어차피 우릴 대하는 태도에는 차이가 없을 테니 상관없는 거고. 하여간 진심으로 빈다. 혹시 뭔가 터지려면 제발 내가 귀경한 다음에 터져라. 북한 땅을 순시하고 있을 때 일이 터지면 제대로 대처도 못 한다. 그러니 꼭 좀 부탁하겠다.
?
7.
북평에서 사흘 동안 머무른 뒤 삼성부를 향해서 다시 출발했다. 여기부터 삼성부까지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지만 계속 수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철로도 강변을 따라 놓여 있으니 굳이 이용한다고 해서 거리를 단축하는 의미도 없지 않은가.”
“물론입니다, 폐하.”
여기까지 배에 싣고 온 이런저런 짐을 굳이 기차로 다시 옮겨 실을 필요도 없고 말이지. 그게 웬만큼 귀찮은 일인가. 더구나 강을 따라 내려가는 선박 여행도 꽤 즐거운 일일뿐더러, 기차보다는 배 안이 훨씬 공간이 넓어 지내기 편하기도 하다. 침실도 훨씬 넓게 쓸 수 있고 주변의 눈치도 덜 본다.
게다가 내 침실과 하진교의 침실 사이에 널찍이 거리를 둘 수 있어서 사생활 때문에 서로 눈치를 덜 봐도 된다는 것도 상당한 장점이다. 이거, 의외로 중요한 문제더라. 전용열차에서 같은 칸에 타고 생활하니까 이게 의외로 정말 민망했다. 강을 타고 내려가면서 나타나는 고을마다 배를 멈추고 잠시 뭍에 내려 주민들을 살피는 건 잊지 않았다. 모두 내 백성들 아닌가.
“태황 폐하 만세! 만세!”
“상감마마 만수무강하소서!”
“그대들의 충정이 참으로 고맙구나. 내 잊지 않으마.”
처음에는 군 단위 이상인 고을에만 방문하고 너무 작은 고을은 그냥 지나칠까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 순행이 동북부 일대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하니 그러기는 좀 아쉬웠다. 그냥 내가 좀 수고하고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들르는 마을마다 백성들에게 인사를 받고 하사품을 내리며 가끔은 육지에서 묵기도 했다. 그러면서 태평하게 하류로 내려갔더니, 북평에서 삼성부까지 내려가는데 무려 20일이 넘게 걸리고 말았다. 정상적으로 가면 절대로 그만큼 걸릴 일이 없는데, 나 참 느긋하게 갔다.
마침내 삼성부에 도착할 날이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무자호란 당시 삼성부 포위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삼성부에 왔다고 하면 삼성부 포위전에 관해서 쓴 정철의 『삼성별곡』, 그 불멸의 서사시가 언급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문청공은 그 글에서 삼성부를 지키던 장졸들의 용맹함을 옛날 신로마를 최후까지 지키던 로마국 황제와 군사들에 비하였지요. 참으로 명문이었습니다만, 배우느라 고역이었습니다.”
하진교가 혀를 내둘렀다. 옛날 하와국 왕궁에서 글을 배우면서 정철도 배우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정말 힘들었다면서 치를 떨었다.
“더군다나 권수까지 그리 많지 않았겠습니까?”
“미안하군. 다 내 죄일세.”
20세기, 21세기 학생들을 고생시킬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19세기 학생부터 고생시킬 줄은 몰랐다. 어디 시험에 나올 책도 아닌데 하진교를 가르친 선생은 왜 그런 책을 가르친 걸까. 혹시 그놈 자신이 밀덕이었나? 아무튼 정철의 책과 실제 삼성부 포위전에 관한 이야기가 더 오갔다. 김좌근이나 박규원, 박규수 모두 글줄깨나 읽은 사람들이다 보니 이야기는 끊임이 없었다. 그러다가 박규원이 정철이 삼성부 포위전을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비유한 데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신은 경태 4년(1453)에 신로마가 무너진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옵니다.”
“어찌 그러시오?”
신로마(新路馬)는 콘스탄티노플을 뜻한다. 동로마제국을 가리킬 때는 후로마(後路馬)라고 한다. 로마를 수도로 하는 본래의 로마제국을 가리키는 말은 따로 없다. 그냥 로마다.
“만약 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11세 같은 명군이 아니라 명의 태창제와 같은 진정 용렬한 군주였다면 어땠겠습니까. 장렬한 최후를 맞기는커녕 조상들의 위명에 시커먼 먹칠이나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건 그렇구려.”
태창제 주상순은 반군이 쳐들어오니까 자기 혼자 도망치다가 붙잡혀서 고깃국이 됐었지. 원래 역사 선조나 고종 같은 황제여도 마찬가지였겠다. 바로 도망가거나 항복했을 테니까.콘스탄티노플 시민 중에는 그냥 항복하고 무사히 살고 싶은 사람이 꽤 있었을지도 모르긴 하겠다. 하지만 내가 그 처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황제가 항전을 선택한 게 옳았다는 생각만 든다. 덕분에 후대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는가.
만약 황제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으면 유선처럼 후대 대대로 비웃음만 샀겠지. 지금처럼 동방에서까지 그 이름이 영광스럽게 남을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삼성부 성벽이 가까워졌다. 이번 순행의 가장 북쪽 목적지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