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05
4부 289화(1905화)
24.
노려보는 눈매가 정말로 매서웠다. 차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만약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여염의 보통 노파였다면, 그리고 내가 그 노파의 손자였다면 지금쯤 내 등짝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가득했으리라. 아니다. 그냥 등이 온통 시뻘게져 있었을 거다. 손바닥 자국이 하나하나 따로 구분이 안 될 만큼 신나게 처맞았을 테니.
“입이 있으면 어디 한마디 해보시지요, 주상.”
조모가 날카롭게 내뱉었다. 조모의 노기를 자기도 감당하기 힘들어서인지, 말려줄 생각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태후는 동석하지 않고 먼저 사라졌다. 중전은 함께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그마치 시조모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노기를 터트리자 그토록 기가 센 우리 중전도 차마 따라와서 함께 야단맞겠다고 고집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 혼자 태황태후전에 들어와 마루에 꿇어앉는 신세가 되었다.
“입이 있으면 말해 보란 말입니다!”
태후가 일갈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화가 난 기색이 명백했다.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할마마마. 과거 할바마마께서 비행선 시험을 명하셨을 때 추락하여 죽거나 다친 이들이 많았던 것은 소손도 압니다. 하지만 이번 비행선은 오늘 그 성능을 시연하기 전에 군기시 장인들과 비승군 군사들이 북한산성에서 이미 수십 차례나 시험비행을 거친 것으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말해 보라면서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뿐인데 대뜸 그렇게 화를 내실 거면 말해 보라는 말은 왜 하신 건가요.
?
조모는 비행선 시연장에서 곧바로 내 부주의를 야단치지는 않았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화를 내기에는 보는 눈이 지나치게 많았던 까닭이다. 이번 비행선 시연을 성공적으로 치르려고 열흘 전부터 조보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조보가 기사를 실으니 시보들도 앞다투어 그 기사를 실었다. 그 홍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적어도 수만 명이 모여들어서 내 비행을 구경했다.
사실 비행선에 관한 소문은 이미 어느 정도 퍼져 있었다. 군기시 장인들이야 입이 무거운 게 습관이라고 해도, 북한산 주변에 사는 주민들 눈까지 가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시험을 위해 북한산성 내에서 이착륙을 반복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꽤 있었다. 시보에도 목격담을 인용하는 형태로 몇 차례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그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한 기사는 없었다. 추측만 난무했는데 그 정체가 마침내 공개된 거다. 당연히 이 구경거리를 보려고 수많은 관중이 모였다. 조정 문무관들과 종친들은 물론이고 도성 인근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몰려와서 마포 백사장을 빽빽하게 메웠다. 내가 비행선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이 관중이 사방에서 환호했다.
“주상 폐하 만세! 만세!”
“땅과 바다와 하늘까지 다스리시는 폐하 만세!”
“태황 폐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
‘하늘까지 다스리는 태황’이라는 의미인지 천황이라고 부르는 자들도 있었다. 졸지에 내 새 별명이 생기고 말았다. 이런 환호에 직면하고 보니 백성들의 흥을 돋울 겸, 내 자부심도 채울 겸 즉석에서 짧게나마 연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비행선은 선대의 유업(遺業)을 이어서 완성한 것이라, 천하에 유례가 없는 물건이다. 장차 만국이 이를 보고 놀라워할 것이니, 그대들은 경탄하며 칭송할지어다!”
연설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짧았다. 하지만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모아서 만세를 불렀다.
“만세! 만세! 태황 폐하 만세!”
“상감마마 만세!”
미리 준비시켜 둔 술과 음식을 나눠주니 관중들이 외치는 만세 소리는 더 커졌다. 한때는 처형장으로 사용되며 숱한 죄인들과 포로들의 피를 빨아들였던 이 백사장이 지금은 최신예 비행선의 시험장이자 완전한 잔치 자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는 내 마음은 뿌듯하기는커녕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내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노려보는 조모의 따가운 눈길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조모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진 건 경희궁에 돌아온 뒤였다. 앞서 말했듯이 태후는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고, 중전은 따라 들어오려다가 분노한 조모의 눈빛을 보고 어물어물하다가 문이 닫혔다. 나는 두 줄로 늘어선 조모의 상궁들 사이에 홀로 꿇어앉아 조모를 대면해야 했다.
“오늘 일을 변명할 수 있으면 해보세요, 주상!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는지!”
‘할머니’한테 이토록 혼이 나 보는 건 네 번의 생에 걸쳐서 처음이다. 무종 때 할머니였던 인수대비한테도 이런 야단은 맞지 않았다. 아니, 그때는 내가 도리어 진성대군의 목숨으로 인수대비를 협박하는 자리에 있었던가. 거참 불효막심한 놈이었군.
