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09
4부 293화(1909화)
6.
황제는 거슴츠레한 눈으로 자기 앞에 엎드린 사람을 바라보았다. 술과 미약에 취해 있는 나날이 계속되다 보니 이게 누구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대는 누구며 무슨 일로 짐을 찾아왔는가?”
“폐하. 신 흠차대신 임칙서이옵니다.”
“아, 그랬었지. 참. 짐이 요즘 격무로 인해 피로하여 조금 정신이 없었노라. 그대를 얼른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
임칙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화려하게 장식한 후궁의 침소에서 맨몸에다 비단 겉옷 하나만 걸친 차림새로 누워 있는 게 격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심히 의문이다. 하지만 황제에게 그 질문을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원래 이런 성품이니까. 선황 영강제가 죽기 직전에 태자를 폐위하려고 심각하게 고민한 것도 이 문제 탓이었다. 선황이 붕어하기 서너 달쯤 전의 그때 선황제와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흠차대신. 짐은 태자를 바꿨으면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태자 전하를 폐위하시겠다고요?”
아편 근절 문제로 협력하고 있는 덕성도 측에서 보내온 서한을 들고 찾아갔을 때였다. 이 갑작스러운 선언은 뭔가 싶어 임칙서도 귀를 의심했다.
“우리 대송은 참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몰려 있네. 잠시 평화를 누리고는 있으나 사방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으니 언제 또 침범당할지 모르지. 이를 피하자면 자질 있는 군주가 제위에 올라야 하는데, 태자는…태자는…그 무거운 책무를 감당할 능력이 모자라네….”
황제는 차마 자기 아들의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 태자가 주색에 미쳐 있다는 사실은 이미 황궁 내에 알음알음으로 퍼져 있건만, 아버지 된 이로써 자기 입으로 거론하는 건 너무나 민망한 일이었다.
“…그래서 후궁 소생인 다른 친왕 중 하나를 태자로 새로 세우려 하네. 짐이 마음에 두고 있는 녀석이 있기는 하네만, 그대도 누가 좋다고 생각하는지 의견을….”
“폐하, 태자 전하를 폐하시다니요! 아니 되옵니다!”
황제의 말을 도중에 끊는 건 엄청난 중죄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자를 폐하고 다른 황자를 태자로 책봉했을 때 그 후유증이 심각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태자의 성정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심히 어울리지 않아 폐위하는 게 낫다고 많이들 말하던데 경은 어찌 그리 격하게 반대하는가?”
“태자 전하를 폐위하면 이 대송의 명운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임칙서는 황제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새 태자께서는 폐태자 전하를 견제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폐위에 불만을 품은 폐태자가 제위를 탈환하겠다며 반기를 들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가만히 있더라도 역적들이 폐태자를 옹립하여 난을 일으킬 우려도 있습니다.”
황제가 황위를 지키는 동안에야 큰 사고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새 태자가 즉위하면 분명히 폐태자를 제거하려 할 텐데, 그 생모인 황태후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결국에는 황태후까지 치게 된다.
“그리되면 새 황제께서는 불효자가 되어 천하의 지탄을 받으실 것이고 성군으로서 나라를 이끄는 일은 무척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태자께서 자리를 지키도록 하십시오. 이 비천한 몸이 전력으로 태자 전하를 보위하여 성군이 되시도록 받들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태자가 주색에 미쳐 있기는 해도 ‘남의 것’을 탐하지는 않는 데 있었다. 태자는 주색에 탐닉하면서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서, 여염의 부녀자들을 강제로 끌고 오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는 여인을 봐도 유부녀라고 하면 손대지 않았다. 임칙서는 이 정도면 태자가 황위에 올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후궁에 틀어박혀서 들어가는 서류에 도장만 찍어주면 된다. 그러면 실제적인 나랏일은 자신을 포함한 중신들이 처리하면 되니까 말이다. 물론 황제에게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경의 생각은 그러한가. 하지만 짐은 아무래도 태자를 믿고 보위를 넘길 수가 없다. 너무, 너무 그 자질이 부족하니….”
하지만 황제는 자꾸 미련을 보였다. 태자에게 너무 실망한 나머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탈이 너무 크지 않은가. 그것도 자기가 해결할 게 아니고 새로 황제가 될 다른 아들에게 지울 짐이. 정녕 후환 없이 이 문제를 처리하자면 현 태자를 폐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목숨을 끊어서 아들에게 부담을 넘기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영강제는 그렇게 모진 사람이 못 되었다. 이를 잘 아는 임칙서는 태자를 유임시키는 게 최선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결국 황제가 단념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임칙서는 그저 쓰디쓴 입맛을 되씹으며 어전에서 물러나야 했다.
“흠, 투옥된 중신들을 그만 용서해달라고.”
“그렇습니다, 폐하. 이제 봉선도 하실 터인데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특사를 내리신다면 폐하의 관대함이 온 천하를 밝힐 것입니다.”
