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00
4부 284화(1900화)
1.
비글호는 작은 소형선이지만 항해 성능은 상당히 우수했다. 뱃머리에 서서 망원경을 들고 전방을 살피던 피츠로이 함장이 크게 소리쳤다.
“바람이 바뀐다! 동쪽으로 키를 돌려라! 40도!”
“40도!”
타륜을 잡은 키잡이가 크게 복명복창하면서 키를 돌렸다. 키잡이만 움직인 게 아니다. 열 명이 넘는 선원들이 구령과 함께 돛대에 달라붙었다.
“그쪽 밧줄 풀어! 활대 돌려!”
“예!”
범선은 증기선과 다르다. 증기선은 키만 돌리면 방향이 바뀌지만 범선은 키만 돌린다고 해서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 그런고로 수많은 선원이 달라붙어 아딧줄을 풀고 묶으며 돛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바람을 제대로 받는다. 이 복잡한 작업을 위해서는 숙련된 선원 다수가 필요하다. 요즘 증기선이 자꾸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인력 조달 문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증기선은 증기기관을 관리할 기관사 한 사람과 화부만 있어도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삽질만 하면 되는 화부와 돛을 전문적으로 다뤄야 하는 숙련된 선원의 인건비를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비싸다. 그러니 비용이 나갈 요소를 줄이고 싶어 하는 선주들이 증기선 쪽을 기웃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돛대 고정 끝!”
“쉬어!”
밧줄을 놓은 선원들이 갑판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곧 다른 할 일이 생기겠지만, 지금은 잠시 휴식이다. 인상 험악한 영국인 선원이 호통을 쳤다.
“이봐, 빅 존! 물 떠와!”
“예, 스미스씨.”
이름과는 전혀 다른 작은 체구의 아시아인 선원이 허겁지겁 갑판 한쪽에 놓인 청수(淸水) 통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가 물을 뜨기도 전에 덩치 큰 폴리네시아인 선원이 불쑥 나타나서 물통을 통째로 들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자, 마셔.”
“아…알겠네.”
‘빅 존’이라는 이름과는 반대로 작기만 한 아시아인 선원에게는 거칠기 그지없던 영국인 선원 스미스도 자기보다 덩치가 큰 폴리네시아인 ‘리틀 존’에게는 양순하기만 했다. 공연히 싸움을 걸다가 연달아 나가떨어진 동료들을 보고 배운 교훈 덕분이다.
“물통은 전달했으니, 나랑 밧줄이나 손질하러 가자고, 빅 존.”
“고, 고마워. 리틀 존.”
안도의 한숨을 쉰 빅 존이 종종걸음으로 친구의 뒤를 따랐다. 그의 본명은 종성공 이훈, 본래대로라면 태황의 사촌으로 한양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던 불운으로 인해 다른 나라 배에서 뱃사람 노릇을 하고 있었다.
?
2.
“불이야!”
“불이야! 물 가져와!”
“소방도감에서는 언제 오나!”
소왕저 식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사랑채에서 폭발음이 크게 울리고 불꽃이 솟았다. 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불, 불을 꺼라!”
“마님, 도련님! 이쪽입니다!”
고요하던 저택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에 빠졌다. 어떻게든 불을 꺼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노복들과 먼저 몸을 피하는 소왕 일가가 뒤엉켰다. 고함과 비명 사이로 소방마차의 경고종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세상에, 세상에 이럴 수가….”
고작 열세 살인 종성공의 침실도 사랑채에 있었다. 바로 인근에서 굉음이 울리고 건물이 뒤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으나 정신은 차리지 못했다. 혹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곁에서 모시던 노복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타죽었을지도 모른다.
“도련님, 어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노복은 종성공을 그대로 둘러업은 채 연기 속을 헤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한 그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을 때, 방금 빠져나온 사랑채가 불길에 싸여 무너지고 있었다. 그 뒤로 종성공은 소왕저를 다시 보지 못했다.
“말도 안 됩니다. 반역이라니요! 아버님께서 그런 일을 꾸미실 리가 없잖아요!”
