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896
4부 280화(1896화)
9.
『삼가 현재 미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에 관해 아뢰옵니다. 태원백 김재정은 올해 봄 4월경부터 미주 일대를 주유하며 폐하께 연명 상소를 올린다는 명분으로 각지에 거주하는 유지들에게 자기가 만든 연판장을 직접 돌려 날인을 받고 있사옵니다. 신이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태원백을 찾아가 대체 무슨 의도로 백성을 선동하느냐고 꾸짖으니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이번에 직접 백두산에 올라 국운을 융성하게 비는 봉선을 하신다고 들었다. 이는 실로 경탄하고 감축할 일이라, 그렇다면 이곳 미주에서도 폐하께서 명산에 올라 제사를 올리신다면 천하에 그 위엄을 떨치는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그 해명을 듣고 어떤 의도로 하는 일이든 이처럼 백성들을 선동하면 안 된다고 잘 타이르려 하였으나, 태원백은 자신은 폐하께 대들고자 하는 뜻이 없으며 단지 폐하께 미주 백성들의 뜻을 적어 상소를 올리고자 할 뿐이니 막지 말아달라 하였습니다.
‘본국 백성 5천만이 폐하의 백성이듯, 미주 백성 1천만도 폐하의 백성이오. 폐하께 미주 백성들을 위해서도 천신께 제를 올려 빌어달라고 청하는 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오? 분명히 폐하께서도 어렵다 답하실 수는 있어도 안 된다고 하지는 않으실 거요!’
이처럼 대답하며 폐하께 올릴 연판장에 수결과 도장 받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하니, 차마 신이 더 제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의 전례를 볼 때 이처럼 백성을 선동하는 것은 장차 난을 일으키려는 시초이니, 신은 이 일이 장차 큰 환란의 단초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폐하께 글을 올리니 부디 현명하신 하교를 부탁드리옵니다. 신이 목민관의 도리를 지키자면 마땅히 제 손으로 태원백을 일단 잡아 가두고 연판장에다 수결, 날인한 자들도 모두 잡아들여야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태원백이 황실과 맺은 인연을 생각하니 차마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이는 신이 지은 크고도 큰 죄입니다. 불충의 죄를 범하였으니 부디 신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어떤 벌을 내리시건 마땅히 따르겠사옵니다….』
나머지는 굳이 공들여 읽을 필요 없었다. 폐하께서 믿고 맡기신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이 표현과 형태를 바꿔 가면서 4천 자쯤 늘어져 있었으니까. 딱 보면 뻔한데 그걸 뭐 하러 일일이 읽고 있는가. 그냥 대충 한번 훑고 말지. 그 의미 없는 뒷부분을 끝까지 훑는 동안에도 앞부분에서 받은 충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뭐, 미주에서도 봉선을 해달라고? 이게 정말 진지하게 올리는 요청인가? 너무 황당해서 당장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며칠 전에 동빈이 침소에서 아버지가 찾아오면 따로 만나줄 수 있겠냐고 물어본 이유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연판장, 탄원서를 김재정이 나한테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던 모양이다.
다만 자기 아버지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동빈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미주에서 건너와 임금을 알현하고 돌아가서는 동네에서 자랑거리로 내세우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도 그럴 줄 알고 가볍게 승낙한 거였고. 애초에 김재정과 나는 안면이 없는 사이도 아니다. 지난번에 미주 갔을 때 만났으니까. 나를 잘 대접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게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내가 먼저 환대받았으니까 그걸 돌려준다고 생각하면 못 만날 것도 아니었다. 후궁의 아버지도 장인은 장인 아닌가. 생각도 안 한 사태에 직면한 내가 멍청해 있는 사이 신하들 쪽에서 먼저 포문이 열렸다. 포탄은 뜻밖에도 김용관 쪽으로 먼저 날아갔다.
“폐하! 무리를 모아 작당하는 것은 변란의 조짐입니다. 이를 파악했으면서도 죄인 일당을 당장 소탕하지 않고 놓아두었으니, 당장 미주대총관을 파직하소서.”
“어사대의 청이 옳사옵니다. 미주대총관 김용관은 죄인을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풀어놓았으니 이는 실로 큰 죄라 하겠습니다. 당장 어사대 관원들을 보내 추포하소서.”
“이는 미주의 기강이 흐트러졌음을 의미합니다. 도찰원에서 청한 바대로 당장에 어사대를 급파하여 미주대총관에게 죄를 물으소서.”
삼사 관원들이 입을 모아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와, 이런 식으로 누구를 족쳐야 한다고 삼사가 조정에서 난리 치는 거 참 오랜만에 보는구나.