“그따위 잡기(雜器)에 내탕금을 퍼붓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상에게도 생각이 있겠거니 해서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다니요. 만백성의 어버이인 주상이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돈 가지고 뭐라고 하면 억울하다. 비행선 연구에 들어간 돈은 3만 냥쯤인데, 내가 중종 때 취미생활에 쓰던 돈과 비교하면 미미하기 그지없는 액수다. 내가 흑단으로 건조했던 1등 대선, 동성 건조비에 비하면 뭐 정말 푼돈이지. 1등 대선의 평균 건조비는 14만 냥이었다. 하지만 동성은 선체 상부를 순 흑단으로 하고 금과 비단을 처바르다시피 장식했다. 그래서 정확한 액수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건조비가 대략 20만 냥은 족히 들었다. 그거 단 한 척을 건조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조모한테 그 액수를 언급하면서 변명해 봐야 욕만 더 먹을 게 뻔하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모의 힐난이 이어졌다.
“그리고 주상의 목숨과 일개 장인, 군사들의 목숨이 어찌 같습니까! 저들보다 백 배나, 천 배나 귀중하고 이 나라에서 누구의 목숨보다 더 아껴야 할 목숨이 주상의 목숨입니다!”
나는 조모에게 이렇게 야단맞을 때를 대비해서 ‘임금인 제가 솔선수범하지 않는다면 어찌 비행선에 군사들을 태워 전장으로 보내겠습니까?’라는 변명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잔뜩 화가 난 조모의 상태를 보니 그따위 변명은 안 하느니만 못할 게 분명했다. 지난 15년 동안 내게 자애로운 모습만 보여주던 조모의 호된 질책은 손바닥으로 등짝을 후려치는 것보다 더 아팠다. 조모는 선황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언급하면서 계속 불호령을 내렸다.
“그 끔찍한 사건을 보고서도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그나마 선황에게는 당장 보위를 물려받아도 될 만큼 나이를 먹은 주상이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상은, 이제 겨우 핏덩이를 벗어난 원자를 두고 어찌 그런 무책임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손찌검은 안 하는 대신 정신적으로 압박을 주는 조모의 힐난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해가 넘어가고 저녁 수라를 받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꾸지람을 끝낸 조모는 아직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표시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당분간 주상의 문안을 일절 받지 않겠습니다! 다시 부를 때까지, 주상께서 범한 잘못을 돌이키며 근신하세요!”
“하, 할마마마!”
“듣기 싫습니다! 나가세요!”
생각지 못한 반응에 멍해 있는 사이 조모는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뒤늦게 용서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내 주변은 조모를 따르는 늙은 상궁들로 둘러싸였다.
“폐하. 그만 대전으로 돌아가시옵소서.”
“태황태후마마의 명이시옵니다. 물러가셔야 하옵니다.”
뭐라고 맞서볼 새도 없이 등을 떠밀리다시피 해 쫓겨나고 말았다. 허망한 마음에 한참을 복도에 서 있으려니, 기다리고 있던 송현승이 다가와 송구하다며 허리를 굽혔다. 송현승의 부축을 받으며 내 처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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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비행선 시승 문제로 조모가 진노했다는 사실은 알음알음으로 퍼져나갔다. 바로 하루 뒤에 편전에서도 그 문제로 신하들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조정 신하들 역시 내가 직접 비행선에 탈 줄 몰랐던 건 마찬가지였다.
“엄연히 기관사와 함께 올라타기로 한 비승군 군사들이 있건만, 폐하께서 직접 비행선을 시승하신 건 실로 부주의한 처사셨사옵니다.”
“호란과 왜란을 맞아서 대군을 거느리고 몇 번이나 친정하신 장조께서도 직접 적을 향해 활을 겨누지는 않으셨습니다. 선봉에 서는 것은 폐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만약 사고로 추락했으면 어쩔 거냐, 포낭(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린다고 해도 확실하게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지 않으냐 ? 여태까지 군기시에서 허수아비로 실험한 바로는, 백 미터 정도 고도에서 낙하산을 펼쳤을 때 성공률은 절반가량이었다 ? 는 공박이 빗발쳤다. 제지하지 않고 전부 들었다. 그러면서 깊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이럴 것 같아서 내가 조정에서 미리 이야기 안 한 건데. 미리 얘기했으면 여기서 아무도 동의 안 했을 테니까. 지금도 대신급 중신 중에 내가 잘했다고 동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건 각오했던 바기도 해서 실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모에게 야단을 맞으면서 이미 나빠진 기분을 더 나쁘게 하는 효과는 확실했다.
“알겠소. 내가 잠시 혈기가 앞서서 무모한 짓을 벌였으니, 깊이 후회하는 바요. 앞으로는 주의하리다. 다시는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일로 만용을 부리지 않겠소.”
한참을 듣다가 잘못을 인정하는 의미로 나지막하게 한마디 했다. 어차피 비행선 말고는 내가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 선구자 노릇을 할 탈것도 없다. 그리고 뭐, 이런 종류의 약속은 원래 난감한 자리만 잠깐 모면하려고 하는 거 아니던가. 어쨌든 내가 이렇게 말한 이상 중신들은 그만 입을 다무는 게 예의다. 내가 약속을 깨면 그때 가서 나를 나무랄지언정, 임금이 자기 잘못을 인정했는데 계속 붙들고 늘어지는 것도 불충이다. 헌데 그 불충을 시도하는 놈들이 있었다.
“폐하께서는 아직 젊으신 관계로 성급하게 구실 때가 있습니다. 부디 자중하소서.”