소왕 일가는 백부인 전왕 이종의 저택에서 한동안 피난살이를 했다. 그런데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소왕저가 불바다가 된 이유가 사랑채에 있던 화약 때문이라는 게 아닌가. 그리고 거기 화약을 쌓아둔 당사자는 자기 아버지라는 이야기까지.
“…너를 황태자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저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부친의 고백을 듣는 순간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태자라니, 바란 적도 없는 자리다. 그 자리는 적장손인 사촌 형님의 자리가 아닌가. 너무나 뛰어난 능력을 갖추어 차마 범접할 생각도 안 드는 그 형님 말이다. 황태자는 고작 열 살도 안 되어서 논어를 읽고 지학(志學)의 나이에는 이미 모든 학문에 통달했다. 사대부라면 마땅히 익혀야 할 옛 성현들의 학문만이 아니라 각종 서학(西學)에도 능숙해서 양인들과 불어나 라틴어로 자유롭게 대화할 정도였다.
이훈은 태자의 그런 모습을 보자마자 기가 질렸다. 부친인 소왕은 금상의 방탕한 생활을 우습게 보아 그 자리를 욕심냈지만, 정작 이훈 자신은 태자가 이룬 성취를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저게 대체 사람이 달성할 수 있는 경지란 말인가? 그 자리에 대한 욕심조차 생기지 않았다. 대한의 태자 자리에 오르려면 저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건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떨렸다. 그런데 부친이 그 자리에 자기를 앉힐 생각으로 역모를 꾸몄다고 하니, 혼이 달아날 기분인 게 당연했다.
“아버님, 절대 하시면 안 되는 일을 하셨습니다! 대체 이 일을 어찌 수습하시려고…!”
이훈만 기가 막혀 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친인 소왕비도, 두 살 아래 동생인 명천공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직 어려서 작호가 없는 일곱 살배기 막내 성이만 지금 오가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구나. 죄는 내가 지었는데, 억울한 네가….”
부친 소왕이 이훈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모친은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눈물을 뿌렸다. 아직도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은 이훈은 그저 멍하니 안겨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어떻게든 연통을 넣어라.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구해 그리로 보내 주마. 옷이든, 음식이든, 배필이든….”
뜻밖에도 금상은 부친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모든 죄는 문객이었던 남응중이 덮어썼다. 황실 내에서 역모 사건이 터진다면 그로 인한 비난이 황실을 향하리라 예상한 탓이겠지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자칫했으면 성이만 빼고 나머지 남자 셋은 다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산은 거의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한 지붕 아래에 죄인을 두었으면서도 몰랐던 죄를 비는 의미에서 일가가 모두 귀양지인 현토도로 ‘낙향’해야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억울할 일이었지만, 그에게 더 억울한 점은 따로 있었다.
“아직 어린 너만 혼자 죽은 사람이 되어 그 먼 곳에 가야 한다니….”
다른 일가는 살았지만 그만 죽었다. 정확히는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었다. 역적의 집안이 일본 공주 ? 일본 황실의 딸이 아니라 대군의 조카지만, 다들 공주라고 부른다 ? 와 혼사를 맺게 둘 수 없으니, 죽은 사람이 되어 떠나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북쪽 섬, 해우도로. 마지막 겨울은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그 호화로웠던 소왕저가, 즐비했던 노비들이, 한양에서의 풍요로웠던 삶이, 비록 그가 청한 상대는 아니었다지만 아름답고 부유한 약혼녀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부친의 욕심 탓이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까지 잃으려는 참이다. 자신이 원했던 것도 아니고, 부친이 멋대로 청한 혼인 때문에.
“머슴 거동은 어서 밖으로 나와라!”
“나, 나가오.”
밖에서 호송관의 호통이 쏟아졌다. 천것 따위가 황명을 우습게 여기느냐는 협박이 덤으로 붙었다. 부친 소왕은 마지막으로 그를 끌어안은 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당부했다.
“절대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살아서 버티면 벗어날 길이 있을 것이니라.”
해우도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황량했다. 제주도에 버금갈 만큼 큰 섬이라지만 이 섬에서 사는 사람은 해우도 판관 이하 내수사 관원과 번병인 이텔멘 토병을 모두 합쳐 열댓 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그저 새들, 그리고 해우와 물개 같은 바다짐승들뿐이었다.