“미주대총관이 아주 잘하였다. 태원백이 동빈의 아비라서 차마 추포할 수 없었다면 당장 짐에게 알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대로 묵인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일단 한마디 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아랫사람이 자기 권한과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 직면했다면 바로 윗선에 보고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현명한 행동이니까. 상대는 임금의 셋밖에 없는 후궁 중 하나의 부친이다. 김용관이 아무리 미주대총관이라고 해도 임의로 잡아넣거나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동빈이 슬퍼하고 임금이 분노하면 그 불똥이 누구한테 튀겠는가. 아니, 튀리라고 생각하겠는가. 파악한 즉시 바로 보고한 것만 해도 용한 거다. 문제를 일으킨 인물이 태황에게 총애받는 후궁의 아버지라면, 그것도 멀리 미주에서 생긴 일이라면 어떻게든 본국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면서 자기가 수습하려고 기를 쓰는 게 보통일 텐데 말이다.
“폐하. 일단 연판장을 돌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태원백을 역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삼정승 중 가장 우두머리인 국무총리대신 한승룡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육군대신과 우참정대신을 역임한 바 있는 노신으로, 국상이던 김창재가 신병(身病)을 이유로 올해 초에 사직하자 그 자리에 올라갔다. 그가 비운 우참정대신 자리에 권세직이 들어간 것이고. 군무에 경험이 없는 권세직을 그의 후임으로 넣은 건 굳이 시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내가 군무를 관장할 테니, 권세직이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잠시 앉혀두었다가 좀 편한 다른 자리로 옮겨줘야지.
“대총관이 알리기를, 태원백은 미주 선비들의 뜻을 모아 폐하께 상소를 올리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연명 상소로 자기 뜻을 올리기를 서슴지 않은 선비가 많았으니, 어찌 과거의 그 수많은 전례를 부정하겠습니까.”
유생들이 연명으로 올리는 상소라. 무종 시절, 장조 시절에는 정말 질리도록 받아야 했던 물건이지. 중종 시절에도 일일이 거론하는 게 의미가 없을 만큼은 받았다. 시대가 바뀐 지금도 수십 명, 수백 명이 서명한 연명 상소는 종종 올라온다. 죽은 선황의 품행을 지적하는 어떤 상소에는 7백 명이 이름을 적어서 올리기도 했었다. 참 대단했지. 올리는 수단도 옛날보다 다양하다. 신문궤 속에 들어있기도 하고 시보에 실리기도 한다. 상소의 기능을 시보가 일부 대체하는 건 이미 한참 전부터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김재정이 돌리고 다닌다는 연판장을 연명 상소로 간주한다면 그렇게까지 큰 문제가 아닌 건 맞다. 문제는 그 상소의 주제고, 중신들도 그 문제를 지적했다.
“폐하. 대총관이 올린 표문에 따르면 태원백은 ‘미주에는 미주의 천신이 따로 있다’라고 말했다고 하옵니다. 이는 태조 폐하를 보위에 오르시게 한 천명을 부정하는 처사이니, 어찌 이를 대역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옳습니다. 아무리 태원백이 무식한 미주인이라 해도 이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당장 칙명을 내려서 연판장을 돌리지 못하게 하시고, 태원백의 작호를 박탈하고 엄벌에 처하소서! 옛날 무종께서 계시던 시절 같았으면 이런 죄인들의 가산을 적물한 뒤에 일가의 사내들은 모두 처형하고 아녀자들은 전가사변에 처하셨을 것이옵니다!”
어, 옛날 무종 시절의 나 같으면 정말로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딱히 그러고 싶지 않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요즘은 안 그래도 나라가 굴러가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겠느냐는 말이다.
“천명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어찌 나라 안에 다른 천명이 있겠습니까? 감히 다른 천명을 거론하는 것부터가 이미 역도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김용관을 두둔하자 그를 공격하는 목소리는 일단 잦아들었다. 하지만 김재정을 향한 공격은 맹렬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혼란스러운 기분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아무 말 않고 조용히 있으니, 나도 자기들 의견에 동조한다고 여겼는지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임금은 하나, 하늘도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도한 소리를 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폐하, 신은 생각이 조금 다르옵니다.”
거의 조정 전체가 김재정을 맹비난하는 와중에 혼자서 반대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내 스승 중 한 사람이자 좌참정대신인 김정희였다.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는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흥분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사옵니다만, 대총관의 표문을 보면 태원백은 ‘미주에는 본국과 다른 천명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사옵니다. ‘미주에 있는 천신은 본국의 천신과 다르다’라고 하였지요.”
김정희는 중원의 하늘과 우리 하늘이 다르다고 천명한 장조를 거론했다. 중원과 우리에게 다른 하늘이 있다면, 장조 이전까지 서로를 모르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던 미주에도 당연히 다른 하늘, 다른 천하가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미주 토인들에게도 자기들 나름대로 모시던 천신(天神), 수신(水神), 지신(地神)이 모두 있었습니다. 우리 대한이 강역을 넓혀 미주를 획득했다고 해서 저들이 모시던 그런 신들의 존재 자체를 원래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나도 거의 같은 생각을 하던 참이었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김정희는 반박할 이는 얼마든지 이야기하라고 했지만, 그의 논리적인 지적에서 흠을 찾아낸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미주의 천신을 별도로 언급했다고 해서 역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별도의 천명이 내렸다고 하면 모르겠습니다만, 태원백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폐하께서 미주에서도 봉선을 행하여 그 천명을 미주에도 널리 퍼뜨려 주십사고 하였지요.”