“성현의 글을 읽으시고 수양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심이 좋겠습니다. 책을 많이 읽어서 학식만 풍부하다고 하여 곧 도를 깨달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소서.”
경연청 영사 조예승이 헛기침을 토하면서 나를 나무랐다. 아니, 이 작자가 경연 때 내가 본의 아니게 망신 좀 줬다고 이런 식으로 앙갚음을 해? 기회를 잡았으니 내 기를 꺾겠다고? 짜증이 확 났다. 지난번 중종 때는 성친왕이 개망나니로 살면서 악명을 원체 드높여 놔서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어려서부터 원체 모범생 이미지로 일관한지라 그런 면으로는 은근히 얕보려는 경향이 조금은 있다. 이건 능력 면에서 우수하다고 보는 것과는 별개다.
어려서부터 숱한 통치 경험을 쌓아서 명군의 자질을 보이는 임금이라고 해도 ‘어린 나이로 인한 일부 미숙함’은 어쩔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나한테는 ‘형편없는 아비’라는 족쇄가 이미 걸려 있다. 내가 조금만 엇나가는 꼴을 보이면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게 뻔하고, 나는 그게 죽도록 싫다.
“알겠으니 이제 그만하시오.”
내가 다시 한번 경고했는데도 이들의 나무람은 바로 끝나지 않았다. 한참을 더 계속되는 그 공박을 들으면서 다짐했다. 내년 봄에는 이놈들 다 잘라버리고 말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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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렇다고 내가 직접 비행선을 시승, 만백성 앞에서 솔선수범을 보인 걸 좋게 보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며칠 지난 뒤에 마포 거리로 미행을 나갔더니 술잔을 앞에 둔 사내들이 아직도 그날의 사건을 화제로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거, 비행선이라는 물건, 정말 대단하더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허공에 떠서 산이고 강이고 다 넘어가면, 수레고 배고 다 필요가 없게 되는 거 아니야? 기차도 필요 없고?”
“그런데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지 않았나? 그리고 사람이나 짐을 많이 싣기에는 너무 작고 약해 보이던데….”
“배랑 기차도 갈수록 커지고 빨라지지 않았나. 그러니 비행선도 계속 커지고 빨라지겠지. 상감께서 비행선 개발에 관심이 꽤 크신 모양이던데, 조만간 조운선만큼 큰 비행선 정도는 나오지 않겠나?”
비행선을 본 백성들은 기대가 참 컸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배, 어떤 지형이든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보고 느낀 당연한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위험성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비행선을 타고 움직이다가 고장이라도 나면 끝장 아닌가? 수레나 기차가 멈추면 땅에 내리면 되고 배가 가라앉으면 누가 구해줄 때까지 헤엄을 치면 되는데, 비행선을 타고 가다가 떨어지면 그대로 피떡이 될 텐데….”
“그건 그렇지….”
신나게 비행선을 찬양하던 술꾼들이 잠시 눈을 마주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이 괜찮다는 듯이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아니! 괜찮을 걸세! 비행선이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면 상감께서 직접 타셨겠는가?”
그 발언은 확실하게 효과가 있었다. 둘러앉아 있던 술꾼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동조하기 시작한 거다.
“내 동생이 그날 비행선을 타기로 되어있던 비승군인데, 상감께서 직접 비행선을 타신 걸 보고 감격해서 눈물을 줄줄 흘리더라고! 비승군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면서!”
“그러게. 상감께서 손수 타실 정도면 비행선도 꽤 안전하다는 말이잖나. 안심하고 타도 될 거야.”
“비행선이 얼른 널리 퍼지면 좋겠네. 그러면 우리도 여울목 같은 데서 난파할 염려 없이 안전하게 쌀을 나를 수 있을 텐데.”
신이 나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걱정도 좀 됐다. 이러다가 사고 한 번 제대로 나면 그대로 여론이 뒤집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신감은 좋지만, 괜히 안전불감증 같은 게 생기지는 않도록 해야겠지.
“폐하. 무척 기분이 좋으신 듯합니다. 미행에서 좋은 일이 있으셨사옵니까?”
“좋은 일이 있었소, 중전.”
흐뭇한 기분으로 환궁하니 중전이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오늘은 데이트하러 다녀온 게 아니라 민심을 살피러 나간 참이었으므로 중전 없이 혼자 나갔었다. 물론 호위는 데리고.
옷을 갈아입고서 오늘 듣고 온 이야기들을 중전에게 들려주니 중전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기뻐해 주었다. 상의도 없이 혼자 몰래 비행선을 탄 것만 빼고, 중전은 처음부터 나를 크게 응원해 주었으므로 지금도 같은 편이었다.
“백성들이 폐하의 뜻을 알고 기꺼이 따르니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이제 태황태후께서도 곧 화를 풀고 폐하를 불러들이실 테니, 기운을 내시옵소서.”
“고맙소, 중전.”
웃으며 중전을 끌어안았다. 내 뜻을 이해하고 내 편이 되어 지지해주는 사람의 존재는 늘 힘이 된다. 곧 다가올 겨울 안에는 조모가 나를 용서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