“이런 험지에서 관원과 죄수를 구분해서 무엇하겠는가. 예전에 유배되었던 이들이 지내던 집이 있으니 거기서 지내도록 하시게.”
관원들은 아직 어린 이훈이 역모에 말려든 것을 가엾게 여겨주었다. 하지만 이훈은 이곳 삶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부모가 기껏 챙겨준 좋은 옷과 음식도 머슴에 불과한 대역죄인이 이런 게 왜 필요하냐며 호송관들이 거의 가져가 버려서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어서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으나 죽는 것도 쉽지 않았다. 허나 그를 가엾게 여긴 판관 장덕순이 노역도 시키지 않고, 먹을 것도 내주었기에 겨우 마음을 잡고 버텨나가던 어느 날 이국의 배가 왔다.
“대해우를 연구하러 왔으니 협조해 주시기를 바라오. 여기, 임금께서 주신 공문이오.”
“알겠습니다. 대해우가 주로 서식하는 해안으로 안내하지요. 어이, 거동이. 자네 이쪽으로 와서 이분들 일 좀 돕게.”
잉글인들의 심부름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어차피 무거운 짐 같은 것은 선원들이 직접 날랐고, 이훈의 일은 길 안내와 잔심부름 정도였다. 그저 섬 안을 누비기만 하며 몇 년을 보낸 터라 길은 밝았다. 섬 내의 지리를 그보다 잘 아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다. 죄인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워서 신분은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잉글인들은 이훈을 그저 이곳 토인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섬 바깥에서 온 외국인들과 접촉하다 보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몰고 온 배에 밀항한다면 도망갈 수 있지 않을까. 섬을 정기적으로 찾는 관선은 경비가 엄중해서 숨어들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저들의 배는 허술해 보였다. 그래서 작심하고 숨어들었다. 일단 바다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잉글인들이 자신을 유형수라고 알고 있으면 섬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회항할지도 모르지만 평범한 토인이라고 알고 있으니, 배를 돌리기 귀찮아서라도 그냥 진행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벽지를 벗어나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 우리 배를 탔다고? 태워주는 거야 뭐 어렵지 않지만, 한국 관청에서 뭐라고 할 것 같은데.”
선창에서 들켰을 때, 선장은 매우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그가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본 다윈이라는 학자가 데려가 주자고 했다. 어차피 해우도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면서 말이다. 안도한 이훈은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며 도박을 걸었다.
“근무지를 이탈했다고 태형을 당할 거긴 합니다만, 그 이상은 처벌이 없을 겁니다.”
“그런가. 그러면 그건 자네가 감당하게. 우리가 대속금을 내주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피츠로이 선장이 쌀쌀맞게 말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이훈은 급료 따위 없이 일하는 견습 수부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빅 존’이라는 영어 이름은 거동(巨同), 즉 ‘큰아이’라는 본래 이름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너, 한인이지. 그것도 도성 출신.”
“무, 무슨 소리야. 리틀 존. 나, 나는 한어를 좀 배웠을 뿐인 이텔멘 토인인데….”
리틀 존 일행, 니브히족 5명이 이 배에 타게 된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비글호가 현토도 연안을 지나다가 모래톱에 얹히지만 않았어도 이들의 일손이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괴력을 선보인 리틀 존을 본 피츠로이 선장은 이훈 때와 달리 자기가 먼저 비글호에 타지 않겠느냐고 승선 제안을 했고, 그가 선뜻 승낙하자 마음이 바뀔지가 걱정됐는지 얼른 태웠다. 그를 맞이한 선원들은 ‘빅 존’은 이미 있다면서 ‘리틀 존’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훈은 언뜻 봐도 현토도 토인이 아닌 그를 슬슬 피했다. 아무리 봐도 하와인이 분명한데 현토도 토인이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상대방도 뭔가 켕기는 게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비밀을 알게 되면 자기 비밀도 털어놓아야 할 게 두려웠다. 헌데 상대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 역시 이훈에게 동질감을 느낀 탓인지 자꾸 친밀하게 접근해 왔다. 그러더니 그를 선창 구석에 밀어 넣고 정체를 추궁했다.