보위에 오른 금상이 보인 행동은 태자 시절에 임칙서가 예측한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딱 하나 어긋난 것이라면 황태후가 황제 대신 나라를 다스리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모후가 어린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돌보는 거야 흔한 일이다. 소무제 때도 10년이 넘도록 태후가 수렴청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가 스물을 넘긴 지 한참 아닌가. 설마 황태후가 성인이 다 된 아들을 뒷전에 앉혀 놓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정권을 쥐고 맨 먼저 한다는 일이 봉선과 태자 폐위에 찬성했던 이들에 대한 복수라니, 기가 막힐 뿐이다.
형산에서 봉선하는 건 중원 탈환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태자를 폐위하려는 선황의 생각에 동조했던 신하들을 숙청하면 조정에서 일해야 할 인재를 줄여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양쪽 모두 황실의 기반을 다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전자는 끝없는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환영이라도 받겠지만, 후자는 정말 조정의 힘을 약하게 만들 뿐이다. 어떻게든 처벌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황제를 부추겼다.
“음, 확실히 짐은 관대하지.”
황제가 뒤로 기댄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등 뒤에는 평범하게 베개나 방석을 고이는 대신 풍만한 궁녀 한 사람이 반라 상태로 앉아 있다. 임칙서는 혹시 시선이 그쪽으로 가지 않도록 그저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나, 그 문제는 황태후께서 결정하셨으니 짐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 죄인들의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황태후께 가서 청하라.”
그러고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황제는 이제껏 기대고 있던 궁녀의 옷 속으로 냅다 손을 집어넣었다. 곧바로 궁녀의 빨간 입술 사이로 간드러진 교성이 흘러나왔고, 얼굴이 벌게진 임칙서는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 뒤 방에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
7.
한왕부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한 피해는 꽤 컸다. 상당한 규모였던 한왕부 저택이 대부분 타버렸을 뿐 아니라 사망자도 십여 명이나 되었다. 특히 한왕 부처와 세 자녀, 측근 시종들 몇과 마침 한왕부를 봉쇄한 군사들을 살피러 방문했던 우림위 상장군 고문휘까지 휘말렸다.
“아깝도다, 아까워. 죽은 이들이 너무나도 아깝구나.”
황태후 송씨가 혀를 찼다. 한왕 부처도, 고문휘도 절대 죽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죽었다. 한왕은 감히 형을 제치고 태자위에 오르려고 넘본 대역죄인이니 마땅히 봉선이 끝난 뒤에 죽였어야 했다. 그런데 화재로 죽어버리다니.
“그렇게 죽으라고 그놈을 여태껏 살려둔 게 아니었거늘!”
황태후는 자기 아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지위를 뺏어가려고 했던 자들에게 격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태자 폐위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보인 자들은 죄다 체포해 투옥했다. 봉선만 끝나면 모조리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굳이 봉선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건 친정인 송씨 가문에서 소개한 방술사가 절대 봉선 전에 피를, 특히 황실의 피를 흘리면 안 된다고 그녀에게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천길(天吉)’이라 칭하는 이 방술사는 점치는 재주가 참으로 뛰어나 추종자가 많았다.
“화를 푸시옵소서, 황태후 마마.”
시녀들이 급히 차를 가져오고 부채질로 시원한 바람을 보냈다. 덕분에 열이 식으면서 좀 기분이 풀어졌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아직 남아있었다.
“죄인들도 죄인들이지만 고 상장군이 죽어버린 게 참으로 아쉽구나.”
고문휘처럼 정쟁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올곧고 유능한 중신들은 황태후에게도 긴요했다. 황태후가 바라는 건 자기 아들이 이 대송을 다스리는 거지 이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후로 지낸 세월만 20년이 넘는다. 그동안 직접 국사를 돌보지는 않았어도 선황 옆에서 선황이 어떻게 하는지 살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깨달은 건, 잘 모르는 일은 잘 아는 이가 맡아 하도록 놓아두는 편이 가장 낫다는 거였다.
조정에서의 정사라면야 자기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사를 움직이는 일 같은 건 하나도 모른다. 그러니 본래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을 그대로 앉혀 두고 무엇을 하라는 명만 내리는 편이 가장 확실하다. 그리고 고문휘 같은 이들은 아주 좋은 인재였다. 회주도통사 장문성도 그런 부류다. 5대 전까지만 해도 농부였다고 해서 그런지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묵묵하고 우직하게 변방의 장수 노릇만 했다. 그 우직함이 선황의 마음에 들었기에 회주도통사 자리를 그토록 오래 지키는 게 아니겠는가. 황태후는 그 두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장수나 대신들도 태자 폐위에 찬성하지만 않았다면 선황이 임명한 자들을 본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폐태자에 찬성했다가 감옥에 갇힌 반적들의 빈자리에 앉혀 승진시켜 주기도 했다.
“그놈들이 빠져도 우리 조정이 굴러가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지. 없고말고.”