이게 정리하자면 조금 애매한데 이렇게 되는 셈이다. 임금은 분명 나 하나다, 새 천명을 받을 다른 임금은 없다, 하지만 미주에는 본국과 다른 천신이 있으니 내가 미주에 와서 그 천신에게도 제를 올려준다면 좋을 것 같다…라는 게 김재정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하느님?부처님?공자님?조상신에게 한꺼번에 기도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지.’
나도 비슷한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김정희의 의견이 반가웠다. 사실 애초에 김재정이 반란 따위를 일으키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으니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미주에 가서 직접 김재정을 만나보고 그 품성도 확인하고 왔는데 그런 억측을 할 리가 없잖은가. 김재정은 그저 자기 딸을 황실에 집어넣음으로써 그 영광의 과실을 누리려 하는 소인배에 불과한 사람이다. 자기가 가진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는 반란 따위는 생각도 안 할 성품이라는 말이다.
“좌상께서 하시는 말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본관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정희가 논리적으로 내놓은 설명에 수긍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잠시 침묵했다가 자기 나름의 논리로 반박을 가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본래 토인들이 섬기던 미주의 천신이 따로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우리에게 밀려 그 힘을 잃었으므로 의미가 없다는 이들이 다수였다.
“저들의 하늘이 본래 별도로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우리 하늘에 흡수되었으니 이를 따로 생각함은 옳지 않습니다. 중원이야 지금도 우리와 별개의 나라이므로 저들의 하늘이 별도로 있지만, 미주는 이미 우리 강역이 아닙니까.”
예무대신 유현동이 이쪽 진영의 선두에 섰다. 맡은 직책이 예무대신이니만큼 이런 문제를 두고 나설 때는 그가 발언권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도 장조를 인용했다.
“장조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우리도 하늘이 별도로 있었다’라고 하셨지요. 이는 곧 중원을 천자로 모시는 번국이던 시절에는 우리에게도 하늘이 따로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대명이 쓰러져 선조께서 칭제하시고서야 비로소 떳떳하게 우리 하늘을 모시지 않았습니까.”
즉, 우리 번국조차도 아닌 속지에 불과한 미주에는 이제 자기 하늘이 따로 없고, 별도의 천신을 운운하는 태도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게 유현동의 주장이었다. 양 진영은 서로 다른 논리를 내세워 이렇게 치열한 논전을 벌였다.
“그러면, 이러면 될 게 아니오.”
내가 입을 열자 편전 안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신하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천천히 그동안 정리한 내 생각을 하나씩 입 밖으로 꺼냈다.
“미주에 본래 별도의 하늘이 있었음은 모두가 알고 있소. 그렇다면 미주에서 봉선을 한다 치면, 거기서 올리는 제사는 본국에 계시는 천신께서 미주 땅에 발을 딛고 그 땅을 완전히 점유하시며 그곳 토인들의 신을 복속하여 신하로 들이시는 형태로 지내면 되지 않겠소.”
역사 속에 선례도 많지 않은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그랬다. 정복자들은 자기들의 신을 피정복자에게 강요했고, 피정복자들의 신은 악마로 격하되거나 구세대의 신으로 몰려 일선에서 밀려났다. 그리스 신화에서 윗세대 신으로 묘사된 이들이 그런 존재들이다. 조금 더 가까운 사례도 있다. 스페인이 중남미를 정복하면서 원주민들의 신전을 파괴하고 그 터에 성당을 지은 것도 이와 같은 성격의 행동이다. 원주민들의 신앙을 아예 짓밟으면서 자기들의 새 종교를 강요하는 거니까.
“서반아인들에 비하면 우리가 훨씬 점잖은 것 아니겠소. 제사만 한 번 지낼 뿐이지, 토인 무당들을 몽땅 잡아다 처형하거나 신당을 불태우자는 건 아니니까. 토인들도 별다른 불만 없이 잘 받아들일 거요.”
이미 그런 신앙의 대상으로 임금이 있다. 원주민들이 임금을 부르는 ‘바다 건너 큰아버지’라는 표현에 이미 종교적인 존숭의 의미가 있는데 거기에 천신 하나 새로 덧붙인다고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그리고 그대들에게 한마디 하겠소. 무지한 이를 보면 가르쳐야지, 어찌 무턱대고 처벌할 생각부터 하시오? 태원백이 그대들 말대로 무지한 미주인이라 바른 도리를 모르면, 불러다 가르쳐야 할 게 아니오. 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지, 가르쳐서 깨우칠 생각부터 하시오!”
“….”
내 지적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내 말이 논리적으로 지극히 타당해서인지, 동빈에 대한 총애 때문에 내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이 논쟁은 결론이 나지 않고 끝났다. 합의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겠고, 아마도 김재정이 나타나는 그 순간까지 결론은 안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