“거짓말 마. 네놈 말투는 한양 양반들이 쓰는 말투야. 잉글인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모양이지만, 한양에서 태어나서 살지 않는 이상 그렇게 자연스럽게 구사하지는 못 해.”
리틀 존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자기 정체를 밝혔다.
“너도 눈치채고 있었지? 나는 현토인이 아니라 하와인이다. 이복형을 제치고 보위를 노린 죄로 현토 땅에 유배당했지. 너, 해우도에서 왔다며? 거기까지 갈 정도면 너도 국사범이지? 거기서 평생 살려니 앞이 캄캄해서 탈주한 거지?”
입이 얼어붙었다. 이자가 관에 고변하면 자기는 죽은 목숨이었다. 덜덜 떠는 이훈을 보고 리틀 존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겁먹지 마. 어차피 같은 처지인데 서로 도와야지. 그러니 네 사연이나 털어놔 봐라.”
이훈은 고민했다. 정말 자신의 진짜 신분을 털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그저 소왕저 머슴 거동으로 살 것인가. 어느 쪽이든 도망쳐 숨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상황은 다를 거다. 고심 끝에 입술이 열렸다. 동료가, 친구가 가지고 싶었다.
“네 말이 맞아, 리틀 존. 사실 나는…주상 폐하의 사촌동생이다.”
3.
“어떠냐. 뱃일은 이제 좀 익숙해졌지?”
“다 리틀 존 네 덕분이지 뭘.”
두 사람 모두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다. 게다가 고립된 바다 위에서 몇 달을 지내다 보니 친해지는 속도도 빨랐다. 이훈, 쿠아이와라는 본명도 서로 고백했지만 둘은 여전히 서로를 빅 존, 리틀 존이라고 불렀다. 혹시 누군가가 엿듣기라도 하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정체는 계속 아무도 모르는 편이 좋았다.
“이제 조금만 가면 잉글국에 도착하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먹고 살길을 찾아야지.”
배에서는 일단 밥은 준다. 하지만 이훈이 생각하기에 선원을 직업으로 택할 수는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다. 쿠아이와 역시 그 점에서는 같은 결론이었다. 거기에 닿는 과정은 좀 달랐지만.
“나랑 같이 온 니브히들은 계속 선원 노릇을 한다지만, 난 군대에나 지원하면 어떨지를 생각하는 중이야. 잉글군에 들어간 전사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전사는 전사답게 살아야지.”
많지는 않지만, 잉글국 해군 군함들도 하와국에 기항해서 선원을 보충할 때가 있다. 물론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지만, 가끔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도 있다.
“나도 너랑 같이 갈까….”
종친 신분을 드러내고 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분명히 주상이 추격대를 보낼 테니까. 겁을 먹은 잉글국 조정이 직접 잡아서 송환해 버릴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어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돈을 벌 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학자 노릇을 하자니 임진년 그 난리 이후 5년 동안 공부에서 손을 뗀지라 아는 게 없다. 장사를 하자니 밑천이 없고, 가진 건 몸뚱어리뿐이다.
“사냥은 익숙하지만, 남의 땅이니 사냥꾼 노릇도 못 하겠고….”
잉글국은 대한 못지않게 사회 체제가 꽉 짜인 나라다. 외방에서 온 청년이 파고들어 자기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아, 미주합중국으로 가지. 거기라면 좀 더 쉽게 정착할 수 있을걸.”
쿠아이와가 손바닥을 쳤다. 하와국에 있을 때 합중국에서 온 배들을 자주 접했었다며, 그 나라는 언제든 이주자를 환영한다고 했다.
“아직 빈 땅도 많고, 기회도 많은 나라야. 우리를 알아볼 사람도 없으니, 그쪽으로 가서 새로 살아보자고. 뱃삯은 없지만 대신 몸으로 때우면 되겠지.”
“그래, 그게 잉글국에서 거지가 되는 것보다는 낫겠네.”
두 사람은 잉글국에 도착하면 바로 대서양을 건널 배를 알아보기로 했다. 혹시 본국에서 올지 모르는 추적대를 따돌리기에도 그편이 좋을 터, 아주 좋은 방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