황태후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때 시녀 한 사람이 다가와 금의위에서 사람이 왔다고 알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금의위 관원 한 명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황태후 마마, 금의위 교위 이진성입니다. 한왕부 저택을 유심히 살피니, 며칠 전 화재는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방화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방화라고…?”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곧 처형될 역적의 집에 누가 일부러 불을 낸다는 말인가? 원한이 있다고 해도, 그냥 놓아두면 죽을 텐데? 그리고 우림위 군사들이 한왕부를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외부인이 아니라, 한왕이 스스로 불을 지른 듯하옵니다. 처형될 것이 두려워서 자택에다 불을 지르고 처자식과 동반 자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장 고문휘는 이를 저지하다가 칼에 찔린 듯, 복부에 깊은 창상(創傷)이 있었습니다.”
“어허, 이런 역적이!”
황태후는 금의위를 신뢰했다. 예로부터 금의위는 황제의 개였고, 황실이 주도권을 쥐게 하는 공신 중 하나였다. 비록 그 힘이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해도 황도 일대에서는 금의위가 모르는 일이라곤 없었다.
“이미 일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 고문휘의 유족에게 은자와 비단을 내려 포상하라. 그런데 좀 수상한 점이 있구나.”
황태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들은 보고에서 뭔가 수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한왕이 불을 질러 처자와 함께 타죽은 게 아니라 불을 질러 혼란을 초래한 뒤에 군중에 뒤섞여 도망간 건 아닌가?”
“그건 아닐 것이옵니다. 시신의 옷차림을 확인하니 확실히 한왕 전하 일가가 맞았습니다. 한왕부는 봉쇄되어 어떤 사람이나 물품도 드나들 수 없으니 가짜 시체를 구할 수도 없건만, 한왕 전하가 탈출했다면 어찌 사람 수에 꼭 맞는 시신이 있겠습니까.”
“그건 또 그렇구나.”
황태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까 그 시녀가 또 들어와서 이번에는 흠차대신 임칙서가 왔다고 알렸다.
“오늘은 바쁜 하루로다. 너는 그만 물러가라.”
“예, 태후마마.”
금의위 관원과 엇갈리다시피 하면서 임칙서가 들어왔다. 그리고 태후에게 태자를 폐하는 문제로 투옥된 중신들을 제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중대한 나랏일을 맡은 이들입니다. 제발 용서하여 풀어주십시오. 저들의 죄라면 폐하께서 너무나 피로하신 나머지 잠시 혼란스러운 생각을 하셨을 때 바로잡아 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어울려 드린 죄밖에 없습니다.”
임칙서는 쉽게 물러갈 기색이 아니었다. 황태후는 그를 상대로 지루한 논쟁을 시작했다. 임칙서가 조정에 꼭 필요한 인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태자 폐위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중신만 아니었다면 이런 귀찮은 일은 절대 감수하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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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문휘의 장남 고벽진은 부친의 부대인 우림위가 아니고 시위군에서 정4품 편장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남몰래 그를 찾아온 금의위 교위 이진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했다.
“상장군 대인께서는 무사히 떠나셨다 하오. 그리 아시고, 앞으로 행동에 주의하시오.”
“감사하오, 교위 대인.”
교위 벼슬은 본래 정6품에서 종7품에 걸친다. 하지만 소속된 기관이 금의위고 보면 본래 품계보다 4단계쯤은 높여 봐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고벽진은 깍듯하게 존댓말을 썼다.
“교위 대인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부친께서 대업을 이루셨으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평소 고씨 가문에서 입은 은혜가 있고, 옳은 길이기에 따랐을 뿐이오.”
사람과 물품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왕부를 봉쇄한 우림군의 우두머리가 직접 가짜 시체를 반입했을 줄은 황태후가 상상도 못 했으리라. 덕분에 한왕 일가가 죽음을 위장하고 왕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진성이 여기 협력했다.
“금의위라 하여 모두가 아무 생각 없이 명만 받드는 건 아니오. 황상께서 즉위하셨으면 되었지, 그 무고함을 알면서도 피를 나눈 형제들까지 해치는 것은 너무한 일이기에 막고자 하였을 뿐이오. 다른 분들까지 구하지 못해 죄송할 뿐이오.”
“그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저 대인의 의거에 감복, 또 감복할 뿐입니다.”
한참을 고맙다고 반복하던 고벽진이 슬쩍 주머니 하나를 쥐여주었다. ‘고씨 가문의 은혜’가 또 한 차례 이진성에게 건너갔다. 이진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시오. 고씨 가문이 베푸신 은혜가 얼마인데.”
몇 번이나 인사를 반복하며 이진성을 돌려보낸 고벽진이 잠시 한숨을 푹 쉬더니 담뱃대를 피워물었다. 부친이 무사히 탈출한 건 기쁜 일이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과연 한국이 한왕의 망명을, 그리고 함께 탈출한 부친의 망명까지 받아줄지 궁금했다.